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옥천의 만의총을 아시나요?

2012. 12. 11. 07:35전라남도 견문록/해남 견문록

 

 

임진왜란으로 왜군에 의해 백성이 유린되고 삼천리 강산이 초토화되었을 때도 전라도 땅 만은 무사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전라도 곡창땅을 왜군들이 넘보지 못하게 막은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군수보급물자의 조달처인 호남을 정벌하지 못한 것이 패전에 이르렀다고 판단,

1597년 12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에 남아있던 2만의 왜군과 합류, 정유재란을 일으켰을 때 최우선적으로 호남을 정벌하고자

‘우군’은 양산을 출발해 밀양, 창녕, 합천을 거쳐 황석산성으로 보냈고, 그곳에서 곽준의 병력과 마주쳤으며, ‘좌군’은 부산을

떠나 배편으로 사천과 왜교에 상륙하여 하동, 구례를 지나 남원성으로 가게 하였다.


 

황석산성은 백성들의 격렬한 저항끝에 어렵게 점령했고 남원성도 전라병사 이복남과 명나라 부총명 양원이 이끄는 4천의 병사와 6천의 주민들이 결사항전 하였으나, 수만 정의 조총을 가진 왜군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8월 16일 결국 함락되었으며, 성 안의 조선인은

남김없이 모두 살육 당하였다.

이렇게 남원성과 진주성 공략으로 전라도를 손에 넣은 소서행장은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전한 거제 앞바다의 칠천도해전 이후

사실상 무력화된 조선수군을 궤멸시키고 전라도 땅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해남을 끝으로 전쟁에 마침표를 찍고자 했다. 
 

그러나 칠천도해전으로 조선 수군을 괴멸시킨 왜군이 300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해남으로 밀려들어올 때 명량해협에서 단 12척에

불과한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대패하며 제해권을 상실하며 정유재란은 끝을 맺게 되는데..

그 단초를 제공한 해남 옥천 성산대첩은 해남 윤씨의 족보에 야사로 밖에 전해 내려오지 않기에 그것을 끄집어 내 보고자 한다.

 

 

호남의 마지막땅 해남정벌을 위해 왜병 3만 대군이 1597년 9월 13일 강진 병치를 넘어 해남으로 진격해 오지만 옥천 성산대교에

이르러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바로 윤륜, 윤신 형제가 이끄는 해남지역 의병 2천여 명과 장흥,강진,영암에서 모여든 4천 여명의 의병 등 모두 6천 여명의 의병들이

손에 낫과 곡괭이, 죽창 등을 들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달마산 전투의 승리로 사기가 오른 윤현, 윤검 형제가 이끄는 의병 2천여 명과 대흥사 방면의 김인수 장군이 이끄는 관군 1500여 명이

합류하면서 부터 초반 왜군에 유리하게 전개되던 전투의 양상은 대등하게 달라지기 시작하였고, 3일동안 밤낮없이 치러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피아 간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처절한 혈전이 이루어 졌으며, 어란진으로 상륙한 왜병이 북상하고, 황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영암으로 남하하여 전투에 합세하게 되자, 승부의 추가 급격하게 기울어 결국 일만여명에 달하는 이 지역

의병들이 모두 성산리 이곳에서 전사하게 말았다.

비록 옥천 성산전투에서 의병이 전멸하긴 했지만 이 전투로 왜군도 궤멸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결국 왜군은 해남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장흥 수문포 방면으로 물러가게 되었다.


 

 

 

 

성산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9월 12일 진도 벽파진에 도착한 이순신 장군은 성산전투가 끝나 장흥 수문포로 패퇴한

15일에 왜 적선과 전초전을 치른다.

그리고 이튿날인 16일 해남 우수영과 진도를 잇는 명량해협의 대첩으로 패전의 위기로 몰린 왜군은 약 두 달 후인 11월 19일

왜장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로 조선에 주둔해 있던 왜군이 철군을 위한 퇴로를 뚫기 위해 최후의 결전을 감행하게 되는데...

 

이에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은 협공으로 왜군을 관음포로 유도하여 항로를 차단하고 결전을 벌이게 되고,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도망가는 왜군을 추격하던 중 적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내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라는 말을 남긴 노량해전으로 왜군은 겨우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고

도망침으로서 정유재란은 종결되었다.

 

그 정유재란 종결의 단초를 제공한 해남 옥천 성산대교 전투에서 전사한 1만 의병의 죽은 시신을 모아 합장한 것이 지금 보고 있는

만의총이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6기가 있었는데, 농지개량 등으로 현재는 3기만 남아 있으며, 해남군 옥천면 주민들은 만의총유적

보존회를 조직해 매년 음력 10월 10일 이들을 기리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해남 옥천 만의총의 진실이었다. 아래 사진처럼...

(윗 글은 네이버캐스터와 한민족대백과 등 각종 자료와 문헌 등을 참고하여 간략하게 성산대첩을 구성해 보았다.)

 

 

 

 

2006년 10월 의병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던 3기 중 1호분에 대한 동신대학교 박물관의 시굴조사에서 신라양식인 토우가 장식된 서수형 토기 1점과 가야식 토기, 일본계의 조개팔찌 등 1,100여점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되면서 그동안 알려졌던 귀무덤이라는 만의총의 조성연대는 조선시대 정유재란때가 아니라 삼국시대(5~6세기) 석실묘로 이미 밝혀진 바 있었다.

 

이 조사의 결과는 그동안 이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자신들의 조상이자 의병들의 무덤인 만의총에 묻힌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매년 10월 10일 위령제를 지내던 해남 옥천면민들의 자긍심을 건드리게 되고, 제일 규모가 큰 3호분에 대한 엄밀한 조사를 기회로 자신들의 생각이 맞기를 간절히 기원했던 것이다.

 

결국 2008년 3월 25일 부터 5월 23일까지 60일간 국립광주박물관에 의해 만의총 3기 중 규모가 가장 큰 3호분을 조사한 결과, 봉분의 지름은 25m, 높이는 4.5m 규모에,

 

 

신라양식인 토우가 장식된 서수형 토기 1점과 가야식 토기, 일본계의 조개팔찌 등  5-6세기 초반 백제, 신라, 가야, 일본 등 4개국 유물

1,100여점 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신라시대 토우 장식 서수형 토기가 경주지역 이외에서  발굴된 것도 처음이지만, 백제시대 4 개 국가 유물이 동시에 발굴된 것도 처음이고 곡옥과 금장식된 청동곡옥, 관옥 등이 함께 발굴된 것은 해남지역이 마한 세력과도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한다.

 

 

무덤양식도 독특하여,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돌방무덤)도 아니고 신라의 적석분과도 달라 발굴단이 이를 '해남식'으로

새로이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새로운 묘제형식이라고 한다.


묘제형식과 출토된 유물로 미뤄볼 때 서기 5~6세기 사이에 해남지역에는 육상과 해상을 아루르는 상당한 세력이 이미 존재했고,

이 세력이 신라와 왜나라, 백제 수도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방 대호족이었음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시대 석곽 위를 덮은 봉토분에서 채취한 흙을 분석한 결과, 다량의 인 성분이 확인되었다고 하여,

이는 봉분이 남아있지 않은 삼국시대 돌방무덤이 당시 편평했던 들판이었을 것이고 오래전부터 고분으로 추정되어

온 것을 알고있는 옥천지역민들이 정유재란의 의병들을 고분위에 다시 묻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지방 대호족의 묘위에 합장하면 그들의 원혼을 달랠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굳이 만의총을 정의하자면 5세기 후반~6세기 초 만든 지방 대 호족의 묘로 돌덧널(석곽) 묘실의 윗부분(즉 편평한 들판)에

16세기 말 정유재란 때 숨진 의병들의 주검을 다시 묻은 얼개의 복합 무덤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파란선안은 2호분인 듯..

글쓴이가 1988년 경 부터 1991년까지 약 3년간 해남에서 건설일을 할 때, 이곳 만의총을 처음 보았다.

당시에도 옥천 지역민들에 의해 관리가 철저히 되고 있었고, 이 무덤은 정유재란 당시 일만 의병들의 시신을 합장한 무덤으로

아주 오래전 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문화재 도굴단의 손아귀에서 고분의 유물들이 안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의총 출토 유물들..(사진출처 : 동신대 문화박물관, 연합뉴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노란선의 고분은 1호기..

즉, 1만여 명에 달하는 의병들의 시신을 합장한 무덤이기에 파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그리고 수백년을 이어 온 옥천면 주민들의 만의총 위령제가 있었기에 도굴로 부터 유물 보존이 가능했을 것이다.

 

 

의병 일만명이 해남땅으로 들어서는 왜군 3만여 명을 맞아 이곳 성산대교 들에서  3일 밤낮으로 치러진 전투는

지금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해남 윤씨 7명이 전사했다는 것을 중심으로 해남윤씨 족보에 야사(野史)로만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가.

 

실질적으로 정유재란의 끝을 맺게 만들고 의병 일만명의 희생자가 난 해남 옥천 성산전투가 한 낮 야사로만 남아있다고 하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옥천 만의총을 중심으로 당시 성산전투의 상징물을 하나 세워 그 들을 기억하고, 그 들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도 세워 그 들을 추모하고, 후세에 성산전투의 업적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1597년 9월15일 이 곳에서 해남과 조선을 지키고자 장렬히 전사한 일만 의병에 대한 최고의 예의이자 후손들이 당연히

해야할 일 일것이다.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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