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여행)강진 다산기념관. 다산의 유물을 한 곳에서 만나다.

2014. 8. 6. 07:05전라남도 견문록/강진 견문록

 

조선후기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작성하며 실학을 집대성하고 목민심서를 통해 백성을 사랑한 진정한 지도자의 길을 제시했던 다산 정약용을 기념하는 다산 기념관이 다산초당 앞 귤동마을에 제42회 강진청자축제에 맞춰 개관했습니다.

다산기념관은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도 있지만, 이번에 다산 유배지가 있는 강진에도 새롭게 문을 연 것입니다.

다산기념관은 총 90억 원을 들여 부지면적 28,615㎡에 2,794㎡ 규모의 지하1층. 지상2층 건물로 지어졌으며, 다산의 각종 유물과 자료 등이 전시되었습니다.

 

 

강진군은 이미 1999년 8월 귤동마을에 다산의 성지임을 알리고자 다산유물전시관을 개관했으나, 진품이 아닌 영인본이 대부분 전시돼 있어서 그동안 예산을 들여 다산선생의 진품 유물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2005년부터 매년 강진청자축제기간동안 유물전시회를 개최해 다산선생을 알리는 행사를 가졌으며 이런 유물들을 전시할 유물전시관의 필요성이 늘어나 이번에 새롭게 다산기념관이 문을 연 것입니다.

 

 

19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천재적인 대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유배지 귤동마을에 문을 연 전시실은 상설전시, 기획전시실로 운영되며, 상설전시실에는 다산의 수학과 관료생활, 유배생활과 다산학단, 해배이후 저술 등을 전시해 해당 시기의 미디어 자료와 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디지털 자료와 3D 상영관, 다산 선생의 진품 유물들이 전시되었고, 초의 선사의 다산초당도를 바탕으로 다산 초당의 4계절의 변화를 통해 다산초당에서 다산 선생이 느꼈을 감정을 공감할 수 있도록 했으며, 상영관에서는 강진에서 다산 선생의 생활 모습을 3D 애니메이션으로 상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산의 각종 저술 및 시, 다산과 교류했던 김정희의 추사수선화법첩, 이인행의 신야집,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 시고, 다산의 친필 간찰들도 전시됩니다.

 

 

기획전시실에는 어린이들에게 다산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동화로 만나는 다산 일대기'와 다산의 수제자이자 외손자인 방산 윤정기의 유물 등이 제42회 강진청자축제(7.26.∼8.3.)기간 동안 전시되었으며, 연세대학교 다산실학연구원도 다산기념관에 입주해 실학사상의 체계적인 연구와 다산 선생의 삶과 발자취를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합니다.

 

 

또한 다산기념관은 여름방학을 맞아 학생과 가족이 함께 하는 “여름방학 힐링캠프〞를 8월 16일 부터 17일 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개최한다고 합니다.

이 캠프는 다산의 사상을 체험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알기 쉽게 전파 하고 자녀와 부모 간 소통을 통해 가족 간의 화합과 힐링의 시간을 마련하고자 기획됐으며, 기존의 듣기위주 강연에서 벗어나 문답식 강의와 참여형 체험으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여름방학 힐링캠프'는 인터넷과 우편으로 접수 가능하며, 기타 자세한 사항은 전남 강진군 다산기념관으로 문의하면 됩니다.

 

 

다산의 가계도를 보니 배다른 맏형 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보이는군요.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온 결정적인 사유가 바로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죠.

자화상의 작가 윤두서의 손녀인 해남윤씨 소생의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생물도감인 자산어보를 만들었으며,

세째 형 약종은 황서영 백서사건의 진원지인  신유사화(1801년)때 순교했습니다.

자신의 형제들이 붙잡혀 문초를 당할 때 스스로 체포되어 참수를 당했으며 큰 아들 철상 역시 같이 순교했습니다.

훗날 기해박해 때는 약종의 부인, 둘째아들, 딸이 같이 순교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정약용 형제의 유일한

누이의 남편으로 그 역시 정약종이 참수된 날 같이 순교했습니다.

이렇듯 정약용의 가문은 맏형 약현의 사위 황사영에 이어 세째형 약종의 전가족 그리고 누이의 남편인 이승훈까지 이 땅의 천주교

포교를 위해 일가족이 절멸한 위대한 가문인 것 입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천주교도 색출방법 등을 자백하며 겨우 목숨을 건졌으니 다산의 운명을 바꾼 자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 다산기념관의 내부를 둘러보겠습니다.

 

 

다산의 수학과 관료생활

 

 

 

 

 

다산은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거쳐 규장각에서 초계문신으로 지내며 학자로서 거쳐야 할 요직은 두루두루 섭렵합니다.

하지만 훗날 경세유표에서 규장각의 초계문신을 없애야 한다고 적었으니 당시 초계문신의 특혜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덕무의 편지인 간찰입니다.

이덕무(1741~1793)는 서울출신의 실학자로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 보다는 고증학적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합니다.

규장각은 37세 이전에 들어가는데 마흔이 되어 들어간 이덕무가 쓴 글이랍니다.

 

마흔살 내 생애 우스워라

해마다 술에 취해 낙엽에 누웠네

버려진 물건없는 밝은 시대임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남은 생애 벼슬길에 맡기리

환한 하늘빛 규장각에 가득하니

귀중한 서적 영화로운 관복에 얼비치네

이내 한 몸 쓰일 곳을 얻었으니

책더미 속 좀벌레로 늙어감이 달갑도다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아 임금의 측근에 항상 있었으나 보수 집권 세력인 노론 벽파(僻派)의 공격에 순탄치 못한 관료기를 보냅니다.

그 때마다 항상 정조는 다산의 든든한 후견인 노릇을 했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산의 정치생명도 바로 끝이 나고 맙니다.

 

1791년 진산사건과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 등 서학(西學) 관련사건으로 노론 벽파는 채제공계 남인세력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게되고 정조는 노론벽파의 공격으로부터 다산을 지키기위해 1795년 7월 정약용을 종6품 금정 찰방으로 좌천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796년 10월 정약용에게 이만수(李晩秀), 박제가(朴齊家) 등과 '사기영선(史記英選)'을 교정하도록 명령하였고, 12월에는 병조 참지(參知)를 거쳐 좌부승지로 승진시켜 중앙정부로 다시 불러들입니다.

1797년 봄에는 '춘추경전(春秋經傳)', '두시(杜詩)', '육시(陸詩)' 등을 교정하게 하고, 같은 해 6월 정약용을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하자 노론벽파의 반대는 극에 달했으며, 정약용은 이에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정조는 오히려 황해도 곡산 부사로 임명했답니다.

또한 1799년 4월 정조는 곡산 부사로 있던 정약용을 다시 병조참의로 조정에 불러들이고 이어 형조참의에 제수하자 다산에 대한 반대파의 시기와 공격은 더욱 거세져 결국 정약용은 39세인 1800년 봄 벼슬을 버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정조는 다시 정약용을 불러들여 규영부에서 교정하는 일에 종사하게 하였으나 그해 6월 정조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방패막이는 끝나고 말았으며 순조 1년(1801)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18년간의 유배기를 보내게 됩니다.

다산의 유배생활은 정조가 승하(1800년)한 이듬해인 1801년부터인데 그해 신유사화로 세 째형 약종과 그의 큰아들은 참수되지만,

다산은 자백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2월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의 백서사건에 연루돼 문초를 받고

11월에 강진으로 다시 유배되었습니다.

강진으로 유배온 다산을 천주교 신자라 해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을 때 동구밖 주막집 주모가 방 한 칸을 내주면서 다산의 강진유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집이 바로 사의재이죠.

다산은 이곳에서 4년간 머물며 서당을 열어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며 학문적기초를 닦았습니다.

 

보은산방은 다산이 사의재에서 지내는 동안 담장이 헐리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현감에게 보고되는 등 감시를 받자 다산과 친분관계에 있던 백련사 혜장스님이 우두봉에 위치한 고성사내 칠성각으로 다산의 거처를 옮겨주는데 그곳이 바로 보은산방입니다.

그곳에서 9개월을 보낸 다산은 제자인 목리에 있는 이청(이학래)의 집으로 옮겼고 거기서 2년을 살다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유배생활을 했고 해배된 후 고향인 마재로 돌아가 18년을 살다 운명했습니다.

마재마을은 다산이 태어나고 운명한 곳으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그곳입니다.

다산은 귀양살이 중 ‘소계도(苕溪圖)’라는 한 장의 그림을 그렸는데, 소계는 다산이 태어난 고향마을의 소내(苕川)를 말합니다.

 

 

 

 

다산초당의 다조(茶竈)모형물입니다.

 

 

 

거중기는 다산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작은 힘으로도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만든 기계 장치입니다.

정조가 독일인 선교사 요한 테렌스가 저술한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중국에서 들여왔는데 다산이 이것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했으며, 이 거중기는 수원 화성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죠.

 

주교사는 한강의 노량진에 주교를 설치함에 있어서 그 임무를 담당하는 관청으로서 주교는 배다리로 부교와 비슷한 것입니다.

 

현재도 군 작전시 이와 비슷하게 부교를 만들어 강을 건너곤 합니다.

 

 

수원 화성입니다.

수원화성은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입니다.

 

 

정조는 이 대역사를 당시 30세인 다산에게 맡겼습니다.

처음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1796년 10월, 단 34개월(실제로는 28개월)만에 낙성연을 치렀습니다.

바로 거중기가 이 대역사에 큰 역할을 했으며 실학자인 정약용의 힘이 지대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어린이들에게 다산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동화로 만나는 다산 일대기'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럼 잠시 어린이들 눈으로 다산을 쉽게 알아볼까요?

다산이 7세 때 지은 시가 바로 보입니다.

 

小山蔽大山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遠近地不同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시를 본 부친 정재원은 '이 아이의 두뇌가 이렇듯 명석하니 장래에 반드시 역법과 산수에 밝을 것이야.'라며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다산은 22세에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죠.

성균관 재학 시에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28세에 마지막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갔습니다.

23세 때 서학를 처음 접했는데 '정신이 황홀하여 마치 은하수가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심정을 토로했으며, 28세 때

배다리를 설계했습니다.

 

 

나머지 다산에 대해서는 그림을 보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산은 18년 동안 강진군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번에 새로이 개관된 다산기념관을 통해 다산의 애민사상, 청렴, 목민사상, 실사구시 정신이 널리 알려지길 희망해 봅니다.

기존의 다산유물전시관은 이제 폐관되며 개관한 다산기념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됩니다.

올해 12월까지 시범운영함에 따라 무료로 입장하며, 2015년부터 유료로 전환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8월2일 현재까지도 다산기념관을 검색해보면 지도서비스는 되지 않고 있으며 강진군청 홈페이지에도 다산기념관에 대한

안내는 받을 수 없습니다. 개관으로 하드웨어는 만들어졌지만, 그것 못지않게 홈페이지 등 소프트웨어도 중요하다는 것을 강진군청은

알았으면 합니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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