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의병길, 420년전 함성을 듣다. /광주견문록Ⅲ

2013. 6. 27. 09:00한국의 산 견문록/무등산

광주견문록Ⅲ

광주 삼충신(三忠臣)을 찾아서

1.충장공 김덕령 

무등산 의병길, 420년 전 함성을 듣다. 

         


 

 

프롤로그

 

광주는 예향(禮鄕)의 도시이지만 의향(義鄕)의 도시이기도 한다.

이 고장의 사대부와 민초들은 임금을 모시는데 충을 다하고 어른을 공경하는데 효를 다하다가도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거나 의롭지 않은 일이 발생할 때는 분연히 일어나 국가의 안위와 민중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그 효시가 바로 임진년(1592)으로 왜적이 삼천리 금수강산을 유린하고 있을 때 이 고장의 수 많은 문인과 사대부, 백성들은 국난을 극복하기위해 붓이나 호미 대신 칼과 창을 들고 자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맞서 싸웠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고경명과 김덕령장군이다. 그 맞섬은 장군들의 뒤를 이어 구한말까지 이곳은 항상 불의에 항거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의병을 모아 왜적과 항전하던 대표적인 곳으로 만들었으며, 그 정신은 동학과 광주학생독립운동과 한국전쟁, 4.19의거에 이어 광주시민의 안위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5.18광주민주화운동까지 이어진 것이다.

 

전상의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은 아니지만 선조대의 무인으로 1617년 (광해군 9)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포로 150여 명을 송환해 왔으며,1618년 종3품인 어모대장까지 올랐다가 인조반정 때 외직으로 밀려난 뒤 변방의 최전선에서 근무하다 1627년 정묘호란때 안주성에서 청군의 남하를 5일간 막아내며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었다.

 

광주 3충신이란 1879년에 간행된 광주읍지(光州邑誌)기록에 의하면 광주의 역사에 남는 의로운 충신 14인 가운데 3인이 나라에서 정려를 받았는데, 그 3인이 바로 위에서 열거한 고경명, 김덕령, 전상의 장군으로 이 세 분을 광주 3충신이라 부른다.

그래서 광주문화관광 탐험대에서는 광주를 빛낸 3충신의 행적을 찾아 외지인의 광주탐방서 '광주견문록Ⅲ'에 광주3충신 시리즈를 소개하기로 하고 그 기초조사의 일환으로 이번 탐방길에 나서게 되었으며 탐방주제 '광주 삼충신(三忠臣)을 찾아서' '1편 김덕령 장군의 행적을 찾아 떠난 여행' 의 일환으로 지난 번 담양 추월산 보리암에 있는 흥양이씨 순절비 탐방에 이어 김덕령 장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무등산 의병들의 발자취를 따라 명명된 무등산 의병길 탐방에 나섰다. 계속해서 무등산 곳곳에 있는 김덕령장군의 전설이 깃든 곳을 탐방하고, 사당인 광주 충장사와 충효리 생가와 정려비각, 김덕령 장군이 공부했던 환벽당과 자신의 억울함을 권필의 꿈에 술취한 채로 나타나 하소연했던 취가정등을 탐방할 예정이다.

 

'광주 삼충신(三忠臣)을 찾아서' 는 1편 김덕령 장군의 행적을 찾아 떠난 여행, 2편 고경명 장군의 행적을 찾아 떠난 여행, 3편 전상의 장군의 행적을 찾아 떠난 여행 등 3편으로 나뉘며, 각 편 마다 3충신들의 생가와 묘소, 사당과 제실, 유적지 등의 탐방과 더불어 그분들의 가족사까지 모두 포스팅할 예정이며 순서에 관계없이 탐방 순서에 따라 포스팅할 예정으로 이번 탐방은 5월17일 부터 시작하여 9월 하순까지 '고경명의 유서석록' 따라 떠난 무등산 여행과 같이 진행될 예정이며 훗날 광주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광주견문록 Ⅲ'라는 책자로도 일부가 소개될 예정이다. 

 

 

광주3충신 중 한 사람인 김덕령 장군은 무등산과 따로 떼어서 말 할 수 없는 인물이다.

태어난 곳이 무등산 북쪽 산자락인 지금의 충효동이며, 어렸을 때 부터 임진왜란 의병장이 되어 전투에 참전할 때 까지 수도 없이 올라다녔던 무등산 곳곳에는 김덕령장군과 관련된 전설과 유물이 많다.

그것들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1.충장사옆 이치장군대(梨峙將軍臺)설화 2.원효계곡의 치마바위 3.금곡동의 시검바위 4.지왕봉의 뜀바위 5.중봉 삼밭실 6.말바우 시장의 말바우 7.의상봉의 비마족바위 등이 있는데 광주3충신을 찾아서 김덕령편을 이야기하면서 해당되는 장소가 나오면 그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한다.

 

 

오늘 갈 곳은 무등산 의병길로 임진왜란 당시 무등산 옛길2구간에 있는 주검동 제철유적지에서 나온 철로 칼과 창을 만든다음 사당소에서 식히고 단련한 뒤 왜적과 맞서 싸우는 의병들에게 무기를 공급했던 그 길을 말한다.

풍암제입구에서 제철유적지까지는 3.5km로 편도 1시간 30분이 걸리며 무등산 옛길2구간과 합류하여 무등산 서석대까지 산행도 할 수 있다. 풍암제입구까지는 승용차가 들어가며 돌아올 때는 원효사지구에서 버스를 타고 풍암정에서 하차한 다음 약900m정도를 다시 걸어오면 된다. 승용차가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산수동5거리에서 충효187번(배차간격60분)을 타고 금곡동 분청사기 전시관에서 내려 그곳에서 부터 의병길을 시작하면 되고 마찬가지로 돌아갈 때는 원효사지구에서 1187번(배차간격25분)을 타고 광주시내로 나가면 된다.

 

 

풍암제 입구부터 제철유적지까지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길이다.

가는 길에 중요포인트는 김덕령장군의 동생 김덕보의 풍암정사, 김덕령장군 누이의 전설이 있는 치마바위, 제철유적지에서 만든 창과 칼을 식히고 단련한 사당소, 의병들이 전투의 피로를 풀었다는 원효폭포 등이 있다.

 

 

 

풍암제에서 단풍나무 터널길로 300m를 걸어가면 좌측 솔숲아래 정자가 하나 보인다.

그곳이 바로 풍암정사로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비통해 한 아우 김덕보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한 곳이다.

 

 

 

 

충장공 김덕룡장군(1567~1596)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형 김덕흥과 같이 고경명 의병대에 참여했다가 노모의 봉양을 책임지고 귀가하였다. 그 후 어머니를 여의고 큰 형 김덕흥이 고경명, 안영 등과 함께 충남 금산전투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종형인 해광(海狂) 송제민의 권유와 장성현령 이귀의 천거와 전라감사의 인정을 받아 각진에 격문을 발하고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선조로 부터 충용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충장공은 권율원수의 지휘하에 진주, 고성 등지에서 왜병을 공격하였고 거제도를 공격하는 등 의병을 이끌었으며. 그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고문을 받다 29살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이에 충장공의 아우 김덕보(1571~1627)는 형의 억울한 옥사를 슬퍼한 나머지 이곳에 풍암정사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에 힘쓰고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후 여러번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후진 교육과 명현 시인들과 교유하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형제들의 애국충절의 피는 결코 속일 수 없었고, 의로움에 있어서는 은둔생활도 사치였다.

결국 김덕보는 정묘호란 때 안방준(1573~1654)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병으로 거동을 못하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풍암정사(楓巖精舍)

김덕보 스스로 호를 풍암이라 하고 '처마 끝에 해 비치니 삼동에 다숩고 정자가 물가에 임했으니 삼복더위에 서늘하다'라고 노래했다고 하니 여름철 물놀이 처로는 딱일 것 같지만 김덕보 가(家)의 애국충혼의 마음을 안다면 삼복더위에 물놀이을 하더라도 예는 갖추고 해야 할 것이다. 이곳은 풍류를 즐기고자 세운 정자가 아니고 형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세상을 피해 은둔의 길로 들어서다 결국 그 자신도 애국의 길에서 세상을 등진 슬픔가득한 정자이기에...

 

풍암정사는 1614년에 쓰여진 정홍명의 풍암기에 소개되기에 그 전에 이미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충장공이 1596년에 누명으로 옥사하였으므로 그의 죽음을 슬퍼한 김덕보가 세운 풍암정사 역시 1600년 이전에 세우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400년도 넘은 문화유산인 셈이다.(광주 문화재 자료15호)김덕보는 사후 앞서 전사하고 옥사한 두 형과 더불어 의열사(義烈祠)에 추배(追配)되었다.

 

 

楓巖精舍(광주광역시문화재자료 제15호)

풍암정사는 일반적인 정자와는 의미가 다르다. '정자'가 자연과 친화하며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라면, '精舍'는 심신을 수련하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강하고 김덕보가 이곳에서 은둔하면서 심신을 수련한 곳이기에 그 뜻을 새겨봐야 하는 곳이다.

 

楓巖 金德普

晩結楓崖屋數間 늙으막에 단풍나무 우거진 벼랑에다 두어 간 정자를 짓노라.

巖前樹竹後重巒 바위앞에는 우거진 대밭 뒤엔 첩첩 산중.

向陽 爽三冬暖 양지바른 이 정자 삼동에도 따뜻하고 삼복에도 서늘하구나

臨水高臺九夏寒 물가의 높은 대(臺)는 한더위에도 춥구나.

靈藥每從仙儷 불로초는 일찍이 신선들이 캐었고

好書時借野人看 좋은 책은 모두 야인들이 빌어다 본다.

棲身別有安間地 이곳은 내가 깊이 안식할 곳이니

何用蓬壺海外山 신선 사는 바다와 산이 내게 무슨 소용있나

 

 자료출처 : 광주호 주변 무등산권 문화유산 기초조사 보고서, 광주광역시 북구

 

송강 정철의 네째 아들 畸菴 鄭弘溟(1582~1650)이 쓴 <풍암기>에는 바위 주변에 단풍나무 백여 그루가 있어서 "가을이면 서리 맞은 단풍이 물 위를 비추어 물빛이 단풍빛이고 단풍빛이 물빛"이었다고 하니, 현대에 이르러 분청사기 전시관에서 풍암정사까지 오는 길은 온통 단풍나무 길로 만들어 놓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楓 巖 記

서석산은 웅장하여 호남에서 으뜸간다고 한다. 그 까닭은 기이한 수석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남쪽에 사인암(사인암)이 있는데 기기괴괴한 돌이 많이 있고 그 아래 절이 있다. 이 절은 가파른 언덕과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솟아 있어 찾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내가 호남에 살면서 오랫동안 각기를 앓았다. 그래서 이 좋은 경치를 십분의 이삼 정도로 구경하지 못하여 무척 한스럽게 생각하던 차 금년 겨울에 우연히 대수롭지 않은 병에 걸리어 산방에 들어가서 조섭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풀려 하였으나 산에 오르기가 어려울 듯하여 주저하였더니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풍암이 여기에서 얼마되지 않으며 거기에 오두막집 한 채가 있어 머물며 요양할 만하다고 권하였다. 내가 무척 기뻐서 곧 말을 달려 그 집에 이르러 보니 과연 한갓지고 고요하면서도 아취가 있었다. 언제나 밥만 먹고 나면 같이 지내는 두세 벗끼리 바위 아래를 거닐면서 여기가 어째서 이렇게 이름이 높은지를 알아 보기도 하였다.이 바위를 끼고 위아래로 단풍나무 백여 그루가 자라 있는데 이것이 시내못을 삥 둘러 물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가을이 한창인 때에는 서리맞은 고운 단풍잎이 물 위를 비추어 물빛이 단풍이고 단풍빛이 물빛이다. 그 위로 시냇물은 솟구쳐 흐르는데 기암괴석까지 곁들이어 있다. 흐르는 물이 바위 사이를 돌고 돌아 폭포가 되어 떨어지니 그 소리는 천둥소리 같았다. 장마 때에 물이 불어나면 바위를 치고 내리지르는 물소리가 사람의 귀를 막아서 가까이서 하는 말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여름철에는 이곳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 드물다.내가 이곳에 온 때는 마침 겨울철이라 물은 줄고 바위의 모습은 그대로 드러나서 자연 그대로의 맛을 만끽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 몇걸음 가면 시내에 징검다리를 건너게 되고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 위에 서 있는데 높이가 한 길쯤 됨직하고 그 뿌리가 가로로 노출되어 있어 목침삼아 눕기가 제격이다.

가지는 뻗어 수면을 덮었고 바위는 판판하고 넓어서 십여명의 사람이 앉고도 남을 만하다. 그 아래 괸물은 못이 되어 물고기도 낚을 만한데 아래로 갈수록 물은 더욱 맑고 돌들은 더욱 기이하다. 높이 솟아서 이마가 벗어진 것 같은 놈, 웅장하게 서 있는 놈, 뾰쪽하고 날카로와 까마득하게 솟은 놈, 의자같이 생긴 바위, 소반같이 생긴 바위, 움푹하게 파인 바위, 바둑판처럼 너른 바위등 천태만상이다. 물가의 모래는 비단처럼 곱고, 나무 그늘은 땀들이기에 알맞다. 경치도 갖가지고 모양새도 가지가지이다.이 경치에 취하면 저 쪽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곳에 미쳐서 옛것은 놓치기 알맞다. 이 경치를 어찌 한 마디로 그려 낼 수 있을까 보냐. 집을 새로 지은 까닭으로 이름을 짓지 못한 채 두세 사람의 벗과 이 좋은 경치를 마음껏 즐기고 떠나려고 생각하니 정말 시원섭섭하였다. 여기서 십여일을 묵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경치에 취하였고 나가 놀다 보면 또 새로운 풍치를 발견하였다.

어! 참 좋기도 하구나. 이 경치에, 이보다 더한 데가 어디에 있겠는가?내가 서석산에 있으면서도 승경을 찾아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풍암에 가서 차차 산허리까지 위로 올라가서 유명하다는 절에 한두 차례 가 보았다.하나 수석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좋은 곳이 동네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있는 줄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으니 옛날에 미처 몰랐던 것을 이제야 알았다고나 할까?

정말 우연한 일이 아니고 또 그럴만한 때를 만나야 하는가 보다. 이 좋은 승경을 안 뒤에 조그마한 집을 지은 사람이 광주의 김 자룡이다. 젊어서 속된 세상을 등지고 때 맞추어 이곳에 와서 근심 걱정 다 버리고 이 집을 지었다니 그 사람됨을 가히 알 만하다.이글을 짓는 사람은 내가 스스로 기와산인이라 호하였다.

 

(기암 정홍명 짓노라.) 자료출처 :  광주호 주변 무등산권 문화유산 기초조사 보고서, 광주광역시 북구

 

풍암정사에는 정홍명(鄭弘溟)이 쓴 풍암기(楓巖記)말고도 임억령, 고경명, 안방준, 정홍명, 김덕보 등의 제영(題詠)을 새긴 판각들이

걸려있어 다양한 시인 묵개들과 교류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齊峯 高敬命의 <次楓巖亭韻> 현판도 걸려있다.

 

木益蒼蒼石益奇 나무는 창창하고 돌은 기기 하도다

 

洞天無地不幽姿 이 동천이야 말로 유수(幽邃)하도다.

 

偶來梅影橫斜處 매화꽃 그림자 빗긴 곳 찾아가

 

看銀河倒掛時 은하수같은 폭포를 한가히 보고 있네

 

 

자료출처: 광주호 주변 무등산권 문화유산 기초조사 보고서, 광주광역시 북구

 

 

 

 

 

 

풍암정사뒤쪽으로는 커다란 바위에서 제를 지낸 흔적들이 있다.

무등산 자락은 모두가 신령스럽기에 굿을 벌인 흔적들이 이렇게 도처에 깔려있다.

 

 

집채보다 더 큰 두꺼비바위에 풍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원효계곡쪽으로 휜 노송 한 그루가 쓸쓸하게 서 있는 곳.

 

 

풍암정사에는 광주북구문화원의 문화재지킴이 어른신들 10여명이 풍암정사 주변의 잡풀도 뽑고, 가지치기도 하며, 풍암정사 이곳저곳을

닦고 문지르고 계셨다. 풍암정사 뒷편의 굿터도 말끔히 치워버리고, 상수도 보호구역인 이곳에서 취사행위도 제재 한다고 한다.

문화재지킴이는 풍암정사 뿐만 아니라 광주 북구 소재의 각종 문화재들을 돌아가며 보호하고 있다 하니 노인 일자리 창출과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원효계곡의 시린 물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

지금이야 길이 뻥 뚫려 쉽게 접근이 되지만 김덕보가 은둔한 시기에는 인적이 끊긴 무등산 자락 아주 깊은 곳이었을 것이다.

 

 

풍암정사 가는 방법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문흥IC에서 담양방면, 담양에서 고서방면,고서에서 담양댐 방면.

             광주시에서는 산수동 오거리에서 무등산방면, 충장사에서 담양방면으로 가다 금곡동 분청사기전시관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1km정도 가면 됨

버스   : 1187번으로 충장사(남)에서 하차, 충효187번은 충장사(북), 충효동 환벽당에서 하차

걷기코스 : 충장사에서 하차하여 옛길 3구간(역사길)을 따라 풍암정사 - 환벽당 까지 간 다음 담양 가사문화권을 탐방하면 된다. 

 

 

무등산 지진관측소는 대단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지진관측이 잘 되는 유일한 곳으로 우리나라 초광대역지진계는 무등산관측소 한 개소이며 지구 반대편의 지진까지

관측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장소라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까지 24시간 관측하며 실시간으로 기상청에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니

지금 내 발자국 소리는 기상청 컴퓨터에 희미하게 나마 기록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면서도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 나무벤치가 나오는 길에서 무등산 옛길3구간(역사의 길)과 의병길이 나뉜다. 

제철유적지까지 갔다가 되돌아 올때 원효사지구에서 버스를 타고 풍암정사에서 내리면 바로 이 길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곳에는 글의 후미에 나오지만 환벽당의 주인 사촌 김윤제의 재실이 있는 곳이기도 한다.

 

 

의병길에서 만난 편백숲.

 

 

 

전혀 힘든 구간이 없기에 운동화 차림으로도 갈 수 있는 길이다.

 

 

 

한 여름이면 저 물에 풍덩하고 싶지만.. 

원효계곡은 상수원보호구역이다. 원효계곡의 물은 풍암제로 흘러든 다음 그곳에서 다시 광주댐으로 흘러들어 광주시민들의 상수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 이정표가 나오는 곳에서 원효계곡을 가로지르면 안양암(폐찰)을 가는 길이 나온다.

그곳으로 해서 윤필봉, 투구봉으로 올라 의상봉까지 연계산행을 할 수도 있다.

 

 

이정표 너머로 캄캄한 곳이 바로 사당소이다.

 

 

대 낮에도 캄캄할 정도로 자그만 협곡을 이루고 있으며 물이 깊어 금새 이무기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곳이다. 

제철유적지에서 만든 칼과 창을 이곳까지 가져와 물에 담금질하고 단련하는 등 작업을 했다고 한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800m정도 가야 하지만 인적이 뜸한 곳이라 걷기에 고즈넉하다.

 

 

아마도 무등산 공원화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다리 건너에 있었던 수 많은 음식점과 상가들은 다른 곳으로 옮겼을 듯..

 

 

하지만 다리 모양이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같기도 하여 안쪽을 살펴보았지만 앙끗도 없더라는 것..ㅋ

 

 

 

1960년대 초에 세원진 도수교를 지나...

 

 

무등산장과 원효사지구로 갈리는 길이 나왔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무등산장, 규봉암으로 갈 수 있고 우측으로 가면 의병길과 원효사지구로 갈 수 있다.

 

 

원효사 지구 상가가 보이면 의병길은 좌측으로 간다. 이곳에는 이정표가 없다.

 

 

이제 종점인 제철유적지가 400m남았다.

 

 

이정표 없는 삼거리가 나오면 우측 의병길로 가야 한다. 

왼쪽으로 가면 떨어지는 폭포물에 의병들의 신경통과 잔병을 치료했다는 원효계곡 원표폭포가 나온다.

 

 

 

제철유적지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장군이 무기를 만들었던 주검동으로 주검동은 이곳에서 부터 옛길2구간의 주검동 바위까지 이다.

무등산 의병길은 제철유적지에서 끝나지만 조금만 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주검동 바위까지 보고 오는 것이 좋다.

 

 

멀리 무등산 누에봉이 보이고...

 

조금만 더 오르면 주검동 유적지가 나온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장군이 칼고 창을 만든 곳으로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제공하고 무술을 연마하고 수련했던 곳이다.

충장이란 시호를 쓴 것으로 보아 시호를 받은 1788년 이후 김덕령 장군의 활약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그가 활동한 이곳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이곳까지가 무등산 의병길이다.

여기서 처음 출발지로 돌아가려면 무등산 옛길2구간을 따라 원효사지구로 내려간 다음 1187번 버스를 타고 2번째 정거장인 풍암정에서 내리면 된다.

 

 

원효사지구에서 1187번 버스를 타고 충장사 못 가서 풍암정에서 하차하였다.

 

 

이곳은 무등산 옛길3구간 역사의 길이 지나는 곳으로 버스정류장에서 600m만 내려가면 풍암정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300m정도 내려가면 환벽당의 주인 사촌 김윤제의 제실을 볼 수 있다.

 

 

 

사촌 김윤제의 재실 귀후재(歸厚齋) 

김윤제는 김덕령 장군의 종조부로 덕령,덕보 형제는 어렸을 때 부터 김윤제를 스승으로 모시고 환벽당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사촌 김윤제 재실 귀후재

 

 

재실과 살림집이 같이 있다.

 

 

돌 계단 위가 재실

 

 

 

 

사촌 김윤제의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원래 재실이 있던 자리에 근세에 들어 다시 지은 듯..

 

 

재실을 나와 조금만 아래로 내려오면 아침에 봤던 갈림길이 나오면 좌측기을 타고 풍암정사를 지나 풍암제에 도착하면 

무등산 의병길 탐방은 끝나는 셈이다.

 

 

아침에 왔을 때만 해도 나 혼자 였는데 오후4시가 다 되어 도착하니 풍암제 주변은 온통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의병길을 나처럼 걸어 제철유적지까지 다녀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김덕령장군의 동생 김덕보가 은거했던 풍암정사로 나들이를 간 가족단위 소풍객도 많을 것이다. 목적이 문화탐방이든 원효계곡에 발 담그고 소풍을 즐기던 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풍암정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우리고장이 낳은 임진왜란의 위대한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흔적을 찾아보는 일이기에 고성방가 음주가무는 자제했으면 한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트위터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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