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이순신장군의 첫 승첩지/ 해남 어란진

2013. 2. 28. 07:05전라남도 견문록/해남 견문록

 

해남군 송지면 어란진...

이곳 어란진(於蘭鎭)은 조선초기에 세워진 조선 수군의 주요 거점으로 성종 대에는 진성(鎭城)이 축조되어 수군만호가 살았던 곳으로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란진의 이름을 널리 알린게된 계기는 정유재란 당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 교지를 받은

이순신장군의 첫 승첩지이며, 정유재란 이후 조선 수군과 왜군 수군과의 첫 전투현장이기도 하고, 1597년 9월 16일 13대 133이라는 세계

해전사상 불멸의 대승으로 금자탑을 쌓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당시 어란이라는 해남여인의 호국충정어린 사랑을 담은 야화가 있었으니

이제  삼일절을 앞두고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임진왜란이후 잠시 소강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년)당시 전열을 가다듬은 일본군이 조선을 재침범하였고, 군수물자의 보급지인 호남을

정벌하지 못한 것이 임진년의 패인이라고 지적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7년 12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에 남아있던 2만의 왜군과

합류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고, 호남을 최우선적으로 정벌하고자 '우군'은 양산을 출발해 밀양, 창녕, 합천을 거쳐 황석산성으로 보냈고, '좌군'

은 부산을 떠나 배편으로 사천과 왜교에 상륙하여 하동, 구례를 지나 남원성으로 가게 하였다.

황석산성은 쉽게 점령되었으나 남원성은 전라병사 이복남과 명나라 부총명 양원이 이끄는 4천의 병사와 6천의 주민들이 결사항전하였으나,

수 만 정의 조총을 가진 왜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8월16일 결국 함락되었으며, 성 안의 조선인은 모두 살육당하였다.

 

이렇게 남원성과 진주성 공략으로 전라도를 손에 넣은 소서행장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거제 앞바다 칠천도 해전으로 전라도 땅

마지막 남은 해남땅을 수중에 넣고 전쟁에 마침표를 찍고자 했다.

 

그러나 칠천도 해전으로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왜군이 300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해남으로 밀려들어올 때 명랑해협에서 단 13척에 불과한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대패하며 제해권을 상실하고 결국 정유재란은 끝을 맺게 되는데, 만약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협이 없었더라면, 호남을

수중에 넣은 왜군은 물자를 자유롭게 보급받으며 북상하여 한양을 수중에 넣고, 결국은 산동반도로 상륙하여 국세가 미약할데로 미약해진

명나라까지 점령하여 지금의 세계역사는 일본 중심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 바로 명랑해협의

대패였으며,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은 다름아닌 장부도 아닌 한 여인이었으니, 그가 바로 해남여인 어란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최근 보도된 빅뉴스 "임진왜란...'천행'과 '기적'그리고 이순신의 정보력 사이'어란의 등장"이라는 기사와 난중일기를 참고하였다.

 

칠천도 해전에서 달랑 12척의 배를 가지고 도망쳐 살아남은 배설에게서 이순신은 강진 회령포에서 배를 인수하여 해남 북평의 이진포에서

며칠 지내며 형세를 살핀다.

남원과 진주를 함락한 왜 육군이 육로로 계속 한양으로 진격하고, 왜 수군은 남해를 거쳐 서해안을 따라 한양에서 육군과 합세하여 조선을

수중에 넣고 명나라까지 진출하다는 장기계획을 간파한 이순신은 왜 수군이 해남 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해협인 울돌목을 반드시 지나갈 것으로

판단하고 진도 벽파에 진을 친다.

 

그 후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대장으로 한 왜 수군이 어란진으로 들어왔고, 그곳에서 진을 치다 1597년 9월 16일 133척의 배를 몰고 명량으로

들어가 이른바 13대 133이라는 세계해전상 유래가 없는 기적과도 같은 대승을 기록하고 정유재란을 끝내버린 이순신의 명랑대첩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순신은 명랑대첩 하루 전인 9월15일 진도 벽파에서 해남 우수영으로 갑자기 진을 옮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해남 여인 김해인의

제보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니, 그것은  결론적으로 이순신의 고급정보전의 결과라는 것이 최근 해남 어란진 이야기를 하게된 박승룡옹의 주장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 중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23번의 해전에서 단 한번도 진 적이 없다. 즉, 23전 23전승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순신의 충정과 구국의 일념과 뛰어난 지략이 있어서 가능했겠지만, 현대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정보전에서 왜군을 압도하였기

때문인 것은 이순신의 정보력을 말해주는 한 기록에  나타나 있다."이순신의 경우 정보에 목숨을 걸었다. 관할구역이 아니었던 경상도의 물길을

알기위해 백방으로 인재를 보내고 부산으로 스파이를 잠입시키고 출격시에도 항상 현지민을 통해 적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 그 결과 1,2차

출격때에는 모두 적의 배후를 기습해서 압승을 거두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니, 명량대첩의 숨은 공로자는 바로 해남여인인 미기(美妓)어란이라는 것으로 지금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해남 어란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어란진에 주둔한 왜군 장수 '간 마사가게'는 이순신 장군의 간첩 미기(美妓)'어란'과 애인관계로 사랑에 빠져 무의식중에

명량해전으로의 출정기일을 발설하고 만 것이다. -사와무라 하찌만다로의 유고집 48,49쪽- 

사와무라 하찌만다로는 일제강점기 해남에서 19년간 순사로 있었으며, 우리말에 능통하였고, 중국고서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한편 한시에도

나름 일가견을 갖은 한학자로 많은 저서와 잡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어란여인을 발굴한 해남 송지의 박승룡옹(84세)은 어란 여인의 애인 '간 마사가게'는 실존 인물로 확인됐고, 주민들의 구전과 일본인의 기록,

그리고 명량해전에 관한 난중일기(9월14일 어란진에서 있었던 일로 김중걸이 왜에 붙잡혀 왜선에 감금될 때 '김해인'이라는 여인이 결박을

풀어주며 기밀을 제공했다)와 조선왕조실록 기록(선조30년 이순신은 왜선중에서 여인으로 부터 정보를 탐지하여 곧장 장계하였다)이 맞아

떨어졌고, 그의 잡기록에 나오는 임진왜란 당시 해남 삼산면 왜군 포로수용소도 사실로 밝혀져 해남 어란마을에 가서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니

사와무라의 기록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져 어란여인 이야기가 한 낮 설화에 그친다 하여도 꽤 괜찮은 관광 아이템으로 생각하여 역사가

가는 아니지만 고증찾기에 나섰으며, 난중일기와 왕조실록, 김훈의 칼의 노래 등에서 근사한 고증을 찾는데 성공하고 비로소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작심하였으며, 이후 저명한 인터넷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당시 해남군수권한대행으로 부터 후대를 위해 이것을 책으로 엮어

달라는 청을 받았고, 전남도가 알게되어 도비로 '어란자료집'을 발간해 주고 뮤지컬도 두 차례나 공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충무공 관련 사업회 등과 일부 지역사회가 "일본인의 유고집에서 주장하는 역사기록을 갖고 명량대첩을 왜곡,폄하하고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짓밟는 또 다른 역사왜곡"이라며 '어란'여인의 등장을 강력하게 반발하자 해남군에서도 꺼림직하게 여기고

별다른 지원이나 대책을 더이상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 2011년 어란 당집을 향토유적으로 지정하였고, 2012년 12월 20일

해남군 송지면 어란마을 뒷산 여낭터(어란 여인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낭떠러지)인근에 <어란 여인 이야기>라는 비석을 300만원을 들여

세웠다고 한다. 

 

비문에는

 

어란여인 이야기

정유재란 때에 일본장수 칸 마사가게는 송지면 어란진에 주둔하던 어느 날 그의 여인인 '어란'에게 출병의 기일을 발설했다.

'어란'여인은 그 사실을 이순신에게 전하여 명량해전의 중요 승인이 되었다. 이로써 '어란'여인은 나라를 구했으나 자신의 연인이

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비관하여 여낭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어느 어부가 그 시신을 거두어 바닷가에 묻어주고

석등롱을 세워 그녀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해남에 근무했던 모 순사의 유고집에 나오는 이야기는 많은 언론의 관심사로 떠 올랐다. 국악뮤지컬과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등, 새로운 이야기들로 발전해 가고 있다. 어란마을의 당집과 여낭, 석등롱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를 이룬다.

 

                                                글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강봉룡원장

                                                                  2012년 12월 20일

                                                                             해남군

 

 

 

 

 

 

(어불도 들어가는 배 타는 곳)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장군의 어란진에서의 내용이다. 

8월24일. 맑다.

아침에 도괘땅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곳마다 텅텅 비었다. 바다위에서 잤다.

8월25일. 맑다.

당포의 보자기(어부)가 피난민의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쳐 들어왔다"고 헛소문을 내었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말인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 곧 목을 베게 하니 군중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8월26일. 맑다.

임준영이 말을 타고와서 급히 보고하는데 "적병이 벌써 이진에 이르렀다"고 했다. 전라우수사(김억추)과 왔다.

8월27일. 맑다.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 있었다.경상우수사 배설이 와서 보는데, 무척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8월28일. 맑다.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 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뒤쫓아 갈두(땅끝마을)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저녁에는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어란포 앞바다 첫 전투에서 이순신은 조선수군의 정유재란 첫 승전이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첫 승첩을 기록하게 된다.) 

 

 

(어불도 도선장)

세계 해전사상 유래가 없는 13대 133의 전함끼리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명량대첩 등 난중일기의 다른 내용은 너무 길어 옮기는 것을 생략한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것은 이순신장군이 어란진에 있다가 벽파진으로  옮겨간 날까지 어란진에 있었던 사실을 이야기하고, 해남 어란진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으로 부상하고 있는 '어란'여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 것이지만 그 사실관계의 진위여부를 떠나 어란이라는 지명이 옛날 어란(於蘭)이라는 여인의 이름을 따서 내려온 것이라고 하는데 어란은 난중일기에도 수차례 나오는 지명으로 조선건국 초기부터 있던 수군의 진이었기에 어란진의 지명에서 무명의 여인에게 어란(於蘭)이라는 이름을 지어준것이 맞을 것이다. 

 

 

 

 

 

 

1597년 9월7일 어란진 앞바다에는 133척의 전함과 보습선, 연락선 등 500여척의 대선단이 집결했었다.

이렇게 조그마한 어촌마을에 무려 500여대가 넘는 왜군의 대함대가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어란진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10일간 머물며 전열을 가다듬은 왜군은 9월16일 이른아침 133척의 전함을 이끌고 어란진을 출발하였고 결국 울돌목에서

이순신장군의 전함 13척에 쌍코피가 터지며 흠씬 두들겨 맞고 결국에 가서 정유재란의 종식을 불러오는 대 참극을 당하게 되는 출발점이다.

 

 

 

어란에는 등대가 2개가 설치되어 있다.

모든 항구는 항구에서 바다쪽을 봤을 때 우측은 하얀등대, 좌측은 빨간등대를 세운다.

그것은  우현표지(右舷標識):바다에서 항구 방면으로 볼 때 항로의 오른쪽에 설치되어 선박이 표지의 왼쪽으로 항해할 수 있음을 표시하는 항로표지로서 IALA해상 부표식으로 홍색등 즉, 붉은색 외관의 등대를 세워야 하고, 좌현표지(左舷標識) : 항로의 왼쪽에 설치되어 선박이 표지의 오른쪽으로 항해할 수 있음을 표시하는 항로 표지로서 IALA해상 부표식으로,백색외관의 등대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IALA : 국제항로표지협회

 

 

건너편 섬은 어불도

 

 

지금 어란은 1종어항이다.

어항(漁港)은 어업 활동의 기지로 이용하는 항구로 어선의 안전한 출입, 정박 등이 가능하고 어획물의 하역과 판매, 처리가 용이하며, 어민의 문화, 후생 시설을 갖춘 어업활동의 근거지로써 어업 기지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연안의 항구를 말한다.

어항은 1,2,3종 어항으로 구분되며, 1종어항은 이용범위로 전국적인 어업 근거지이고 2종어항은 지역적인 어업 근거지이다. 3종어항은 어장개발과 어선대피에 있어 필요한데, 멀리 떨어져 있는 도서나 벽지에 소재하는 어업 근거지이다. 

 

 

1종어항은 그 지방의 어선 수가 60척 이상이고, 합계 총 톤수가 200톤 이상이어야 하고, 외래어선이 연간 100척 이상 이용된 것으로 예상되어야 하며, 2종어항은 그 지방의 어선 수가 20척 이사이고, 합계 총 톤수는 50톤 이상, 3종어항은 그 지방의 어선 수가 20척 이상이고 기상악화시에 긴급대피 가능한 외래어선 수가 20척 이상으로 예상되는 항포구여야 한다고...

 

 

 

해남 처가에 오면 항상 이렇게 어란에 온다.

이곳은 어떤 해남아가씨와의 아련한 추억이 있는 곳으로, 당시 어란진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교사였던 그 해남아가씨와의 사랑을 키운 곳이기에

더 그렇다.

글쓴이가 해남에서 토목관련공사를 할 때 만난 그 해남아가씨는 그렇게 해맑은 어린이들을 가르키는 긴 생머리에 포동포동한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공사를 하다 유치원생들과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해남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한 글쓴이는 어느날 포크레인 작업을 신기해 하는 어린이를 미끼로

접근을 하게되고, 그 해남아가씨는 글쓴이가 당연히 학부모인줄 알고 차 한잔 마실 시간을 가지게 된다.ㅋㅋ

그렇게 찻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글쓴이가 학부모가 아닌것을 알게된 해남아가씨는 글쓴이의 애퓨터 신청에 마지못해 응하게 되고, 두 번째 만남을 대흥사에서 가지게 되며 본격적인 데이트를 즐기게 된다.

 

 

그 후 편지를 보내려니 주소와 전화번호를 얻게되고 두 번째 데이트 이후, 하루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한 번 보낼 때 마다 편지지 10장에 빼곡하게 글을 써서 겉봉투가 잘 안붙혀질 정도로 두툼하게 보내는 이미지메이킹으로

그 해남아가씨의 부모와 해남아가씨를 유혹하였다.

그렇게 100일을 채우려고 했는데, 60일 정도 보내니 그 해남아가씨의 부친이 대체 어떤 놈이 이렇게 매일 이따위 편지를

이렇게 두툼하게 써서 보내는지 얼굴이나 보고싶다고 한 번 와보라고 한단다..ㅎㅎ

 

  

그렇게 그 아가씨의 집에 초대받은 글쓴이는 현장에서 일하던 옷차림 그대로 먼지 풀풀 털고, 땀냄새 풍기며 첫 만남을 갖게되고

1시간여의 점심대접을 받으며 온갖 취조를 당한 뒤에서야 정식으로 교제를 허락받고 자유자재로 그 아가씨의 집에 드나들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하숙집에 돌아와 유일하게 글쓴이가 하는 일은 샤워후 공중전화로 전화하고 편지쓰는 것이 다 였을 정도였다.

그 아가씨 역시 밤 8시 무렵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거의 반사적으로 슬라이딩하며 전화를 받게되고, 그렇게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갔다. 그후.....  

 

 

해가 저물어 간다.

좀 더 있다가 노을을 찍어보고 싶지만, 이제 처가집으로 가 봐야 하기에 여기서 이만 이야기를 끝낸다.

그 해남아가씨와의 이야기는 다음편 해남 땅끝마을 쪽으로 계속 이어지며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더 풀어나갈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한다.ㅎㅎ

 

 

오늘 어란진의 '어란'여인 이야기는 해남 송지면에 사는 박승룡 옹의 집념의 결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제 해남 땅끝마을이 있는 송지면의 자그만한 어촌 어란리와 조선시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장군의 10일간의 어란진 생활,

그리고 명량대첩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의 어란이라는 여인의 활약 등으로 스토리텔링이 만들어 지고 있다.

최근 부친이 일제 강점기 이곳 해남 어란국민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자신은 어란이 태생인 일본인 고니시유이찌로와 동생 고니시전히로씨는

자신들의 비용으로 어란여인 비석 주변에 표지석과 어란 여인상을 세우기로 하였다고 하니, 다음에 그 표지석과 여인상이 건립되면 한 번 들러

다시한번 살펴볼 생각이다.

 

이제 처가집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 땅끝마을에 있는 대한민국 일출의 최고봉 맴섬일출을 보러갈 예정이다.

 

1편 : 앗! 공룡이 탈출했어요/해남 공룡박물관

2편 : 우리 공룡 사냥하러 가 볼까?/해남 공룡박물관

3편 : 보고 서 있는것 자체가 힐링/해남 고천암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트위터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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