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여행)녹우당 비자나무 숲길에서 녹우(綠雨)를 느껴본다.

2014. 2. 10. 07:05전라남도 견문록/해남 견문록

 

해남윤씨 어초은파 종가인 녹우당을 나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비자나무 숲과 어초은 묘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윤선도의 사랑채 녹우당까지 보고 돌아가나 녹우당 여행의 진미는 바로 녹우당 뒤편의 비자나무 숲이다.

입구 충헌각에서 100m정도의 돌달길을 딸 약 500m 오르면 고산사당과 어초은 사당이 있고 차례로 비자나무 숲이 나온다.

비자나무 숲 사이 양지바른 곳에는 해남윤씨 어초은파 시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묘가 있다.

과연 비자나무 아래서 초록비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녹우당 샛문을 나와 산쪽으로 오르면 330살이 훌쩍 넘은 거대한 해송이 나온다.

그 옆 차량있는 곳은 고산사당이다. 어초은 사당과 비자나무 고산사당 좌측길로 계속 올라간다.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가 윤효정 아들의 진사급제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수였다면

이 나무는 훗날 자라 사당을 지켜달라는 염원이 담겼을까?

 

 

고산사당은 솟을 삼문에 사당 한 동으로 아주 단촐하다.

고산 윤선도(1587~1671)를 배향한 불천지위(不遷之位)사당으로 고산은 영조3년(1727)에 불천지위로 지정됐다.

불천지위는 안사당에서 4대까지 모시고 묘로 가는 대신 영구히 사당에서 모실 수 있게 하고 있으며, 보통 나라에서 공이 인정될 때 허락한 신위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6월 11일 기제사를 지낸다.

 

 

왼쪽은 녹우당의 안채 담장. 오른쪽은 고산사당의 담장.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보이는 곳은 해남 윤씨 어초은파 시조 어초은 윤효정의 사당.

 

 

어초은 사당도 고산 사당과 마찬가지로 솟을 삼문에 사당 하나의 단촐한 모습이다.

종가에서 모시는 사당은 대개 이런 모습으로 기억되는데 출입문이 하나인 경우와 3개인 경우로 나뉜다.

어초은 사당은 어초은 윤효정(1476~1543)을 배향하고 있는 불천지위 사당이다.

어초은은 덕음산 아래 이곳 백련동에 처음 터를 잡고 해남윤씨 어초은파를 중흥시킨 인물로 사당뒤에 어초은 묘가 있다.

윤효정은 '삼개 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라 불리게 할 정도로 적선을 실천하며 가문을 빛내게 했다고 한다.

 

삼개옥문적선지가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해 옥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을 들은 윤효정은

관아에 찾아가 백성들의 세금을 대신 내어주고 풀어주는 일을 세 번이나 했다.

이 일로 인하여 해남윤씨가는 삼개옥문적선지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매년 음력 11월 15일 시제사를 지낸다.

 

 

 

고산 사당 옆으로 무엇인가 짓고자 터를 닦고 있다.

 

 

고산 사당과 나란히 있는 어초은 사당

 

 

어초은 사당 뒤로 난 산책길이 바로 비자나무 산책로다.

이곳 비자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241호 지정돼 국가의 관리를 받고 있다.

녹우당이라는 이름 자체가 연동에 바람이 불면 집 뒤 비자나무숲에서 나뭇잎끼리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마치 빗소리처럼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동리 비자나무 숲의 조성시기는 대략 530년전 이라고 한다.

해남 윤씨 어초은파 선조 한 분이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을 남기자

후손들이 앞다퉈 비지나무를 심고 숲의 보호에 힘썼고 결국 오늘날 천연기념물로 국가의 보호를 받을 정도로 번창한 숲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자나무 산책로는 이 숲사이로 계속 이어진다.

아쉽게도 바람 한 점 없는 따뜻한 날로 비자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지며 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바람 부는 날에는 굳이 비자나무 숲까지 오지 않아도 대잎과 비자나뭇잎 서걱거리는 소리는 녹우당까지 들려온다.

바람 일렁이는 날 녹우당에 오거들랑 귀 기울여 녹우(綠雨)를 꼭 들어보시도록...

 

 

높이 20m, 지름이 1m 되는 약 500여 그루가 빽빽히 들어선 비자나무 숲

단단하고 뾰족하며 윤기 나는 이파리를 가진 비자나무의 열매는 아몬드와 흡사한 검정색이지만 모양은 원형으로

이 열매로 옛날에는 촌충을 방제하는 구충제로 복용했다고 한다.

 

 

우리도 아이들이 저만 했을 때 이곳을 들른 적이 있다.

이제 쑥쑥 자라 큰애는 대학에 들어가고 작은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지 애비 키를 훌쩍 넘듯..

500년 넘은 비자나무들도 계속 자라만 갈 것이다.

 

 

해남윤씨 어초은파 종가 녹우당은 풍수지리적으로 주산 북현무, 좌청룡, 우백호, 안산 남주작과, 안산 너머 삼산벌 구릉이 다소곳이 조복하고

있는 대표적 명당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한 집안에서 4대에 이르며 과거급제를 하고 6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시조 , 음악, 미술등 예술분야에서 독보적인 가문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로부터 집터와 묘자리는 풍수의 영향력이 컸다고 하니 그 영향력이 현대에 까지 미치고 있음이 놀랍기만 하다.

글쓴이의 부친은 국가유공자로 국립묘지에서 쉬고 계시지만 묘지 자체가 암반이어 얼음골이라고 한다.

작년 겨울 임시방편으로 따뜻하게 해 드렸더니 놀랍게도 다른 곳의 묘는 눈이 쌓여 있어도 부친이 묘는 주변이 모두 녹아 있었다.

아마 다른 분들에 비해 따뜻하게 겨울을 지내셨을 것이다. 

 

 

해남 윤씨 어초은파 시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묘

윤씨의 본관(本貫)은 옛 문헌상에는 149 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현재는해남(海南)·파평(坡平)·해평(海平)·남원(南原)·칠원(漆原)·무송(茂松)·

함안(咸安)·해주(海州)·영천(永川)·예천(醴泉)·야성(野城)·기계(杞溪)·양주(楊州)·현풍(玄風)·죽산(竹山)·고창(高敞)·평산(平山)·여주(驪州)·

신녕(新寧)·덕산(德山). 경주(慶州). 청주(淸州)등 22개의 본이 있으며 이중 해남,해평, 무송,칠원 등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本貫)은 파평윤씨

(坡平 尹氏)에서 분관 하였다고 하며 나머지 남원윤씨, 신영윤씨, 야성윤씨, 함안윤씨 등은 파평(坡平)으로 다시 합본(合本)이 되었다고 한다.  

윤씨는 파평 윤씨가 전체 윤씨 인구 중에서 가장 많고,해평 윤씨가 다음을 차지한다.

 

윤씨(尹氏)는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592 명에 상신(相臣) 18 명, 문형(文衡 : 大提學)6 명, 왕비(폐비 1명 포함) 6 명, 부마 7 명, 봉군 7 명을

배출하였으며 2002년도 국세조사에서 83 만 4천여명, 전국 인구구성비 2.1 %로 전국 274성 중 8위를 차지할 정도로 많다.

해남윤씨는 8계파가 있고, 윤선도는 그 중 막내인 연동파(蓮洞派) 어초은공파의 후손으로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종가가 아니라

해남 윤씨 어초은파의 종가인 셈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자료에는 녹우당을 해남 윤씨 종가로 묘사하고 있기에 정보의 빠른 수정이 필요하다.

 

 

비자나무숲과 어초은 묘를 나와 추원당을 거쳐 녹우당으로 내려간다.

 

 

추원당은 이곳 백련동에 처음 터를 잡은 어초은 윤효정의 제각으로 1935년 윤정현의 발의로 지었다.

추원이란 돌아가신 조상이나 부모를 추모하고 공경함을 뜻한다.

 

 

문이 굳게 닫혀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녹우당 사랑채 모습과 엇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어초은의 제각이 이곳에 있듯, 해남 삼산면 금쇄동에 있는 윤선도의 묘 앞에도 제각이 있다고 한다.

 

 

추원각을 나와 녹우당으로 가면서 본 차밭.

녹우당에 자주 들른 정약용의 영향을 받았을까?

20여 년 전부터 고산의 14대 손인 종손 윤형식씨와 종부 김은수씨가 종가를 시키며 차 밭을 일구고 있다 한다.

불천위 제례와 4대 봉제사, 가을 시제, 설과 추석까지 일년에 30여 차례 제례를 모신다고 하니 일년에 4번 지내는 글쓴이에 비하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대단한 종가라고 할 수밖에...

 

 

 

녹우당을 한 바퀴 빙 돌아 나온다.

 

 

 

녹우당 담장길은 다른 돌담에 비해 상당히 편안했다. 

호박덩이 같은 자연석을 생긴 대로 포개어 싼 ′그렝이′ 공법으로 담쟁이 넝쿨이 얽혀 가을빛에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충헌각은 원래 유물전시관이었으나 입구에 새롭게 유물전시관을 만들고 지금은 충헌각으로 바뀌었다.

 

 

해남 윤씨 어촌은파 종가인 녹우당 앞에 수고 23m, 둘레 6m를 자랑하는 500살 은행나무가 있다.

효종의 하사한 집을 뱃길로 옮겨 지은 녹우당은 볼 수 있었으나 안채는 고산의 14대손 종손이 살고 있어 살펴볼 수 없었다.

고산의 4대조인 윤효정이 이 곳에 터를 잡고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나 갑자사화와 을사사화로 인해 정치에 실망을 느끼고 세상과 단절하며

산 곳으로 윤효정의 아들 윤구(尹衢)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되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절의를 지키다 세상을 떠났다.

고산은 윤구의 증손자로 서울 종로구 연지동(지금의 명동)에서 태어나 8세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큰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와 해남 윤씨 어초은파 종맥을 이었다.

10세 때 경사(經史)는 물론이고 음양, 지리 등의 서적을 두루 공부하여 문장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17세에 남원 윤씨와 결혼하고 그 해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6세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42세에 별시에 급제하여 인평대군과 봉림대군(효종) 등 두 왕자의 사부가 되었으며, 효종 즉위 이후에는 성균관 사예와 예조참의를 역임했다.

하지만, 30세 때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북 경원으로 유배되었으며, 이후 서인과의 당쟁과 예송 논쟁으로 유배를 반복했다.

관직생활 10년, 유배 20년, 은거 25년이 그의 삶의 질곡이었지만 평소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윤선도는 결국 숙종대에 이르러 충헌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아 후세에 더 큰 평가를 받았다.

그러한 고산이 서울과 해남을 오가며 수없이 들렀을 녹우당.

비록 85세에 보길도 부용동에서 숨을 거뒀지만, 녹우당과 삼사면의 금쇄동, 보길도의 부용동 등은 모두 그의 삶의 한 부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굴거리나무.

잎이 축 처져 있어 안개속에서 보면 마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사람처럼 보이는 나무.

이 나무는 윤선도 유물전시관 앞 뜰을 가득 메우고도 넘쳐 옆길까지 들어서 있다.

다음에 가 볼 공재 윤두서 고택과 윤탁 고택도 마찬가지로 굴거리나무가 식재돼 있다.

 

 

윤선도의 녹우당이 있는 뒷산은 덕음산은 높이 381 m정도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금강산(金剛山:481 m) ·만대산(萬垈山:481 m) 등과 함께

해남읍을 둘러싼 자연산성을 이룬다.

해남윤씨 녹우당(사적 167호)와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의 국보1개, 보물 3개,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 숲 등을 안고 있는 듬직한 산이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녹우당은 500년 역사를 이어가며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일컫는 고산 윤선도와 조선의 삼재 공재 윤두서를 비롯한

다수에 이르는 해남윤씨 명문가를 배출 한 곳으로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다.  

녹우당이 있는 연동마을은 충남 아산의 예산 이씨 집성촌인 외암마을, 경북 고령 김씨 집성촌 개실마을, 경남 밀양 교동 손씨 집성촌 등

문중을 빛낸 전국 4대 집성촌중의 하나이다.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가곡의 3대 명인 고산 윤선도.

 

음악을 사랑하고 세상과 사람 그리고 자연을 노래한 시인이었던 윤선도.

별을 헤아리고, 풍수에도 뛰어났으며 의학에도 밝았던 윤선도.

과연 박문다능왈헌(博文多能曰憲학문이 밝고 재주가 많다)의 표상으로 은둔의 세월속에서도 후세에 길이 남을

수 많은 작품들을 탄생시킨 그의 발자취를 따라 계속 여행을 이어간다.

 

(해남두륜산권 여행기)

1.해남윤씨 보물창고,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2 .초록비 쏟아지는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 

 

(해남땅끝 여행기) 

  1편 : 앗! 공룡이 탈출했어요/해남 공룡박물관

  2편 : 우리 공룡 사냥하러 가 볼까?/해남 공룡박물관

  3편 : 보고 서 있는것 자체가 힐링/해남 고천암

  4편 : 정유재란 이순신장군 첫 승첩지/해남 어란진

  5편 : 대한민국 일출의 최고봉/땅끝마을 맴섬 일출

  6편 : 우리 모노레일 타고 가 볼까?/땅끝전망대

  7편 : 땅의 끝, 여기서 뒤 돌아서면 그것이 바로 시작이야/땅끝탑

  8편 : 땅끝에서 삼남길을 따라 한양까지 가 볼까?/삼남길

  9편 : 땅끝에도 하루에 두 번 길이 열리는 신비의 섬이 있다./땅끝 대죽도

10편 : 해남아가씨의 사랑이야기가 있는 송호해변/송호해수욕장

11편 : 자연과 예술이 하나가 된 땅끝조각공원

12편 : 땅끝 사구미 해변에서의 사랑이야기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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