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그리고 김덕령장군의 충장사(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 5부10편)

2013. 2. 18. 08:05한국의 산 견문록/무등산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충장사를 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 시리즈 1차 탐방의 마지막 편으로 하는 것은 김덕령장군과 무등산은 뗄레야 뗄 수 없으며, 충장공과 광주무등산은 한마음 한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무등산 곳곳에 김덕령장군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자 붓을 꺾고 칼과 화살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광주출신의 의병장이기 때문이며, 그 억울한 무고로 누명을 쓰고 고문끝에 옥사한 가여운 삶이 슬퍼서이기도 하다.

 

 

충장사는 화암마을 충민사와 달리 입구부터가 소박을 넘어 검소하다.

주차장은 충장사옆에 있으니 그곳에 주차를 해 놓고 홍살문을 지나 들어가면 된다.

 

 

연못에서는 봄바람이 일렁이고,

 

 

 

좌측으로는 무등산국립공원 충장사관리사무소가 있다.

그러고 보니 무등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원효사지구가 본부이고 증심사, 충장사, 충민사, 경렬사, 호수생태원 등 모두 5곳에 관리사무소가 있는 셈이다. 이제 국립공원이 되었으니 대대적인 조직증강으로 한 두군데 더 생길 수도 있겠다. 주로 화순쪽으로....

 

 

충장사 건립 각종 공덕비가 앞마당에 세워져 있고,

 

 

통합기준점이란 국토부의 표지판이 서 있다.

 

 

안내판을 자세히 보니 해발고도 1000m라고 하면 정확한 산 높이는 50m를 빼야 되구나..ㅎㅎ

이곳을 중심으로 2~3km마다 하나씩 통합기준점이 있다고 하니, 혹시 지나갈 때 보이걸랑 꼭 새겨보시길..

 

 

충장사 안내문

 

 

충장사의 유물관은 세칸의 팔작지붕으로 충민사의 다섯칸 팔작지붕에 비해 검소하기만 하다.

그럼 유물관으로 들어가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어떤 분이었는지 살펴 볼까나?

 

 

광주 구도심의 대표명칭인 충장로가 바로 김덕령 장군을 모신 충장사에서 따 온 것이다. 

 

 

김덕령장군 활동시기의 의복을 소개하는 코너.

 

 

당시 의복들

 

 

김덕령장군의 의복은 직접 관에서 나왔다고 한다.

 

 

보관상태가 좋았던 3점은 이렇게 전시되어 있고,

 

 

무명솜 저고리

 

 

충장공 유사는 1791년 정조의 명으로 김덕령장군과 관련된 글을 모아 편찬한 책이라고 한다.

 

 

김덕령장군의 친필로 김영섭이란 분이 기증했다. 

 

 

 

 

김덕령장군 관련유적은 모두 6군데로

1.무등산 의병길의 종착역과 무등산옛길2구간 중 제철유적지의 주검동으로 김덕령장군의 의병들이 무기를 만든 곳.

2.김덕령 장군 사후 정묘재란때 김덕령장군의 부인 흥양이씨가 투신한 곳은 추월산 8부능선 보리암 입구에 있다.

3.충효리정려비각은 김덕령장군의 생가터가 있는 충효동 왕버들나무 바로 앞에 있다.

4.풍암정은 김덕령장군의 아우 김덕보가 형의 옥사를 슬퍼한 나머지 은둔한 곳으로 장형,둘째형 처럼 그 역시 의병으로 출전하여 병사하였다.

5.취가정은 환벽당 바로 옆에 있으며,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권필의 꿈에 취한 채 나타나 노래했다는 곳으로 무등산 옛길 종점근처에 있다.

6.충장로는 광주를 대표하는 거리로 젊음과 생동감있는 활력이 넘치는 거리로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김덕령 장군의 관 

 

 

 

이제 유물관을 나와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러 간다.

 

 

충장사 묘역 안내도

 

 

1595년 고성지방에 상륙하던 왜군을 격퇴하여 선조로 부터 충용군이란 군호를 받았다.

그 충용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측으로 동재,

 

 

좌측으로 서재가 있으며,

 

 

159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지방에서 의병 5,000명을 모집하여 출정하는데, 그때 전주에 내려와 있던 선조의 아들 광해군으로 부터 받은

익호장군이란 군호를 받은 익호문을 지나면,

 

 

김덕령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가 나온다.

 

 

우측으로 비각이 있고 그 안에 충용장군 김공덕령 은륜비가 있다.

 

 

충용장군 김공덕령 은륜비 안내문

 

 

김덕령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비로 1842년(헌종8) 당시 광주목사였던 조철영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으며 비석 전, 측, 후면에 모두 40행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69m,폭은 62cm, 두께는 35cm이다.

대석은 가로 1.02m, 세로 73cm, 높이 12cm의 비신 받침 1단이 있다. 은륜비 옆에는 작은 비석이 하나 더 있으며, 이 비는 원래 배재마을에 있었던 것을 충장사로 옮겨 이곳에 같이 봉안하였다.(자료출처: 두산백과)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재실

 

 

사당 내부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영정

 

 

 

아들이 대표로 방명록에 기재하고, 향을 피워 참배를 마친다.

충민사에서는 꼼짝않고 차 속에 있던 아이들이 충장사에서는 모두 참배하러 따라 나섰으니, 충민사와 충장사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었음에도

아이들 마음속에 충장사는 그렇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참배를 마쳤으니 묘역으로 올라가 본다.

 

 

김덕령장군의 묘역은 사당 바로 뒷편 양지바른곳에 있다.

 

 

주변은 광산김씨의 선조나 후손들의 묘도 같이 있다.

 

 

 무인석과 마석

 

 

 

  

 

제일 꼭대기까지 올라가 바라본다.

 

 

잘 지키셈... 

 

 

 

봄이 오는 풍경

 

봄이 더 가까이 온 풍경

 

 

그리고 보니 이 길은 무돌길 배재마을이구나.

오래전 무돌길이 막 생겼을 때 이 길을 따라 옆지기와 아이들이랑 같이 출발지인 각화동  각화중학교 앞에서 이곳까지 걸어온 적이 있다.

중간에 등촌마을 정자에서 다리쉼하며 도시락을 까 먹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 또 나의 탐방의지를 불태운다.

지금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당시만 해도 안내도나 이정표가 부족하여 조금 헤맸던 기억도 있지만, 각화중학교에서 등촌마을 정자까지가 1구간, 등촌마을에서 배재마을 정자까지가 2구간으로, 날 풀리고 나뭇가지에 새 순이 돋아나오며, 개나리 진달래 필 무렵 무돌길 전구간 도전에 나서는 나의 모습이 벌써 보이는 듯 하다.

 

충장사를 끝으로 1차 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 시리즈는 끝이 났다.

이 시리즈는 지난 1부 5편(원효사,얼음바위,서석대,입석대,새인봉)에 이어, 2부 1편(중머리재와 백암사터,봉황대), 3부 4편(문빈정사와 증심사, 의재허백련과 춘설헌,광주전통문화관, 의재로를 따라간 미술관여행), 4부 5편(규봉으로 가는길, 규봉암, 지공너덜과 장불재, 중봉, 덕산너덜과 토끼등, 바람재, 늦재)에 이어 5부 10편(지산유원지의 추억, 무등산 원시림 원효봉, 원효8경 의상봉, 김덕보 삼형제의 충절을 기린 풍암정사, 무등산 분청사기전시관, 무등산 여행의 하이라이트 호수생태원과 김덕령장군생가터, 무등산 역사길의 종점 환벽당, 김덕령장군의 억울함을 노래한 취가정, 충민사의 불편한 진실, 무등산 그리고 김덕령의 충장사) 등 모두 25편의 이야기를 2달에 걸쳐 연재하였다.

 

2차 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는 무등산 무돌길 전구간과 무등산외곽의 무명봉들, 그리고 그 자락에 숨어있는 보물같은 우리의 문화,역사를 함께 찾아보고 감상하며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다. 이제 꽃피는 봄이 오면 근질근질 거리는 발바닥에 시동을 걸고 그 머나먼 여정을 떠나 볼까나..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트위터http://twitter.com/huhasim

   지도:4]

          

k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