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영산강8경)극락강의 비경 풍영정

simpro61 2014. 5. 13. 08:05

전남의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가로목포앞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영산강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머무는 곳곳마다 생명의 물을 공급해 주고, 흐르는 곳곳마다 남도땅의 풍요로움을 골고루 퍼트려 주는 호남인의 사랑 영산강.

산강은 총 길이  122km에 유역면적은 2,798평방킬로미터나 됩니다.

전남 담양군 용면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담양, 광주, 나주, 영암을 지나 영암호 하구둑을 통해 서해바다로 흘러들어가며 담양호에서

1차적으로 힘을 비축했다가 담양을 지나면서 오례강, 증암천과 합류하여 광주시내를 관통합니다.

여기까지는 거대한 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아주 오래전에 광주사람들은 광주를 지나는 영산강을 극락강이라고도 부르고

있지요. 

 

광주천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형성한 뒤 황룡강과 지석천이  마지막 힘을 보태면서 영산포부터는 영암호 하구둑까지 배가

다닐 정도로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며 도도하게 서해바다로 흘러갑니다. 

즉 영산강은 전라도 사람들의 향수와 사랑이 옴팡지게 담긴 어머니 젖줄같은 강이지요.

그 영산강에 영산강 8경이 있습니다.

제1경에는 저녁놀을 볼 수 있는 영산강 하구언

제2경에는 식영정에서 바라본 곡강

제3경에는 석관정에서 바라본 황포돛배와 영산강 절경

제4경에는 4계절 들꽃을 즐길 수 있는 죽산보

제5경에는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나주평야

제6경에는 황룡강 물길이 합쳐지는 승촌보

제7경에는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풍영정

제8경에는 대숲에 피어오르는 새벽 물안개가 있는 담양습지 라고 합니다.

그 중 8경 담양습지는 지난 편에서 설명했구요, 6경도 그림으로 봤습니다.

오늘 보여줄 곳은 바로 7경인 풍영정입니다.

영산강 8경 중 7경인 풍영정입니다.

풍영정은  명종 15년(1560년)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김언거(金彦据)가 지은 정자로서 김언거는 7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풍영정에서 10여년 동안을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등 이름난 문인들과 교우하며 지냈습니다.

지금 풍영정에 남아 있는 제영현판은 모두 그때의 흔적들입니다.

김언거(1503∼1584)의 본관은 광산,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입니다.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1525년(중종 20) 사마시, 153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옥당에 뽑혀 교리·응교·봉사시정등의 내직을

거쳐 상주·연안등의 군수를 지냈으며,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덕망이 높은 김언거가 낙향하자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12채나 되는 정각을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풍영정 이외의 11채의 정각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말았죠.

풍영정만 소실을 면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다른 정자들이 다 타버리고 풍영정이 불길에 휩싸이자 현판 글자 가운데 앞의 "풍"자가 오리로 변하여 극락강 위로 날아올랐습니다.

기이하게 느낀 왜장이 즉시 불을 끄도록 하자 극락강의 오리가 현판에 날아들어 다시 글씨가 또렷이 되살아났다는 것이죠.

현재 정각에 걸린 현판의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풍자와 영정의 글씨체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이 전설이 생겨난 까닭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시인묵객 70여명의 현판이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황, 이덕형, 송순, 고경명, 김인후등이 지은 시문들이 빼곡이 붙어있으며, 제일호산(第一湖山) 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는데,

이는 명필 한석봉(韓石奉)이 쓴 것입니다.

풍영정에서 바라본 극락강과 극락강 철교입니다.

극락강 상류쪽으로도 시원하게 조망되죠.

극락강 철교는 6.25때 북한군의 광주침입을 막기위해 산동교와 같이 폭파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지금도 꾿꾿하게 버티고 서서 하루에 50편 이상 광주에서 송정까지 기차가 다닌답니다.

그런데 영산강 중 광주를 지나는 부분을 왜 극락강이라 불렀을까요?

옛날 광주를 관통하여 가로 지르는 극락강을 배로 오르내리며 소금을 팔던 강원도 총각이 있었답니다.

해마다 늦여름에 와서 극락강 나루에서 소금을 싣고 다시 길을 떠나곤 했는데 어느 해인가 가까운 마을에 사는 장 처녀와 눈이 맞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죠.

이 둘은 견우와 직녀처럼 일년에 단 한번 남의 눈을 피해서 짧게 만날 수 밖에 없었지만 죽어도 서로 헤어지지 않기로 맹세 할 만큼 절절 한 사이였답니다.

하지만 양가집 규수와 뜨내기 소금장수와의 결합이 가당할 리 있었을까요?

아무튼 그리 사앙을 나누다 무슨 연고인지 3년동안 소금장수 총각의 종적이 뚝 끊겼답니다.

장처녀는 부모님의 영을 어기지 못하고 결국 시집을 가고 말았죠.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강원도 소금장수 총각이 4년만에 소금배를 저어

극락강을 거슬러 올라 이곳을 찾았는데 그토록 오매불망 그리던 여인이 남의 아내가 되어 있었으니 총각은 한서린 울음만 터트리다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를 알게 된 장여인은 밤마다 언덕위의 정각에 올라 총각이 배를 저어 지나간 극락강을 바라보며 한숨과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가 이내 이승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녀가 서 있던 그 자리에 한그루 괴목이 총가의 고향인 강원도쪽을 향해 자라 강물을 덮었다고 합니다.

장처녀가 죽어 괴목이 되었다는 곳이 지금의 풍영정으로 극락강이란 바로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나누는 강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마침 극락강 철교위로 KTX가 지나군요.

극락강철교 다음에는 광주 유일의 간이역 극락강역이 있답니다.

극락강역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KTX 조차도 바로 통과하지 못하고 다른 열차를 비켜 가는 곳입니다.

그럼 다음 포스팅에서는 극락강 역을 만나 볼까요?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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