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6. 07:00ㆍ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 장군
이치(梨峙)마을 설화 와 전설
프롤로그
광주는 예향(禮鄕)의 도시이지만 의향(義鄕)의 도시이기도 한다.
이 고장의 사대부와 민초들은 임금을 모시는데 충을 다하고 어른을 공경하는데 효를 다하다가도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거나 의롭지 않은 일이 발생할 때는 분연히 일어나 국가의 안위와 민중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그 효시가 바로 임진년(1592)으로 왜적이 삼천리 금수강산을 유린하고 있을 때 이 고장의 수 많은 문인과 사대부, 백성들은 국난을 극복하기위해 붓이나 호미 대신 칼과 창을 들고 자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맞서 싸웠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고경명과 김덕령장군이다. 그 맞섬은 장군들의 뒤를 이어 구한말까지 이곳은 항상 불의에 항거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의병을 모아 왜적과 항전하던 대표적인 곳으로 만들었으며, 그 정신은 동학과 광주학생독립운동과 한국전쟁, 4.19의거에 이어 광주시민의 안위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5.18광주민주화운동까지 이어진 것이다.
전상의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은 아니지만 선조대의 무인으로 1617년 (광해군 9)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포로 150여 명을 송환해 왔으며,1618년 종3품인 어모대장까지 올랐다가 인조반정 때 외직으로 밀려난 뒤 변방의 최전선에서 근무하다 1627년 정묘호란때 안주성에서 청군의 남하를 5일간 막아내며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었다.
광주 3충신이란 1879년에 간행된 광주읍지(光州邑誌)기록에 의하면 광주의 역사에 남는 의로운 충신 14인 가운데 3인이 나라에서 정려를 받았는데, 그 3인이 바로 위에서 열거한 고경명, 김덕령, 전상의 장군으로 이 세 분을 광주 3충신이라 부른다.
그래서 광주문화관광 탐험대에서는 광주를 빛낸 3충신의 행적을 찾아 외지인의 광주탐방서 '광주견문록Ⅲ'에 광주3충신 시리즈를 소개하기로 하고 그 기초조사의 일환으로 이번 탐방길에 나서게 되었으며 탐방주제 '광주 삼충신(三忠臣)을 찾아서' 중 '1편 김덕령 장군의 행적을 찾아 떠난 여행' 의 일환으로 담양 추월산 보리암에 있는 흥양이씨 순절비 탐방에 이어 김덕령 장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무등산 의병들의 발자취를 따라 명명된 무등산 의병길, 김덕령장군의 전설속 지왕봉 뜀바위를 찾아 오른 무등산정상, 전설속 비마족바위를 찾아 오른 의상봉 등에 이어 마지막편으로 사당인 충장사와 충효리 생가터와 정려비각, 그리고 김덕령 장군이 공부했던 환벽당과 자신의 억울함을 권필의 꿈에 술취한 채로 나타나 하소연했던 취가정 등을 탐방하였다.
'광주 삼충신(三忠臣)을 찾아서' 는 1편 김덕령 장군의 행적을 찾아 떠난 여행, 2편 고경명 장군의 행적을 찾아 떠난 여행, 3편 전상의 장군의 행적을 찾아 떠난 여행 등 3편으로 나뉘며, 각 편 마다 3충신들의 생가와 묘소, 사당과 제실, 유적지 등의 탐방과 더불어 그분들의 가족사까지 모두 포스팅할 예정이며 순서에 관계없이 탐방 순서에 따라 포스팅할 예정으로 이번 탐방은 5월17일 부터 시작하여 9월 초순까지 진행될 예정이며 훗날 광주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광주견문록 Ⅲ'라는 책자로도 일부가 소개될 예정이다.
김덕령의 이치장군대(梨峙將軍臺)설화는 무등산에 전해져 내려오는 수 많은 설화 중의 대표적인 설화이다.
예로부터 광주의 지형은 여러 이무기가 앞을 다투어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화룡승천(化龍昇天)의 형국이라고 했다.
그것은 호남의 신산(神山)무등산에서 내려 뻗은 두 개의 큰 산줄기가 이무기를 닮았다는 것으로, 한 줄기는 사양능선을 내려서서
원효봉을 거쳐 무등산 관광호텔이 있는 장원봉에 이르는 능선이고, 또 하나는 중봉으로 내려서서 증심사로 부터 조선대학교 부속병원
뒷쪽으로 이르는 산줄기를 말한다.
이 두마리의 이무기가 광주를 향해 내려오는 것은 바로 여의주를 먼저 차지하기 위함인데, 그 여의주가 묻힌 곳이 바로 지금의 광주역 근처에 있었던 태봉산으로 태봉산이 헐려 경양방죽을 메울 때 광주시민들 사이에 회자된 전설은 여의주가 묻힌 태봉산을 없애면 광주에 엄청나게 큰 재난이 따른다는 것으로 태봉산이 1967년 헐린 뒤로 부터 13년만에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엄청난 사상자를 낸 것이 바로 그 재난이었다는 것이다.
그 화룡승천의 형국은 태봉산 설화에서 무등산까지 이어져 이치장군대(梨峙將軍臺)의 설화로 이어졌으니, 그 설화를 잠시 소개하자면,
김덕령의 고조부 문손이 성촌마을에 살 때 어느 날 남루한 형색의 젊은이가 찾아와 머슴을 자원하자 그를 받아들였다.
이 젊은이가 밤이면 몰래 집을 빠져나가 밤늦게 돌아오곤 하여 문손이 그를 몰래 따라나섰는데, 그는 지금 배재(梨峙)의 문손의 묘가 있는
자리를 보고 '회룡고조(回龍顧祖)'의 명당이 틀림없다고 중얼거렸다. 젊은이는 삶은 달걀을 준 날은 그것을 그 자리에 묻었다가 꺼내 귀에 대보고 이상하다고 하였으나, 날달걀을 준 날은 똑같이 하고 틀림없다며 그 자리에 표시를 해두었다. 문손은 젊은이가 중국에 간 사이
그의 부인 광산노씨의 묘를 이 자리에 이장하였고, 젊은이는 돌아와 그 사실을 알고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그 자리가 대장군(大將軍)이 나올
자리라고 알려주었다. 그 자리가 장군대좌(將軍臺座)로 훗날 덕령과 같은 신장(神將)이 태어났다고 한다.
(자료출처 : 전라남도 공보담당관실 [향토사대계:명소지명유래의 이치장군대]
그 이치장군대 설화로 태어난 장군이 바로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 장군으로 무등산에는 김덕령 장군에 대한 수 많은 전설들이
있기에 무등산과 김덕령은 한 몸이었던 것이다.
무돌길을 따라 걷다보면 등촌마을에서 충장사로 넘어가는 고개가 지릿재(조릿대재)인데 그 고개를 넘어가면 나오는 마을이 김덕령의
충장사가 있는 배재마을이다.
충장사가 있는 배재마을은 옛날에는 조릿대재(백토재)에 쌓아 둔 고령토가 달빛에 배꽃처럼 하얗게 보인다고 이치(梨峙)마을
이라 불렀으며, 이치장군대 설화가 있는 마을이다.
광주를 대표하는 위인 김덕령 장군에 대한 설화는 이치장군대 설화 말고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잠깐 열거해 보자면,
1.충장사옆 이치장군대(梨峙將軍臺)설화
'회룡고조(回龍顧祖)'명당에서 태어난 김덕령장군
2.원효계곡의 치마바위
김덕령의 누나가 치마폭에 싸서 올렸다는 바위로 원효계곡에 있다.
3.금곡동의 시검바위
김덕령이 주검동에서 만든 칼을 시험해 본 바위로 두 쪽으로 깨진 커다란 바위
4.지왕봉의 뜀바위
무등산 정상 지왕봉에 있으며 김덕령이 어렸을 때 이곳에서 바위와 바위 사이를 뛰어 다니며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길렀던 곳으로
훗날 왜정 때 이 전설을 들은 일본군 장교가 자신도 뛸 수 있다고 뛰어 다니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바위
5.중봉 삼밭실
중봉아래 넓은 들판에 삼밭을 일구고 매일 커가는 삼을 뛰어 넘으며 체력을 길렀다는 곳.
6.장불재의 의병활동지
무등산 장불재에서 백마능선을 말을 타고 달려 의병들의 본거지가 있었던 둔병재까지 다녔다는 곳
7.말바우 시장의 말바우지명 유래
김덕령이 용마를 타고 활을 쏴서 화살이 용마보다 먼저 가면 용마를 죽이기로 하였는데 그가 화살을 쏘고 가서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을 죽였는데 말을 죽이고 난 후 화살이 도착한곳에 있던 바위로 말이 어찌나 힘껏 바위 위로 발굽을 내디뎠던지 바위가 말발굽 모양
으로 움푹 팼다고 해서 붙여졌으며 당시 말 발자국이 찍힌 바위가 있었지만, 도시개발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그 바위를 말바위라고 불렀으려 동문로가 확장되기 오래전부터 말 바위 부근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던 전설에 의하면
지금의 통일로 약국 앞 부근에 마치 말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에 어린아이들이 걸터앉아 말 타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기에
그 바위를 말 바위(말바우)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8.의상봉의 비마족바위
김덕령이 무등산 지왕봉에서 말을 타고 한 걸음에 도착한 곳이 의상봉으로 말 발자국이 선명한 바위
그 외에도 무등산에는 김덕령장군의 유적지가 많이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1.주검동 제철유적지
무등산 의병길의 종착역으로 제철유적지가 있으며 김덕령장군의 의병들이 무기를 만든 곳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비문이 새겨진
바위도 있다.
2.흥양이씨 순절비
김덕령 장군 사후 정묘재란때 김덕령장군의 부인 흥양이씨가 투신한 곳으로 추월산 8부능선 보리암 입구에 있다.
3.충효동 정려비각
충효리 정려비각은 김덕령장군의 생가터가 있는 충효동 왕버들나무 바로 앞에 있다.
4.풍암정
풍암정은 김덕령장군의 아우 김덕보가 형의 옥사를 슬퍼한 나머지 은둔한 곳으로 장형,둘째형 처럼 그 역시 의병으로 출전하여
병사하였다.
5.환벽당
김덕령 장군이 어렸을 때 수학하였던 곳.
6.취가정
환벽당 바로 옆에 있으며,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권필의 꿈에 취한 채 나타나 노래했다는 곳.
7.충장로 지명유래
광주를 대표하는 거리로 젊음과 생동감이 넘치는 거리로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그렇다면 김덕령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덕령 장군은 25세 때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김덕홍과 함께 고경명(高敬命) 의병에 가담하여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가 어머니를 공양하라는 형의 권유에 따라 귀향했다. 그 후 형 김덕홍은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전사하고 이듬해 8월에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상 중임에도 1593년 11월 다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수천 명이 모여들었으며, 이를 전라관찰사가 조정에 추천하니 조정에서는 의병을 충용군(忠勇軍) 그를 충용장(忠勇將)이라 하였다. 1594년 전주에 있던 세자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남원에 머물다가 진주로 옮겼는데 조정에서 의병을 통합하여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여,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영남 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곽재우와 협력하여 여러 번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에는 고성(固城)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격퇴했다.
1596년 7월 이몽학의 난을 제압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도중에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으나, 충청도 순찰사의 종사관의 무고로 반란군의 무리로 보고되어 체포되었으며, 선조의 친국을 받게 되고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였으나 영상 유성룡의 비협조와 서인 판충추부사 윤두수의 엄벌간청에 속은 선조는 6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을 하게 되고 장독을 견디다 못해 끝내 29세 때 옥사하였다. 형의 억울한 죽음을 듣고 그의 동생 김덕보는 세상을 등지고 무등산 자락 풍암정에 은둔하였으며, 부인 흥양이씨는 이듬해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왜군에 쫓기다 보리암 앞에서 절벽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그 후 1661년 그의 억울함이 풀려 관직에 복직되었으며, 1680년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88년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가 내렸고 그가 태어난 마을에 충효리라는 비석을 세워 김덕령 장군의 삼 형제와 그의 부인의 충절을 기렸으며, 1678년 광주 벽진서원에 배향되었고 1679년 의열사라는 사당 이름을 하사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거 철거되었다가 1975년 충장사를 지어 배향하였으며 1947년부터 광주의 중심지를 충장로라 부르며 장군을 기리고 있다.
내남문인 익호문
사찰의 대웅전이나 향교, 사당, 사우, 서원 등을 출입할 때는 우입좌출(右入左出), 동입서출(東入西出)하는 것이 원칙이다. 성현들의 위패가 배향된 향교나 서원에 갔을 때 신도(神道)인 중앙통로를 왕래해서는 안되며 공수(供手)라 하여 왼손을 오른손위에 놓고 두 손을 마주 잡아 공경의 뜻과 예를 다해야 한다. 전각의 층계를 오를때는 합보(合步)라 하여 뛰어 다니지말고 오를때마다 발을 가지런히 모아 올라가야 한다는 것으로 외삼문인 충용문을 들어설 때부터 우측문으로 들어가고, 참배를 마친 다음에는 보는 방향에서 왼쪽문으로 나와야 한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영정사진과 위패를 모신 사당.
충장공의 묘는 사당 뒤의 산자락에 있으며 묘로 가는 오른쪽의 조그만 출입문을 거쳐 나가야 한다.
우측으로 비각이 있고 그 안에 충용장군 김공덕령 은륜비가 있다.
김덕령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비로 1842년(헌종8) 당시 광주목사였던 조철영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으며 비석 전, 측, 후면에 모두 40행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69m,폭은 62cm, 두께는 35cm이다.
대석은 가로 1.02m, 세로 73cm, 높이 12cm의 비신 받침 1단이 있다. 은륜비 옆에는 작은 비석이 하나 더 있으며, 이 비는 원래 배재마을에 있었던 것을 충장사로 옮겨 이곳에 같이 봉안하였다.(자료출처: 두산백과)
김덕령 장군의 묘소는 충장사 뒤 선영의 묘소 아래에 묘셔져 있다.
처음에는 북구 금곡동 배재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1974년 11월 19일에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며,
묘를 봉안한지 378년이나 지났는데도 육탈이 되지 않았고 매장당시에 입었던 수의와 목관이 그대로 출토되어
지금 충장사에 전시되어 있다. 주변은 광산김씨의 선조나 후손들의 묘도 같이 있다.
풍수발복으로 김덕령장군의 옛 묘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이치장군대 설화에서 보듯이 고조모 묘로 인해 훌륭한 자손이 태어났지만
결국은 부모 묘로 인해 발복이 반감되어 임진왜란의 영웅 김덕령장군이 모신 선조의 질투를 받아 고문끝에 옥사했다고 한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모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 장군이 죽어가면서 남긴 유일한 시 춘산곡으로 시비는 광주사직공원 사직단 건너 관리사무소 옆에 있다.
조경남은 김덕령의 애석한 죽음에 "온나라 사람들에게 그를 기대어 안심하였고, 왜놈도 또한 겁내어 항상 스스로 경계를 엄히 하여 지키면서 감히 침범하지 못하더니, 국운이 불행하여 죄가 아닌데 죽었다. 하늘이 그에게 수년의 수명을 주었더라면 정유년의 적이 어찌 전라, 충청도에 출동할 수 있었으랴. 당시에 뜻이 있는 이는 개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말했으며, 장군이 죽은 뒤로 같이 전투에 참여했던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는 군병을 모두 해산한 다음 세상을 등지고 은둔 생활을 하여 선조가 벼슬을 내리며 수 없이 조정으로 들라해도 거부하여 화를 피했으나, 괘씸죄에 걸려 귀양살이까지 하면서도 끝내 더러운 벼슬길을 마다하고 낙동강변에 망우당(忘憂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선도(仙道)에 몰두하다가 천수를 다했으며, 이순신은 한참 승전할 즈음에 스스로 나서 적환(敵丸)을 맞고 죽으니, 호남과 영남에서는 부자 형제가 서로 의병에 가담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는데, 적이 김덕령 장군의 죽음을 듣고는 비로소 날뛰고 즐거워하면서 이르기를, “김덕령이 죽었으니, 더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김덕령 장군 한 사람이 두려워 옥사시킨 것이 결국 이후 정유재란때는 의병들의 씨를 말려버렸으니, 선조가 과연 후회를 했을까? 안 했을까...
유물전시관
김덕령장군의 친필로 김영섭이란 분이 기증했다.
충장공 유사는 1791년 정조의 명으로 김덕령장군과 관련된 글을 모아 편찬한 책이라고 한다.
김덕령 장군의 관
충장소 담벼락을 넘어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튤립나무.
꽃이 피기전 맺은 봉우리가 튤립을 닮았다 하여 튤립나무라 부른다고...
이것은 일본이 원산지인 철쭉으로 충장사를 점령하고 있다.
이게 왠말인가. 지하에 계신 충장공이 노할 일이다. 그 외에도 충장사에는 일본산 섬잣나무와 화배나무 등이 버젓이 자리잡고있다 하니
겉으로는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사당이지만 실상은 일본산 나무에 포위되어 있는 셈으로 천국에서 편하게 계실지 궁금하다.
아니면 공포의 대상이었던 김덕령 장군의 기(氣)로 일본을 간접 정벌하고자 한 것은 아닌지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돌아간다.
이제 충효동 호수생태원 근처에 있는 김덕령장군이 태어난 생가터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충장공의 생가터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에 멀리서도 잘 보인다.
장군의 생가터가 있는 마을은 광산김씨 낭장공파의 집성촌으로 장군의 후예들이 사는 곳이다.
이 길은 무등산 옛길3구간 중 역사길로 충장공의 사당인 충장사에서 시작하여 환벽당에서 끝나는 길이다.
지금 밭이 있는 곳이 충장공의 생가터라고 하는데, 덩그러니 밭만 있지 주춧돌이라든지 그 어느것 하나 보전되어 있는 것이 없다.
언듯보면 옆의 허름한 폐가가 된 기와집이 생가로 여겨질 정도이니, 밭을 치우고 거기에 생가터임을 증명하는 비석대신 그를 기릴 수 있는 터전을 만든다면 더욱더 무등산 역사길의 의미가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되어진다.
김덕령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곳은 충장사인데, 생가터 옆에 이렇게 위패를 모신 또 다른 전각을 세워 놓았다.
김덕령 장군의 생가터에서 바라본 무등산은 운무에 쌓여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무등산을 바라보고 선 김덕령 장군은 저 무등산을 보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무등산의 품속에서 기상을 세우고
훗날 의병장이 되어 나라와 민족의 안위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으니 그 정신을 광주사람들 모두는 현세에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충효동 왕버들나무는 광주시 기념물 제 16호 였으나 최근 천연기념물로 등급이 상향되었다.
높이는 10m, 둘레는 6m정도이며 수령은 430살이 넘었다고 한다.
충효동 마을에는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고 하여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 한 그루,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다는데,
지금은 충효리비 입구의 왕버드나무 세그루만 남아있다.
2012년 9월 25일 문화재심의위원회는 광주 충효동 왕버들이 충효마을 사람들의 풍수지리와 마을의 안녕과 평온, 번영을 위해
비보림(裨補林)으로 조성하였다는 스토리텔링을 높이 평가하고, 수령이 430년이 된 왕버들 세 그루를 역사적, 문화적, 생태학적으로
보존과 보호가치가 적지 않다며 천연기념물로 제539호로 지정했었다.
김덕령 장군의 생가터, 충효리비와 더불어 충효동의 오랜역사를 대변하는 왕버들은 수형자체가 우람하고, 수관과 수세가 단연코 돋보여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를 절묘하게 표현하였고 임진왜란의 정사와 야사로 전해오는 일명 김덕령 나무로도 일컫어진다고 한다.
충효동 정려비각[忠孝洞 旌閭碑閣]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4호 이며 이비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한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과
형 덕홍[德弘], 아우 덕보[德普], 부인 흥양이씨[興陽李氏] 등의 충[忠], 효[孝], 열[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1788년[정조12] 왕명으로 "충효리[忠孝里]"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 받고 이듬해 그 유래를 밝힌 이 비를 세웠다.
비각[碑閣]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792년에 처음 세웠다
1788년 (정조12년)또 좌천성으로 가증 하고 충장[忠壯]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부인 흥양이씨에게는 정경부인 추종되었다.
형 덕홍에게는 지평을 추증 하였고, 그후에 마을의 정표를 충렬이라 하지않고 충효라 한것은 임금의 뜻이 이와 같으니
훗날 이 정려에 경의를 표하고 이 비석을 읽는 사람은 어찌 먼저 효도를 힘쓰지 않을까? 삼가 후대에 알리노라.라는 비문을
타액하여 현판으로 걸었다.
환벽당의 주인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 1528년(중종23)에 무자식년시 에 진사(進士) 2등 7위에 합격하였고, 1531년(중종26) 신묘식년시 병과 23위로 급제하여 직강, 홍문관교리, 전중어사 겸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하였고, 전주진영 병마절도사, 부안군수,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으로 근무했다.
관직을 떠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을 하였는데, 송강 정철(1536~1593)과 서하당 김성원 등이 대표적인 제자이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종손으로 김윤제에게서 어릴 때부터 이곳 환벽당에서 학문을 배웠다.
김윤제는 이곳에서 당시 호남의 이름있는 시인 묵객들과 어울리며 시단을 형성하였는데, 김윤제가 교유한 사람들은 송순, 임억령, 김인후, 소세양, 양산보 부자, 양응정, 기대승, 김성원, 정철, 고경명, 백광훈 등이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호남 사림으로 서로간의 정신적 유대감이 깊었으며,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거치면서 시대의식을 함께했던 사람들이다.
취가정은 김덕령 장군의 후손들이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 무등산 역사길의 주인공이 바로 김덕령이다 보니 옛길 3구간 역사길이 김덕령의 묘와 사당이 있는 충장사에서 시작하였다면, 김덕령이 어릴 적 공부했던 환벽당에서 끝나지 말고 김덕령의 억울함을 권필의 꿈에 나타나 노래하였다는 취가정까지 이어져야 그 의미를 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1596년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다시 진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 관찰사 종사관 신경행과 모속관 한현의 무고로 최담년, 곽재우, 고언백, 홍계남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에 정탁, 김응남 등이 그의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옥사하고 말았다.
그 후 권필의 꿈에 김덕령이 술에 취해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노래를 부르자, 권필이 그를 위로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으며, 김덕령이 취했을 때 부른 노래라는 뜻으로 취가정(醉歌亭)이라 이름 지었다.
1889년(고종27) 김만식 등 후손들이 김덕령이 어릴 적 공부했던 환벽당 근처에 세웠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55년 다시 세웠다.
김덕령 장군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 충장사에서 시작한 역사길이 김덕령의 아우 김덕보의 풍암정사에서 형제간의 우애를 느껴보고, 충효리 정려 비각이 있는 충효동에서 김덕령과 부인 흥양이씨, 김덕령 삼형제의 충절을 되새겨 보고, 김덕령의 생가터에서 김덕령의 어린 시절을 그려본 다음, 동생 김덕보와 함께 김윤제 밑에서 학문을 공부했던 환벽당까지 그의 흔적을 따라갔다면, 그의 억울한 옥사를 권필에게 하소연 한 취가정에서 그의 누명을 벗겨주는 것이 역사 길의 진정한 의미라 하겠다.
네 기둥에 붙은 주련 글씨는
聲閒于天 (하늘에 대고 고요히 노래하니)
忠貴日月 (곧은 마음은 해와 달을 꿰뚫으네)
氣壯山河 (기운은 산하에 넘쳐)
醉歌於地 (이 땅에 취하도록 노래하네)
김덕령의 취가시(醉詩歌)
醉詩歌此曲無人聞 (취해서 부르는 노래 이 곡조 듣는 사람 없네)
我不要醉花月 (꽃과 달에 취하면 무엇하리)
我不要樹功勳 (공훈을 세운들 무엇하리)
樹功勳也樹浮雲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醉花月也是浮雲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醉時歌此曲無人知 (취해서 부르는 노래 내 마음 누가 알까)
我心只願長劍奉明君(다만 긴 칼 부여잡고 임금께 보은할 수 있기만을 원하노라)
권필의 화답가(和答歌)
將軍昔日把金戈 (장군께서 예전에 칼을 잡으셨나)
壯志中최奈命何 (장한 뜻이 중도에 꺾이니 이 또한 운명이로고)地下英靈無限恨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 없는 원한이여)
分明一曲醉時歌 (분명 이 노래는 취시가로구나)
역사란 충성을 다 해 나라를 지킨 이들을 시기하는 중상모략꾼들의 이간질에 놀아나는 임금의 가려진 눈에 의해 기록되어 왔기에, 그들의 충절을 결국 역모로 몰아 붙인 역사의 간신배들을 이제 모두 하나씩 추려내어 새로운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 할 것이다.
이 취가정은 비록 남도 가사문학과는 관계가 없지만, 김덕령 장군의 역사 길과는 엄청난 상관관계가 있기에 반드시 무등산 옛길 3구간 역사 길의 종점은 환벽당이 아니라 취가정에서 끝나야 할 것이다.
광주의 대표적인 젊음의 거리 충장로는 바로 광주의 영웅이자 무등산의 영웅 김덕령 장군의 길이다.
이 길을 걷는 광주시민들은 충장로를 거닐면서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애통하게 생각하며
그를 기억한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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