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기행)남도의 환벽당과 취가정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

2011. 7. 13. 06:30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아이들이 금요일에 모두 기말고사가 끝났다.

모처럼 공부라는 압박감에서 해방되어 토요일날은 하루종일 친구들이랑 야구하고 영화보고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었단다.

집에 밤12시가 다 되어 들어오면서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역력하다.

버스가 끊겨서 택시비를 갹출해서 왔다는 둥 영화가 너무 재미 있었다는 둥 저녁밥으로 먹은 돈가스가 너무 맛 있었다는 둥

한껏 기분의 좋아서 수다를 한보따리 풀어놓고 다음날 나랑 같이 갈 곳에 대해 주섬주섬 준비물을 챙겨둔다.

 

며칠전에 수능 언어영역에 나오는 송강 정철에 대해 묻길레 설명할 필요도 없이 현장을 보여 주겠노라고 말하고 동창회 산악회

일요일 산행때문에 D데이를 토요일로 잡았는데 비가 안오면 친구들하고 야구시합을 한다 해서 일요일로 밀쳐놨던 것이다.

 

아침일찍 오늘 둘러봐야 할 곳이 무려 11곳이다.

무등산에서 발원된 창계천이 흐르는 길목을 따라 소쇄원, 환벽당, 취가정, 식영정, 서하당, 부용당 등이 몰려있고 그 가사문학의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한국가사문학관 그리고 광주댐 건너 수남학구당과 명옥헌원림, 송강정, 면앙정등을 둘러보는데 하루

온종일 걸린다.

먼저 무등산 충장사를 거쳐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몰려있는 역사의 산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이곳에 올때는 차량을 세워둘 곳이 없기에 가까운 환벽당옆에 두고 오던지 아니면 길건너의 한국가사문학관의 넓다란 주차장에

          세워두고 싸묵싸묵 걸어서 와도 된다. 아이들 현장학습을 시키면서 덩달아 나도 아이들을 위한 리포트를 작성해야 했다.^^

         

          오늘은 그 첫번째로 환벽당과 취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음엔 소쇄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세번째로 한국가사문학관과

          수남학구당 네번째 식영정,서하당,부용당 다섯번째 명옥헌원림 여섯번째 송강정 일곱번째 면앙정 그리고  관방제림과 기타등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삼거리 못가서 충효교를 건너기 전에 우측으로 빠지는 비포장도로로 100여미터정도 가면 우측으로

          환벽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이 나온다. 왼편으로는 창계천이 흐르고있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387번지다..바뀐 주소로는 환벽당길10번지로 되어 있고 창계천 건너는

담양 남면이다.

 

 

                         환벽당으로 올라가는 돌길.. 김윤제와 송강 정철이 수도 없이 오르내렸을 돌계단에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면서 1549년 (중종44년)으로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본다.

 

 

환벽당은 조선시대 때 나주목사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건물을 세우고,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전에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윤제(金允悌)
1501년(연산군 7)∼1572년(선조 5).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로(恭老), 호는 사촌(沙村).
증조부 김자침(金自沈)은 진사(進士)로
참의(參議)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김문손(金文孫)은 진사로 참판(參判)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김후(金詡·金珝)는 진사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정랑(正郞)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어머니는 여산김씨(礪山金氏)이다. 1528년(중종 23)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7위에 합격하고, 1531년(중종 26)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로 급제했다. 직강(直講)·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

전중어사 겸 춘추관 편수관(殿中御使 兼 春秋館 編修官)을 역임하였고, 전주진영 병마절도사(全州鎭營 兵馬節度使), 부안군수(扶安郡守), 나주목사(羅州牧使)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으로 나갔다. 나주목사로 있을 때,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뽑아 엮은 《주자문록(朱子文錄)》 4책을, 간행하였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을 하였는데,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과 종질(從姪)인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등이 대표적인 제자이고,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金德齡)김덕보(金德普) 형제는 종손으로 역시 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성산동으로 물러나, “환벽당(環碧堂)”이라는 정자를 짓고는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며 스스로 즐겼는데, 당시 호남의 이름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단을 형성하였다. 김윤제(金允悌)가 교유한 사람들은 송순(宋純), 임억령(林億齡), 김인후(金麟厚), 소세양(蘇世讓), 양산보(梁山甫) 부자, 양응정(梁應鼎), 기대승, 김성원, 정철(鄭澈), 고경명(高敬命), 삼당시인으로 이름난 백광훈(白光勳) 등이다. 이들 대부분은 호남사림으로 서로간의 정신적 유대감이 깊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거치면서 시대의식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참고문헌]광산 김씨대종회 홈페이지朝鮮人名辭書

 

 

 

이곳의 제액은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썼다. 당호는 신잠(潛 1491~1554)이 지었다.

송강 정철이 14살되던해 여름에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환벽당앞에 있는 청계천 용소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

그 시각 김윤제는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가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꾸고 내려가 보니 멱을

감고 있는 어린 정철을 보고 그의 영특함에 반해 16세에 제자로 삼아 글을 가르치며 자신의 외손녀와 혼인까지 시키고

27세에 관계에 진출할 때 까지 뒷바라지를 하게된다.

 

 

 

   환벽당에 걸려 있는 임억령(林億齡)의 시                                      환벽당에 걸려 있는 조자이(趙子以)의 시

 

  烟氣兼雲氣 (연기의 기운인지 구름까지 겸했는지)                          丞相故墟何處尋 (승상께서 사신 옛터 어느곳에 찾을런지)

  琴聲雜水聲 (거문고 소리인지 물소리가 섞이었는지)                       鳴陽縣郭瑞湖潯 (명양고을 서호 위에 그의 유적 남아 있네)

  斜陽乘醉返 (석양 무렵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니)                         淸名直節賢孫繼 (맑은 이름 곧은 절개 어진 자손 이어가고)

  沙路竹與鳴 (모래길에 대밭가마 소리쳐 우네)                                餘韻遺風過客欽 (남긴 여운 맑은 유풍 지난 손이 흠모하네)

                                                                                                                     環碧亭空新易主 (비어있는 환벽정자 새주인이 바뀌었고)

                                                                                     棲霞堂在古猶今 (그 옛날의 서하당이 아직까지 건재하네)

                                                                                              通家小子悲吟地 (통가하는 이 소자가 찾아와서 읊조리니)

                                                                                              老木寒波無限心 (늙은 나무 찬 물결에 이 마음이 설레이네)

 

 

 

임억령 (1496~1568)

본관 선산(). 자 대수(). 호 석천(). 해남() 출생.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고 1525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45년(명종 즉위) 금산군수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인 동생 백령()이 대윤()의 선배들을 내몰자 자책을 느껴 벼슬을 사직하고 해남에 은거했다. 1552년 동부승지

등용되어 병조참지를 지내고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동복() 도원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석천집()》이 있다   [출처] 임억령 [林億齡 ] | 네이버 백과사전

 

김윤제와 임억령은 동시대의 사람으로 임억령이 지은 시는 김윤제가 이 환벽당을 지었을 때 기념으로 써 준 것 같으나

조자이의 시는 내용을 보건데 정철의 4대손 정수환이 김윤제의 후손으로 부터 사들인 후에 김윤제를 흠모한 문하의 후손이

환벽당에 들러 쓴 시같다. 시에 나오는 서하당은 서하 김성원의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식영정 아래에 있는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서하당을 지칭한다.

 

 

 

뒷간이다. 지금은 왼쪽은 큰것,,오른쪽은 작은 것 볼때 쓰는 곳인데 그 옛날에도 그랬는지 궁금할 뿐이다..

직접 물어보기도 그렇고...

 

 

                                                                                  

환벽당 아래쪽 넓은 들판에 김윤제의 본체가 있었다.

환벽당은 본체의 후원격으로 푸른 대나무에 둘러쌓여 있다해서

환벽당(環碧堂)이라 불렀고 그 전에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축대바로 밑에는 직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환벽당안에 앉아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연못은 보이지 않고 본체가 있었던 자리도 안보인다.

이렇게 높은 곳에 후원을 만들어 놓고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자리에서 그의 제자 송강 정철과 서하 김성원등을 가르키고 송순, 임억령, 김인후, 소세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 부자,

양응정, 기대승, 고경명, 삼당시인으로 이름난 백광훈 등 당대의 고명한 학자들과 교유를 하며 또 어린 정철은 그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에게는 시를 배우며 자란다.

그의 시 성산별곡에는 이 환벽당 근처의 산수경관을 담고 있어 어린 정철에게 이 환벽당이 얼마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는지를 잘 알수있다.

김윤제의 환벽당을 드나들던 학자들 대부분은 호남사림으로 서로간의 정신적 유대감이 깊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거치면서 시대의식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식영정옆 지실마을에서 살던 어린 정철이 순천에 살던 형을 만나기 위해 이곳 창계천을 지나다 여기 용소에서 멱을 감던중 환벽정에서 낮잠을 자다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노는 꿈을 꾼 김윤제가  꿈에서 깨어 창계천으로 내려와 보니 14살밖에 안된 정철이 멱을 감고 있는것을 보고 그 인물됨을 알아본다. 그리고 정철이 순천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여 자기 제자로 삼은 유서깊은 현장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김윤제가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과 어울려 낚시를 즐기더 조대(釣臺)가 있는데 지금은 광주댐의 건설로 물속에

잠겨있다.

 

 

 

                    조대(釣臺)가 있던 자리 위로 조대쌍송(釣臺雙松)이 보인다. 조대 아래 창계의 용소에서는 예전에는 뱃놀이도

                    행해졌고 또 조대에서 낚시도 했다하니 그 들만의 풍류를 엿볼 수 있어 눈과 마음이 즐겁다.

                    쌍송을 사이에 두고 정철의 성산별곡중 환벽당을 노래한 구절이 보인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환벽당을 나와서 조대쌍송을 바라보고 창계천을 따라 오른쪽으로 50여미터 가다보면 왼쪽으로 소쇄원으로

                    나가는 자그마한 다리가 보이고 다리와 만나는 지점 바로 우측으로 이렇게 정자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숲과 나무가 우거져 잘 안 보일 수도 있으니 눈여겨 봐야 한다. 

                    이 계단을 올라서면 취가정(醉歌亭)이 있다.

 

 

 

 

네 개의 기둥에 붙어있는 주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聲閒于天(하늘에 대고 고요히 노래하니)

          忠貴日月(곧은 마음은 해와 달을 꿰뚫으네)

氣壯山河(기운은 산하에 넘쳐)

醉歌於地(이 땅에 취하도록 노래하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임진왜란때의 의병장인 충장공 김덕령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890년(고종27년)에 김만식을 비롯한 후손들이 지었다.

6.25때 불탄 것을 1955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에 작은방이 하나 있다.

취가정이란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권필의 꿈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장군이 나타나 권필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노래를 부르자 권필이 시를 지어 그 원혼을 달랬다해서 취가정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취가정의 등장인물에 대해 알아본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

광산김씨(光山金氏). 자 경수(), 시호 충장().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인 석저촌(石底村, 돌밑)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봉섭(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이다. 형인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에게서 배웠다. 체구는 작았지만 신용(神勇)이 뛰어나 무등산주변에는 그의 용력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가 전설적으로 전해오고 있는 무등산의 영웅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로부터 익호장군()의 군호를 받았고, 1594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에 광주 도원수(都元帥)로 있던 권율(慄 1537-1599)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수차례나 왜병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1596년 도체찰사인 윤근수()의 노속()을 장살()한 사건이 일어나 체포되었다가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의병을 다시 모집하였는데 마침 충청도에서 이몽학() 반란이 일어나 토벌하려 가다가 이미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여 회군하였는데, 이 사실을 이몽학과 내통하였다고 신경행()이 무고하여 체포 ·구금되었고,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옥사하고 말았다.

이 억울함이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고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 벽진서원()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1681년에는 병조판서에 가증()되었다. 영조 때는 의열사()에 형 덕홍(), 아우 덕보()와 병향()되었고 1788년(정조 12) 좌찬성에 가증되었다.  1974년에 무등산에 충장사()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다.

작자 ·연대 미상으로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전기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김덕령이 죽기 직전에 지었다는 시조 '춘산곡(春山曲)' 한 수가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에 실려 있다. 

[출처] 의병장 김덕령을 기리는 취가정(醉歌亭)|작성자 무하mooha

   

 

권필(石洲 :1569∼1612)

안동권씨(安東權씨), 자 여장(汝章), 호 석주(石洲). 권근(權近)의 6대손으로 아버지 권벽(權擘)과 어머니 경주 정씨 사이에

다섯째 아들로 마포 서강 현석촌에서 태어났다.
다섯 형제가 모두 시로 이름이 높아 연주집(聯珠集)이 전하고 있다.

무등산 시가문화권에서 배우고 성장하였던 송강 정철시인의 제자로 성품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를 싫어했다. 

19세(1587) 때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한 글자를 잘못 써서 출방 당한 후 23세 때 스승인 송강 정철이 모함을 받아 죄를 얻고 귀양을 가고 다시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와 강화에서 운명하자 벼슬을 마다하고 산수를 벗삼아 시주(詩酒)를 낙으로

살았던 당대의 뛰어난 저항시인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용(具容)과 함께 당시 재상이던 서애 유성룡과 이산해의 목을 베라고 상소하여 조야가 들끓게 했으며 주전론()을 주장하였으나 왜란이후 세상에 뜻을 접고 강화()에 머물렀다.

선조와 광해군시대의 한문학의 목릉성세()로 대표되는 당대 문단에서 동악 이안눌과 함께 양대산맥의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강화에 머물때 많은 유생들이 몰려오자 석주 초당을 열고 이들을 모아 가르쳐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33세(1601) 때 이정구()가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使) 고천준()을 접반할 문사()를 엄선할 때 야인으로서 제술관에 임명되어 문명을 떨쳤다. 이후로도 접빈의 행사에 참여 시인의 이름을 날렸다.
동몽교관을 제수하였으나 곧 사직하는 등 불의를 꾸짖고 서슬 푸른 풍자를 서슴치 않았는데, 광해군 초에는 권신()이었던 이이첨()이 교제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할 정도로 강직했다. 

광해군의 비() 유씨()의 아우 유희분() 등 척족()들의 방종을 궁류시()로 비방한 사실로 이듬해인 1612년에 발생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억울하게 연좌되자 광해군이 대로(), 혹독한 고문으로 친국()을 당하고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술을 대접하였는데 이때의 폭음으로 장독이 도져 이튿날 민가에서 44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석주 권필의 죽음은 인조반정()의 구실이 되기도 했으며 인조반정후에는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권필은 건제 김천일(健齊 金千鎰 1537-1593) 장군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무등산 화암(花岩)마을의 해광 송제민(海狂 宋齊民 1549-1602)의 사위이며 화암마을에 있는 운암서원(雲巖書院) 운암사(雲巖祠)에 해광 송제민선생과 함께 제향되고 있다.

[출처] 의병장 김덕령을 기리는 취가정(醉歌亭)|작성자 무하mooha

 

            설주(雪舟)송운회(宋運會)가 쓴 현판.

 

 송운회(宋運會) 1874년(고종 11년) 율어면 금천 태생으로 중국, 조선의 서예 명인체를 답습, 독특한 설주체를 완성했으며 “설주(雪舟)의 먹물에 보성강이 검게 물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지막 일심(一心)이란 두 자를 남기고 92세로 별세하였다.

 

 

   김덕령의 취시가에 권필이 화답하여 부른 노래다.

 

   김덕령의 취시가(醉詩歌)                                                       권필의 화답가(和答歌)

 

   醉詩歌此曲無人聞   (취해서 부르는 노래 이 곡조 듣는 사람 없네)    將軍昔日把金戈 (장군께서 예전에 칼을 잡으셨나)   

   我不要醉花月         (꽃과 달에 취하면 무엇하리)                          壯志中최奈命何 (장한 뜻이 중도에 꺽이니 이 또한 운명이로고)
   我不要樹功勳         (공훈을 세운들 무엇하리)                              地下英靈無限恨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여)

   樹功勳也樹浮雲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分明一曲醉時歌 (분명 이 노래는 취시가로구나)
   醉花月也是浮雲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醉時歌此曲無人知   (취해서 부르는 노래 내 마음 누가 알까)

   我心只願長劍奉明君(다만 긴 칼 부여잡고 임금께 보은할 수 있기만을

                               원하노라)                                                                                       .

 

 

취가정을 나서면서 이 웅장한 노송을 바라본다.

임진왜란때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충장공 김덕령장군이 명성을 떨치자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1595년 이몽학의 반란에

가담했다고 누명을 씌우고 결국 그는 선조의 국문을 받는다. 유성룡이 그의 무고를 주장했으나 20여일동안의 혹독한

국문을 감당하지 못하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를 하게 된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권필의 꿈에 나타나서 억울함을 노래했을까....

아마 이 노송은 알고 있을 것이다...

역사란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킨 이들을 시기하는 중상모략꾼들의 이간질에 놀아나는 임금의 가려진 눈에 의해 기록되어

왔다고..  그들의 충절을 결국 역모로 몰아붙인 역사의 간신배들을 모조리 추려내어 현세의 법정에 세워야 할 것이다.

 

시리도록 깊은 아픔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비록 이곳 취가정은 남도의 가사문학과는 관계가 없지만 김덕령장군이 옆에 있는 환벽당의 김윤제의 종손이 되기에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편엔 환벽당의 김윤제과 교우를 나누었던 양산보가 지은 소쇄원으로 가는 길에 대해 써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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