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고봉문화제가 월봉서원에서 열립니다./고봉 기대승의 삶과 철학

2013. 10. 31. 07:00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조선시대 최대의 사상로맨스의 주인공 고봉 기대승

 

퇴계 이황과 13년간 114통의 편지로 사단칠정을 논했던 조선시대 최대의 사상 로맨스의 주인공 고봉 기대승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제2회 고봉 문화제가 너브실마을 월봉서원에서 '꼬마철학자 상상학교'를 시작으로 막이 올라, 인문학자와 함께 하는 대화, 인문 연극, 황룡강 저녁놀 캠프 등 '인문학의 향연'이 이틀간 펼쳐진다.

2일에는 서원콘서트(오후 4시), 목판 탁본과 자경설 족자 만들기 등 서원문화 체험행사(오후1시), 어린이 글짓기대회, 철학자의 길 걷기대회 등이 열리며, 고봉학술제를 통해 '호남 시단과 고봉 문학의 형성'에 대한 강의도 있을 예정이다.

이에 제2회 고봉문화제에 맞춰 고봉 기대승 선생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3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며 오늘은 어제 고봉의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광산구 광산동 너브실마을에 이어 2편 고봉선생의 사단칠정 논쟁이 무엇이었으며, 고봉선생을 모신 월봉서원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아마추어다보니 정확하지 않은 표현도 있을 것이지만 전문가적 입장이 아니기에 넓은 혜량있으시길 바란다.

자세한 사항은 월봉서원 홈페이지 참고 바로가기

 

 

 

 

 

 

 

 

월봉서원은 원래 이 자리에 없었다.

월봉서원의 원래 자리는 지금의 신룡동 고봉이 세웠다는 낙암아래에 망천사를 세우며 시작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광산구 산월동 월봉마을 동천으로 옮겼다가 1654년 (효종 5년)에 유림들의 상소로 효종이 월봉이란 서원명을 내리면서 사우와 동·서재, 강당을 갖추었다.

그후, 1868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41년 지금의 위치에 후손들이 `빙월당’이라는 제실을 지었는데, `빙월당’은 정조가 고봉의 학덕을 빙심설월(氷心雪月) 같다고 한데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그후 1978년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 건립에 착수하여 1981년 현재 자리에 월봉서원을 복원하면서 빙월당은 서원의 강당이 됐다.

 

또한 마을 입구엔 고봉 선생의 6대 손인 기언복이 숙종 때 터를 잡은 이래 300년 역사와 학풍을 이어온 애일당이 있으며 1991년 고봉의 13세 후손인 기세훈 이사장이 설립한 고봉학술원이 애일당을 겸하고 있다.

 

고봉(1527-1572) 기대승이 퇴계이황과 사단칠정을 논했던 16세기는 한국의 문예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 면앙 송순 등을 비롯한 조선 성리학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절이었다.

 

고봉은 1558년 32세에 문과 을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하자마자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퇴계 이황을 방문하여 퇴계의 학설을 비롯한 성리학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고, 몇 달 후, 고봉은 퇴계로부터 “논박을 듣고 나서 (나의 생각이)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쳐 보았습니다.” 라는 편지를 받았다. 이에 고봉은 답장에서 “그렇게 고친다면 비록 지난번의 설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제 의견으로는 그래도 불만스럽습니다.”라고 당돌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이제 막 교육직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대학교에 온 32세의 신출내기가 사무관이 환갑을 바라보는 서울대학교 총장에게 당신의 교육정책 이러 이러한 부분이 잘못되었고 이렇게 바꿔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따지러 온 것으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나중에 생각을 정리해서 서찰로 답변을 주고받은 것을 시작으로 퇴계이황과 고봉 기대승간의 13년에 걸친 사단칠정 갑론을박의 그렇게 출발하였다.

 

 

 

여기서 일단 고봉 기대승 선생의 삶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고봉은 행주기씨(지금의 경기도 고양시)로 아버지 기진은 조광조와 도학정치를 소망하다 실패한 동생 기준(기묘 8명현)이 선비들의 사화로 가문이 멸문의 화를 입게 되자 가솔을 데리고 1519년 광주로 피난해 기진의 외가인 나주 오씨 가와 처가인 진주 강씨 가의 도움으로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마을에 정착하였다.

 

고봉은 신룡동에서 1527년 기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했는데, 5세 때부터 침착하고 묵직함이 성인(成人)과 같았으며, 7세 때부터는 글공부를 부지런히 하면서 과제를 읽고 외웠으며, 새벽에 일어나 단정히 앉아 저녁까지 글을 외느라 중얼거리므로, 동복(僮僕)이 그의 뜻을 시험 삼아 물으니 답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이 맛을 알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8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자 3년 상을 마치고 서당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549년 (명종 4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양과에 합격하였고 1555년 (명종 10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여묘(廬墓)살이 하면서 3년간의 상기(喪期)를 마치고 마침내 나이 32세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1558년 (명종 13년)에 문과(文科) 을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월봉서원 전경

 

주로 승문원과 승정원에서 봉직하다 고향으로 낙향하기도 하고 다시 병조 좌랑(兵曹佐郞)ㆍ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직강(直講)을 거쳐 이조 정랑 겸 교서관 교리(吏曹正郞兼校書館校理)에 승진하였지만, 휴가를 청원하여 고향을 찾기를 수차례, 예조 정랑과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을 정도로 관직과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종 22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어 우부승지로 전임된 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고 곧바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체임되었으며, 다시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체임되고 다시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고 오래 되지 않아 체임되었다 1570년 (선조 3년) 봄에 휴가를 청원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 도성의 사대부가 모두 나와 전송하였다한다.

 

 

 

 

 

동재인 명성재(明誠齋)는 월봉서원의 기숙사로 명성재의 명성은 '배움에 있어서 밝은 덕을 밝히는데 성의를 다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듭된 선조의 부름에 모두 질병을 핑계로 사양하다 1572년 (선조 5년)에 종계 변무(宗系辯誣)로 주청 부사(奏請副使)로 뽑히고 이어서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신으로 가는 일이 중하다고 여겨 어쩔 수 없이 조정으로 나가, 공조 참의와 대사간(정3품)에 두루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임하여 체직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행차가 천안군(天安郡)에 이르러 갑자기 볼기짝에 난 종기[臀腫]를 앓다가 태인현(泰仁縣)에 이르러 병이 더욱 위독해지고,, 큰 아들 기효증의 장인 유사(儒士) 김점(金玷)의 집에서 이틀을 유숙하고 46세에 사망하였다.  

 

1573년 (선조 6년) 2월에 나주(羅州)의 관아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光谷) 묘좌(卯坐)의 터(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 너브실 마을)를 가려 장사지냈는데, 고봉이 평소에 지정해둔 곳이었다 한다.

1590년 (선조 23년)에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덕원군(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德原君)에 추증되었다.

 

부인 함풍(咸豐)이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기효증(奇孝曾)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첨정(僉正)벼슬을 지냈고 둘째 기효민(奇孝閔)과 셋째 기효맹(奇孝孟)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한 누이와 함께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선조 30년)때 왜적을 만나 굽히지 않다가 죽었다. (참고자료)국역 국조인물고, 신종우의 인명사전,http://www.shinjongwoo.co.kr/

 

 

동재 명성재에 쓰여진 주련

 

 

 

서재인 존성재(存省齋)도 월봉서원의 기숙사로 '자기를 성찰한다'는 의미라 한다.

 

 

 

존성재에 쓰여진 주련

 

 

월봉서원 묘정비(廟庭碑)는 월봉서원과 고봉 기대승 선생의 연혁이나 관련 인물 등에 대한 내력을 기록한 비석

 

 

장판각(藏板閣)은 월봉서원내 자료를 보관하는 건물로 고봉선생 문집 11권과  판각 474매와 충신당, 명성재, 존성루, 유영루 등의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장판각의 주련

 

 

 

월봉서원 빙월당(氷月堂)은 주강당으로 광주시 기념물 제9호이다.

'빙월'은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빙심설월(氷心雪月)에서 유래한 말로 정조가 하사했다고 한다.

 

 

빙월당의 주련들

 

 

퇴계 曰 四端情也 七情亦情也(사단은 정이다 칠정 또한 정이다.)

고봉 曰 均是情也 何以有四七之異名耶(모두 정인데 어떻게 사단과 칠정의 다른 이름이 있겠는가.)

 

고봉의 업적 가운데 정계에 진출하기 전인 31살에 내놓은 `주자문록’은 당시 학문계에 큰 충격을 줬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는 생전에 700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그 핵심을 주자대전 120권에 담았지만, 워낙 어렵고 방대한 양이라 당시 조선학자들

가운데 다 읽은 이가 없었다고 하는데 새파랗게 젊은 고봉이 주자문록이라는 해설서를 냈으니 학계가 발칵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봉의 학문은 그동안 학계나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에 대한 서신 논쟁은 고봉이 1558년 32세에 문과 을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봉은 주자의 글을 배경삼아 따졌고, 퇴계는 주자의 마음을 가지고 응수했는데, 논쟁의 핵심은

 

순수 도덕 감정인 사단(四端)(사람으 본성인 理로 인의예지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옳지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과

 

 

비도덕 감정인 칠정(七情)(사람의 감정인 氣로)

기쁨(희 喜)

노여움(노 怒)

슬픔(애 哀)

두려움(구 懼)

사랑(애 愛)

미움(오 惡)

욕망(욕 欲)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였다.

 

 

 

퇴계는 고봉의 날카로운 비판에 ‘이치도 (스스로) 움직인다.’며 두 번이나 자신의 논지를 수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봉이 주자학에 머물러 있을 때 퇴계는 주자의 논리보다 주자의 뜻에 서며 주자가 다다르지 못한 것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버려 주자를 넘어섰다고 하니 표면적으로는 고봉이 퇴계에 승리를 거둔 것 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퇴계는 고봉의 주자를 초월해 버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러한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은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으로 다시 논쟁을 이어갔으며, 주리파와 주기파라는 철학집단으로 분류된 다음 동서분당으로 이어졌으니 사상논쟁이 결국 정파싸움으로 변질되어 종묘와 사직이 위태로워지고 국각가 위험에 빠진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정안문은 월봉서원의 내삼문으로 사당인 숭덕사로 들어가는 문이다.

고봉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조용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들어가란 뜻이다.

 

 

숭덕사는 문헌공 고봉 기대승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매년 3월과 9월 춘, 추향사제를 지내고 있다.

 

 

광주를 ‘기고박의 고장’이라고 한다.

'기'는 고봉의 본가인 경기도 고양의 행주발 광주착 기씨이며,

'고'는 광주 압촌마을의 제주 고씨를 말하고,

'박'은 광주 방하동의 충주 박씨 집안을 지칭한다.

고씨는 임진왜란 당시 호남연합의병 대장 고경명과 창평고씨라 부르는 후손을 말하고, 박씨는 호남사림정치를 연 눌재 박상과 영의정 박순 등을 말한다. 기씨는 바로 고봉 기대승과 그 번창한 후손들을 말하며 이들 가문의 영광과 명성이 오랜 세월 동안 광주 3대 성씨로 유지되어왔다.

그후 조선조 성리학 6대가인 기정진, 한말 의병장 기삼연, 을미 호남 창의 대장 기우만 등을 배출하여 광주 전남권에서 드높은 선비정신과 의로움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렇든 ‘기고박의 고장’에 안착한 기씨들은 그후 조선조 성리학 6대가인 기정진, 한말 의병장 기삼연, 을미 호남 창의 대장 기우만 등을 배출하여

광주 전남권에서 드높은 선비정신과 의로움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하였지만, 고봉의 학문은 그동안 학계나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한다.

퇴계학이나 율곡학 등이 후학들의 연구에 의해 풍성해진 것에 비해 46세에 세상을 등진 고봉에겐 제자들이 없었으며, 일제 식민사관이 해방 이후까지 이어져오면서 그의 사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도 한다. 이번 제2회 고봉문화제를 통해 고봉의 사상적 업적에 대해 널리 알게되는 계기가 되어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1편, 조선시대 사상 최대로맨스의 주인공, 고봉 기대승을 찾아서 / 광산구 너브실 마을

2편, 제2회 고봉문화재가 열리는 월봉서원, / 고봉 기대승의 삶과 철학

3편, 기대승의 묘와 생가터를 찾아서/ 2회 고봉문화제

4편, 기쁘게 놀면 어디든 편안치 않으리오 / 제2회 고봉문화제

5편, 늦가을 너브실 마을을 찾아 / 제2회 고봉문화제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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