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고아들의 보금자리 충현원/양림동 둘레길

2013. 9. 30. 06:30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사직공원에서 양림동 방향으로 급경사길을 내려서면 정면으로 호남신학대학교가 보인다.

도로로 내려서면서 오른쪽 축대 위를 올려다 보면 오래된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충현원의 옛 건물이다.

그렇지만 충현원이라는 간판은 없고 충현어린이집이라는 간판만 있기에 헷갈릴 수도 있지만 충현어린이집도 충현원 소속이기에

어린이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조만간 충현원을 찾기 쉽게 간판석을 설치할 예정이라고 하니 훗날 찾아가는 분들은 편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양림동 둘레길은 사직공원에서 양림동쪽으로 계속 내려간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호남신학대학교 건물이고, 오른쪽 출입문이 충현원으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지금은 굳게 닫혀있다.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가면 자바라 출입문이 보이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충현원으로 갈 수있다.

축대위의 건물이 옛 충현원

 

 

호남신학대에서 바라본 옛 충현원건물.

충현원이 막 생겼을 당시인 1950년 초에는 호남신학대교 자리는는 양림산자락의 과수원이었다고 한다.

지금 보이는 차도는 오솔길이었고...

 

 

 

충현어린이집

 

 

 

충현원은 (구)충현원 건물, 사무실, 체험관, 어린이집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직공원산 자락의 햇살 좋은 서쪽 사면에 있다.

충현원내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동상이 한국전쟁당시 전쟁고아 1,000여명을 구출한 미공군의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이다.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은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 군목으로 참전하여 1951년 1.4후퇴 이전인 1950년 12월 20일 그의 명예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 거리에 버려진 1,059명의 전쟁고아와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서울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인천으로 이동시키고, 인천에서 김포로, 김포에서 제주도로 5일 동안의 여정에서 3번의 기적을 경험하며 미공군 수송비행기로(C-54)16대로 구출하였다.

 

 

 

 

'평화의 대사' 조형물은 멕시코 조각가 세바스챤이 제작하여 기증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한국이 양육하지 못하여

16여 개국으로 보내어 진 해외 입양인들을 상징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정체성을 찾으며 모국에 대한 희망과

세계평화를 위한 민간 외교관으로 성장하여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갈 평화의 대사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6.25참전 용사인 드레이크 박사가 구입하여 기증하였다.

 

 

'비운의 왕좌' 조형물은 세계적인 조각가 멕시코사람 세바스챤의 제작하였고, 6.25참전 용사인 드레이크 박사가 기증한 작품이다.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500,000명의 어린이를 추모하기 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조형물을 따라 오른쪽 산책로를 따라 가면 옛 충현원 건물이 나온다.

충현원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나무는 송악으로 넝쿨이 나무가 되어 서쪽 벽으로 담장이처럼 올라갔다. 

 

충현원은 설립자 故 박순이 선생에 의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6.25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전쟁고아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버려진 아동들에 보다 따뜻한 가정을 찾아주고, 후원하여 줌으로써 사회에 봉사

하는 훌륭한 일꾼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사회복지법인이다.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호남신학대학교 내에 있는 우일선 선교사 사택에서 고아 45명으로 1949년 비인가 고아원을 운영한 것이

시초이며, 1952년 5월 1일 한국전쟁 직후 부모의 품을 잃은 수 많은 고아들을 위해 기독교 정신인 사랑과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광주지구선교사 커밍스, 녹스, 캐딩턴, 윌슨, 루트 와 백영흠 목사가 후원회원이 되었고, 후원회장은 루트 선교사가 되어 설립자 박순이

여사를 후원하여 지금의 충현원 자리에 광주 충현 영아원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53년 선교보고후 1954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후원으로 충현원 건물이 2층으로 신축되었으며,

당시 신생아들의 자연스러운 황달치료를 위해 남향으로 창을 넓게 하여 지었다고 하니 건강을 위해 채광과 통풍에도

신경을 많이 쓴 건물로 2010년 부활절에 개축복원하였다.

 

 

 

설립자 박순이 선생의 묘는 충현원 바로 뒤에 있어 영원히 충현원과 함께 하고 있다.

좌측은 설립자 박순이 선생의 부모 묘, 오른쪽은 남편 김생옥 선생과의 합장 묘.

 

 

충현원 유혜량 목사(62)가 충현원에 대한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유혜량 목사는 설립자 박순이(1921~1995) 여사의 며느리로 박순이 여사는 박태삼, 박애신 부부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선진적인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랐으며 박순이 여사의 어머니 박애신 여사는 우월순 선교사 사택에서 직접 재봉질로 아이들의 옷을 만들며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박순이 여사는 어렸을 때부터 선교사 자녀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어 영어를 쉽게 배웠으며, 수피아여학교를 다니다 전남여고를 나온 신지식인이 되었고, 목포고 음악선생이었던 성악가 김생옥과 결혼하였지만 여순사건때 목숨을 잃어 27세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지만 한 평생을 고아들을 돌보는 보육사업과 결혼하여 지내다 1994년 난소암으로 사망하였다.

 

 

 

위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프랑스로 입양된 오준철 양부가 제작하여 기증한 작품이다.

 

 

1층에는 각종 기록사진과 신생아들을 재웠던 침대 등이 있으며 2층에는 당시 각종 놀이기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가운데 있는 통은 당시 신생아들을 목욕시키던 통.

 

 

위 사진은 우월순 선교사 사택에서 임시 고아원을 차렸던 시절의 사진으로 이 귀중한 사진들은

2006년 8월 14일부터 19일까지 광주광역시청 1층 시민홀에서 가진 Gls and the Kids, A Love Story

(미군 병사들과 한국 아이들, 그들의 사랑 이야기)사진전시회에 나왔던 사진들이다.

 

이 사진전을 연 죠지 F 드레이크 박사는 2005년 5월 30일 미국 전몰장병기념일에 라스베이거스에서 사진전시회를 가졌다.

당시 충현원에서는 충현원과 관계된 자료확인을 위해 미국의 사진전시전을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처음 드레이크박사를 만났다고 한다.

그곳에서 6.25전쟁당시 미공군 군목인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의 아들인 블레이즈델 목사부부를 만났으며, 벨링햄시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기념탑과 관련 전시공간이 있다는 말을 듣고 훗날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충현원이 우월순 선교사의 사택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사진자료를 발견하였으며, 한국을 방문한 드레이크 박사는 1,059명의 고아들이 피신한 제주도의 옛 고아원 부지와 조각공원을 둘러보고 다시 광주 충현원으로 와 새벽마다 충현원 주변을 돌며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195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공간이며 인류애의 문화적 가치가 무궁무진한 이곳이야 말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빛을 보게할 장소라고 말했으며, 충현원 주변의 사직공원에 조각공원을 조성해서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교류의 장이 되로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한다.

 

그 후 광주시와 사회복지협의회의 도움으로 2006년 8월 14일부터19일까지 광주광역시청 1층에서 사진전시회를 가졌으며, 전시회가 끝나고 이 사진들은 모두 충현원에 기증되었다.

 

 

죠지 F 드레이크 박사는 전시회 서론에서 이야기 하기를,

한국전쟁 50년이 다가오면서 나는 뭔가 빠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기념일을 위해 예정된 모든 행사들 가운데 전쟁으로 인해 상처 입은

나라의 아이들을 위해 동정어린 행동을 한 미군에 관한 행사는 없었다. 나는 "성조"의 표현대로 "전쟁의 부드러운 면"이 빠졌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작은 책이며, 사진 전시회이며, 인터넷 사이트이다.

(중략)

이 사진 자료들은 전쟁중에도 근본적인 미국인의 정신을 실천했던 미군의 동정심, 사랑, 친절함에 관한 것으로 우리 모두가 자랑스러워 해야 할 이야기이다. 또한 이것은 한국 전쟁사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소책자를 다 본 후 웹사이트 www.koreanchildren.org를 방문하여 나머지 이야기를 접해 보시기 바란다. 고 적고 있다.

 

 

 William F. Asbury는 사진전을 위한 카달로그 머릿말에서 밝히기를,

1,300만의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전장을 떠난지 5년이 채 못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은 당시 미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한반도에 불려가게 되었다. 북한 공산군은 단단히 무장한 채,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던 남한을 빠르게 정복해왔다.

이 소책자에 들어있는 특별한 사진과 이야기는 공산주의자들이 침공해서 일어난 한국전쟁 중의 이야기들을 알려준다.

이 내전은 미국 전쟁사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심한 파괴를 당했을 이곳에서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긴 싸움이었다.

(중략)여러 강대국 군대들이 오가는 동안 발생한 주된 피해자는 한국의 가족들, 특히 아이들이었다.

 

 

 

 

약 100,000명의 아이들이 고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육원이 세워져야 했고, 의약품이 절실했다. 또한 한국의 지독한 겨울날씨로 부터 아이들을 보호할 옷과 담요도 필요했다.

미군은 그 필요를 감당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각각의 아이들을 책임졌다.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와 심지어 해양운송상인조합까지 모두 고아들 전체를 입향했다.

미군은 아마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동정심의 군대가 된 것이다.

사병, 하사, 상사, 중위, 대령 할 것 없이 김씨나 이씨, 신씨 성을 가진 아이의 사진을 미국에 있는 자신들의 가족에게 보내 많은 도움을 요청하였다. 가족들은 편지를 동봉해 선물이나 현금,물질적인 지원 등의 개인적인 도움을 주었다.

 

 

 

생명을 살리는 선물과 사랑이 답지한지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이제 가정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모든 것이 명백하게 부족했던 1950년대 초의 한국에서 진정한 가정의 가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지금과 그 시절과의 차이점은 그 시절의 미군은 "가족"을 자신의 조국인 미국의 국경이나 민족성과는 무관한 보편적인 것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이 카다로그는 역사에서 간과한 잘못된 점을 바로잡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또한 젊은 미군들이 한국전쟁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희생자였던 아이들을 돕기 위해 했던 일들을 보여주고 기록하고 있다. 고 적고 있다.

 

 

충현원의 첫 모습으로 안전을 위해 2010년 개축복원공사를 거쳐 현재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충현원앞에는 양림산으로 지금 호남신학대학교자리는 과수원이었다고 한다.

충현원 뒤쪽이 지금의 사직공원이며 건물들이 비교적 작아 광주천이 잘 보인다.

 

 

 

당시 신생아들은 이렇게 햇볕이 잘 들어오는 곳에 눕혀, 자연스런 황달치료가 되도록 했다고..

 

 

그 침대가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카메라를 쳐다보는 아가들의 모습이 어쩜 이리도 천진난만한지..

 

 

 

사진에서 발견한 함석헌 선생..

함석헌 선생은 자유당정권과 군사독재정부치하에서 민주주의 운동, 인권운동 등 시민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재야의 중심인물로서 장준하선생이 발행하던 월간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등을 기고했으며, 1970년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독특한 '씨알사상'을 본격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했고, 1976년 소위 '명동 3.1 사건'에 참여하여 윤보선, 김대중, 정일형, 윤반웅, 문익환, 안병무, 이문영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민주수호 양심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또한 함석헌 선생은 종교시 300여 편을 남긴 탁월한 종교 시인이며 문필가로 행동하는 지성인, 진리구도의 종교사상가, 거짓과 비겁에 저항하는 시대의 양심이었다.

함석헌 선생의 중심사상은 '씨알사상'인데 '씨알'은 종자나 열매, 곡식 따위의 하나하나의 크기를 나타내는 말로 민중 중에서도 순수한 사람됨을 지향하는 뜻이다. 그의 역사관은 영웅사관이거나 유물사관이거나 유심사관이 아니고, '역사의 담지자의 주인은 씨알(민중)이다.'고 보는 민중사관이다.

 

그는 1989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1979년과 85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며 1987년 제1회 인촌(仁村)상을 수상하였고 사망후 2002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충현원 역사를 간직한 현판들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

 

 

당시 아이들의 키를 재던 측정기

 

 

이 탁구대는 광주 최초의 탁구대라고 한다.

직접 나무판자를 대고 페인트를 칠해 만든 핸드메이드..^^

 

 

충현원 2층으로 올라가 본다. 다락방도 있고...

 

 

2층에는 옛날에 쓰던 교구들과 해외입양인들이 기증한 장난감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직공원 전망대쪽으로 올라가는 산책로도 있고.

 

 

충현원의 상징처럼 보이는 이 나무는 J.C 창립수로 히말라야시다.

광주청소년협회에서 충현원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처럼 JC도 잘 자라자는 뜻으로 충현원 마당에 심었다고 한다.

 

 

 

 

 

 

 

 

 

1,000명의 아버지라는 책은 2008년 5월 1일 블레이즈델 군목의 1주기 추모식에 맞추어 출판을 한 후 2011년 9월 28일 수정판이 나왔다.

유혜량 목사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처음 출판 된 "전란과 아이들- 그 일천 명의 아이들"의 책제목을 "1,000명의 아버지"로 하였으며

저자의 이름 '브레이즈델'을 영문의 한글표기법에 따라 '블레이즈델'로 표기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이번 수정본의 목적은 먼저 "한국판 쉰들러"라 불리는 블레이즈델 군목의 공로를 바로 잡고자하는 것이고,

딘 헤스가 '전송가: Battle Hymn' 라는 영화로 고아 구출작전을 왜곡한 사실에 군목 블레이즈델과 부관 마이클 스트랭하사 사이에

오간 편지를 수록하였고, 당시 구출된 고아 대표로 이강훈(당시 16세)과 임경애의 편지와 한국인들의 증언이 담긴 이야기들을 수록

하였으며 한글과 영문 합본으로 편집하여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읽어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출판하였다고 적고 있다.

블레이즈델 군목님의 생전에 사실을 바로 잡아 출판하지 못했던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번 수정본이 군목님과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는 유혜량 목사는 이 수정본이 나오기까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고 적고 있다.

 

2012년 11월 1일 제1회 「미공군 군목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 회고록 1,000명의 아버지」 독후감을 공모했으며, 12월 4일까지 전국에서 모두 255명의 학생들이 응모했으며 광주 풍암고의 김소령 등 20명이 입상하여 수상하였다.

 

 

 

 

아마 7080세대드모두 초등학교 시절에는 이런 책으로 공부했을 것이다.

 

 

양림동 둘레길이 사직공원에서 내려서서 충현원으로 이렇게 내려오며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사무실로 쓰이는 충현원의 또 다른 건물.

이 건물도 기록사진에 보면 나온다. 1954년 신축하여 2010년 보수공사로 복원하였다.

 

 

 

복도끝에 있는 유혜량 목사의 사무실에는 역사만큼 오래된 탁자와 의자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었다.

 

 

 

60년 손때가 묻은 책상과 의자들...책상위 기자재만 현대의 것이지, 나머지는 모두 충현원의 역사와 같이 한다.

아마도 의 책상과 탁자, 의자들은 충현원과 같이 영원할 것이다.

 

 

충현원은 2009년까지만 해도 당시 보육원 건물들이 그대로 있었으나 오래되고 낡아 충현원과 광주시가 2009년 부터

건물 개보수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미국 참전용사들도 복원공사 비용 일부를 보탰다고 한다.

대지 5,765(약 1,743평)에 해외 입양아들이 한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체험관과 6.25전쟁 당시 사진, 자료 등 5,000여 점을

전시할 전시관 등 6개 건물이 2010년 1차 준공에 이어 2012년 3월 2차 준공식을 갖고 20만 명이 넘는 6.25전쟁 해외 입양인과

 

그 가족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한국전통문화를 체험하는 등 자신의 뿌리 찾기 공간이자 고국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요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제2회 < 1,000명의 아버지 >독후감 공모 안내

1.마감일 : 10월 31일 24:00까지 

2.분량 : ① 원고지 / 200자 원고지 8장 내외

              ② A4용지 / 1장 내외, 글씨체-굴림체, 10포인트, 자간 160%, 2,000자 내외

3.제출방법 : 충현원 유혜량목사 이메일unichurch@naver.com

4.  『제 63주년 어린이 구출 작전( The Kiddy Car Airlift)』기념 행사 및 제2회 독후감시상식 : 2013년 12월 20일(금) 오전 10:00

   전쟁당시의 참상을 회고하고 생명존중 정신을 계승하여 현재에 감사하며 전쟁이 없는 평화를 추구한다.

5. 장소 : 사회복지법인 충현원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 동상 앞)

 

충현원 후원안내

광주 은행: 구좌번호 :138-107-003272 예금주: 충현원

홈페이지 : www.cbh.or.kr

E-mail : unichurch@naver.com

연락처 : ☎(062)652-5500, 652-2214 팩스(062)432-2214

유혜량목사 : 010-9550-2214

양림동 둘레길 이야기 

1.광주양림동 둘레길, 그 보석같은 공간들

2.광주가 낳은 세계적 음악가 정율성

3.110년 역사의 양림교회와 <각시탈>촬영지 오웬기념각

4.커피맛에 놀라고 가격에 더 놀랐다./어비슨카페

5.영화<위험한 상견례>촬영지.이장우 가옥

6.동서양의 아름다운 조화, 최승효 가옥

7.양림동 둘레길의 오아시스 '한옥식당'

8.양림동 효자비와 뒹굴동굴, 양파정

9.광주사직공원에는 7080의 추억이 있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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