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가 낳은 세계적 음악가 정율성/양림동 둘레길

2013. 9. 11. 06:30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1. 광주가 낳은 세계적 음악가 정율성

9월 11일 부터 14일까지 광주에서는 2013페스티벌 오!광주 정율성축제가 열린다.

13억 중국인이 추앙하는 천재 작곡가 정율성, 내년이면 탄생 100주년이 되지만 정작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낯선 이름이 된 정율성.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울려퍼진 음악, 2006년 6.15 공동선언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역사적인 첫 만남때

울려퍼진 음악,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열식에 울려퍼진 음악이 모두 정율성의 곡이었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한국의 아리랑과 같은 연안송을 작곡하여 중국인의 80%이상이 그의 노래를 부르고 10억 명 이상은 그가 작곡한 노래를 최소 한 곡 이상 부를 줄 아는 정율성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것 같다.

 

광주가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이자 작곡가인 정율성은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외삼촌 최흥종이 사준 축음기를 좋아했고,

최흥종은 어린 정율성에게 서양 명곡을 들려주거나, 그가 활동하던 광주YMCA, 양림교회, 양림동 선교사촌을 통해 서양 음악과

접하게 해주었으며 동시에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양림동 정율성거리전시관)

정율성은 부친의 본적인 옛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부동정 94번지(현 불로동 163)번지에서 1914년 7월 7일(음력)태어났다고 한다.

하동이 본관인 부친 정해업과 어머니 최영온 사이에 10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났으나 5남매가 요절하는 바람에 4남 1녀의 막내로 자랐다.

(정율성이 태어난 곳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없어 생가를 두고 광주 남구와 하동정씨 종친회가 서로 다른 곳을 생가라 주장하고 있다.)

 

정율성은 어머니 최영온의 본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정해업은 외삼촌 최흥종의 뒤를 이어 수피아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정율성의 형제들도 모두 외삼촌이 관여했던 숭일 학교와 수피아 학교를 졸업했다.

정율성의 작은 외삼촌은 최영욱 박사로 숭일 학교와 서울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켄터키 주립대학 의학부, 에모리 대학 의학박사를 취득한 후 광주 제중원(광주 기독병원)원장을 지냈고, 해방 무렵에는 황금동에서 서석병원을 운영하다가 미 군정 하에서 초대 전남도지사를 지낸 사람이다.

 

 

정율성 거리에는 연안송을 포함 정율성의 대표곡을 들어볼 수 있는 음향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 악보아래 하얀색 단추를 누르면 듣고자

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연안송, 연수요, 평화의 비둘기, 3.1행진곡, 우리는 행복해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최 박사의 부인이자 정율성의 작은 외숙모는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인 김필례(1891-1983) 여사다.

그녀는 일본 동경여자학원 유학 후 김활란과 함께 조선 여자 기독교청년회(YWCA)를 창립했으며, 미국 콜롬비아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정율성의 외삼촌 최영욱과는 미국 유학 중 결혼했으며, 광주 수피아 학교 교사와 교감을 거쳐 교장을 역임하는 등 수피아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부인 김필례 여사와 사이에 자식이 없던 최 박사는 율성을 양자로 삼고 싶어 할 만큼 아꼈으며, 1933년 의열단원인 형의 권유로 중국으로 떠날 때 여비를 대 주었다고 한다.

 

 

*정율성 양림동 생가

정율성 거리가 끝나는 오른쪽으로 정율성 생가 안내판이 있다.

생가로 들어가는 오른쪽의 집들은 모두 비어있다.

집들은 모두 헐어내고 도로를 내어 주차장 부지와 정율성 생가임을 알리는 기념물을 설치한다고 한다.

양림동 둘레길 지도에는 오른쪽 첫번째 집이 다형 김현승 시인의 가옥이라고 하는데 그 어떠 표식도 없어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정율성은 외가와 양림교회에서 서양음악과 찬송가를 듣고 배우며 음악도의 꿈을 키워갔으며, 광주 숭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사망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학교를 중퇴한 뒤,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뒤 1937년 연안의 노신 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39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군의 공식 노래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한 인물이다.

 

 

 

정율성 생가는 지금 정율성과 관계없는 분이 살고 있지만, 정율성에 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9월 중국으로 다시 갔다가 12월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 때 인민지원군의 전선 위문활동을 하였다.

그 후 중국 주은래 총리의 요구로 김일성은 정율성을 중국으로 보내게 되고 이후 중국 국적을 취득했으며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작곡가로 약 360여 곡을 만들었다.

특히 [八路軍 行進曲]은 90년 北京 아시안게임에서 주제음악으로 쓰이기도 하였고, 2009년 중국 정부에 의해 ‘신중국 창건 100대 영웅’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이 100년도 넘은 석류나무가 산 증인이며, 석류나무 옆 작은방은 공부방이었다고 한다.

지금 천정은 막았지만 예전에 대들보에 쓰여진 상량문에 적힌 연대를 보면 일제시대때 지어진 집이 맞다고 한다.

 

정율성은 中國 현대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중한 인물임에도 주 활동 지역이 중국에다 중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2차 대전 이후 한 중 수교가 이루어질 때까지 전혀 몰랐던 인물이었지만,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그를 알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鄭律成의 작품이 국립 국악원의 노력으로 지난 96년 10월 8일 처음으로 한국에서 선보이게 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음악 활동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음악계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현재 남구 양림동 생가터에는 출생지 표지가 세워져 있고 생가 앞 약 100m에는 2008년 ‘정율성로(路)’가 광주시와 남구청에 의해 조성됐다. 광주시와 자매도시 관계를 맺고 있는 광둥(廣東) 성 광저우(廣州) 시의 정율성 선생을 추모하는 시민단체에서 기증한 동(銅)으로 제작된 흉상도 ‘정율성로’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그가 태어난 광주는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매년 개최하고 올해로 9년째 ‘페스티벌 오! 광주 정율성 축제’도 매년 열어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고 있다. 올해는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열린다.  

 

9월11일(수) 19:30 광주시립교향악단 개막공연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

9월12일(목) 19:30 한동일과 음악친구들  (빛고을 시민문화관)

9월13일(금) 19:30 한중 전통문화교류 공연 중국창즈시 가무극단 공연1회차 (빛고을 시민문화관)

9월14일(토) 14:00 정율성 작품연주회 (아트스페이스)

                       15:00 한중 전통문화교류 공연 중국창즈시 가무극단 공연2회차 (광주문화예술회관 소극장)

                       19:00 오카리나 앙상블 공연 (빛고을 시민문화관)

 

자세한 공연 내용은 홈페이지 참고 페스티벌 오!광주 정율성 축제

 

 

하지만 그의 출생지를 놓고 광주시 남구청과 하동 정씨 종친회가 주장하는 생가가 달라 아직도 정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 의외였으며,

4살때 온 가족이 화순 능주로 이사했다는 기록에 의해 화순 능주라는 설도 있어 더더욱 기가 막혔다.

이곳은 하동정씨 종친회가 주장하는 또다른 정율성의 생가로 양림동 생가와는 많이 떨어져 있다.

즉, 광주천을 건너야 하는 곳에 있어 양림동이 아닌 동구 불로동이며, 구 도청에 인접한 곳으로 히딩크호텔 부지가 정율성의 생가이며

이곳에 정율성기념사업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일 년이면 수만 명의 중국인들이 광주를 찾아 양쪽으로 추모행렬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율성정이라는 우물도 있고,

 

 

정율성의 가계도 및 관련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어 기념비와 흉상이 있는 양림동 생가와는 사뭇 다르다.

 

 

히딩크 호텔이 들어선 곳이 정율성의 생가가 있던 곳이라지만 주차장 건너 오래된 한옥이 생가라고 히딩크 호텔 직원들이 이야기 하길레

가 봤더니 출입문 앞에는 애국지사의 집이라는 명패가 걸려있고, 문은 굳게 닫혀있어 집주인하고의 인터뷰는 하지 못해 정율성의 일가가 사는지 생가가 맞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었다.

정율성은 중국최초의 여성대사이자 모택동의 당비서인 정설송과 1950년 결혼하여 슬하에 외동딸 정소제 외에는 없으며, 부친과 큰 형,

둘째 형은 모두 일제시대 때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중국에서 누나는 북한에서 사망하였으며, 네째 형만 1980년 유일하게 한국에서 사망

하였다. .(김성준 저, 정율성의 음악활동에 대한 연구 인용)

 

그러므로 현재 한국에는 그의 생가가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확인시켜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부친의 본적인 광주군 광주면 부동정 94번지(현 불로동 163)번지이지만 정율성의 호적에는 옛 광주부 금정 162번지로 되어있어 이곳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도 불분명하다.

일제시대 때 광주천 상류 지역에 일본식 동 이름인 금정과 양림정이 있었다고 하니 지금의 불로동 지역이 옛 금정이었을 것이란 추측만

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금동(錦洞)이라는 지명도 옛날 금동 지역 주민들이 광주천을 부를 때 금계(錦溪)라고 불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금정이 금동으로 바뀐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집안 이곳저곳에도 오래된 석류나무가 있다.

 

남구청이 주장하는 정율성 생가는 남구 양림동 79번지로 그것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는 것이고, 종친회에서 주장하는 생가는 정율성 부친의 호적상 주소인 동구 불로동 163번지로 정율성 생가 고증위원회는 두 곳을 모두 생가로 인정했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지.

 

광주시는 2010년 정율성 선생 생가 고증위원회를 결성하고 생가 고증에 나서 10개월의 시간을 투자해 현장을 방문하고 문헌을 토대로

자료연구, 증언청취 등 11차례의 회의를 거쳤지만, 결국 정확한 생가를 찾지 못하고 1914년 당시 불로동과 양림동을 합쳐 부른 부동방면을 정율성의 생가로 발표해 불로동 163번지와 양림동 79번지를 모두 생가로 볼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결과를 냈다고 한다.

어떻게 한 몸이 두 군데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도 매년 수만 명씩 정율성 생가를 찾아오는 중국인들도 헷갈려 양쪽으로 나뉘어 간다고 하니 중국인 관광객들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광주시는 다시 한 번 한 곳을 정확히 생가로 지정하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할 것이며, 올해로 벌써 9회째를 맞이하는 정율성 축제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율성 생가는 두 곳 중 한 곳을 확실하게 지정해야 할 것이다.

(정율성의 불로동 생가는 양림동 둘레길에는 없지만, 정율성 거리와 양림동 생가를 포스팅하면서 빠지면 안 될 것 같아 불로동까지 다녀오게 되었으니 양림동 둘레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은 불로동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양림동 둘레길 이야기   

1.광주양림동 둘레길, 그 보석같은 공간들

 

 

  (광주 양림동 둘레길 지도:광주남구청제작)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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