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축제가 열리는 수완동 왕버들나무 완동방죽

2014. 7. 18. 07:05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20층이 넘는 대단위 고층 아파트단지가 즐비한 곳, 8만 여 명에 달하는 대인구가 밀집해 전남 나주시 전체 인구보다 더 많은

광주 최대 인구밀집지역인 수완지구. 그곳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20여 년 전인 1996년 이곳에 택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감남골·독시암골·석금시암·절골·초분골 등 여러 골짜기가 있었으며

골옷·상완·하완 등의 오래된 옛마을과 새매·점등산·큰봉산 등의 아트막한 야산 그리고 안산보·중보 등 농경지에 물을 대던 보(洑)가

있던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습니다.

하남산업단지에서 운암동으로 질러가는 좁다란 농로가 하나 있어 좌우로 야트막한 구릉을 보면서 구불구불한 길을 조심스럽게 차를

몰던 기억이 있는 곳이었죠.

당시에는 평범한 시골마을로 눈에 띄던 저수지도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마을을 보니 당시 지나다니던

기억이 떠올라 한참 추억 속에 잠겼습니다.

 

 

대규모 택지단지 안의 자연마을인 하완마을의 옛이름은 완동마을입니다. 원래 광산군(光山郡) 천곡면(川谷面)에 속한

완동마을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완동마을이 상·하 마을로 나뉘었고 아래쪽에 위치한다하여 하완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수완동이란 이름도 수원이 좋다는 뜻의 수(水)와 이곳의 옛 마을 이름인 완동(莞洞)의 완(莞)자를 따 수완이라 칭하였으며 다른 말로는

통머리라 불렀는데 이는 마을 형상이 말과 같고 앞 방죽이 말의 구시통과 같다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이라고 합니다.

 

 

하완마을 최초 입향자는 명종18년(1563년)경 효령대군의 후손인 판광공 순빈이 낙남하여 정착하였고 이후

양천 허씨와 전주이씨가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생성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인물이 많이 나는 것을 꺼려

마을의 주령이 끊기는 수난을 겪기도 했답니다.

 

 

택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무의 특산지로 70~80호가 살던 비아출장소관내 유수의 부촌이었지만 택지개발이후 실농민이 많고

젊은이들의 도시아파트 이주로 이제는 20여 가구가 남은 노인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맨 처음 찾아간 날은 아직 논에 모를 심기전이었지만 최근 연꽃이 피었다고 해서 다시 찾아가 봤습니다.

 

 

 

마을 곳곳은 지금은 아름다운 담장벽화로 화려해 보이지만 골목길에 들어서면 빈집이 넘쳐나고 다 쓰러져 가는 폐가도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마을이 삼성전자 광주공장 인근에 있다 보니 임직원 주말농장으로 삼성전자와 인연을 맺었었는데 2013년 7월 삼성전자

가족벽화봉사단과 수완 청년회 등 지역주민 100여 명이 하완마을 담벼락 약 130m를 ‘벚꽃이 만개한 봄날’을 콘셉트로 담장그림을

그려 넣으면서 지금은 완동방죽과 더불어 찾아오는 방문객이 늘어 점점 생기를 찾고 있습니다.

 

 

하완마을 완동방죽에서는 지난해까지 3년간 ‘비아·수완 왕버들 연꽃축제’를 열었는데요, <왕버들 흐드러진 방죽에 연꽃 구경가세>란

주제에서 보듯이 하완마을은 방죽과 왕버들이라는 두 가지 마을 자랑거리를 가지고 축제를 열고 있었습니다.

 

 

이 축제는 지방자치단체 주관이 아닌 수완 청년회와 비아·수완 동주민자치위원회 등 주민들이 주관한 동네 축제로 길놀이, 난타,

어린이 스포츠댄스, 진도북춤 등 식전행사와 더불어 개막식과 축하공연이 있으며 주민노래자랑, 연꽃 축제 사진전, ‘통머리 마을’의

유래가 담긴 이야기전, 연잎차와 연근발효차를 맛 볼 수 있는 시음회, 먹거리 장터, 희망의 연등걸기, 민속놀이 체험, 풍등 날리기,

연꽃 페이스페인팅, 우드마커스 등 다채로운 부대행사로 수완지구 대표 동네축제로 발 돋음 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8월2일(토요일)비아,수완동 연꽃축제가 열립니다.

노래자랑, 로컬푸드판매장, 농촌체험장, 풍등날리기, 먹거리장터 등 이 개설돼 도심속 자그마한 마을의 멋진 축제로 어른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을 아이들에겐 멋진 경험을 선사할 것으로 보이니 8월2일 꼭 이곳으로 가 보세요.

 

 

완동마을을 빛내는 두 가지 중 하나는 수완동 왕버들인데요, 이 왕버들은 하완마을 앞 모정 옆에 한 그루가 있고, 하완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중간에 한 그루가 서있습니다.

 

 

수령은 약 350~400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나무가 서있는 곳은 과거 저수지의 둑 양쪽 끝으로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예전에는

저수지 둑을 따라 우람한 왕버들이 마치 방풍림처럼 열 지어 서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나무들은 마을의 당산나무로서, 해방 전까지는 여기서 당산제도 지내고 흥겨운 농악놀이도 했다는데

현재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모정 옆에는 당산제와 관련된 제단이 남아 있을 뿐인데, 거주하는 사람도 적고 힘든 일을 해 낼

젊은층도 거의 없어 당산제 단절은 큰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왕버들은 2004년 수완택지지구 계획 때 없앨 계획이었으나 환경단체의 반대와 문화재자료 24호로 지정이 되어 있어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답니다.

토지공사가 이 왕버들을 보존하기위해 도시계획 자체를 변경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자랑거리인 완동방죽은 1879년에 편찬한 광주읍지< 光州邑誌 >에도 완동방죽< 莞洞防築 >으로 기록돼 있어,

이 나무들의 수령에서 보듯이 350여년 이전에도 이곳에 저수지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완마을의 문화유적으로는 마을 앞의 유일한 촌민들의 쉼터임 우산각이 있었으나 오래되어 붕괴 직전에 있던 것을

광산구청의 지원과 마을 주민 각 문중 인사들이 정성을 모아 왕버들나무 아래 정자를 다시 세워 수완정이라 명명하고

마을 유래비를 세워 놓았습니다.

 

 

 

 

또한 전주이씨 제각인 영모정이 마을 뒤 유치원 단지를 벗어난 곳에 야트막한 구릉과 같이 서 있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영모정은 원래 마을 뒤에 있었다는데 현재는 그 자리에 유치원 단지가 들어섰으며,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겨 새로 지은 듯 합니다.

 

 

 

현재 하완마을은 아파트 도심 속 섬같이 고요합니다.

널따란 전답들은 20년 전부터 하나둘씩 개발에 야금야금 먹히고 지금의 방죽보다 수십배는 더 넓었던 완동방죽도

이제 겨우 손바닥만큼만 남았습니다.

방죽을 빙돌아 아름답게 서 있던 왕버들나무도 모두 베어지고 단 두 그루만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마지막 남은 땅들도 개발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빈집은 넘쳐나지만 매물이 없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연은 결코 돌아오지 않습니다. 개발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도심 속 전원마을인 하완마을만큼은

유지 보전되어야할 이유입니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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