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8. 06:30ㆍ전라남도 견문록/담양 견문록
여러분은 지금 일기를 쓰고 계십니까?
초등학교 시절 방학숙제로 내준 일기와 그림일기 과제 이후 한 번도 안 쓰셨다고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기는 초등학교 시절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을 것인데요, 현대인들은 일기대신 업무일지에 빼곡하게 적은 그날의 일과가 곧 일기라고 강변하시는 분들의 의외로 많습니다.
기자도 군대시절 행정병으로 근무하면서 업무일지를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매년 한 권씩의 업무일지를 쓰고 있는데요, 책장 한 면을 가득 매운 손때 가득한 업무일지를 가끔 들쳐보면 30년 전 희미했던 기억까지도 고스란히 생각난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업무내용일 뿐 그날 어떤 감정으로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올해들어 업무일지 한쪽에 조그맣게 메모란을 만들어 하루의 반성과 생각을 적어보기로 했는데요, 며칠 하다 관두고 말았답니다.
사실 총성 없는 전쟁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삶의 반성과 내일의 계획 등을 잔잔한 수필형식으로 쓰는 일기는 사치일 수도 있는데요, 오늘은 여러분께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인 1567년부터 10년간 관직생활, 학문, 아내 송 씨에 대한 애틋한 마음, 말다툼과 농담을 주고받은 편지 등 정사에서 신변잡기에 이르는 잡다한 이야기까지 일기로 남긴 조선시대 학자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물 제260호 미암일기
미암일기는 미암이 64세로 사망하기 전까지 11년간의 기록이지만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풍속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각 관서의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생활, 부부간의 사사로운 연서까지 기록하다보니 임진왜란 당시 선조 25년 이전의 기록인 승정원일기가 다 타고 없어져버려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이이의 「경연일기」와 더불어 「선조실록」의 기본사료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얼마나 꼼꼼하게 적었으면 조정에서도 알아봤을까요? 그런데 그 일기가 현대에 이르러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데요, 바로 부부간의 사랑이야기때문입니다.
때론 싸우고 때론 존경하고 때론 사랑하는 내용이 담긴 미암과 부인송덕봉 간의 밀고 밀리는 사랑편지 이야기.
그 미암일기를 찾으러 담양 대덕 장산리 노루골 마을로 떠나볼까요?
▲미암일기가 보관되었던 모현관
여러분은 전남 담양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소쇄원, 식영정 등 가사 문학권의 정자와 송강 정철 같은 문인들, 그리고 대나무 숲 죽녹원과 영산강을 따라 쭉 늘어선 관방제림. 설명이 필요 없는 메타세퀘이아 가로수 길과 천년의 역사를 가진 금성산성, 슬로시티 창평과 100대 명산 추월산, 담양딸기와 블루베리 등 바로 백열전구처럼 떠오르는 것만 해도 열 가지는 됩니다.
그런데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와 미암박물관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잘 모릅니다.
기자는 2012년 봄, 사진출사 차 찾은 이후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요, 미암일기가 보관되었던 모현관(慕賢館)옆에는 미암박물관과 근사한 미술관도 있었습니다.
대덕면과 무정면을 가로지른 금산(496.8m) 비탈진 계곡아래 위치한 대덕면 장산리 노루골 마을은 정월 대보름날 500살 된 느티나무 3그루에 당산제를 지내는 풍습을 몇 백 년째 쉬지 않고 이어오는 곳인데요, 400살 된 분홍겹홍매화도 있어 사진작가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출사지입니다.
주로 정월대보름 당산제때, 분홍겹홍매화필때, 모현각에 연꽃필때 쯤 많이 찾는데요, 최근 개관한 미암박물관까지 둘러볼 수 있어 요즘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최신 여행지입니다.
▲보물 제260호 미암일기가 보관된 미암박물관
연못위에 있는 모현관을 보기 전에 미암박물관부터 보는데요, 박물관은 준공된지 꽤 오래되었지만, 콘텐츠미비와 소유권 분쟁 등으로 얽히고 섥혀 왔어도 못 본 사람이 많았는데 최근 개관해 이제는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10시부터 17시까지 자유롭게 볼 수 가 있습니다. (예약관람 010-2620-3456)
미암일기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선조 즉위년인 1567년 10월 1일부터 1577년(선조10년) 5월 31일까지 약 10년 동안 조정의 공적인 사무뿐만 아니라 개인사와 주변의 일, 그리고 상부에 내는 보고서 등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한 일기인데요,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방대한 것으로 본래 14책이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11책과 부록으로 그의 부인 송 씨의 시문과 잡록이라고 합니다.
▲미암박물관 내 체험관
이 책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조선사료총간으로 5권에 두주, 방주를 곁들여 간행되었으며 국보 401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목판본을 포함하여 일괄 보물 제206호로 지정되었는데 미암의 14대손인 고 유대수 씨가 가보로 간직하다 1959년 4월에 준공한 석조 건물 모현관에 보관했는데요, 새롭게 지은 미암박물관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박물관 내부
미암 유희춘은 선산 유씨로 1513년 12월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났는데요, 미암이란 호는 출생지인 해남의 미암산(금강산)의 미암바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향교 18현 중 한 명인 하서 김인후와 함께 모재 김안국의 문하생이 되어 학자의 길을 걸었는데요, 미암이 먼저 과거급제 후 성균관 조교로 있을 때 하서가 미암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하서가 전염병에 걸려 격리되었을 때 출입 금지된 집까지 찾아와 하서를 극진히 치료했다고 합니다. 그 뒤 미암이 을사사화로 제주도 유배 길에 오르자 서너 살 된 미암의 아들을 하서가 거두었으며 결국 미암의 아들은 하서의 사위가 되는 등 둘의 우정은 자식들의 인연까지 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해남출신인 미암이 왜 담양에 뿌리를 내렸을까요?
미암의 부인 송덕봉은 담양출신으로 16세기 남귀여가혼(男歸女家昏)이라는 혼인풍습에 의해 처가 쪽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요, 24세 때 결혼과 함께 관직에 오르면서 처가가 있는 담양에서 뿌리를 내린 것이라고 합니다.
송덕봉도 미암이 장기간 유배 중일 때 친정인 담양 대덕에 머물렀다고 하는데요, 훗날 여류문인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
미암의 관직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537년(중종 32년)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성균관, 춘추관, 기사관 등을 거쳐 1542년(중종 37년) 세자강원설서에 임명되었는데요, 1546년 을사사화로 파직당하고 이리에 칩거하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고향 해남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조선 최북단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돼 19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기약 없는 유배생활에도 미암은 밤낮으로 사색에 잠겨 저술활동을 하였고 교육에 힘써 변경지역 주민교화에 힘썼는데요, 1565년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을사사화 죄인들 사면복권이 이루어져 충청도 은진으로 옮겼다가 2년 후인 1567년 (선조1년) 삼정승의 상소로 해배되어 홍문관교리, 홍문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에 올랐으며, 이조참판을 마지막으로 1575년 담양으로 낙향했습니다.
▲만화로 보는 미암 유희춘
►壁書의 獄이란 1547년(명종2년) 경기도 양재역 벽에 '위로는 여주(문정왕후)가, 아래로는 간신(奸臣) 이기가 있어 나라가 망하려하는데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 라는 내용의 벽보 사건으로,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하는 명종 2년에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소윤을 비난하는 익명의 벽서가 붙자, 윤원형은 중종의 서자이자 윤임의 조카인 봉성군을 죽이고, 과거에 자신을 탄핵한 적이 있는 유희춘을 귀양 보낸다. 이 사건이 바로 일명 벽서의 옥(獄)이라 불리는 정미사화.
미암은 후진양성을 중시했던 도학에 비해 유학경서에 충실한 경학에 뿌리를 둔 관계로 후학 양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겼는데요, 실제로 낙향해 담양 대덕에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대신 미암은 해배된 1567년 10월부터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인 1577년 5월까지 10년간 일기를 썼는데요, 하루하루 일상을 빠짐없이 기록했다고 합니다. 누구와 편지를 주고받거나 또는 어떤 소식을 들어도 놓치지 않았으며 집안 살림살이는 물론 자신에게 흠이 되는 일도 소상하게 적었다고 하는데요, 심지어는 병들어 누웠을 때도 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이런 성품으로 보아 유배기간 중에도 일기를 썼을 것으로 추측하나 남아있는 기록은 없으며 미암일기 외에도 「속몽구 續蒙求」·「역대요록 歷代要錄」·「속휘변 續諱辨」·「천해록 川海錄」·「헌근록 獻芹錄·」「주자어류전해 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 詩書釋義」·「완심도 玩心圖」 등 저서가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 國朝儒先錄」이 있는데요, 외할아버지 최보(崔溥)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하서 등과 함께 호남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힙니다.
▲미암박물관 전시품
미암박물관을 나와 보물 제260호 미암일기를 보관했었던 모현관 둘레를 돌아봅니다.
연꽃이 피지 않아 연잎만 무성하지만 만개했을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아름다운 석조건물 모현관과 더불어
연꽃을 보지 않았음에도 본듯합니다.
연지(蓮池)라 불리는 연못에는 물고기가 유유자적 헤엄치고 연잎은 새벽이슬을 잔뜩 머금고 있습니다.
모현관은 오랫동안 미암사당에 보관되었던 미암일기를 제대로 보존하기위해 전라남도와 선산 유 씨 문중이 돈을 모아 1959년 지었는데요, 화순에서 소달구지로 화강암을 실어 와 광주의 유명 석공을 모셔 돌을 다듬었으며 ‘慕賢館’(모현관)이란 글씨는 남종 문인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이 썼다고 합니다.
모현관을 굽어보는 곳에 연계정인데요, 미암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전해집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정자인데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후학들이 중건하였습니다.
3년 전 왔을때만도 옛모습 그대로 중간중간 지지대를 설치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는데, 오늘 와서 보니
나무 향 물씬 풍긴 새 건물이 되었더군요.(위의 사진은 옛 연계정)
모현관 인근엔 장산미술관도 있는데요, 카페를 겸한 곳입니다.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미술전시회도 가끔 열린다고 합니다.
미암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참 단아하게 생겼습니다.
400여년 전 미암과 부인 송덕봉이 살던 집터에 30여년 전 후손들이 새로 집을 짓고 사당을 모시고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갓집 다운 면모는 없지만, 미암의 14대 종부 남금례 여사(86)와 15대 종손 류근오 님이 현재 살고 있으며, 둘째 아들인 류근영 님은 미암박물관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낯선 이의 방문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개로 인해 한 동안 실갱이를 펼쳐야 했는데요, '미암 사당을 보러 왔어요' 했더니 신기하게도 짖기를 멈추더군요^^
3년 전 방문했을 때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땐 14대 종부를 못 뵈었지만, 이번에는 뵙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꽤 널지 막 한 연못도 있습니다.
시도 민속문화재 제 36호인 미당사당은 전체적으로 관리가 잘 되어 있는데요, 담장위로 빨간 능소화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봄에 오면 홍매도 볼 수 있는데요, 근처에는 400살 된 매화나무도 있으니 내년 봄에 꼭 가보시길 권합니다.
옆지기가 미암의 14대 종부 남혜남 여사와 능소화를 보고 있는데요,
능소화가 사람의 눈에 해롭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최근 뉴스에서 사실무근임이 밝혀져 올해도 능소화를 제대로 감상하고 있다고
기뻐하십니다.
미암사당은 2001년 지방민속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는데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 형태입니다.
1608년 처음 지었졌다고 하는데, 건축연대를 알 수 있는 상량문은 없으나 나중에 기와를 교체하면서 명문이 있는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추월산 진경사에서 1608년 만든 기와임이 확인돼 건축연대를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면 400년도 넘은 건물인데요.^^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란 책을 보면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 주는데요, 고전문학 연구자이자 고려대 교양교직부 초빙교수인 정창권씨가 미암일기를 쉽게 풀어쓴 책입니다.
미암은 일기를 쓰면서 일기가 먼 훗날 세상에 공개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은 듯합니다.
부부간에 주고 받은 사사로운 내용까지 일기로 남겼는데요, 미암이 홀로 한양에서 지내며 일체 여색을 멀리하고 있음을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알라'고 은근히 자랑하자, 부인 송덕봉은 '나이가 60이 가까우니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건강이 좋아지는 것이지 자신에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은 아니다'라고 핀잔을 준 내용까지도 남겼다고 합니다.
기자도 옆지기와 연애시절 한 번에 6~7장을 쓴 편지를 하루에 한 통씩 3개월을 보낸 적이 있는데, 처음엔 괜찮았지만 횟수가 더해질 수록 소재가 빈곤해 신변잡기에 자질구레한 내용까지 모두 써서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30여 년을 같이 살다보니 미암과 같은 10년 열정은 사라졌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시 손편지에 사랑을 담아 옆지기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시길 권합니다. 사랑이 별겁니까? 어느날 갑자기 날아온 남편, 부인의 손편지 하나가 바로 사랑의 완성이 될 것입니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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