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사가 한때 승보사찰 송광사를 거느렸다고?

2012. 12. 30. 09:05전라남도 견문록/곡성 견문록

 

태안사는 골짝나라 곡성에서도 가장 골짝인 죽곡면 원달리에 있는 조그마한 사찰이지만 한 때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거느렸을 정도로 대찰이었다면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송광사하면 양산의 통도사, 합천의 해인사와 더불어 삼보사찰의 하나이며 통도사를 불보사찰, 해인사를 법보사찰, 송광사를 승보사찰이라고 해서 불교의 신행 귀의 대상인 불, 법, 승을 대표하는 사찰로 불리우고 모두 그리 알고 있으니...

 

태안사의 창건연대는 동리산태안사 사적에 의하면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인 742년 이름을 모르는 세 명의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송광사의 창건연대는 불명확하지만 송광사 사적기에 신라말기 혜린이라는 선사에 의해 길상사로 창건되었다고 하여 태안사보다 약 200여년 뒤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기에 태안사의 말사였다는 것은 신빙성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태안사는 그렇지만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며, 대안사(大安寺)라고도 부른다.

742년(경덕왕 1)에 3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였고, 고려 태조 때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가 중창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로 삼았다고 한다.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국사(慧徹國師)가 머물렀던 이 절에 윤다가 132칸의 당우를 짓고 대사찰을 이룩하였던 것으로,

고려 초까지 송광사, 화엄사 등 전라남도 대부분의 사찰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수선(修禪)의 본사로 독립되면서 급속도로 사세가 축소되었다고 한다.

당시 절의 규모는 건물 총 40여동에 110칸이었으며 법당에는 높이 1.4m나 되는 약사여래철불좌상을 모셨다고 한다.

 

일주문을 바로 지나면 부도전이 나오는데 이곳에만 두개의 보물이 있다.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과 광자대사 윤다의 부도비(보물 제275호)가 그것으로, 광자대사의 자는 법신(法身)이며 법명은 윤다(允多)이다. 태안사의 2대 조사로 경문왕 4년에 출생하여 고려 혜종 2년(945)82세로 입적한 뒤 고려 광종 원년(950)에 부도가 세워졌다고 한다.

 

 

 

월출산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도 잠시 태안사에 머물며 혜철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당(願堂)이 되어 조정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1683년(숙종 9) 정심(定心)이 중창하였으며, 1737년(영조 13)에 능파각(凌波閣)을 지었는데 능파각은 그 뒤에도 1776년, 1809년, 1861년, 1923년에 각각 중수하였고 6·25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일주문과 능파각만 소실을 면햇다고 하며 근래 들어서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있었다.(적묵당)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불보전, 만세루(萬歲樓), 해회당(海會堂), 선원(禪院), 능파각(凌波閣), 일주문 등이 있으며 대웅전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곡성군의 보조로 1969년에 재건하였다.

중요문화재로는 혜철의 부도인 보물 제273호 적인선사 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과 윤다의 부도인 보물 제274호의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그리고 보물 제275호인 광자대사비와 보물 제956호인 대바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인 천순명동종 등이 있다. 유형문화재로는 능파각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있고, 일주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중 바라는 승무를 출 때 사용한 것으로, 조선 태종 때 효령대군이 발원하여 만들었으며, 둘레 3m로서 우리 나라 최대의 것이다. 천순명동종은 1465년(세조 11)에서 1475년(성종 6)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공예수법이 뛰어나다고 한다.

이 절은 1925년 최남선(崔南善)이 찾아와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서 선종(禪宗)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고 극찬한 곳이다고 하니 유서깊은 절은 분명 맞는 말이다.

 

 

 

 

팔작지붕의 대웅전은 고풍스러운 멋은 없지만 천년고찰 태안사의 옛모습을 재현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크다.

대웅전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셔져 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 사진찍는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여, 대웅전 안에 있는 보물 제1349호인 천순명동종(天順銘銅鐘)을 보고 사진으로 담고 싶으나 문을 열고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기에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본다.

 

동종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1457)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동종은 조선시대 전기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많은 탄압을 받던 시기에 왕실의 도움없이 사찰 불사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부드럽게 한다는 음통과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을 새긴 용뉴가 있다. 그리고 어깨에는 1단의 연꽃무늬가 돌려 있고, 그 밑에 넓은 띠에는 방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작은 원 속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넓은 몸체에는 네군데에 사각형의 유곽이 있는데 그 주위는 당초문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연꽃속에 넣었다. 밑부분에도 어깨띠와 비슷한 넓은 띠가 있는데 연꽃무늬와 당초문을 새겨 넣었다.

신라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한국종의 독창적인 조형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이 종은 조선전기 동종양식의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전통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작과 관련된 명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기술도 비교적 좋은 편이으로 보물 제1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보물 제 956호인 태안사 대바라는 절에서 종교적으로 사용되거나 춤을 출 때 사용된 타악기이다.

냄비 뚜껑같이 생긴 두 개의 얇고 둥근 놋쇠판으로 만들며, 놋쇠판 중앙의 볼록하게 솟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혀서 소리를 낸다.

 

이 바라는 지름 92㎝의 큰 작품으로 제작 방법이 우수하며, 국내에서 제일 큰 작품으로 손상이 거의없이 내려왔다.

이 바라에는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의 복(福)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글이 남아있다.

크기로 보아 사람이 들고 사용하지 못하고 매달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작품에 명기(銘記)가 있어 제작년대(製作年代)(정통십이년(正統十二年), 세종이십구년(世宗二十九年), 서기일사사칠년(西紀一四四七年))나 인명(人名)(효령대군(孝寧大君)) 등을 알 수 있다(사진출처 : 문화재청) 

 

 

 

강당으로 쓰이는 보제루는 대개의 보제루가 그러하듯 대웅전쪽으로는 그 어떠한 문도 달려있지 않다.

 

 

불전사물 중 하나인 목어만 달랑 달려있는 보제루는 어쩐지 휑하기만 하다.

태안사에는 범종루는 없고 범종각만 있기에 목어를 보제루에 달아 놓은 듯...

 

 

              범종각의 금동범종

 

 

해회당

 

 

삼성각은 대웅전 왼쪽에 있으며 독성, 칠성, 산신을 함께 모신다.

 

 

염화실

 

 

태안사 약사전(藥師殿)은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염화실은 조실스님이나 방장스님이 거처하는 곳.

 

 

선원(禪院)은 염화실 옆에 있으며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스님들의 수행처이다.

 

 

 

 

배알문(拜謁門)은 사찰의 가장 높은곳에 있으며 이곳에는 적인선사조륜청정탑과 부도비가 있다.

 

 

보물 제273호인 적인선사 조륜청정탑은 적인선사 혜철스님의 사리탑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며 조성시기는 경문왕 원년인 861년으로 추정된다고...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선.교.율을 섭렵했던 고승 적인 혜철선사(惠哲禪師)의 자는 청보이고 속성은 박씨이며 경주 출생이다.

15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듣고 22세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신라 선문구산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연 스님으로 814년 당나라에 건너가 육조, 혜능, 임제, 서당선사 등에게 남종 선을 공부하고 신문왕 원년(839)25년 만에 신라로 귀국 후 곡성 동리산 대안사에서 불도를 펴다가 문성왕 9년(847) 세수 77세로 열반하니 왕이 적인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도 문성왕 8년(846) 혜철선사를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으며 혜철선사에게 23세에 구족계를 받았다고 한다.

 

 

 

적인선사조륜청정비

 

 

 

부도의 사면에는 주춧돌의 흔적이 있고.

 

 

주춧돌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부도를 세웠을 때에는 건물내에 모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안사삼층석탑

 

 

태안사 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0호)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탑으로 원래 사찰입구 광자대사부도 바로 옆에 있었으나 현 위치로 옮겨 보수복원하였다고 한다.

 

 

 

 

태안사 포스팅을 마지막으로 곡성 봉두산으로의 테마가 있는 산행과 여행을 겸한 친구들과의 여정이 끝났다.

여행의 휴유증은 하루만 지나면 회복되고 다시 일주일내내 틈틈히 새로운 여행지를 검색하고 찾아본 다음 주말에는

또 친구들과 여행을 겸한 산행을 떠난다.

 

일주일 열심히 일했으니 나머지 이틀은 이렇게 자연과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호사스러울까?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트위터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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