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기행)타임머신 타고간 흥선대원군시절의 죽림재(남도문화유적 답사기)

2012. 8. 15. 00:00전라남도 견문록/담양 견문록

 

명옥헌원림을 나와 광주댐을 거슬러 올라 수남학구당으로 가는 길에 들른 죽림재(竹林齋)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창녕조씨(昌寧曹氏)문중의 사원이다.

1987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 99호로 등록되었지만 관리주체가 관청이 아닌 민간이다 보니 관리가 부족하여

잡초 우거진 서원이 되고 말았다.

물론 한 여름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잡초를 매번 잘라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소한 것 하나라도 방문객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면 분명 조상을 극진하게 모셔야 하는 문중에게는

조상 뵈올 낯이 없게 될 것이다.

 

죽림재입구 마을은 창녕조씨 집성촌이라고 하지만 오늘 가본 죽림재는 창녕조씨 사원임에도 건물은 멀쩡하나 잡초만 우거져

이곳이 전라남도 기념물인지 아니면 타임머신을 타고 구한말로 돌아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된 죽림재를 보고

있는 것인지 둘러보는 내내 사뭇 비장하기만 했다.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무등산 자락이 흘러내려 고서면 분향리 잣정마을에서 멈춘산이 향백산(香栢山)이다.

창녕조씨 집성촌인 잣쟁이마을은 직접적으로 죽림재와 관련이 있다.

65가구 정도가 모여살지만 외지 사람은 없고 모두 창녕조씨 일가들이다.

마을도 와우형(臥牛形)으로 나즈막하게 길게 드리워진 향배산을 따라 마을도 길게 누웠있어 풍요로운 수남벌과 같이

풍요로운 마을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렇게 마을입구에서 죽림재를 보면 멀쩡하게 보이지만 마을을 돌아 죽림재로 가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죽림재로 갈때 승용차편으로 온다면 가급적 이곳에 주차해 놓고 가길 바란다.

죽림재입구엔 주차장이 없고 차 한대 겨우 들어갈 정도로 길도 좁다. 그것도 마을 주민들이 차량을 곳곳에 주차해 놔서

외지 방문객들이 주차할 곳이라고는 겨우 이곳 400년 된 당산나무 아래이다.

가지사이로 보이는 기와건물이 죽림재로 지금 마을길은 상수도관 공사를 하는지 콘크리트를 자르는 공사를 하고 있어

차량으로 가 보고 싶어도 못 들어간다.

 

 

죽림재로 들어서는 초입부터 CCTV카메라가 작동되고 있다는 친절한 안내문이 보이고

우측 연못으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의 전자음처럼 들리며..

연못에 박힌 시선을 들어 바라본 죽림재는 잡초에 파 묻힌 채 낯선 방문객을 노려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꽃은 예나 지금이나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이 연못은 이중 반월형연당(半月形蓮塘)으로 죽림재 창건 당시 주돈이(周敦)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인용하여

축조하였으나 전쟁 등으로 폐허가 되었던 것을 1639년 삼천당 조부가 반월형 연못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이하 죽림재에 관련된 자료는 사이버 죽림재에서 인용하였다.)

 

 

입구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 딛어 사위를 살피며 들어가면 처음으로 보이는 장서각은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건물이다.

대체적으로 죽림재와 취사당, 세일재, 충효각을 제외한 건물들은 비교적 깨끗하여 몇년 사이에 대대적인 증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이렇게 관리(잡초 제거하기)가 안되고 있을까?

 

죽림재를 처음 지은 죽림 조수문(曺秀文)은 창녕조씨(昌寧曺氏) 밀직사공파(密直司公派)로 

이곳에 죽림재를 지어놓고 면학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字) 장보(章甫). 호(號)는 죽림(竹林)이며, 어려서부터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면학(勉學)을 즐겼으며, 20살에 이르러 학업이 크게 성장하였고, 세조 무자년에 생원을 하였으나 대과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로 돌아와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짓고 부모를 봉양하며, 성리학을 탐구하고 강론하면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죽림재의 초창기 건물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시 창녕조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문서들과 함께 소실되었고,

1623년(인조1)에 죽림의 6대손인 삼청당(三淸堂) 조부(曺簿)에 의해서 중건되었다.

그후 죽림과 그 아들인 운곡(雲谷) 조호(曹浩)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708년(숙종 34)에 문인과 후손들에 의해

죽림사(竹林祠)가 건립되었고, 1751년(영조 27)에는 죽림재와 같은 위치로 죽림사를 이건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8년 현재의 건물로 복원되었으며 현재 4위(竹林 曺秀文, 雲谷 曺浩,

三淸堂 曺簿, 簫隱 鄭敏河)를 배향하고 있다.

 

 

 

장서각(藏書閣)은 죽림 조수문 선생의 서적 보관고였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유허로 있다가 1972년에 정부 보조를 받아

육영사업의 일환으로 정일도서관을 건립하여 여러 사람들의 학습장으로 활용하였다.
그 후 1987년 죽림재 일원이 문화재로 지정되자 현대식 구조물을 철거하고 198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충효각(忠孝閣)은 하늘이 내린 효자 삼청당(三淸堂) 조부(曺溥)를 기린 상징물이다.
조부는 부모에게는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독실하였는데 부모가 상을 당하였을 때 시묘살이 삼년으로 상을 마쳤다.
그 후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하늘이 낳은 효자라고 칭찬해 마지 않았는데 병자호란 때에는 상중(喪中)의 몸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항전하려고 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적인 화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우지 못함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애국 충정의 행동을 본 유림 안처공(安處恭) 외 90여 인이 그 충효 겸절에 크게 감화되어 도백(道伯)을 통하여 조정에

그의 충정을 널리 드러내줄 것을 건의하자 1604년(인조 18년)에 정려를 하명을 받아 설립하였고, 그 후 여섯 차례의 중수를 거쳐

강상(鋼常)의 상징으로서 현재까지 유지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조부(曺簿)의 정려각(旌閭閣)인 충효각(忠孝閣)은  1640년 건립되었으며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충효각은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허리높이까지 자란 잡초로 인해 발 밑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이렇게 담장너머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수 밖에..

 

 

충효각을 나와 장서각을 한 바퀴 돌아본다.

 

 

문을 열어 매다는 고리에 녹이 없는 것으로 봐서 지은지 오래되지 않은 건물임에 분명하다.

 

 

장서각 지붕옆으로 배롱나무꽃 역시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장서각을 지나 취사루에 올라가기전에 있는 비석 5개.

좌로부터 첫 번째 비문은 사진으로 판독불가하고, 두 번째 비문은 증암수확계원영사비(甑巖水確禊員永思碑),

세 번째 비문은 세일재중수실적비(歲一齋重修實績碑), 네 번째 비문은 서정조공기적비(墅亭曺公紀績碑),

다섯 번째는 조상호장관덕업장앙비(曺相鎬長官德業獎仰碑)로 대한체육회장과 5공때 체육부장관을 지낸 조상호장관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취사루(聚斯樓)의 뒤면은 단층이지만 앞면은 기둥이 있는 2층으로 사찰에 가면 있는 구광루같은 느낌이 든다.

편액에 쓰여진 이름 그대로 문중의 후손들을 모아 선조의 뜻을 기리는 강당(講堂)겸 숙소로 쓰이며 정면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다.

 

죽림 조수문 사후 200년이 지나 죽림의 문하생과 후손들이 지방의 유림으로 조직화 되면서 죽림의 학문과 도덕을 길이 추모하는

사업이 활발해졌는데 춘추의 향사(享祀)때에 참가 객들이 많아 강당과 숙소가 필요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1868(고종 5년)에 국령(國令)으로 죽림사를 훼철하였으나 1870년경에 취사루를 중수하여 지금까지 3차례의 보수를 거쳤다고 한다.

 

 

명옥대(鳴玉臺)에는 밤새 내린 비로 죽림재를 관통하는 맑은 물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옥구슬 떨어지는 소리를 내건만...

 

 

정적을 깨는 물소리와 길을 온통 뒤 덮은 잡초아래 죽림재와 죽림사로 올라가는 길은

옷깃을 적시는 지난 밤 풀잎에 맺힌 빗방울만큼 서늘한 한기가 나를 감싸고 돈다.

 

명옥대는 삼청당(三淸堂) 조부(曺溥)가 죽림재를 재건하면서 유허로 있던 우물을 파서 부모에게 봉양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우물을

삼청정(三淸井)이라 명명하였지만 샘에서 솟는 물줄기가 구슬소리를 내면서 떨어진다 하여 명옥대라 바꿔 불렀다고 한다.

 

 

닭의 장풀 너는 알고 있겠지?

이곳을 한 달 사이에 내가 몇번째로 지나가는지..

 

 

 

죽림재(竹林齋)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로 전면의 2칸은 개방된 마루를 두고 후면의 2칸은 방을 두었으며 홑처마를 사용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죽림재란 편액은 고당 김규태(顧堂 金奎泰)의 작품이다.

 

고당 김규태(1906~1966)는 전남 구례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근세 호남의 巨儒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의 정맥을 이어받은 호남의 마지막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율계 정기(栗溪 鄭琦)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시부와 서예로 당대를 풍미하였다.

 

죽림재는 후손들과 유림들이 선생의 뜻을 살려 교육의 전당으로 운영하여 지방의 문학 진흥에 공헌하다가 정유재란(1597) 때 장서각,

문서 등과 함께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1639년(인조 16)에 죽림의 육세손 삼청당(三淸堂) 조부(曺溥)가 재건하였고, 이후 여섯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1950년 한국전쟁 전까지 한학(漢學)선생님을 초빙, 한문학 교육의 명맥을 계승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이 잠시 주둔하면서 한문학과 윤리교육은 퇴폐문학이요, 반혁명적 교육이라고 지적하면서 죽림재와 장서각에

소장된 문적을 불사르고, 조상의 누각을 지어 놓고 현판을 거는 행위는 족벌체제의 잔재이며 종파분자의 반동적 소행이라면서 행패를

 현판을 뜯어 소각하였고, 현재의 현판은 당시 도피시켰던 것을 다시 걸어놓은 것이다고 한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앙지문(仰止門)을 지나면 죽림사가 나온다.

 

 

죽림재 바로 뒤에 있는 죽림사(林祠)는 죽림선생의 아들인 운곡 호(雲谷 浩)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708년에 문인과 후손에 의해 죽림사(竹林祠)가 건립되었고 1751년에 죽림재 뒷편에  죽림사를 이건하였다.

1868년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8년에 복원되었으며 현재 4위(죽림 조수문, 운곡 조호,

삼청당 조부, 소은 정민하)를 배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창녕조씨 세 분은 당연하겠지만 소은(簫隱) 정민하(鄭敏河)는 왜?

정민하는 송강 정철의 3남 정진명(鄭振溟;1567∼1614)의 4세손으로 타인의 손에 넘어갔던 계당(溪堂)을 인수하고,

1721년 서하당(棲霞堂)김인후의 후손으로부터 식영정(息影亭)을 인수하였던 분으로 무슨 연유로 창녕조씨 문중에 모셔져 있는지

연유를 알수가 없다. 정철의 후손은 식영정뿐만 아니라 환벽당도 인수하였으니 그런 연고로 죽림사에 모셔졌는지...


 

죽림사 앞마당에 세워진 창령조씨 삼선생 서원유허비(竹林祠遺墟碑 )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석으로 죽림사에 배향된 창녕조씨 3위에 대한 유허비다.

 

 

죽림사 옆에도 어김없이 배롱나무꽃이 만발하고...

 

 

 

 

 

 

 

여기서 닭의 장풀은 '당신이 한 달내 첫번 째 손님이에요'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조유도(曺由道)의 묘각(墓閣)인 세일재(歲一齋)는 1899년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묘각이란 말에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것은 눈이 작은 나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스스로도 무섬증이 없다고 자부하는 나도 시간이 멈춘듯한 이곳 죽림재에서 만큼은 오슬오슬 한기가 스며드는 기운을

느낄수가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세일재 건물의 색이 나무색을 넘어 흑빛으로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빨간 배롱나무꽃과 묘하게 대비되는 흑색의 건물..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내부를 들여다 보니 영모당(永慕堂)이라 쓰여있는 편액이 있다.

세일재는 창녕 조씨 밀직사공파의 창평 입향 선조인 고려 보문각 직제학 조유도(諱由道)를 모신 사당이다.
조유도는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 때 고려 충신 정포은(鄭圃隱)이 억울하게 모함 당했음을 항의, 상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은의 충절과 정치 노선을 지지 찬양하였다가 조정에서 증오를 받아 창평(담양)으로 유배되었다.
여생을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분토동에서 마쳤으며 묘소는 현 분토동에 위치하고 있다.
1890년에 동·서재와 같이 건립하여 현판을 세일재(歲一齋)로 걸었으며 그 앞에 직제학 유도(由道) 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세일재를 바라보고 우측이 서재인 육영당(育榮堂)은 세일재와 같이 1890년에 건립하여

초학자(初學者)의 학습장 및 숙소로 사용하였다.

 

 

세일재를 바라보고 좌측이 동재인 정일재(精一齋)도 세일재와 같이 1890년에 건립하여

초학자(初學者) 이상의 학문연구실 및 숙소로 사용하였다. 

 

 

 

변소로 사용하는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를 나무로 가려놓은 것이 특이하다.

 

 

 

취사루를 바라보고 좌측으로 전사청(奠祀廳)은 제사 기물과 제수를 준비하는 장소로 활용하였으며

1백 60여년 동안 춘추향사를 할때 사용하였다. 빈 터로 남아 있었는데 죽림서원의 복원과 함께 2004년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흥선대원군 시절로 되돌아 간듯한 죽림재로의 여행.

금새라도 당시 서원철폐의 국명을 들고 병사들이 이곳으로 뛰쳐 들어올 것 같은 환상에 젖은 공간.

그 모든 것은 단정한 건물에 비해 전혀 관리가 안된 잡초탓으로 모든 여행자는 죽림재에 들어서면 나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죽림재는 뭇사람들의 방문이 꺼려질 정도로 되어 있다.

하루라도 빨리 창녕조씨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건물들은 비교적 깨끗해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듯 하나 죽림재의 넓은 부지의 곳곳에 난

잡초를 제거하지 않고는 마치 벌초하지 않은 조상의 묘처럼 방문하는 여행객들의 눈총을 받을 것이다.

 

다음편은 죽림재를 나와 식영정으로 가기전에 있는 수남학구당이다.

(광주기행)남도의 환벽당과 취가정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

(담양기행)소쇄원과 소쇄48영으로 가는 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

(담양기행)한국 가사문학관으로 가는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

(담양기행)명옥헌원림 배롱나무꽃에 떠나간 님 그리워하며(남도문화유적 답사기)

 

죽림재 가는 길 : 전남 고서군 분향리 338번지

                       광주에서 담양창평가는 길 고서교차로에서 광주댐방향.

                       광주댐 못가서 우측으로 보이는 마을.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