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여행)해남윤씨 보물창고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2014. 2. 6. 07:05전라남도 견문록/해남 견문록

 

지난해 설날, 해남 처가를 오가면서 포스팅한 땅끝 여행지에 대한 감회가 새롭다.

처가가 해남이다보니 일년이면 명절때마다 두 번 오게되는 해남. 하지만 올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해남처럼 문화, 유산, 여행, 관광지가 많은 곳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는 것으로 해남은 그야말로 남도 문화유산의 보고에 관광 일번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 해남 여행은 지난해 땅끝 여행에 이은 두번째 해남 여행시리즈로 첫번째 들른 곳은 해남군 삼산면에 있는 고산 윤선도 유적지이다.

이곳에는 고산유물전시관과 고산 윤선도의 사랑채 녹우당과 종가집, 그리고 조상의 묘와 사당 등이 있는 곳으로 아직 총각이었을 때 공사를 위해

수없이 들락거리던 곳이지만, 당시만 해도 먹고 사는 일에 바빠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곳이다.

고산 윤선도에 대한 이야기는 녹우당편에서 하기로 하고 오늘은 해남윤씨 보물창고인 고산 유물전시관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로 한다.

 

 

고산 유적지를 2005년엔가? 설날 처가집을 가면서 들른 적이 있다.

당시에는 매표소가 없었지만, 근 10년만에 들렀더니 고산유적지는 놀랄만큼 바뀌어 있었다.

우선 넓지막한 주차장이 생겼으며 주차장 입구에 멋들어진 정원을 만들어 산책하기 좋게 만들어 놨다.

또한, 유물전시관이 생겨 고산과 고산 후손들의 유물을 한 군데 모아 놓았으며, 해남윤씨에 대한 가풍까지 느끼게 해 주었다.

 

입장료는 어른 1,000원(20인 이상 단체 700원),18세 이하 청소년과 군인은 700원(20인 이상 단체 500원)이다.

관람시간은 09:00~18:00,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이며 마감시간 1시간 전까지 입장이 허용된다.

입장료는 카드결제도 되고 현금영수증도 발급한다.

입장료 할인은 보통의 지자체 운영 입장료 할인과 대동소이하다.

 

 

올해 설날은 한 겨울이지만 입춘이 머지 않은 관계로 날씨가 매우 따뜻해 두꺼운 겨울 점퍼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예년 같으면 낮 기온이 5도 정도로 목이 움추러들 정도로 추웠겠지만, 설날과 설날 다음날 까지는 낮 기온이 20도를 웃돌아 

약간의 경사진 오르막만 걸어도 겨드랑이에 땀이 베일 정도로 따스했다.

마치 가을하늘처럼 파란 하늘은 푸르른 비자나무 숲으로 둘러쌓인 빛 바랜 건물들과 멋진 조화를 이뤄 사진찍기에도

매우 좋은 날이었다.

 

 

고산유적지가 있는 이곳은 대흥사 들어가는 도로에서 바라보면 참으로 아늑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한 곳이다.

고산은 시조시인이지만 풍수에도 능해 자신의 묘를 직접 택할 정도였다하니 집 터 정도야 멀리서 봐도 '아~ 좋다!' 할 정도로 아늑한 곳이다.

삐죽 튀어나온 곳도 없고 그렇다고 야박하게 들어간 곳도 없는 두리뭉실한 곳. 보고있노라면 마음의 평화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곳이다.

 

이곳은 해남윤씨 어초은파 600년 역사가 한 자리에 있는 곳으로 어초은 묘와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이 있으며, 효종이 사부였던

고산 윤선도에게 하사한 수원집을 1668년 고산이 해남으로 오면서 사랑채를 배로 옮겨와 다시 지은 녹우당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해남윤씨 보물들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관람순서는 고산유물전시관-녹우당-고산사당-어초은사당-어초은묘-

비자나무 숲길-추원당 순으로 보면 좋다.   

 

 

고산유물전시관은 2011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을 정도로 자연, 녹우당과 잘 어울리는 멋이 있다.

건축양식은 ㄷ자 형태로 이루어져있으며 대나무 정원도 있고 공간배치 또한 아주 탁월하다.

 

한 가문의 유물전시관치고는 역대급 전시관이지 싶다.

아마도 3,000점이 넘는 유물과 수많은 국보, 보물들을 전시한 곳이라 더 정성을 들인 모양이다.

 

 

들어가는 입구가 1층 특별전시실이다.

이곳은 공재 윤두서와 아들, 손자의 작품이 전시된 곳으로 3대에 걸친 화풍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공재 윤두서(1668~1715)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며, 그림을 잘 그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등과 더불어 조선의 삼재(三齋)로 추앙받고 있다.

고씨화보.당시화보를 기본으로 스스로 스븍, 발전시켜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한 인물로 풍속화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대표작은 [윤두서 자화상]이 있다.

 

낙서 윤덕희(1685~1766)는 윤두서의 아들로 문인화가이다. 특히 말과 신선 그림을 잘 그려 쌍절이라 불리었다.

82세까지 장수하면서 풍부한 작품활동을 하였고 약 110점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청고 윤용(1708~1740)은 윤두서의 손자이자 윤덕희의 차남이다.

1735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33세의 젊은 나이에 일찍 죽었다.

산수화에서는 남종화풍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풍속화에서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보인다

 

 

 

 

특별전시실을 나서 지하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겨울 따스한 햇살이 스며든다.

녹우당이 보수공사중이어 한동안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오늘은 개방되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 반갑기만 하다.

여기까지 와서 윤선도의 사랑채를 못 보고 가면 얼마나 억울한가?

 

 

 

 

엘리베이터 위를 쳐다보곤 깜짝 놀랬다.

바로 윤두서의 손자 윤용의 미인도와 천장의 자연채광이었다.

지하1층 로비에 쏟아지는 햇빛과 미인도와의 절묘한 조화.

예술적가치와 실용적가치를 잘 섞어 놓은 건축미는 윤용의 그림을 너무 잘 살려 주었다. 

 

 

 

지하1층 유리통로를 지나면 1,2전시관이 나온다.

좌우로 대나무 정원이 잘 꾸며져 있어 한 여름으로 착각하게 되는 곳이다.

 

 

오른쪽 1전시실로 들어가 좌측으로 나오는 구조로 2전시실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나온다.

 

 

1전시실은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사대부가의 삶에 대하여 보물급 고문서와 서책으로 알아보는 공간이다.

 

 

해남 윤씨는 고려 중기 윤존부(尹存富)를 시조로 하는데, 시조 이후 7세조까지는 이름만 전해올 뿐 출생지, 거주지, 묘소에 관한 기록이 없으며

고려말 공민왕 때 사온직장(司 直長)과 명동정(沒正)을 지낸 8세조 윤광전(尹光琠)부터 기록이 이어지고 있다.

8세조 이래로 전남 강진 일대가 해남 윤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이어왔던 점에서 8세조 윤광전부터 강진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고산 윤선도의 고조부인 12세조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이 결혼으로 강진에서 해남으로 옮겨오면서 해남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는데, 어초은 윤효정은 해남지역의 향리로 당대의 거부였던 해남 정씨 귀영의 외동딸과 결혼하였고 그의 전 재산을 물려받아 일약 해남의

거부가 됐다.

150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과거보다는 교육에 힘써 최부와 함께 해남지역을 학문과 예의 고장으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그는 많은 재산을 털어 난민을 구휼하고 세금을 대납하여 죄인을 방면케 하는 이른바 개옥문(開獄門)을 세 차례나 하여 적선지가(積善之家)란

칭송을 들었는데, 이때부터 명문가 해남윤씨의 기틀이 잡혔고 관향(貫鄕)도 해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어초은 윤효정 이후 윤구, 윤복, 윤흥중, 윤의중, 윤유기,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여 해남윤씨 번영기를 이루었다.

큰아들 윤구는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 3걸로 이름을 날렸으며, 성균관 사성을 역임했고,

막내아들 윤복은 안동부사, 사헌부 지평,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윤구의 두 아들 중 윤홍중은 예조 정랑과 영광군수를 지냈으며, 둘째아들 윤의중은 평안도 관찰사, 공조판서, 예조판서, 좌참찬 등의

벼슬을 지내고 1559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윤흥중의 둘째아들인 윤유기는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윤유기의 대를 이은 윤선도는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효종의 사부를 비롯 많은 벼슬을 거쳤고, 유배와 은거생활동안 창작한 시가문학은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과 더불어 오늘날 국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위치에 있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뛰어난 그림과 글씨로 이름을 높였으며, 실학의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해남윤씨는 이렇게 12세조 어초은 윤효정 이후로 해남에 뿌리를 내리고 중앙에 진출하여 대대손손 정치, 학문, 예술, 경제 등의 각 분야에서

조선문화를 대표하는 가문이 된 것이다.

 

 

녹우당 현판 및 윤효정, 윤복, 윤선도 등 윤씨가의 교지들이 전시돼 있다.

 

 

고산 윤선도 존영

 

 

1전시관은 위의 설명외에도 해남윤씨가의 삶의 터전 녹우당에 대한 설명과 윤선도의 가훈, 녹우당을 이어온 사람들 등

해남윤씨 면면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전각에 조예가 깊었던 공재 윤두서와 후손들이 사용하던 도장.

 

 

서죽은 대나무를 가늘게 깍아 막대기로 만든 점술구로 주역에 능한 윤두서가 64괘 풀이로 점을 쳤다고 한다.

 

 

고산 윤선도가 효종의 왕릉인 영릉의 자리를 정할 때 사용했던 나침반

 

 

녹우당의 모습들

 

 

해남윤씨 종가음식의 모습도 볼 수 있고...

 

 

해남윤씨 가통을 이어 온 고산의 8세손 종부 광주이씨의 작품 규한록과 고산의 12세손 종부의 유서, 근현대 녹우당 중흥조 윤정현을 기리는 공간.

 

 

윤선도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곳.

윤선도는 조선중기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송강 정철이 가사문학의 대가였다면 윤선도는 시조문학의 대가이다.

철따라 바뀌는 자연의 모습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등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선비의 생활과 서정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 선비시조의 최고봉이자 산수 미학의 절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침 스크린에 윤선도의 대표작 오우가 나오고 있다.

오우가는 고산문학의 대표작으로 윤선도가 56세때 해남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에 들어 있는 6수의 시조다.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을 다섯 벗으로 삼아 서시(序詩) 다음에 각각 그 자연물들의 특질을 들어 자신의 자연애(自然愛)와 관조를 표백하였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시조문학의 백미이다.

 

오우가(五友歌)

 

내 버디 몃치나 하니 水石(수석)과 松竹(송죽)이라

東山(동산)의 달 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삿 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

 

구룸빗치 조타 하나 검기랄 자로 한다

바람 소래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츨 뉘 업기난 믈뿐인가 하노라

 

고즌 므스 일로 퓌며셔 쉬이 디고

플은 어이 하야 프르난 닷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산 바회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곳 피고 치우면 닙 디거 

솔아 너난 얻디 눈서리랄 모라난다

九泉(구천)의 불희 고단 줄을 글로 하야 아노라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곳기난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난다

뎌러코 四時(사시)예 프르니 그를 됴하 하노라

 

쟈근 거시 노피 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밤듕의 光明(공명)이 너만하니 또 잇나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벋인가 하노라

 

 

윤선도는 음악을 사랑해 시조 자체가 노래를 부르기 위해 지었으며 악기도 잘 다뤄 실제로 거문고도 튕겼다고 한다.

윤선도의 거문고는 녹우당에 지금도 전해지고 있으며, 연주자들과 어울려 작곡도 했다.

또한 거문고의 제작과 사용 방법 등이 담긴 희명정축이라는 책도 전해지고 있다.

 

 

윤선도는 시조시인이지만 조경가 이기도 하다.

보길도의 부용동, 해남이 금쇄동과 수정동에 조성된 원림은 원(園)과 림(林)의 자연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터와 정자를 배치했다.

 

윤선도는 풍수에도 능해 자신의 묘자리를 명풍수가이자 친척인 이의신에게서 뺏은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공재 윤두서의 생가도 직접 터를 잡았을 정도며, 의술도 뛰어나 보약, 건강주의 처방과 질병 퇴치를 위한 약방문도 썼다.

버짐을 없애는 선창약, 회충약, 해수병 치료제 해수약, 소의 전염병 치료제 우역신방 등 의술의 실용화에도 힘썼다.

 

 

윤선도에 이어 고산의 손자인 공재 윤두서의 전시실로 가 본다.

 

 

이 그림으로 공재는 많이 알려져있다.

바로 공재 윤두서 자화상이다.(국보 제240호)

 

당시에 글 쓰는 선비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정면상을 그렸다는건은

놀라울 정도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화면가득 얼굴만 그리고 머리 윗 부분은 과감히 생략해버린 도발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어느 화가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머리 윗 부분을 날려버릴까?

현대에 이르러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싶다.

또한, 금새라도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에서 늘어뜨린 수염까지도 흔들리게 보일 정도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박학하고 세상을 꿰뚫어 보는 시선을 가진 자신이 당쟁의 혼란스러움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고독을 이 자화상은 보여주고 있다. 즉, 세상의 불행함속에서도 꿋꿋하게 선비의 길을 가고자 했던 선구자의 마음을

담아낸 것이다.

 

 

그는 당시 최초로 백성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으며,

풍속화의 시초가 된 공재의 화풍은 아들 낙서 윤덕희와 손자 청고 윤용에게로 이어졌다.

 

 

 

공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림을 배우지 않고 중국에서 전해져 온 고씨화보와 당시화보 등을 놓고 그림을 익혔다고 한다.

남북조시대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 백여명의 대가들의 그림이 실린 고씨화보는 그림의 특징까지 세세하게 쓰여있어

윤두서가 그림공부를 하기에 최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고씨화보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연습을 했지만, 대상을 직접 관찰하고 사생하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노력이 민중의 생활상을 그리는 것에 나타나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그의 시문학과 실학정신은 외증손자인

다산 정약용에게까지 이어졌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 녹우당을 드나들며 학문을 넓혔고 윤두서 자화상을 보고 자신이 외가와 닮았다고 했을 정도라고 한다.

 

 

윤두서의 화풍은 그의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에게까지 이어졌다.

이 그림은 미인도로 윤두서의 손자인 청고 윤용의 작품으로 당시 부녀자들의 신분과 복식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윤용은 산수화에서 남종화풍 아버지 윤덕희의 영향을 받았고 풍속화에선는 할아버지 윤선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공재 윤두서가 그린 동국여지지도(보물 제481-3호)

세로 112㎝, 가로 72.5㎝. 장지(壯紙)에 그린 채색 필사본으로 지도의 윤곽은 정척(鄭陟)과 양성지(梁誠之)의 「동국지도」와 같은 유형으로 추정

되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의 「조선팔도지도」와 같다.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의 유로가 부정확하나 한강·낙동강·금강·대동강 등의 유로는 상세하고 정확하며, 태백산맥·소백산맥·낭림산맥·함경산맥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교통로·영(營)·목(牧)·부(府)·군(郡)·영(令)·감(監)·첨사(僉使)·만호(萬戶)·성(城) 등이 표시되어 있고, 각 부·군·현에서 경도(京都)까지의 일정이 기록되어 있다. 주변 도서가 상세히 그려져 있고, 육지 및 도서 상호간의 연결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영조 때 정상기(鄭尙驥)가 만든 「동국지도」 이전의 지도이며, 정척·양성지의 「동국지도」 유형에 속하는 지도로서, 작자가 화가인 만큼 지도가 섬세하고 채색도 아름답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약 150년 정도 앞서 제작된 것으로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채색이 매우 아름다우며 윤두서의 실학자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공재 윤두서가 그린 일본여도(보물 제481-4호)

윤두서는 「동국여여지도」·「중국여도」·「일본여도」를 그렸으나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여도」만이 11대손 윤형식(尹亨植)가에 전한다.

일본여도는 숙종이 48인의 첩자를 일본에 보내 수집해온 정보를 수집해 만들었다 하는 설명이 있다고 한다

작가 김완식은 이러한 일본여도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 <일본여도>를 썼다고 한다.

<일본여도>는 전남 해남에 소재하는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에서 발견된 일본여도를 소재로한 역사소설이다.

 

 

이제 2전시실을 나와 1층 로비의 문을 통해 녹우당으로 가서 해남윤씨 600년의 역사를 만나보는 시간이다.

따뜻한 날로 인해 마치 한 여름 대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나서는 듯 하다.

 

(해남땅끝 여행기) 

  1편 : 앗! 공룡이 탈출했어요/해남 공룡박물관

  2편 : 우리 공룡 사냥하러 가 볼까?/해남 공룡박물관

  3편 : 보고 서 있는것 자체가 힐링/해남 고천암

  4편 : 정유재란 이순신장군 첫 승첩지/해남 어란진

  5편 : 대한민국 일출의 최고봉/땅끝마을 맴섬 일출

  6편 : 우리 모노레일 타고 가 볼까?/땅끝전망대

  7편 : 땅의 끝, 여기서 뒤 돌아서면 그것이 바로 시작이야/땅끝탑

  8편 : 땅끝에서 삼남길을 따라 한양까지 가 볼까?/삼남길

  9편 : 땅끝에도 하루에 두 번 길이 열리는 신비의 섬이 있다./땅끝 대죽도

10편 : 해남아가씨의 사랑이야기가 있는 송호해변/송호해수욕장

11편 : 자연과 예술이 하나가 된 땅끝조각공원

12편 : 땅끝 사구미 해변에서의 사랑이야기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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