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북구8경)⑥경, 국가명승 환벽당과 풍암정사
환벽당과 풍암정사가 광주북구8경에 선정됐습니다.
그런데 사실 좀 놀랐습니다. 환벽당과 풍암정사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경관으로 보기엔 좀 무리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환벽당의 주인 사촌 김윤제(1501~1572)와 풍암정사의 주인 풍암 김덕보(1571~1627)는 종손간으로 김덕보가 형 김덕령과 같이
어렸을 적 환벽당에서 사촌 김윤제에게 학문을 배웠다는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풍암정사를 먼저 들러보겠습니다.
풍암정사는 수박마을로 유명한 금곡마을에서 원효계곡이 흐르는 분청사기전시관쪽으로 가야 합니다.
원효계곡의 맑은 물이 모이는 풍암제입니다.
풍암제는 1968년에 준공하였으며, 둑길을 중심으로 좌측이 신선대바위, 우측은 투구봉 능선입니다.
풍암정은 충장공 김덕룡 장군의 동생인 김덕보가 세운 정자로, 앞으로는 원효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고 뒤로는 단풍 우거진 무등산 자락이 있으며 신선바위가 지척이어 은둔생활하기에 그만인 장소입니다.
충장공 김덕룡장군(1567~1596)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형 김덕흥과 같이 고경명 의병대에 참여했다가 노모의 봉양을 책임지고 귀가하죠.
그 후 어머니를 여의고 큰 형 김덕흥이 고경명, 안영 등과 함께 충남 금산전투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종형인 해광(海狂) 송제민의 권유와 장성현령 이귀의 천거와 전라감사의 인정을 받아 각진에 격문을 발하고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킵니다.
선조로 부터 충용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충장공은 권율원수의 지휘하에 진주, 고성 등지에서 왜병을 공격하였고 거제도를 공격하는 등
의병을 이끌었으며. 그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고문을 받다 29살의 나이로 옥사하였습니다.
이에 충장공의 아우 김덕보(1571~1627)는 형의 억울한 옥사를 슬퍼한 나머지 이곳에 풍암정사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에 힘쓰고 제자 양
성에 전념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번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후진 교육과 명현 시인들과 교유하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형제들의 애국충절의 피는 결코 속일 수 없었고, 의로움에 있어서는 은둔생활도 사치였지요.
결국 김덕보는 정묘호란 때 안방준(1573~1654)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병으로 거동을 못하다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풍암정사(楓巖精舍)
김덕보 스스로 호를 풍암이라 하고 '처마 끝에 해 비치니 삼동에 다숩고 정자가 물가에 임했으니 삼복더위에 서늘하다'라고 노래했다고 하니
여름철 물놀이 처로는 딱일 것 같지만 김덕보 가(家)의 애국충혼의 마음을 안다면 삼복더위에 물놀이을 하더라도 예는 갖추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곳은 풍류를 즐기고자 세운 정자가 아니고 형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세상을 피해 은둔의 길로 들어서다 결국 그 자신도 애국의 길에서 세상을
등진 슬픔가득한 정자이기에...
김덕보는 사후 앞서 전사하고 옥사한 두 형과 더불어 의열사(義烈祠)에 추배(追配)되었습니다.
풍암정사는 1614년에 쓰여진 정홍명의 풍암기에 소개되기에 그 전에 이미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충장공이 1596년에 누명으로 옥사하였으므로 그의 죽음을 슬퍼한 김덕보가 세운 풍암정사 역시 1600년 이전에 세우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400년도 넘은 문화유산인 셈입니다.(광주 문화재 자료15호)
다양한 시인묵객들과 교우를 나눈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풍암정사에는 정홍명(鄭弘溟)이 쓴 풍암기(楓巖記)가 있고, 임억령, 고경명, 안방준, 정홍명, 김덕보 등의 제영(題詠)을 새긴 판각들이
걸려있습니다.
풍암정은 여름철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오는 휴식처라고 합니다.
옛길3구간이 생기기전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가 3구간이 개방되면서 이 길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의 구전으로 찾게된 무등산의 명승지로
풍암정은 주변의 도요지와 무등산호수생태원, 천연기념물인 왕벚꽃나무, 김덕룡장군의 생가터와 충장사 등과 더불어 문화와 역사, 그리고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최고의 나들이길이자 데이트 코스가 될 것입니다.
풍암정사 가는 방법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문흥IC에서 담양방면, 담양에서 고서방면,고서에서 담양댐 방면.
광주시에서는 산수동 오거리에서 무등산방면, 충장사에서 담양방면으로 가다 금곡동 도요지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됨
버스 : 1187번으로 충장사(남)에서 하차, 충효187번은 충장사(북), 충효동 환벽당에서 하차
걷기코스 : 충장사에서 하차하여 옛길 3구간(역사길)을 따라 풍암정사 - 환벽당 까지 간 다음 담양 가사문화권을 탐방하면 됩니다.
풍암정사와 환벽당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산을 넘어도 몇개를 넘어야 하고 들판도 많이 가로 질러 가야 합니다.
환벽당은 나주목사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관직을 떠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교육에 힘쓰던 곳으로
처음에는 벽간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앞면3칸, 옆면2칸 팔작지붕건물로 원래는 전통적 누정형식이었으나, 훗날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것으로 보인다네요.
환벽당 제액은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썼으며 당호는 신잠(申潛1491~1554)이 지었다고 합니다.
송강 정철은 16세가 되던 해 김윤제의 제자로 환벽당에 들어왔고 이곳에서 글을 배우며 김윤제의 외손녀와 혼인까지 하였으며,
관계에 진출하는 27세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김윤제 등의 뒷바라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환벽당 앞을 유유히 흐르는 창계천, 먼 옛날은 이보다 더 얕았을 것이지만 광주호의 준공으로 물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창계천 건너편 지실마을에 살던 14세의 송강 정철이 순천에 살던 형을 만나러 가다 날이 더워 창계천 용소에서 멱을 감고 있는데,
당시 환벽당에서 낮잠을 즐기던 김윤제의 꿈에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답니다.
김윤제는 꿈에서 깨어나 하도 신기해 용소로 가 보니 어린 정철이 멱을 감고 있었더라는...
결국 이런 저런 말을 주고 받은 후 정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순천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16세에 자신의 제자로 삼아버렸으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곳이 바로 이곳 창계천 용소입니다.
조대(釣臺)쌍송(雙松)에 나오는 조대라고 하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겠으나, 김윤제가 환벽당으로 찾아온 손님들과 어울려
낚시를 즐겼다는 조대는 광주댐 건설로 지금은 잠겨있다고 하니, 아마도 저 너럭바위 밑이 아닐런지..
환벽당은 호수생태원 바로 인근에 있습니다.
충효교를 건너면 담양이지만, 다리를 건너기 전은 광주 북구입니다.
환벽당 앞 창계천가의 조대쌍송은 정철의 성산별곡에 나오는 나무입니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밴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옛날에는 창계의 용소에서는 뱃놀이도 행해졌고, 조대에서는 낚시도 했다고 하니, 식영정과 환벽당 사이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풍류를 즐겼을 임억령과 김윤제의 모습이 창계천에 반영으로 나타납니다.
김윤제(金允悌)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1501년(연산군 7)∼1572년(선조 5).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로(恭老), 호는 사촌(沙村)으로 조부 김자침(金自沈)은 진사(進士)로
참의(參議)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김문손(金文孫)은 진사로 참판(參判)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김후(金詡·金珝)는 진사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정랑(正郞)과 현감(縣監)을 역임하였습니다.
1528년(중종 23)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7위에 합격하고, 1531년(중종 26)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로 급제했다. 직강(直講)·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전중어사 겸 춘추관 편수관(殿中御使 兼 春秋館 編修官)을 역임하였고, 전주진영 병마절도사(全州鎭營 兵馬節度使), 부안군수(扶安郡守), 나주목사(羅州牧使)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으로 나갔습니다. 나주목사로 있을 때,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뽑아 엮은 《주자문록(朱子文錄)》 4책을 간행하였습니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을 하였는데,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과 종질(從姪)인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등이 대표적인 제자이고,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金德齡)과 김덕보(金德普) 형제는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 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성산동으로 물러나, “환벽당(環碧堂)”이라는 정자를 짓고는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며 스스로 즐겼는데, 당시 호남의 이름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단을 형성하였습니다. 김윤제(金允悌)가 교유한 사람들은 송순(宋純), 임억령(林億齡), 김인후(金麟厚), 소세양(蘇世讓), 양산보(梁山甫) 부자, 양응정(梁應鼎), 기대승, 김성원, 정철(鄭澈), 고경명(高敬命), 삼당시인으로 이름난 백광훈(白光勳) 등으로, 이들 대부분은 호남사림으로 서로간의 정신적 유대감이 깊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거치면서 시대의식을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자료출처]광산 김씨대종회 홈페이지, 조선인명사전
이곳의 제액은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썼다고 합니다.
당호는 신잠(申潛 1491~1554)이 지었다네요.
환벽당 아래쪽 넓은 부지에 김윤제의 본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환벽당은 본체의 후원격으로 푸른대나무에 둘러쌓여 있다고 해서 환벽당(環碧堂)이라 불렀고, 그 전에는 벽간당이라고 불렀습니다.
본체와 후원 사이에는 직사각형의 연못이 있습니다.
겨울에 본 모습과 여름에 본 모습이 틀리지요?
환벽당은 8월 꽃무릇 필때가 제격인것 같습니다.
환벽당에 걸려 있는 조자이(趙子以)의 시
丞相故墟何處尋 (승상께서 사신 옛터 어느곳에 찾을런지)
鳴陽縣郭瑞湖潯(명양고을서호위에그의 유적 남아 있네)
淸名直節賢孫繼 (맑은 이름 곧은 절개 어진 자손 이어가고)
餘韻遺風過客欽 (남긴 여운 맑은 유풍 지난 손이 흠모하네)
環碧亭空新易主 (비어있는 환벽정자 새주인이 바뀌었고)
棲霞堂在古猶今 (그 옛날의 서하당이 아직까지 건재하네)
通家小子悲吟地 (통가하는 이 소자가 찾아와서 읊조리니)
老木寒波無限心 (늙은 나무 찬 물결에 이 마음이 설레이네)
환벽당에 걸려 있는 임억령(林億齡)의 시
烟氣兼雲氣 (연기의 기운인지 구름까지 겸했는지)
琴聲雜水聲 (거문고 소리인지 물소리가 섞이었는지)
斜陽乘醉返 (석양 무렵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니)
沙路竹與鳴 (모래길에 대밭가마 소리쳐 우네)
김윤제와 임억령은 동시대의 사람으로 임억령이 지은 시는 김윤제가 이 환벽당을 지었을 때 기념으로 써 준 것 같으나
조자이의 시는 내용을 보건데 정철의 4대손 정수환이 김윤제의 후손으로 부터 환벽당을 들인 후에 김윤제를 흠모한 문하의 후손이
환벽당에 들러 쓴 시같습니다.
시에 나오는 서하당은 서하 김성원의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식영정 아래에 있는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서하당을 지칭한 것이기
때문이죠.
환벽당안에 앉아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무등산 자락과 지실마을 등이 수월하게 보입니다.
이자리에서 김윤제는 제자 송강 정철과 서하 김성원등을 가르키고 송순, 임억령, 김인후, 소세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 부자,
양응정, 기대승, 고경명, 삼당시인으로 이름난 백광훈 등 당대의 고명한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또 어린 정철은 그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에게는 시를 배우며 자랐다고 합니다.
그의 시 성산별곡에는 이 환벽당 근처의 산수경관을 담고 있어 어린 정철에게 이 환벽당이 얼마나 잊을 수 없는
되었는지를 잘 알수있다고 하지요.
송강 정철이 어린시절부터 과거에 급제할 때 까지 보냈던 환벽당.
광주북구8경에 풍암정사와 같이 선정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다 김덕보와 종손간이라는 것이 배려된 것으로 보이며,
2013년 11월 국가지정 명승으로 지정 고시된 것이 많은 도움이 된 듯 합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이 두가지를 둘러보려면 많이 움직여야 하지만, 무등산 옛길 3구간을 걷다보면 만나는 것으로 느리게 천천히 걸으며
역사를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되겠습니다.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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