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아 참배한 광주서구 학생독립운동기념탑

2018. 11. 5. 14:37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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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아 서구에 있는 학생독립운동기념탑을 참배했다.

필자는 광주에서 학교를 나오다보니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식이 열린 황금동 광주학생회관에 자주 갔었다.

당시 학생회관 앞 골목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넘쳐났고 그 학생들의 가난한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상추튀김 포장마차가 나래비 선 곳이다.

물론 학생회관에서는 영화도 상영했다. 도서관도 있어 여학생들과 심심치 않게 데이트도 즐긴 그야말로 학생들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건물이 1960년대 지었다 보니 낙후되고 기념식을 열기 부적합해 2005년 광주 서구에 최신식 건물을 짓고 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개관했다.



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크게 도서관과 기념관 등 두동의 건물로 나뉜다.

주차장에서 보는 건물을 기념회관으로 도서관이 있으며 성인문학강좌, 청소년강좌, 어린이강좌 등 평생교육의 장도 있다.




기념관은 기념회관 뒤쪽 학생독립운동기념탑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자료를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전시하는 공간이다.



또한, 역사에 대한 정리 및 연구가 이루어지고 참배실이 있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다 돌아가신 영령들의 얼과 혼을 기릴 수 있다.




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오르면서 내려다 본 광주 서구 화정동의 모습이다.



광주효광중학교가 보이고 그 너머는 상무동. 뒤로 아스라히 보이는 산은 장성 불태산이다.




학생독립운동기념탑을 마주한다.

여기까지 오르는데 계단이 113개이다.

11월 3일이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의미이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광주중학교 후쿠다 슈조 등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고보 3학년 생인 박기옥 등을 희롱하자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춘채 등과 싸움이 벌어졌고 이 싸움은 결국 통학열차 안에 있던 광주고보(지금의 광주일고)생까지 합류한 패싸움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일본인 학생 편에 서서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광주고보 학생들이 11월 3일 광주에서 가두시위를 벌인 것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이다.




11월 3일은 일본왕의 생일이었고, 광주에서는 전남 누에고치 6백만 석 돌파 축하회도 열려 학생 등 많은 사람이 광주행사에 모였다. 일본왕의 생일 축하행사를 마치고 광주고보 학생들이 항의시위를 벌였고 나주 사건을 편파보도한 광주일보사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 항의가 본격화 되었다.

이후 신사참배를 마치고 귀교하던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과 광주고보 학생들이 집단충돌했는데, 일제는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시위참석 학생 수십명을 구금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신간회와 조선청년동맹, 학생전위동맹 등에서 조사단을 파견했고 광주지역 학생비밀결사인 성진회 등은 학생시위를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전개하기로 계획했으며 마침내 11월 11일 저녁 격문을 살포한 뒤 11월 12일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등의 학생들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 시위로 수백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목포, 나주 등 학생시위운동으로 퍼져갔고, 12월과 이듬해 1월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학산되었다.


서울에서의 시위는 12월 2일 격문을 살포했고, 12월 5일 경복고의 동맹휴교를 시작으로 경기고, 중동, 경신, 보성, 중앙, 휘문, 배재, 이화, 동덕, 협성실업 등의 학교까지 동맹휴교가 잇따랐는데, 13일까지 1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해 1,400여 명의 학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학생 시위는 1930년 3월 초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개성, 부산, 진주, 청주, 공주, 대전, 홍성, 예산, 조치원, 부여, 전주, 정읍, 고창, 이리, 평양, 신의주, 정주, 선천, 영변, 함흥, 원산, 경성, 회령, 청진, 대구, 춘천, 해주, 사리원 등에서 동맹휴교와 학생 시위운동이 이어졌다.








▲기념탑은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다.

지금까지 본 기념탑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지만, 학생독립운동기념탑은 기념탑과 참배객이 하나로 호흡할 수 있게 했다.


조선의 학생 독립운동은 만주나 일본의 조선인 학교와 유학생의 시위운동으로 이어졌고 중국, 미국, 연해주 등지에서도 학생 시위에 연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기록에 의하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모두 194개 학교, 참여한 학생은 5만 4천여 명에 이르렀다는데, 당시 전국적으로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재학한 학생 수가 8만 9천여명이었으니 60% 정도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들불처럼 퍼진 학생시위운동으로 전국에서 1,600여명이 구속되었고, 580여 명의 학생이 퇴학당했으며 2,330여 명이 무기정학을 받았다.








높이 39m로 하나의 구심점으로 군중이 집합하는 힘과 1929년 11월 3일 당시의 단결된 선열들의 의지를 상징화 했다.


이렇듯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에 이어 숨죽이고 살며 일제의 억압에 치를 떨던 학생과 시민들을 한데 모은 강력한 에너지가 되었는데, 1930년대 초반 노동자와 농민 등이 일제의 폭압에 맞서 대중운동을 펼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후 사회 각계각층의  대중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금은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광주정신.

광주정신은 바로 이렇게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권력에 맞선 시민 정신을 말하는데, 정유재란 의병장 고경명, 김덕령 등 호남 곳곳에서 분연히 일어난 의병운동, 구한말 일제에 맞선 의병운동, 3.1운동에 이은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 4.19운동, 군부독재정군에 맞선 시민저항운동인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시대에 따라 국란을 극복하고자 한 시민운동이 바로 광주정신이고 호남정신인 것이다

정의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항상 앞정 섰던 광주시민들의 광주정신!!!!

광주 서구에 있는 학생독립운동기념탑과 기념관에서 꼭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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