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기행)광한루원에서 춘향이와 몰래데이트(8편)

2011. 8. 28. 03:00전라북도 견문록/남원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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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광한루원..

춘향이와 몽룡이의 사랑이야기가 옴팡지게 담긴곳.

춘향이는 향단이와 더불어 맨날 맨날 몽룡이와 방자의 2대2 데이트를 즐기며 알콩달콩 사랑을 가꾸어 간 곳..

몽룡이가 얼마나 춘향이와의 만남을 원했는지 방자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춘향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굽신거린곳..

춘향전이란 한국 최고의 판소리가 태어난곳..

그 광한루원에서 둘만의 알콩달콩했던 사랑이야기가 담긴 광한루원으로 춘향이를 몰래 만나러 떠나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요약해보자.

   조선시대 숙종때 남원부사 자제 이몽룡은 남원부사로 임명되어 내려온 아버지를 따라 남원고을에 내려온 지 몇 달이 지났으나 책방에 갇혀

   공부만 해야하는 것에 실증과 짜증이 나던 참에 관청의 하인인 방자를 앞세우고 단오날 광한루 구경을 나선다.        

              

농악놀이가 펼쳐지는 단오날의 광한루에서는 씨름판도 벌어지고 그네터엔 처녀들의 그네놀이도 한창인데 그 무리속에서 해같기도 하고 달같기도 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한 몽룡은 그만 넋을 잃고만다.

퇴기 월매의 딸 춘향이라고 방자가 이르자 이몽룡은 당장 만나줄 것을 방자를 통해 뜻을 전하지만 춘향은 "안수해, 접수화, 해수혈"이라는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향단이와 함께 그네터를 떠나버린다.     

      

             안수해(雁隨海) 접수화(蝶隨花) 해수혈(蟹隨穴)..

안수해 : 기러기는 바다를 따르고, 접수화 : 나비는 꽃을 따르고, 해수혈 : 게는 굴을 따른다는 뜻으로,

직접 자신을 찾아오라는 춘향의 뜻을 알아챈 이몽룡은 야심한 밤을 틈타 춘향의 집을 방문한다.      

          

이몽룡은 월매에게 춘향과의 백년가약을 원한다는 뜻을 밝히고 불망기를 써서 자신의 마음이 영원히 변치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전날 밤, 연못에 잠긴 청룡의 꿈을 꾸었던 월매는 이 일을 길조로 믿고 쾌히 수락한다.   

      

그 밤으로 이루어진 몽룡과 춘향의 사랑은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격이어서 16세 아직 어린 것들이 서먹함도 부끄러움도 없이 순식간에 정신도

육체도 깊이 함몰되어 꿈결같은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몽룡의 아버지 이사또가 동부승지로 승진되어 한양으로 가게되니 이몽룡도 별 수 없이 부모따라 한양으로 가게 된다.   

     

 

그 후 여러 고을을 두루 거치며 호색한으로 소문난 변학도는 남원골 춘향이 절색이란 소문을 듣고 밀양, 서흥부사 등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굳이 남원부사로 임명받아 서둘러 부임한다.

정사는 뒷전이고 부임 삼일만에 부랴부랴 치뤄진 기생점고에 춘향이 빠져있자 동헌으로 춘향을 불러들인 변사또는 어미가 기생이면 종모법에 따라

딸인 너 또한 기생이라며 수청 들기를 강요한다.     

    

  비록 기생의 자식이나 명부에 올리지 않았음으로 기생일 수 없고 구관댁 도련님과 불망기를 보이며 백년가약을 받들기로 하였으니 이부종사는

  할 수 없다고 버틴다.

  화가 난  변사또는 춘향에게 거역관장 죄를 물어 동틀에 매달고 모진 고문을 가하지만 춘향은 절개를 굽히지 않는다.

    

     광한루는 1419년에 황희가 광통루를 세우면서 건설을 시작했고 1434년에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했으며 1437년 남원부사 유지례가 단청을

입혔고 1444년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광한루로 개칭했다. 1582년 남원부사 장의국이 오작교를 축조했도 전라관찰서 송강정철이 호수를 만들고

3개의 섬을 만들어 동쪽의 방장섬에 배롱나무를 중앙의 봉래섬에 푸른대나무를 서쪽 오작교옆의 영주섬에는 연정을 세웠고 호수에는 연꽃을 가득

심었다 한다. 1597년 정유재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599년 남원부사 원신이 광한루를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한편, 이몽룡은 부지런히 공부해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암행어사로 임병받아 전라도로 내려온다.

      남원 근방에 이르러 민심을 탐문하던 중에 변학도의 폭정과 춘향의 높은 절개에 칭찬이 자자함을 알게 된다.        

    

           걸인 차림으로 이몽룡은 옥방의 춘향을 만나고 춘향은 이몽룡을 향해 변함없이 뜨거운 사랑을 보낸다.

           이몽룡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돌아서며 분노에 치를 떤다.

     

      이 자라모양의 돌은 자랏돌로 '동해 대오 배부 삼신산(東海 大鰲 背負 三神山)'이라 하여 동해에 살고있는 큰 자라가 삼신산을 업고 있다 하여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즉 광한루원의 영주, 봉래, 방장은 동해에 살고 있는 엄청나게 큰 자라가 언제나 등에 업고 있다 하는 전설에 의해 광한루원에

          삼신산을 이룩하였고 삼신산에 자라가 없으면 구색이 맞지 아니하므로 광한루원을 창건 당시 마련 되어진 것이라 한다.

         

  다음날 광한루에서는 각읍수령들이 참석하여 남원부사 변학도의 생일잔치가 장대히 벌어진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암행어사 출두가 불어지고 이몽룡은 변학도를 봉고파출로 응징한다.

  몽룡과 춘향은 재회하고 동헌은 축제 분위기로 충만해진다.  여기까지가 춘향전의 주요 줄거리다.

 

오작교는 선조15년(1582)에 남원부사 장의국이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

           그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연지교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어린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처녀가 아닌 사람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광한루와 오작교는 전설과 사랑이 어우러져 있어, 춘향이가 단오날 그네를 뛰는 것을 광한루에 올라앉아 이도령이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것처럼 사랑하는 연인들의 다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출처:광한루 홈페이지)

 

춘향전의 이본(異本)인 남원고사(南原古詞)에서는 춘향이와 이몽룡의 끝마무리가 나오는데. 

이몽룡이 변부사를 봉고파출(封庫罷黜)해 감영에 보고하고 춘향과 월매, 향단을 먼저 한양으로 올려 보내고 그 뒤 서울에 올라와 왕을 뵈옵고

춘향과의 사실을 고한다.

이에 왕은 춘향에게 정렬부인(貞烈夫人)이라는 직첩을 내리고, 이몽룡은 양친에게 혼사의 뜻을 물은 다음 춘향과 육례(六禮)를 갖춘 혼사를 치른다.

그 뒤 이몽룡은 육경(六卿)의 벼슬을 하고 다섯 자녀를 두며 춘향과 화목한 평생을 보낸다라고 쓰여있다.

그 남원고사대로 라면 이몽룡과 춘향은 백년해로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가면 계서당이라는 춘향전의 실존인물의 집이 있다.

이몽룡의 본이름은 성이성(成以性1595~1664)이고 그의 부친이름 남원부사를 지낸 성안의(成安儀)이다.

인조5년(1627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진주부사 등 6개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4차례 어사로 등용되어 근검과 청빈으로 이름이 높았다 한다.

이몽룡이 춘향이를 만날때는 춘향이가 16살이고 성이성의 아버지인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재직한 1607년부터 1612년사이에 남원에 있다가

1612년 성안의가 광주목사로 부임하며 남원을 떠나자 같이 떠난 것으로 봐서 이몽룡의 나이는  1595년 생이므로 16~17세 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성이성이 문과에 급제한 해가 1627년 성이성 나이 33세가 되던 해이므로 그당시 나이로 보면 상당히 만학도로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보인다.

얼추 춘향이와 한 두살 차이가 난 것으로 보여 춘향이도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15년간을 오매불망 절개를 지키며 이도령을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창녕성씨 檢校公派의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것에 의하면 1610년에 이미 진사가 되었다고 하니 16세 되던 해에 이미 진사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공부도 잘하고 연애도 잘하는 이른바 엄친아였던 것이다.   

 

  성이성(成以性)1595(선조 28)∼1664(현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 승지 안의(安義)의 아들이다.

  그는 학업에 열중하여 13세 때 정경세(鄭經世)에게 보이니, 정경세가 크게 될 인물이라 하였다.

  자라면서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김굉필(金宏弼)·이연경(李延慶)의 학통을 이은 강복성(康復誠)의 문인이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진사가 되고, 광해군 때의 난세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 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4년 정언·부수찬·부교리를 거쳐 이듬해 지평을 지낸 뒤, 1637년 헌납이 되어 윤방(尹昉)·김류(金#유15)·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의

  오국불충(誤國不忠)의 죄를 논하기도 하였다.

  특히, 사간을 역임하는 동안 직언으로 일관하여 주위의 시기를 받아 승진이 순조롭지 못하기도 하였다.

  외직으로는 진주·강계 등 네 고을을 다스렸는데, 진주 때는 어사 민정중(閔鼎重)의 선치(善治)보고로 표리(表裏:옷감)를 받았고,

  강계 때에는 삼세(蔘稅)를 모두 면제해주어 백성들이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는 칭호를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청백리에 뽑혔다. 부제학에 추증되었다.저서로는 《계서유고》가 있다.

 

 

 

  아마도 춘향전을 지은 사람이 실존인물인 이들의 사랑이야기를 듣고 당시 양반들의 전성시대에 대놓고 실명을 거론하기가 힘들어서 애둘러 성이성을

  이몽룡으로 춘향을 성춘향으로 이름을 바꿔놓지 않았나 싶다.

     

      춘향관에는 박남재화백의 춘향일대기와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서화류, 장신구, 서책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몽룡이 성이성의 실존인물인 것에 비하면 춘향은 실존인물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봐서 기생출신의 어미를 둔 춘향의 족보는 아마 쉽게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리산국립공원 구룡탐방지원센터 옆에서 1962년 '성옥녀지묘'라 새겨진 지석()이 발견되어 춘향의 묘역으로 단장하였다고 전해지며,

1995년 정비작업을 하여 현재의 춘향묘가 되었다한다. 지석만 발견된 상태이기에 이 무덤은 시신이 있는 진짜 무덤은 아니지만 광한루에 춘향사당과

더불어 춘향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분들은 한 번 쯤 가볼 만 한 곳이다. 춘향묘 앞에는 육모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구룡계곡이 흐른다

 

        광한루를 지나 우측 모서리에 대나무숲이 울창한 곳에 '단심()’이라고 쓰여진 대문을 들어서면 사당이 있으며, '열녀춘향사()’란

        현판이 걸려있다. 사당 안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매년 5월 5일이면 춘향제가 열린다.

 

                    해마다 5월초순이면 춘향제와 더불어 전국춘향미술대전, 전국춘향선발대회, 춘향국악대전 등이 열린다.

 

                                                                                 

 

           그러나 꼭 잘나가는 정치인이나 덕망가들이 말 실수로 구설수에 오르고 또 곤욕을 치러 결국에 가서는 반성하고 사의를 표하고 하는 짓들을 왜 하는지

       알수가 없다..그리고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트위터나 공개된 장소에서의 강연을 통한 사소한 말실수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지역단체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특히 경기도지사인 김문수의 지난 6월 발언은 진위야 어떻든 간에 춘향비하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                       사진 과 기사출처:경인일보(2011년7월5일자 인터넷 신문)

 

           2011년 6월22일 경기도지사인 김문수는 서울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한국표준협회 초청 최고경영자 조찬회에 참석해

          탐관오리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요즘 공무원의 청렴함을 강조하면서 “대한민국 공무원이 지금 얼마나 청백리인 줄 아느냐”라며 “

          춘향전은 변 사또가 춘향이 따먹으려는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한다.       

 

            김 지사는 이어 “(변 사또가) 재산 뺏어가고 부패만 저지르는 게 아니라 처녀 몸, 생살여탈을 제 맘대로 하는 썩어빠지고 형편없는 이런 관리들에 의해

            이 나라 백성이 수천년간 피해를 보고 살아왔는데 이 시대 공무원들이 얼마나 잘합니까”라고 하며 춘향이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의 발언이 뉴스와 일간지 등을 통해서 보도되자 남원지역 100여개 사회,여성단체는 김문수 경기도지사 춘향전 망언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김 지사의 사과와 망언 중단을 요구해 왔으며 또 이에 격분한 남원시민들이 경기도청까지 몰려가서 김문수의 춘향사당에서

                   공개사과와 남원시민들 앞에서 석고대죄를 할 것을 주장했으나 6월 29일 한 방송에 출연해 “남원에서 오해를 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그 말이 잘못돼서 남원시민들이 그렇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남원시민들한테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흐지부지

                   넘어갔다한다.       

                

  

우리는 그동안 명색이 이나라를 이끌어가는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각종 강연이나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간혹 생각없는 말들을 불쑥 내뱉어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모국회의원은 아나운서 비하발언으로 제명위기에 처해있고 , 모 정당의 대표는 자연산발언으로

대표직을 물러났다.

성서에 보면 혀를 조심하라 입을 조심하라 말을 조심하라는 내용이 수도 없이 나온다. 괜한 말이 아닌 것이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

    혀아래 도끼 들었다. 

   쌀은 쏟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라는 속담이 있다.. 

 

 

      

         서양의 철학자들도 이야기했다. 

    당신의 입이 쓸데없는 말을 안 하려면 다섯 가지를 조심하라. 누구에게, 누구의 말을, 어떻게, 언제, 어디서 말할 것인가를.

      -윌리엄 에드워드 노리스
   말로 인한 상처는 확연히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말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을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한다 해도 그 말의 해독은

       마찬가지다. -톨스토이

  말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할 틈을 가져라.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 말할 가치가 있는지, 무익한 얘기인지, 누군가를 해칠 염려가 없는지

       어떤지를 잘 생각해보라. -톨스토이

   말을 할 때는 자신이 아는 것만 말하고, 들을 때는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만 배워야 한다. -루이스 맨스

  

 

 

       

       성서에도 나온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다. 

       혀는 인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허풍을 떤다. 아주 작은 불씨가 큰 숲을 불살라버릴 수도 있다. -성서

  말이 많으면 죄를 짓기 쉬우니, 말을 삼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이다. -성서

 

 

 

 

       동양에서는 더할 나위 없다. 

   말이 달콤하면 실질과 정직을 잃게 된다. -십선어법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하다. -유회
   말이 있기에 사람은 짐승보다 낫다. 그러나 바르게 말하지 않으면 짐승이 그대보다 나을 것이다. -사디

   명심하라. 자기가 한 말은 반드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힌두교

   모든 재앙은 입에서 나온다. 입을 지켜라. 맹렬한 불길이 집을 태워버리듯, 입을 삼가지 않으면 입이 불길이 되어 온몸을 태우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불행한 운명은 그 입에서 생기는 것이다.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칼이다. -석가모니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인간도 역시 입으로 걸린다. -탈무드

 

 

             춘향전은 한글이 발명되기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구전문학이 한글이 발명된 후 판소리계 소설로 기록된 것으로 보여   

대부분의 춘향전에는 "작자 미상"이라고 적혀 있지만 수백년 전부터 춘향전을 소리로 이야기로 만들어 온 우리 민족의 소리꾼들이

             진정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춘향이가 월매와 같이 산 집...담장 너머로 춘향이와 몽룡이가 뱃놀이를 하며 노는 것이 보인다.

    춘향이를 흠모한 나에게는 춘향이는 언감생심이다..그의 모습을 이렇게 담장너머에서나마 볼 수 있어 그래도 만족이다.

    춘향이의 절개굳은 마음과 정신은 어찌보면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단순히 흥미있는 이야깃거리에서 머물지 않고 지아비를 믿고 따르며

    걸인의 모습으로 왔을 때도 변치않는 춘향이의 지아비사랑...옥중상봉의 가사와 판소리 한구절을 들으며 글을 맺은다.

 

 

  "어머니 그리마오 그게 웬 말쌈이요. 잘 되어도 내 낭군 못되어도 나의 낭군 고관대작 나느 싫고 만종록도 내 다 싫소 어머님이 정한 배필 좋고 글코

  웬말이  요 나를 찾어오신 낭군 어찌 그리 괄세하오." "서방님" "오냐 헐 말이 있거든 어서 말하여라." "내일 본관사또 생신잔치 끝에 나를 올려

  죽인다니 부디 멀리 가시지 말고 옥문 밖에가 서셨다가 날 올리라고 영 나리거든 칼머리나 들어주오. 나를 죽여 내치거든 다른 사람 손대기전에

  삯군인체 허고 달려들어 나를 업고 물러나와 우리 둘이 인연맺든 부용당 날 뉘이고 내 속적삼 벳겨내어 세벌둘러 초혼허고 서방님 속적삼 벗어

  나의 가삼을 덮어주고 지상여를 곱게 꾸미여 나를 메고 나갈 적의 심산구산 다 버리고 서울로 올라가 선대감 제절하의 은근히 묻어주고 무덤앞에

  비를 세워 글을 지어 새겨쓰되 '수절원사 춘향지묘(守節寃死 春香之墓)' 라 여덟자만 새겨주고 정초 한식 단오 추석 선대감시 제 잡순 후 내 무덤을

  찾어와기여 술 한잔만 부어들고 발 툭툭 세 번굴러 '춘향아 청초는 우거진디 앉었느냐 누었느냐 내가 와서 주는 술이니 퇴지말고 많이 먹어라' 한두말로

  위로 허면 혼이라도 한 없겄소" 어사또 이 말을 듣고 "오냐 춘향아 우지마라 오늘밤이 새고보면 상여를 탈지 가마를 탈른지 그 속이야 누가 알겄느냐

  '천붕우출(天崩牛出)'이라 하날이 무너져도 소 살어날 궁기가 있는 법이니 오늘 밤만 죽지말고 내일날로 상봉허자"

 

          

           발행된 글 : 전방(주)영암공장 여름휴가동행 취재기

                      1편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섬 소매물도 그곳에 가고싶다..

         2편 거제도 바람의 언덕과 아이돌그룹 티아라..

         3편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줘요. 부산 해동용궁사..

         4편 해운대연가와 아쿠아리움, 용두산공원8경을 찾아서..

         5편 내마음속 대통령 노무현..그리고 부엉이바위..

         6편 대구팔공산과 케이블카의 어색한 만남..

         7편 합천해인사와 2011년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

         8편 남원광한루에서 춘향이와 몰래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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