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기행)명옥헌원림 배롱나무꽃에 떠나간 님 그리워 하며..(남도문화유적 답사기)

2012. 8. 13. 22:00전라남도 견문록/담양 견문록

 

작년 여름 아이들 손을 잡고 남도가사문학 탐사길을 나선 적이 있다.

그날도 소나기가 내리다 그치기를 하루에도 수십번, 변덕스런 날씨만큼이나 습도가 높아 힘들었지만,

오늘도 가느다란 빗줄기에 땀으로 흥건히 젖은 옷은 남루하기 그지 없다.

밤새 비 내린 아침 그 날 그 길을 다시 더듬어 못 다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려는데 1년이란 세월에도 불구하고

사진에 많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작년에 찍었지만 미완성포스팅으로 비공개중인 사진들을 보니 여름 담양을 온통 붉게 물들인 백일홍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작년 7월 초순 백일홍 만발하기 전에 다녀온 듯 하지만 이번 답사 사진을 보니 온통 붉디 붉은 백일홍 천지다.

그 애절한 꽃말만큼이나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떠나간 님을 그리워하는 배롱나무 향연이 펼쳐진 남도답사길을 떠났다.

 

이번 답사기는 작년 7월 초순에 이미 발행된 

(광주기행)남도의 환벽당과 취가정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

(담양기행)소쇄원과 소쇄48영으로 가는 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

(담양기행)한국 가사문학관으로 가는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에 이어서 1년 만에 올리는 글임을 밝힌다.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아침일찍 나선다고 했지만 시간이 벌써 6시30분이 넘었다.

간 밤에 소나기처럼 퍼붓던 비에 명옥헌원림으로 가는 길가엔 벌써 배롱나무꽃잎들이 떨어져 있어 마음이 괜시리 바쁘다.

블친 소국님의 명옥헌원림 포스팅을 보고 불현듯 작년 마무리짓지 못한 답사기가 생각났다.

아침 6시경에 도착하여 배롱나무 사이로 빛내림을 볼 것을 권유받았지만 밤새 내린 비와 아침에도 먹구름 가시지 않은 하늘이

나를 더 잠자리에 머물게 하였다.

 

명옥헌원림으로 가는 길은 광주에서 창평가는 60번 지방도로를 따라 고서를 지나쳐 1.5km를 가다가 우측으로 명옥헌원림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하여 가면 된다. 광주댐 방향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광주댐 바로 밑 증암교를 지나 우측의 명옥헌원림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하여 길을 찾아가면 된다.

 

작년에도 이곳에 주차해 놓고 걸어서 명옥헌원림까지 갔다.

마을 안쪽 길은 비좁아 차량 한대밖에 통행할 수 없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가급적 이곳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가면 된다.

 

주차장은 상당히 넓고 화장실도 구비되어 있으며  누정길과 오방길등 담양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안내도도 있어 이해를 구하기 쉽다.

 

주차장에서 마을 골목길을 따라 약450m정도 걸어가면

우리가 고대하던 명옥헌원림이 나온다.

명옥헌원림을 보고 나오면서 골목길에서 약200m 떨어진  

후산리 은행나무도 같이 보고 올 것을 권한다.

 

 

 

1~3편은 작년에 포스팅 완료하였고, 나머지는 당시 모두 촬영은 했으나 엄청나게 내리는 비로 인하여 사진품질이 마음에 안 들어

이번 촬영으로 모두 삭제하였다.

송강정과 면앙정은 다른 곳에 있어 별도 표기하였고 죽림재는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들르게 되었다.

 

 

작년에도 들렀지만 그때는 배롱나무꽃이 피기 한 달여전.

연못을 끼고 온통 붉은 빛으로 명옥헌을 감쌀 그 처연한 아름다움이 보고 싶어 올해에는 늦지 않게 들렀다.

 

 

백일동안 피어있는다 해서 백일홍이라 부르지만, 사실 백일홍은 백일동안 피어있지 않다.

꽃송이 하나 하나는 열흘정도 피었다가 지는데 한 가지에 매달린 수백개의 꽃이 하나씩 피고 지기를 차례로 하다보니

백일동안 피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꽃 하나의 생명력은 10일밖에 안되니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괜한 말은 아니다.

 

 

자세히 보면 아직 안 터진 꽃망울도 있고 핀 꽃도 있으며 생명이 다 되어 떨어진 꽃잎도 있다.

이렇게 한 가지에 포도송이 처럼 매달린 꽃잎이 일찍 피어난 꽃잎부터 차례로 10일간격으로 떨어진다고 하니...

이 글을 보고 가실 분들은 아마 일주일내에 가지 않으면 이 아름다운 꽃들을 못 보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이곳에 있는 배롱나무들은 언제 심어졌을까?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에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1619~1655)이 명옥헌을 짓고

건물 앞뒤에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가꾸었던 정원으로 350년이 넘은 정원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작년에 갔던 소쇄원이 1520년대에 만들어 졌으니 1650년경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명옥헌은 소새원과 약130년의 시간차가 난다.

그럼 이 배롱나무들도 그때 당시에 심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자그만치 350살이 넘는 셈이다.

 

350살 다 되는 배롱나무는 수피가 자주빛을 띤다고 해서 옛날엔 자미(紫微)나무라고 불렀다.

그 붉은 자미꽃이 100일동안 피어있다 해서 백일홍나무라 불렀고, 한글로 배롱나무라 부르게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 많은 나무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배롱나무를 이곳에 심게 되었을까?

 

 

소쇄원을 지나온 계곡물이 모여드는 하천을 창계천이라 부르지만 옛날에는 개울가 주변에 자미꽃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해서

자미천(자미탄)이라고 불렀다.

남도 가사문학의 산실인 소쇄원을 중심으로 남도의 정자 주변과 길가에 배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것은

자미꽃은 도화꽃과 같이 무릉도원을 상징하는 꽃이기에 봄엔 도화꽃을,여름엔 자미꽃을 보면서 남도의 정자에 모여든 학자들이

무릉도원 세상을 이야기하며 꿈꿨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쇄원, 환벽당, 취가루, 명옥헌, 죽림재, 식영정, 송강정, 만영정 등 남도의 대표적인 정자에는 모두 자미꽃나무가

적송과 함께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를 읊고 문학을 교류하며 풍류를 즐기던 정자와 달리 선비가 학업에 열중해야 하는 공부방 주변에 자미꽃을 심지 않는 이유는

달밤에 비친 자미꽃나무의 흐드러진 모습이 아름다운 여인의 나신(裸身)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정원의 대표적인 모양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연못으로 동서로 20m 남북으로 40m크기이며

중심부에 자그마한 원형섬이 있다.

 

 

명옥헌은 알려진데로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4~1624)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에

그의 넷째아들 장계(藏溪)오이정(吳以井:1619~1655)이 명옥헌을 지은 곳이다.

 

 

 

명옥헌이란 현판이 붙어있지만 정자 내부엔 삼고(三顧)

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능양군(조선 16대 인조)이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한 반정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다 임진왜란때

의병장인 고경명의 손자 고부천을 찾아 후산리까지 왔다.

 

그때 고부천이 명곡 오희도를 추천하고 1623년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을 때 그 때의 인연으로

오희도는 중앙 벼슬길에 오른다.

 

아마 편액은 이곳에 사는 오희도를 능양군이 세 번이나

찾아갔는데 유비가 제갈공명의 초가를 세번이나 찾아가

마음을 얻어듯이 자신의 마음을 얻고자 세번이나 찾아 온

능양군을 기리는 마음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명옥헌 못가서 좌측 산밑에는 후산리 은행나무 또는 인조

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이라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능양군이 왕이 되기 전에 전국을 돌아보다가 오희도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타고 온 말을 매둔 곳이라 해서 이름이 붙었고 2009년 9월 18일 명승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우암 송시열이 그의 제자 오기석(1651~1702)을 아끼는 마음에서 명옥헌이라 이름짓고 좌측 계곡바위에도 새겼다.

그 후 오기석의 손자 오대경(1689~1761)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워 현재에 이르렀다고 입구 안내판에 쓰여져 있지만

문화재청의 문화유산 정보나 네이버 지식백과에도 명곡 오희도의 아들 오이정이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판 다음 적송과 배롱나무를

심었다고 되어 있기에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어느것인지 후참에 다시 알아볼 참이다. 

 

 

오희도(1583~1623) - 오이정(1619~1655) - 오기석(1651~1702) - 오00 - 오대경(1689~1761)으로 이어지는 가계가

맞는지 모르지만 오이정(1619년생)과 오대경(1689년생)의 나이로 본다면 증손이 맞을 것으로 보여 하루라도 빨리 날아간

70년 세월을 복구해 어느것이 맞는지 정확하게 표기할 필요가 있다.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사방이 마루인 명옥헌은 구들까지 두었다.

 

 

정자의 왼편으로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구르는 소리같다 하여 명옥(鳴玉)헌이라고 지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왜 명옥정(鳴玉亭)이 아니고 헌(軒)이라 지었을까?

 

 

이렇게 방안에 앉아 자미꽃나무 흐드러지게 핀 연못을 바라보고 심성을 수양하기 위해 사랑채 개념의 헌(軒)자를 붙였다고 한다.

 

 

배롱나무꽃 흐드러지게 핀 저 숲길로 금새라도 오기정이 걸어 나올 것 같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다시 갈 수만 있다면 나 역시 오기정과 나란히 저 길을 걸어 나오고 있을 것이다.

 

 

도착을 6시30분경에 했음에도 명옥헌원림 입구는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온 진사님들로 북적거린다.

고요한 후산리의 아침을 깨운 진사님들의 발걸음과 소근거림은 명옥헌의 아침도 깨운다.

 

 

연못에 뿌려진 자미꽃송이를 보며..

 

 

명옥헌으로 들어가는 길을 배롱나무 사이로 허리숙여 들여다 본다.

 

 

마침 촉촉하게 젖은 배롱나무꽃에 햇빛이 비치면서 영롱한 이슬이 빛나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에 설레였을까? 카메라를 셔터를 누르는 여 진사님의 손끝이 파르르하게 떨려온다.

 

 

이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진사님들도 모두 돌아가고..

 

 

인적끊긴 명옥헌 원림을 거닐며..

 

 

꽃말처럼 떠나간 님을 그리워해 본다면 낭만적일까?

 

 

후산리 은행나무는 들르지 못했다.

날씨가 너무 후덥지근하여 1시간 넘게 명옥헌원림을 쏘다니다 보니 탈수현상까지 생긴다.

아침에 나올 때 새벽같이 나와 아침식사도 안하고 또 아무런 간식이나 식수도 없이 무거운 카메라와 삼각대를 이고지고

500여미터 길을 걸어 여기까지 오다보니 은행나무까지 200여미터 길은 2km이상 멀게만 느껴졌다

 

또 다시 여운을 남기는 것은 떠나간 님에 대한 그리움처럼 훗날을 또 기다리는 설레임이 있다는 것이다.

내년 이맘때 이른새벽 다시 들러 1년후의 배롱나무는 얼마나 피었는지 탐방을 하면서 후산리 은행나무도 같이 가 볼것을

내 가슴속에 다짐해 본다.

 

보통 이곳 명옥헌원림을 다녀간 뒤에 근처 명지원에 들러 차나 식사를 하고 간다고 한다.

찻집과 레스토랑, 미술관이 같이 있는데 나는 후줄근한 옷차림과 깜박 잊고 지갑도 안 가져와

가 보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애석함이 있다.

다음편은 명옥헌을 나와 수구학구당으로 가는 길에 들른 죽림재이다.

 

네비게이션 주소 : 전남 담양군 고서면 후산길 103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3번지 

대중교통은 명옥헌까지 가는 버스가 없으니 고서교차로에서 내려 택시를 이용하면 편하다.

주변 먹거리 : 명지원 (전남 담양군 고서면 고읍리 182-2) 061-383-2577

                   인기메뉴 대통밥정식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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