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찍어야지'가 아니라 '무엇을 찍느냐'가 중요! 사진 40년 사진가 오상조/광주 명인
사진40년 외골수 오상조 교수
사진의 볼모지나 다름없는 전라도에 '사진'의 씨앗을 뿌리고 기꺼이 그 뿌리가 튼튼하게 내릴 수 있도록 한 인물이 있다.
전라도 최초로 대학교에 사진학과를 개설하여 지금은 사진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전국에서 모일 정도로 유명한 학과를 만든 인물.
한국 사진학회 회장도 역임했던 광주대학교 오상조 교수를 만났다.
그는 전북 장수출신으로 광주에 온 지 30년이 되었다. 사진 인생 40년을 맞이한 오 교수는 호남지역 사진가들이 평소 흠모하는 작가로
사진의 사자도 아직 깨우치지 못한 초보가 레전드 작가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광주대학교 행정관 8층 812호, 오 상조 교수의 연구실을 들어서는 순간 올백에 덥수룩한 수염이 영락없는 학자다.
그는 사진가이기 전에 교수인 것이다.
평소 아끼는 커피를 내려준다.
은은한 커피 향이 실내에 가득하다. 설레임에 가슴이 떨리는 현상을 기분좋게 풀어주는 커피 향이다.
오상조 교수는 필름을 되감듯 사진가로서 지나온 삶을 거침없이 되돌렸다. 때론 천천히...때론 숨가쁘게...
사진에 입문한 계기는
초등학교 4학년 습작시간에 글을 썼더니 담임 선생님이 잘 쓴다고 칭찬을 했다.
그 후 선생님에게 더 잘 보이고 더 잘 쓰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 2년간 서당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서예공부를 했다.
초등학교 시절 학급 미화 반장을 하며 게시판에 그림과 글을 그리고 쓰는 것이 재미있어 결국 그것이 출발이 되었다. 그것은 중고등학교까지 학급 미화 반장으로 이어져 게시판지기가 되었으며, 전주상고에 들어가서는 서클활동으로 미술부에 들어갔지만, 선배들의 짓긏은 장난에 재미를 잃어 1달을 버티다 결국 그만두고 다시 서예를 공부했다.
1학년 때 미화 반장을 하면서 신석정 시인의 시를 게시판에 써 붙였는데 이것을 본 선생님의 격려로 서예가를 꿈꾸게 되었으며 선생님의 소개로 고2 때 서예학원에 다녔다.
하지만 서예가로서의 진로가 불투명해 결국 2달 다니다 그만두고 취업공부를 시작했다.
은행에 다니던 선배가 학교에 왔는데 지갑 속에 두툼한 지폐 더미를 보고 은행에 다니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 공부한 것이다.
그러나 주판시험에서 떨어져 은행을 포기하고 1971년 1월 서울 카메라 회사에 수금사원으로 취직하여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금을 하기 위해 돌아다니며 만난 ROTC 생의 멋진 모습에 반해 다시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다.
대학을 가다
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서예공부를 한 다음 첫 전시회를 친구 어머니 다방에서 하였다.
장수 군수도 작품 하나를 사주는 등 몇 개를 팔아 성공적인 전시회가 되었다.
거기서 번 돈으로 친구들과 다시 서울로 올라가 돈암동 독서실에서 대학공부를 하였다.
수학이 어려워 좋은 대학은 갈 수 없어 고민을 하던 중,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인 사람이 미술보다 사진을 공부하라는 충고를 듣고 미술대를 포기하고 73년도 서라벌대학교 사진과에 들어갔다. 14대1의 경쟁을 뚫고 필기시험은 합격했지만, 다음날 치른 실기시험은 사진필름을 장착하는 법을 설명하라 했는데 하지 못해 떨어질 줄 알았으나 최종합격하여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사진이라는 것이 돈이 많이 들어가는 공부였지만 공부를 잘해 장학금을 계속 받았다.
그러던 중 동아일보 기자로 지금은 사진예술사 사장인 김영만 기자를 친구로 만났다.
그 친구는 인화, 사진 등을 잘했으며 나는 이론에 밝았기에 나는 그 친구에게 영어와 사진이론 등을 가르치고 그 친구는 내게 사진을 가르치는 등, 같이 자취생활을 하며 암실작업도 배우게 되었다. 결국, 그 친구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오늘 아침 학교에 출근하여 쓴 작품이다.
아마 오 교수는 사진작가가 안 되었으면 서예가가 되었을 게다.
아니구나, 사진가 겸 서예가라 해야 정확한 답이 되겠다.
4년제로 편입하여 ROTC로 근무하다.
서라벌 대학을 나와 중앙대학교로 편입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ROTC 생활을 하며 장학금을 받아 학교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광주 31사단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월급을 받아 시간이 나면 광주 충장로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열심히 사진공부를 했다.
군 생활 중 전북대 경영대학원을 마쳤다.
대위 때 군산대 학군단에서 근무하며, 산업디자인 사진 과목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
강사생활의 시작이 되었다.
오 교수의 서라벌대학시절 강의 노트를 본다.
잘쓰여진 논문을 한 편 보는 것 같다.
서예를 공부해서 그런지 한글보다 한문이 더 많아 요즘 학생들 읽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노트에서 오 교수가 학장시절 얼마나 세밀한 마음씨를 가졌는지 알 수가 있다.
군산대에서 첫 강의를 하다
군에서 전역한 후 81년 9월부터 군산대에서 2시간짜리 강의를 했지만 월 2만 원의 급여로는 결혼 직후 아이가 둘이나 있는 상황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방송국 기자로 취직도 생각했지만 40대 1인 넘는 경쟁률에 포기하고 MBC 카메라 기술직으로 시험을 보려는데 방송국보다 사진 작업이 더 유망하다는 충고를 듣고 그만뒀다.
또한, 잡지사 여원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이미 취직한 친구가 내 밑에 들어오지 말라고 만류해 그것도 포기하고 32세까지 힘들게 살았다.
광주대에서 교수가 되다
82년에 목포대 미술대에서 사진 2과목을 가르칠 강사를 중앙대학교로 추천을 부탁했는데. 학교에서 자신에게 연락이 와 결국 목포대에서도 사진을 강의했다.
84년도 1월 서울신문에 광주 개방대가 4년제로 전환하면서 산업디자인 과에서 사진을 가르칠 교수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고 그것은 나를 뽑는 것으로 생각하고 응모했다.
당시 어디든지 붙을 자신 있었다. 학벌 좋지, 장교로 전역했지, 강사 경력 있지.
면접을 갔는데 사람이 많았다. 서울에서 사진업을 하는 여성응모자와 경쟁이 되었으나 당시 김인곤 총장이 자신을 선택했으며 집으로 연락이와 부인과 만세를 불렀다.
84년 3월부터 산업디자인에서 사진을 가르쳤지만 10여 년이 지나면서 사진과를 만들고 싶었다.
사진과가 돈이 많이 들었지만 사진과라는 과가 꼭 필요하다고 김인곤 총장을 설득했다.
1차년도 2억 원이 필요했다. 김인곤 총장과 가까운 홍 안과에서도 간접지원을 얻었다.
사진학회에 가서도 사진과를 전라도에 만들어 줄 것을 강의하고 교육부에 탄원도 했다.
93년도 첫해 사진과 개설을 준비해서 그 해 8월에 인가가 났다.
94년에 첫 신입생을 맞았고 98년에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기뻤어요. 정말 기뻤어요. 그런데 할 일이 너무나 많았어요. 그래도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어요."
오 교수의 사진첩을 보는 순간
모두들 얼음이다. 숨소리도 낼 수가 없다.
지금부터는 오 교수의 작품세계를 엿보고 무엇을 탐구하는지 알아본다.
오교수의 작품에는 인위적인 것이 없다.
기다림이 곧 작품이었다. 길게는 몇 시간씩 기다리는 것이다.
오상조 작가는 우리네 삶을 주로 찍는다. '청학동 사람들' ,'운주사', '동구밖 당산나무' 등의 사진첩을 통해 삶을 기록하고, 현재를 보여주며,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오교수는 보물창고를 열어 두툼한 사진첩들을 연달아 내 놓는다.
지금부터 오교수의 작품세계를 염탐해 본다.
작품세계
시각예술의 장르가 없어지고 있다.
특히 광주비엔날레가 시작되면서 전통 사진보다 퓨전 사진이 유행하였다.
세계에 호남정신을 사진으로 알리고 싶다.
호남만의 특색있는 것을 살리고 싶다.
잃어버린, 잊힌, 사라질 것을 찾아다닌다.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자꾸 발전해 나가면 본질이 훼손된다.
산, 당산나무, 논과 밭이 있는 마을풍경, 삶의 터가 바로 나의 현장이다.
40대 까지는 세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많은 일을 했다.
50대에 접어들어서는 사진학과의 학과장을 맡으면서 학교업무에 전념했다.
이제 60대에는 환갑을 맞아 사진집을 냈다. 이제 오교수도 교수보다 사진가로서 한 숨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다.
41세에 늦둥이를 나 화순에 집을 짓고 지금 전원생활을 한다.
현재 62세. "이제 학과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니 나는 내 자신의 작업을 하며 살랍니다."
"생활을 단순화해서 사람 잘 안 만나고 시내 잘 안 나가고, 말 줄이고.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앞으로 제 일입니다."
"잘 찍어야지가 아니라 무엇을 찍어야 할 지가 중요합니다. 요즘은 똑같은 카메라에, 똑같은 렌즈에, 똑같은 포토샵프로그램으로
똑같이 처리하다보니 똑같은 작품이 나옵니다. 어떤 카메라로 어떻게 찍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찍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사진도 인문학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획일화되다시피한 사진문화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진정한 사진에 대한 미학을 이야기하는 내내 오교수의 눈에서는 광채가 났다.
전라도 사진학의 개척자이자 산 증인 오상조 교수. 인터뷰 자체가 영광이었다.
오상조 교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 졸업, 미술학사
전북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 졸업
광주대학교 문화예술대학 학장
한국 사진학회 회장.
대한 사진문화상(2002)
현, 광주대학교 문화예술대학 사진영상학과 교수
사진집
청학동 사람들 (1998, 눈빛)
운주사(1998, 눈빛)
동구밖 당산나무(2000, 눈빛)
당산나무(2012, 눈빛)
The DangSan, Tree Stallion Press(S) Pte Ltd, (2008)
사진전
전주전(1983,1984)전주대학교 박물관 향토유물유적 사진전
청학동 사진전
한국의 석상전(일본 후쿠오카 현립미술관)
운주사, 청학도 사람들 사진전
동구밖 당산나무 사진전
우리 땅 사진전
공저
<생오지 가는 길> 문순태와 공저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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