고봉 기대승의 묘소와 생가터를 찾아/제2회 고봉문화제

2013. 11. 1. 07:00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조선시대 최대의 사상로맨스의 주인공 고봉 기대승

 

퇴계 이황과 13년간 114통의 편지로 사단칠정을 논했던 조선시대 최대의 사상 로맨스의 주인공 고봉 기대승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제2회 고봉 문화제가 너브실마을의 월봉서원에서 '꼬마철학자 상상학교'를 시작으로 막이 올라, 인문학자와 함께 하는 대화, 인문 연극, 황룡강 저녁놀 캠프 등 '인문학의 향연'이 11월 1일부터 2일까지 이틀간 펼쳐진다.

2일에는 서원콘서트(오후 4시), 목판 탁본과 자경설 족자 만들기 등 서원문화 체험행사(오후1시), 어린이 글짓기대회, 철학자의 길 걷기대회 등이 열리며, 고봉학술제를 통해 '호남 시단과 고봉 문학의 형성'에 대한 강의도 있을 예정이다. 이에 제2회 고봉문화제에 맞춰 고봉 기대승 선생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3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으며 오늘은 1편 고봉의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광산구 광산동 너브실마을에 이어 2편 고봉선생의 사단칠정 논쟁이 무엇이었으며, 고봉선생을 모신 월봉서원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오늘 3편은 고봉 선생의 묘소와 생가터를 이야기 하기로 한다.

아마추어다보니 정확하지 않은 표현도 있을 것이지만 전문가적 입장이 아니기에 넓은 혜량있으시길 바란다.

자세한 사항은 월봉서원 홈페이지 참고 바로가기

 

고봉 선생의 묘는 월봉서원 뒤쪽 백암산 올라가는 길에 있다.

서원에서 그리 멀지 않으므로 월봉서원까지 왔다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묘소도 참배하는 것도 좋다.

굳이 등산화를 신지 않아도 될 정도의 편한 길로 운동화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월봉서원 좌측 멋진 저택 오른쪽 길로 쭉 따라가면 나온다.

 

 

오른쪽으로는 월봉서원이 보이고...

 

 

사계절 내내 걷기 좋을 것 같은 편안한 숲길을 걸어 10분이면 올라갈 수 있다.

 

 

고봉 선생의 시비도 보이고.

 

 

이윽고 정자가 하나 나오면 다 온 것이다.

 

 

정자에서 바라 본 고봉의 묘소

일찍이 고봉은 자신이 태어난 용두마을에서 집성촌인 신촌마을로 가는 저수지 바로위에 있는 ‘평가산’에 자신의 묘자리 를 잡았다고 한다.

배산임수형의 명당자리를 형 승지공 대림이 1565년에 별세하자 형에게 그 묘자리를 양보했을 정도로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1572년 2월 어느날 고봉 기대승은 가묘(家廟)에 시사(時祀)를 지내고 백우산 귀전암에서 심신을 수양하고 학도들 공부를 가르치고 나서

아들 효증과 제자 유은,김경생,이운홍,곽호등 함께 내려오는 길에 백우산 중턱의 지금 묘소가 있는 곳을 둘러보더니 아들 효증을 불러 그 중 한 곳을 지적하면서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훗날 내가 죽거든 반드시 나를 이곳에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하였다 고 한다.

 

 

고봉 선생과 부인 함흥이씨의 묘비석

 

 

문인석

 

 

고봉 선생님이 이 자리를 잡자 풍수에 능한 주변 사람이 이 자리를 절손(絶孫)의 자리라고 우려하자 고봉은 “형님 자손은 내 자손이 아니더냐.”하면서 절손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고봉의 증손자대에서 , 고봉의 손자가 아들 없이 딸 하나만 두어 고봉의 형 대림의 증손자중 한 사람을 양자로 들였다고 하니 절손이 정말 되기 되었다.

왼쪽이 고봉의 묘이고 오른쪽이 고봉의 부인 함풍이씨의 묘이다.

 

 

 

 

 

묘소까지는 온통 소나무 밭이고 묘소 주변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섞여 자라고 있으며 묘소 위쪽으로 올라가서 앞을 바라보니

이곳이야 말로 천하 명당자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뒤로는 백우산이 있고 앞에는 황룡강이 흐르며 황룡강 너머로는 구룡산이 보인다.

아마 그 덕에 광주에 뿌리를 내린 행주기씨 덕성군파는 기고박의 고장 답게 광주를 대표하는 명문가가 되었나 보다.

 

 

이제 고봉의 묘소를 나와 고봉의 생가터를 찾아 나선다.

 

 

고봉 기대승 선생의 묘를 찾아본 다음 고봉의 생가터를 찾아 너브실 마을을 나섰다.

고봉의 생가에 대해서는 너브실 마을의 주민들은 한결같이 신룡동에 있다고 하는데 말로 설명하기가 아주 곤란하다고 했다.

생가터에 대한 주소라든지, 아니면 생가터에 대한 안내문도 없는 상태에서 신룡동 윤상원 열사 생가 못가 어디쯤이라는 것만 알고

무작정 나서게 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거의 기씨 자작일촌이다.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이 바로 사진에 보이는 얕으막한 구릉과 행주기씨 덕성군 문중 재실인 오남재(吾南齋)가 있는 곳이다.

덕성군(德城君)이란 바로 고봉 선생의 아버지 기진이다.

 

 

먼저 오남재를 찾았다.

이곳에서 단서를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고봉은 지금 보이는 오남재가 있는 광산구 임곡동 용동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위치는기록이 없어 확인은 어렵고 기씨 문중 사람들은오남재가 있는 이 근처를 생가터로 추정하고 있다한다.

 

고봉 기대승은 1527년 11월18일 광주 고룡리 송현동 에서 부친인 물재 기진과 모친인 진주 강씨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행주 기씨 가문은 본관이 행주인데 행주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로 고봉 집안은 대대로 한양근처에서 살았으나 기대승의 작은 아버지 기준이 1519년 기묘사화로 1521년에 죽자 일가가 멸문의 화를 당할까 우려해 기진(奇進1487-1555)은 식솔을 데리고 외가인 나주 오씨 가와 처가인 진주 강씨 가의 도움으로 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에 정착하였다.

 

고룡리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 마을로 광주에서 임곡 가기 전에 신촌마을 2km라는 팻말을 보고 진입하면 된다.

저수지 못가서 오남재(吾南齋)라는 표시석도 있고, 그 길을 따라 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왼쪽 산자락아래 제각 같은 큰 기와집이 하나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용동 마을의 오남재이다.

바로 이 곳에서 조선 성리학의 거유 (巨儒) 고봉 기대승이 태어났다.

 

 

재실입구에는 행주기씨 덕성군 문중이라 쓰여있고,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오남재 (吾南齋)는 “내가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 오도다.”라는 뜻으로 건립은 행주기씨 락남선조(落南先祖)인 덕성군 물제(物齊) 기진을

제향하는 제각으로 1560년에 건립했다.

물제 기진은 고봉 기대승의 부친으로 조광조 등 사림파의 몰락을 불러온 기묘명현 기준(己卯名賢 奇遵)의 중형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1칸의 골기와 8작지붕이며 건물내부 우측에 "금송유사 공사원 유사임자" 3월 29일이란 현판내용과 제각정면에 고봉선생과정기훈(高峰先生過廷記訓)이란 제하의 기문이 걸려있다. 내부는 대청마루로 되어 있고, 대문은 소슬대문으로 대문 좌우측에 각 1칸씩 창고로 쓰여지고 있다. 담장은 토담으로 되어 있고, 제각 우측에 행랑채가 있어 관리인이 살고 있으며, 건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건축 과제로서의 가치가 높다. (오남재출처:광산구청 문화정보과)

그러나 관리인이 부재상태여 뒷 동산 어디엔가 묘가 있으리라고 찾던 중...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다 나오는 동네분을 만나게 되고, 고봉 선생의 생가터를 물으니 바로 가르쳐 준다.

이 분도 고봉의 후손으로 자신의 집 바로 뒤편 대나무 숲 자리가 고봉 선생의 생가터라고 알려주었다.

참고로 이 댁의 주소를 네비로 검색하면 바로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432번지

 

 

 

집과 비닐하우스 사이로 난 길이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쭉 위로는 비석이 하나 보이고 묘도 한 기 있었다.

 

 

 

 

 

덕성군 물재기공 유허비의 관리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유허비는 물재 기진의 유허비인데 뒤의 묘는 물재공의 묘가 아니라고 한다.

행주기씨는 덕성군 문중의 묘는 맞으나 고봉 부친의 묘는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신촌마을은 고봉 기대승의 부친 기진이 낙향하여 지금까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고봉의 묘와 서원이 있는 너브실 마을과 이곳은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글쓴이의 친구인 기00의 이름을 대니

두 곳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 만큼 이곳 신촌동과 광곡동 등 임곡 주변은 행주기씨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두 일가 친척이다.

마을 뒤 락암산(樂唵山)에 고봉 선생이 공부를 했다는 락암정이 있지만 지금은 신촌마을 입구로 이전했으며 바로 옆에는 청량재라는

또 다른 행주기씨 정자공 기침을 모신 재실이 있어 찾아보기가 쉬웠다.

바쁜 일정으로 인해 락암과 청량재 등에 대한 탐사를 다 못했으나, 훗날 다시 들러 기씨 문중에 대한 탐사를 이어가 볼 생각이며, 1차 고씨 가문에 대한 탐사에 이어 이번 기씨 가문의 탐사가 이루어 졌으니 곧이어 박씨 가문에 대한 탐사도 이어갈 생각이다. 광주가 왜 '기고박'의 고장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싶기 때문이다.

 

 

1편, 조선시대 사상 최대로맨스의 주인공, 고봉 기대승을 찾아서 / 광산구 너브실 마을

2편, 제2회 고봉문화재가 열리는 월봉서원, / 고봉 기대승의 삶과 철학

3편, 기대승의 묘와 생가터를 찾아서/ 2회 고봉문화제

4편, 기쁘게 놀면 어디든 편안치 않으리오 / 제2회 고봉문화제

5편, 늦가을 너브실 마을을 찾아 / 제2회 고봉문화제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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