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에도 끄덕없는 천지탑의 신비가 있는 마이산 탑사와 은수사

2012. 9. 26. 07:30한국의 산 견문록/한국의 산

 

1편 조선의 영산(靈山)마이산의 전설을 바꿔볼까에서 계속 이어지는 2편 역시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임을 알려드립니다.

 

 

(12:08)탑사에 도착하니 1진이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보다 최소 10여분은 빨리 전망대를 지나서 성황당 방면으로 갔지만 탑사는 우리가 더 빨리 온 것이다.

 

 

범종각이라 부르지 않고 사물각이라 부르는 것도 이채롭고, 그 위치가 협소하고 탑사 대웅전과 멀리 떨어져 요사채 바로 옆에 있어

소통의 거리가 있어 보이고, 사물각과 마주보는 곳에 탑사의 돌탑을 세운 이갑용처사의 동상이 있건만 잘 안보여 지나치기 일쑤고...

 

 

수 많은 조각품들은 파는 것이니 아니면 진열해 놓은 것인지 헷갈리게 한다.

보통의 사찰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는, 마치 시장같은 소란스럼과 분주함이 넘쳐나는 곳. 마이산 탑사.

 

 

수행자들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행하기란 여간 어려운 곳.

그래서 때론 불심을 시험받고자 할 수도 있는 곳. 마이산 탑사

아주 오래전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마이산 탑사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탑사 바로앞까지는 포장도 안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돌탑과 산은 변함 없건만 다른 것들은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영신각.

탑사아래 금당사는 조계종인데 탑사는 태고종이라고 한다.

이유를 살폈더니, 1885년 이갑용(李甲用 1860~1957)이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을 생식하며 수도하다가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계시를 받고 1900년 무렵부터 탑을 쌓기 시작했으며

1920년대 초에는 초가 암자를 지어 돌미륵불을 안치하고 불공을 드리기 시작하였으며,

1935년에는 목조함석지붕의 인법당과 산신각을 지어 부처님을 모셨다고 한다.

 

이갑용처사는 탑을 쌓기 위해 30여년을 인근 30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상단부분에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왔다고 전해지며 이렇게 아온 돌을 팔진도법과 음양이치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氣功琺)

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고 한다.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이라 하며, 최근 태풍 볼라벤의 시속 30km가 넘는 강풍에도 흔들리기만 했을 뿐 80개의 돌탑 중 단 한개도 쓰러지지 않은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져 그것을 보러 전국에서 몰려오는 인파와 공을 들이는 인파로 탑사엔 비오는 날에도 수 많은 인파로 넘쳐나고 있다한다.

 

그것은 돌에도 암수가 있어 이처사ㅏ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고,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쌍의 탑이다.


절을 지을 당시에는 절 이름도 없었으나 그가 평생 동안 만불탑을 축성했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탑사(塔寺)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갑용처사는 1957년에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평생 동안 108기의 탑을 완성시켰으며 현재 80여 기의 탑이 남아 있다.

이 탑들은 '마이산탑(馬耳山塔)’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북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갑용의 손자 이왕선이 한국불교태고종에 사찰등록을 하면서 정식으로 탑사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으며, 1986년 인법당을 대웅전

으로 고쳐 짓고, 1996년 나한전(현재의 영신각)을 지었으며, 1997년 종각과 요사채를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이 분이 바로 돌탑을 세운 이갑용처사로 효령대군의 16대 손으로 전해진다.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고 전국의 명산과 명찰을 순례하면서 스스로 수학하였다. 25세가 되던 해 마이산에 정착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수도 중에 깨달음이 있어 마이산에 만불탑을 쌓기 시작하였다. 현재 마이산 탑사에 쌓아올린 석탑은 혼자서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돌탑을 축성하는 방법과 과정이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1957년 9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네이버지식백과-

일설에는 축지법과 공중부양으로 돌탑을 쌓았다고 하는데 탑을 보면 당시 기술로 공중부양없이 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로

글쓴이는 아주 소소하게 이갑용처사의 축지법과 공중부양을 믿어본다..ㅎ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정권을 찬탈한 무리들이 정한론을 주창하여 한반도를 쳐야한다고 주장했다.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많은 낭인과 자객들이 조선에 대거 들어와 그 중 도력이 높은 이갑용 처사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가

탑사에 왔으나 이 처사가 축지법과 공중부양으로 돌탑을 쌓는 것에 놀래 살해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나도 저렇게 날았으면 좋겠다며

말했다고 한다. 그저 먼발치서 이처사를 계속 동경하며 주시하다가 죽이려 하였으나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계속 탑사의

촛불켜진 방안만 쳐다보다 갔다고 하는 이야기.. 출처 : 그 양반의 블로그

 

 

삼불미륵단.

돌탑을 다 짓고 나서 초가암자를 지어 이 돌미륵불을 직접 조각하여 법당에 안치하여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돌탑이 무너지지 않는 불가사의에 더하여 마이산 은수사에는 또하나의 신비가 있으니 바로 역고드름이라고 한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뻗쳐 오르는데 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릇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비친다고 한다. 이 신서는 이처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형태도 있으며 30여권의 책에

전해 내려오며 사적비에는 언젠가 이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섬진강 발원지 용궁이라고 탑사에서 흘러나온 샘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섬진강 시원지는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원신암마을 상추막이골 데미샘이다.

데미샘을 감싸고 있는 휴양림의 이름도 데미샘자연휴양림이며 그 산봉우리를 천상데미라고 한다.

지도상으로 보면 마이산의 용궁샘물도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맞지만 데미샘이 거리가 훨씬 더 멀다.

선각산 바로옆 오계치 못가서 왼쪽에 있다고 하니 섬진강 발원지를 보실 분들은 이곳이 아닌 데미샘으로 가야 한다. 

 

 

줄사철나무(천연기념물 제 340호 )

1910년경 이갑용처사가 식재했다고 하며 섬진강발원지라고 잘 못 알려진 용궁샘도 이갑용처사가 직접 파서 만든 우물이라고 하니

이제라도 고쳐 써야 하지 않겠나..문화재 관람료를 받았으니 잘못된 정보는 바로 고쳐야 할 것이다.

 

 

미륵존불과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

현재 탑사는 이갑용처사의 3손인 혜명스님과 4손인 진성스님이 사찰을 지키고 있다고 하며

다른 사찰과 달리 탑사를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관광사찰로 탈바꿈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고 하니

사찰분위기가 나지 않고 관광지같이 소란스러운 것은 이해해야 할 듯 하다. 

 

 

대웅전이지만 사찰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대웅전 불상과 현재의 불상이 다른 것을 볼 수 가 있다.

홈페이지에는 좌우협시불은 지장과 관음불로 좌불이나 지금 보이는 것은 입불이며 주불인 석가여래불도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불상과 모양이 많이 틀려 최근에 불상을 바꾼듯 하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탑사전경

 

 

영신각 뒤 바위에 붙어있는 것은 능소화 와 대웅전 뒤 산신각.

 

 

산신각엔 이갑용처사를 모셔두고 있으며 능소화가 핀 암벽이 떨어져 나간 곳에도 돌탑이 있다.

저 돌탑이 최근에 만들어 졌다면 아마도 영신각을 지으면서 사다리차를 이용 만든것 같지만 ,

그렇지 않다면 이갑용처사가 공중부양을 해서 가져다 놓았다고 할 것이다.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

 

 

                천지탑.

                이갑용처사가 만 3년을 공들여 쌓은 탑으로 왼쪽이 음탑, 오른쪽이 양탑이다.

 

 

천지탑에서 공드리는 불자들.

 

 

금줄처럼 달린 산악회 리본들을 보며 이제 탑사를 나와 은수사를 거쳐 북부주차장으로 간다.

 

 

이 산은 암마이산.

 

 

은수사 뒤로 보이는 산이 숫마이산. 마치 거대한 코키리처럼 보이지 않는가?

은수사 역시 탑사와 마찬가지로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곳에 들러 물을 마실때 물이 마치 은과 같이

빛난다고 하여 붙혀졌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386호인 청실 배나무는 태조이성계가 은수사에서 기도하면서 기도의 증표로 씨앗을 심은 것이

               이렇게 자란다고 전해온다.

 

 

은수사의 대웅전은 무량광전.

탑사의 무너지지 않는 돌탑의 불가사의와 이곳 은수사의 역고드름 현상까지 불가사의하다고 한다.

역고드름을 보려면 겨울에 다시 한번 와봐야 할 듯.

 

 

은수사 부처님의 크기는 아주 소소하고..

아미타불을 주불로 좌우 협시불은 관세음, 대세지보살.

 

 

 무량광전은 극락전이라고도 하며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신다.

 

 

       이 법고는 1983년에 제작되었는데 당시에 가장 큰 법고 였다고 한다.

      산행하는 산우님들이 이 법고를 두드리고 가지만 사찰에 있는 법고를 시도때도 없이 두드려도 되는 것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하지만 안내문에 누구나 이 법고를 북채를 가볍게 잡고 북 중앙을 세번 치라고 되어 있기에 치는 듯..

      마음속으로 소원을 기원한 뒤 세 번을 두드리면 성취가 된다고 하니 은수사를 지나는 산우님들은 꼭 쳐보시길...

 

 

천황문에서 암마이봉 정상과 천황문에서 물탕골 정상까지 2개노선은 2014년 10월까지 자연휴시년제가 실시되고 있다.

이제 2년 남았으니 정상이 열리는 날 다시 갈 일이 또 생겼다.

 

 

숫마이산 중턱에 있는 화엄굴은 낙석으로 폐쇄되어있다.

조만간 복구후 다시 열린다고 하니 2년후 이곳도 둘러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샘은 마이산 너머 용담댐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마이산을 중심으로 섬진강과 금강으로 물이 나뉘니 예전엔 두 강의 발원지라고 부를법도 하다.

 

 

북부주차장에서 은수사와 탑사를 거쳐 금당사로 너머가는 곳에도 매표소가 있다.

금당사는 조계종이고 은수사와 탑사는 태고종이건만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하는 것에는 한 마음인 것이 이채롭다.

매표소밖에도 마이사라는 소찰이 있지만 문화재관람료의 혜택은 거기까지는 가지 않을 듯.

 

 

표고버섯이 잘 자라고 있나 스마트폰을 울타리 넘겨 찍어보고..북부주차장에 도착하며 마이산 산행이 끝났다.

 

 

진안 IC를 빠져나오며 차창가로 잡힌 마이산을 보며 정말 말의 귀와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오행설(五行說)에 따라 이성계가 이씨로 목성(木性, 오얏나무며 목(木)이 들었다.)이고 마이산은 목(木)과 상극인 금(金)의 산이므로

금(金)이 왕성하면 목성인 李씨가 해(害)를 받기 때문에 金을 묶어 두려고 이 산을 속금산(束金山)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아들은 산의 모양대로 마이산이라 불렀으니 이런 불효가 다 있나..^^

지 아비가 명명한 산을 고쳐불러 감히 조선 창업의 설화가 담긴 속금산을 마이산이라 불렀으니..ㅋㅋ

마이산은 봉우리 두개가 높이 솟아 있어 용출봉(湧出峰)이라고도 하고 신라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모양이 특이해서 예로부터 사계절 부르는 이름이 모두 달랐다.

봄엔 자욱한 안개사이로 솟아오른 봉우리가 마치 쌍돛대를 닮았다고 하여 돛대봉이라 하고, 여름엔 용머리 형상인 진안에 두 마이봉의

모습이 용뿔 같다고 하여 용각봉이라 하고, 가을에 단풍이 들면 산의 색깔이 말귀와 같다하여 마이봉, 겨울엔 봉우리에 눈이 쌓이지

않아 마치 먹물 찍은 붓끝 같다 해서 문필봉, 또는 바위투성이라 개골산 등 철따라 이름을 바꿔서 불렀다고 한다.

 

진안 마이산에 가면서 비 때문에 오두막2를 가져가지 않은 것이 엄청 후회된다.

지금이라도 이 비 그치면 다시 오두막을 가지고 진안마이산까지 날라갈까?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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