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여행)초록비 쏟아지는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

2014. 2. 7. 07:05전라남도 견문록/해남 견문록

 

초록비가 내린다는 녹우당은 해남윤씨 어초은파를 완성한 윤선도의 사랑채 이름이다.

본채는 사랑채 뒤편에 ㅁ자 모양으로 있는데 요즘은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모두 합해서 녹우당이라 부른다.

녹우당 뒤편의 고산사당, 어초은사당, 어초은 묘, 추원당 등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모두 합해서 녹우단이라고도 한다. 

효종이 대군시절 자신의 사부였던 고산에게 녹우당을 하사했는데, 고산은 82세가 되던 1668년 경기도 수원 자택의 녹우당을

배로 운반해서 해남 종가집 앞에 사랑채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채는 윤선도의 4대조부 어초은 윤효정(1476~1543)이 강진에서 해남으로 장가와 이곳에 터를 잡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대략 151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이정도면 전라도 최고(崔古)의 고택임은 분명할 것이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을 나와 녹우당으로 가는 길은 정자옆으로 난 길로 나와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한다.

겨울이 한참 기승을 부려야 할 설날이지만, 햇빛만큼은 봄처럼 따스하게 느껴지는 고즈넉한 날이었다.

 

 

멀리 녹우당이 보이고 상징처럼 500년도 넘은 은행나무가 거대한 몸집에 햇빛을 가득 받고 있었다.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시비

 

[春詞]

우는 것이 뻐꾹샌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어촌의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맑은 깊은 연못에 온갖 고기 뛰논다

 

[夏詞]

석양이 좋다마는 황혼이 가까웠도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이 솔 아래 비껴 있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푸른 나무숲 꾀꼬리 소리 곳곳에 들리는구나

 

[秋詞]

강촌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고 맑은 물에 실컷 즐겨 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인간세상 돌아보니 멀도록 더욱 좋다

 

[冬詞]

물가에 외롭게 선 솔 홀로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험한 구름 원망 마라 인간세상 가린다

찌그덩 찌그덩 어야차

파도 소리 싫어 마라 속세 소리 막는도다

 

고산이 65세때(1651년 효종2)벼슬을 버리고 보길도로 들어가 51세때 만들어 놓은 부용당에서 한적한 나날을 보내며 지은 시다.

봄 노래(春詞)·여름 노래(夏詞)·가을 노래(秋詞)·겨울 노래(冬詞)로 나뉘어 각각 10수씩 모두 40수로 되어있다.

고려 때부터 전하던 <어부가(漁父歌)>를 이현보(李賢輔)가 9장으로 고쳐 지었고, 다시 윤선도가 시조의 형식에 여음만 넣어 완성한 것이지만, 

이현보 한시구(漢詩句)의 어의(語意)나 어음(語音)에 상응하는 우리말로 재해석해 어부의 생활을 아름답게 나타냈다.

 

 

가을끝무렵에 오면 더 아름다운 녹우당.

500년도 넘은 이 은행나무는 윤선도의 4대조부 어초은 윤효정이 아들의 진사시 합격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기념수다.

지금도 아이들을 낳으면 자신의 정원에 나무를 심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흔했던 일인 것 같다.

 

 

10여년 전 추석에 들렀을때는 노란 은행나무와 주변에 떨어진 은행잎으로 녹우당은 장관이었다.

녹우당의 이름이 집 뒤편 비자나무와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릴때 푸른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녹우당이라 지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산책길에 비자나무숲과 대숲을 보면서 과연 명불허전이라 생각했다.

 

 

녹우당은 안채가 보수공사중이었다.

그래서 사랑채인 녹우당까지 입장이 통제되었는데 설날이라고 공사가 쉬는 틈을 타 녹우당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녹우당을 빙돌아 문간채들이 있고..

 

 

가운데 자그마한 정원을 끼고 문간채가 돌아간다.

 

 

 

350년도 넘은 녹우당은 사적 167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녹우당 현판은 공재 윤두서의 절친인 옥동 이서의 글씨다.

한국적 서체라 할 수 있는 동국진체(조선의 참된 글씨로 윤두서와 이서가 창시)로 쓴 현판으로 남도의 대표적 명문가로 전통을 꿋꿋하게 지켜온

녹우당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녹우당은 집앞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데 집뒤의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운업 현판은 '운'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고 '업'은 일이나, 직업, 학문, 기예의 뜻을 지니고 있어 늘 곧고 강직한  선비라는

뜻으로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 한다.

 

한시 현판은 졸재 윤행의 11대 손인 나산 윤성호가 쓴글로 어초은 윤효정의 은덕을 나타내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정관 현판은 선비는 조용히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의 세계를 살펴 고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중일때 처가인 해남윤씨 가문의 녹우당을 자주 드나 들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수 많은 책들을 보며 학문을 넓혔고 윤두서 자화상을 보고 자신이 외가와 닮았다고 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렇듯 녹우당은 고산 유물전시관으로 유물들이 모아지기 전에는 해남윤씨 가문의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고산 윤선도는 유배생활을 하면서 당시 사대부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음악, 미술, 의학, 천문, 지리, 점성술 등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구축했는데, 그 많은 책들은 모두 녹우당에 있었다.

이러한 책들은 후손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윤선도는 기대아서[寄大兒書]라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글]로 후손들에게 가훈을 남겼다.

1. 의복이나 안장이나 말(馬) 등 몸을 치장하는 모든 것을 구습을 버리고 폐단을 없애야 한다.

1. 노비(奴婢)의 신공(身貢)은 정해진 양만 받아야 하며, 가난한 자는 덜어주고 부자는 더하지 않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아라.

1. 노비는 잘 살펴 가난하게 살거나 우리들에게 원한을 품는 일이 없게 하라.

1. 대운력(大運力)을 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타 자잘한 잡일이나 일반적인 심부름은 집안의 노비를 시키고 호노(戶奴: 별도로 가정을 가지고 밖에서 사는 집안의 노비)는 부리지 말도록 하여라. 그들에게는 여유를 주어 그들의 하는 일에 열중하도록 하여 즐거움을 갖도록 해야 한다. 동리 사람들은 더욱이 자주 부려서는 안된다.

1. 기사(祈嗣: 아들 낳기를 비는 것.)에 관한 것은 반드시 입문(入門: 醫學入門)의 구사조(求嗣條)와 구사진전(求嗣眞詮)으로 위주하여 조심히 행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

1. 재산을 이용해 장사하지 마라. 절대 판매는 네가 먼저하지 말라. 형제를 위한다 하여 부형(父兄)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1. 비록 배짐(船卜)이라 하여도 노비를 선격(船格: 배를 부리는 곁꾼)으로 앙역노(仰役奴)이외에는 모두 때에 따라 조정해서 곁꾼의 품삯을 지급하여라.

1. 소학(小學)은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서 학자는 당연히 이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 평생동안 언어와 문자간에 너희가 부지런히 힘써야 하는 것이니 이제 다시 번거롭게 말하지 않겠다. 때로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가로이 소학(小學)을 보면 반드시 새로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전을 번갈아 가면서 자세히 보면 신심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있을 것이다. 이는 모두가 일생을 두고 힘써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우리 가문의 흥성과 멸망이 이 한 장의 종이에 있으니 절대 범연히 보아넘기지 말아라. 그리고 손자아이들에게도 명심해서 읽도록 하여 잊지 않도록 하여라.

 

 

고산은 효종이 이르되 “윤선도는 아첨을 해서 뜻을 이루는 자가 아니다.”고 할 만큼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며

이러한 성품 때문에 고산의 정치인생은 영광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42세에 별시에 급제하여 인평대군과 봉림대군(효종) 등 두 왕자의 사부가 되었으며,

효종 즉위 이후에는 성균관 사예와 예조참의를 역임했다.

하지만, 30세 때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북 경원으로 유배되었으며, 이후 서인과의 당쟁과 예송 논쟁으로 유배를 반복했다.

관직생활 10년, 유배 20년, 은거 25년이 그의 삶의 질곡이었지만 평소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윤선도는 결국 숙종대에 이르러 충헌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아 후세에 더 큰 평가를 받았다.

 

음악을 사랑하고 세상과 사람 그리고 자연을 노래한 시인이었던 윤선도.

별을 헤아리고, 풍수에도 뛰어났으며 의학에도 밝았던 윤선도.

과연 박문다능왈헌(博文多能曰憲학문이 밝고 재주가 많다)의 표상이다.

 

나중에 금쇄동편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윤선도의 묘는 총명한 수재가 나와 문장과 예술로서 명성을 날리고 부귀를 다한다는 묘자리라고 한다.

아마도 해남 윤씨 어초은파들이 윤선도 이후 정치가나 고관대작보다는 학자나 예술가가 많이 배출되고 거부가 많이 나온 것도 묘자리 덕이라고

하니 금쇄동에 있는 윤선도 묘는 후참에 꼭 들러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윤선도(尹善道)

한성부 연화방(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부정 유심의 아들로 출생

6세에 입학,

8세에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 해남 윤씨 어초은파 대종을 이음.

11세에 산사에서 독서.

17세에 남원 윤씨와 결혼하고 진사초시에 합격.

20세에 승보시에 장원 급제하고 향시에 합격.

22세에 양모(養母) 구씨의 상을 당함.

23세에 생모(生母) 안씨의 상을 당함.

26세에 진사 급제, 겨울에 생부(生父) 유심이 병으로 눕자 임종시까지 극진히 간호함.

30세에 당시의 권신 이이첨을 탄핵하는 병진소를 올리고 절도에 안치되는 처분을 받음.

31세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됨.

32세에 겨울에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됨.

33세에 양부(養父) 유기의 상을 당함.

37세 3월에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 해남에서 두문독서함. 4월에 의금부도사에 취임, 7월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감.

39세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안 나감.

40세에 안기찰방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음.

42세 봄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고 3월에 이조판서 장유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됨.

43세에 사부와 겸임하여 공조좌랑에 제수됨.

44세에 병으로 공조좌랑을 사직. 10월에는 별시 초시에 2등 합격. 12월 특명으로 공조정랑을 제수받고 사부도 겸직하게 됨.

45세 6월 특명으로 호조정랑 제수받고 총융랑 겸함. 9월 호조정랑 사직 해남으로 돌아감. 11월 형조정랑을 제수받음 숙사를 하면서 사직함.

46세 3월 한성서윤으로 승진됨. 11월에 병으로 한성서윤과 겸임하던 왕자사부를 모두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감.

47세 봄 증광향해별시 장원 급제후 예조정랑. 7월 관서경시관, 9월 세자시강원문학. 재상 강석기가 모해하니 식구들을 데리고 해남으로 돌아감.

48세 봄 성산현감으로 좌천됨.

49세 7월 양전의 득실을 논하고 등급을 낮출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보고되지 아니함. 11월에 성산현감을 사임하고 귀향함.

50세에 병자호란이 발생.

51세 1월 향족들과 가복들을 규합한 의병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에 감. 강화도가 이미 함락되어 왕자들이 포로로 붙잡히고 임금도 영남으로   

         몽진했다는 소문에 배를 돌려 임금을 따라가던 중 해남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은거하기로 함.

         제주도로 항해 중 태풍을 피하다가 산수가 수려한 보길도 발견함. 보길도 황원포에 내려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낙서재를 지어 우거함.

52세 봄 대동찰방을 제수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음.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됨.

53세 2월 풀려남.

54세 해남에 금쇄동과 문소동을 세움.

55세 <금쇄동기 金鎖洞記>를 지음.

56세 시조 <오우가 五友歌> 6수 등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를 지음.

63세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세자로 있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요체를 논한 기축소<己丑疏>를 올림.

65세 가을 보길도 부용동(芙蓉洞)에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를 지음.

66세 1월 성균관사예, 3월 동부승지 제수받고 두 번씩 사퇴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아니함. 4월 정언 이만웅이 탄핵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사직소를 올려 허락을 받고 해남으로 내려 가려다 효종의 만류로 고산(孤山)에 머뭄.

         5월 고산에 머무는 동안 시조 <몽천요삼장 夢天謠三章>을 지음. 8월 예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사퇴소를 올림. 그러나 허락받지 못하고,

         속히 취임하라는 특명에 따라 취임함. 10월에 <시무팔조 時務八條>를 올린 뒤 사직하고 양주의 고산촌에 머뭄.

         11월에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렸다가 관직을 삭탈하고 문외로 출송하는 조치를 받고 서울을 떠나 해남으로 돌아옴.

67세 2월 보길도 부용동에 가서 세연정을 증축하고, 석실, 회수당, 무민거, 정성당 등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침.

69세 10월 <시폐사조소 時弊四條疏>를 올려 당시 조정에서 시행하려던 섬 주민들을 몰아내고 어부들을 강화도로 이주시키는 일 등의 부당함을

         말하여 중지시킴.

71세 가을 중궁의 병으로 소명을 받아 상경하여 내국에서 의약함. 겨울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음.

72세 3월 왕의 특명으로 공조참의를 제수받음. 4월 정원의 옹폐를 공박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 남인 정개청의 서원을 철폐하려는 데

         대하여 그 부당함을 논한 것이 문제가 되어 서인 송시열과 삼사의 탄핵을 받고 8월에 삭직됨.

73세 5월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첨지에 제수되어 효종의 산릉 간심에 참여하였는데, 그가 추천한 여주의 홍제동과 수원 두 곳 가운데 수원이

         채택되었다가 취소되고 건원릉 안 건좌 언덕이 채택되면서 파직되고 추고됨.

74세 인조계비의 복제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이 대립하여 서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는데, 윤선도는 남인으로서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을 배척하고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삼수군에 안치되는 조치를 받음. 

75세 4월 북청으로 이배. 5월 북청 이배의 명이 취소되었으며, 6월 13일에는 도리어 위리안치(圍籬安置)의 명이 더해짐.

76세 3월 28일에 위리(圍籬)를 철거하였다.

79세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 백운산 아래 옥룡동에 거처함. 81세 7월 현종의 석방 명으로 8월에 해남으로 돌아와 9월에 보길도 부용동으로 들어감.

82세에 무민당 동쪽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곡수라고 명명함.

84세에 일백 곡의 벼를 내놓아 의곡을 설치함.

85세(1671, 현종12) 6월 11일, 부용동 낙서재에서 세상을 떠남. 9월 22일, 문소동 옛 터에 묻힘.

       현종 13년(1672) 12월에 윤선도의 직첩을 돌려줌. 숙종 1년(1675) 2월 이조판서를 추증. 영조 3년(1727)에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됨.   

 

(해남두륜산권 여행기)

1.해남윤씨 보물창고,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해남땅끝 여행기) 

  1편 : 앗! 공룡이 탈출했어요/해남 공룡박물관

  2편 : 우리 공룡 사냥하러 가 볼까?/해남 공룡박물관

  3편 : 보고 서 있는것 자체가 힐링/해남 고천암

  4편 : 정유재란 이순신장군 첫 승첩지/해남 어란진

  5편 : 대한민국 일출의 최고봉/땅끝마을 맴섬 일출

  6편 : 우리 모노레일 타고 가 볼까?/땅끝전망대

  7편 : 땅의 끝, 여기서 뒤 돌아서면 그것이 바로 시작이야/땅끝탑

  8편 : 땅끝에서 삼남길을 따라 한양까지 가 볼까?/삼남길

  9편 : 땅끝에도 하루에 두 번 길이 열리는 신비의 섬이 있다./땅끝 대죽도

10편 : 해남아가씨의 사랑이야기가 있는 송호해변/송호해수욕장

11편 : 자연과 예술이 하나가 된 땅끝조각공원

12편 : 땅끝 사구미 해변에서의 사랑이야기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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