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여행)천년 목사골 나주, 금성관과 금학헌의 봄.

2014. 4. 8. 07:05전라남도 견문록/나주 견문록

 

나주 영산포 유채꽃밭에서 노란 물로 흠뻑 물을 들인 다음 나주 시내로 나왔습니다.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주 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바로 나주곰탕입니다. 물론 영산포에 가면 나주곰탕보다 영산포 홍어삼합을 더 알아주지요.

그 맛은 나중에 영산포 홍어축제 때 맛보기로 하겠습니다. 궁금하시더라도 꾹 참으시길^^

 

나주에 왔으니 나주곰탕을 먹어야 하는데, 일단 나주목 객사인 금성관 주변에 몰려있는 유명 나주곰탕집 중 한 군데를 가기로 했습니다.

나주곰탕으로 유명한 집들은 하얀집, 노안집, 남평할매집 등 세 곳이 있는데 모두 3대~4대 째 곰탕을 끓여내는 집들이랍니다. 뭐 어느 집을 가든 훌륭한 맛 집 들이니 가리지 않고 주차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가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간 곳이 바로 노안집...

 

곰탕은 7,000원 인데 말끔한 국물 맛이 너무 시원합니다. 공기 하나 추가에 국물도 한 그릇 추가했는데 추가요금은 받지 않군요. 곰탕은 다른 음식과 달리 계속 가마솥에 끓이고 있으니 앉자마자 나오는 스피드가 배고픈 이에게는 최고입니다.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하도 맛 집으로 많이 소개되어 생략합니다.

 

곰탕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거만하게 배 두드리고 나왔으니 이제 소화도 시킬 겸 나주목 객사인 금성관과 나주목사 내아인 금학헌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나주목 객사인 금성관의 정문 망화루입니다. 나주목 객사 외삼문으로 세칸 규모의 2층 문루입니다.

금성관은 조선시대 지방궁궐이라고 하지요. 전남유형 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금성관은 나주목사 이유민이 1475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479년에 완공하였습니다.

여기서 객사란 나주목의 관찰사(현 도지사)가 업무를 보는 곳이기도 하며 중앙에서 관리 등이 지방으로 내려올 때 숙소로도 이용한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금성관은 임진왜란 등 병란을 피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보았고 일제강점기에는 나주군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망화루를 지나 금성관으로 들어가 봅니다.

중삼문은 외삼문인 망화루와 내삼문 사이에 있는 출입문이지만, 내삼문은 당시의 위치 등 터만 있을 뿐 아직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금성관은 조선성종 때인 1479년 나주목사 이유민이 5년의 역사 끝에 세웠습니다.

앞면 5칸 옆면은 4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네요.

내부는 넓은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시공하였고 두리기둥을 세었습니다.

나주목사는 지방관으로 행정, 사법, 군권을 가진 지방의 최고 책임자입니다.

정3품으로 지금의 도지사로 천년 넘게 도청 소재지였던 나주를 천년 목사골이라고 합니다.

 

 

금성관 우측에 있는 것은 벽오헌입니다.

관찰사가 나주에 왔을 때 집무처로 사용한 곳이라 합니다.

금성관의 좌측은 서익헌이 있습니다.

종3품 이하의 관리가 이용하였다고 하는데, 종3품 이면은 지금의 이사관, 국장급입니다.

 

 

나주는 통일신라시대인 903년(효공왕7)에 금성군에서 나주로 개칭되어 천년 넘게 나주라는 이름을 썼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쳐 금성시가 되었다가 1986년 다시 나주시가 되었습니다.

나주에 나주목이 설치된 것은 고려시대로 983년(성종2) 전국에 설치된 12목 중 하나가 될 정도로 나주는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995년(성종14)에는 병마절도사까지 두어 행정과 군사의 중요도시가 되었습니다.

1011년(현종2)에는 거란의 침입으로 잠시 왕이 피난 온 왕도가 될 정도로 위세를 떨쳤으며, 1018년 전국 8목 중 하나로 격이 올라가 1895년까지 나주목으로 남아 있다가 갑오경장 후 지방행정제도 개혁에 따라 목사가 없어지고 나주 군수를 두고 나주 관찰부를 설치했답니다. 오죽했으면 고려시대 때 개경(개성) 다음으로 가장 좋다고 해서 소경(나주)이라고 했겠습니까? 

 

 

 

 

신라 때까지는 지역중심지가 광주였습니다. 당시 광주는 무주 또는 무진주라 불렀지요.

그래서 견훤은 후백제를 광주에 시작했고, 신검을 비롯한 아들들이 태어난 곳도 광주였으며, 맨 마지막까지 왕건에 대항하였던 세력도

광주를 중심으로 한 토착세력이었습니다.

당시 나주는 왕건의 나주 침략에서 보듯이 서해안으로 해서 영산강을 따라 올라오는 지역인 무안 영암 함평 나주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영산강세력이 중심이었다면, 광주는 순천, 전주까지 이어진 견훤의 세력이 중심이었죠.

 

 

하지만, 견훤의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왕건에게 적대세력이었던 광주지역 보다는 왕건의 처가로 인해 우호적이었던 나주가 더욱 중요시되었고 고려는 지역중심지를 광주에서 나주로 옮겨 그 후 조선시대 후기 갑오경장까지 약 1,000년간 나주는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영산강과 비옥한 나주평야를 가지고 있는 나주는 고려시대부터 대도시로서의 입지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지만, 광주에 밀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게 대게 궁금했습니다.

 

 

 

 

은행나무 노거수는 수령이 681살이라고 합니다.

대단하죠? 가을에 오면 금성관은 더 멋지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광주는 1373년(공민왕 22)에 광주목으로 승격했습니다.

그러나 1430년(세종 12)에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되었다가 1451년(문종 1)에 복구되었고, 1481년(성종 12)에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에 복구되었으며, 1624년(인조 2)에 현으로 되었다가 1634년에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1701년(숙종 27)에 다시 강등되었다가 1707년에 복구되고, 1869년(고종 6)에 또다시 강등되었다가 1871년에 복구되는 등 광주목은 바람 잘 날 없었답니다.

 

심지어는 1895년(고종 32)에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는 나주부에 속할 정도로 비참했죠. 그러나 이듬해 다시 13도제를 실시하면서 1등 군이 되어 전라남도 도청이 설치되고 나주를 대신해 현재와 같은 전라도의 최중심지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 비약적인 발전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그럼 이제 금성관을 나와 당시 나주목사 살림집으로 가 보겠습니다.

금성관과 나주목사 내아관인 금학헌 사이에는 정수루가 있습니다.

아마 예전에는 성이 빙 둘러 있었겠죠?

 

 

이곳은 나주목사 내아관 옆에 있는 나주목문화관입니다.

나주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이죠.

 

 

정겨운 돌담너머로 벚꽃이 활짝 피어 한옥의 고풍스러움을 한껏 빛내고 있습니다.

 

 

금학헌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5년 7월1일 날 주춧돌을 놓고 7월 20일에 상량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 초기에 다시 복원한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금성관이 군청으로 사용되었을 때 이곳도 군수 관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아..멋집니다.

나주목사의 살림집인 금학헌은 1986년 9월 29일 전남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건물은 ㄷ자형으로 팔작지붕으로 담장에 벼락 맞은 팽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마당 한켠에는 벚나무가 만개해 있습니다.

 

 

 

2009년 KBS1박2일 팀에서 나주투어 촬영 시 스탭들을 야외취침하게 만든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 영산포 유채꽃밭에서 필을 제대로 받은 큰아이.

나주목사 내아관에서도 필 받습니다..ㅎㅎ

 

 

제복이 잘 어울리는 멋진 아들입니다.

 

 

옆지기는 처녀시절 때부터 제복입은 사람만 보면 뿅~~~갔답니다.^^

그래서 인지 아들한테도 뿅~~가네요..ㅋㅋ

 

 

다시 처녀시절로 돌아가도 제복에 뿅~~^^ 갈거냐고 물어봅니다.

돌아온 답은? "당연하다고 합니다..ㅋㅋ" 이렇게 늠름한 아들이 제복을 입고 있으니 더 맘이 설렌다고...

 

 

벚꽃이 피기가 무섭게 바로 졌다고 사방군데서 아우성입니다.

나도 올 해는 벚꽃 아래 처음 서 봤습니다.

 

 

 

가까이 당겨보고

 

 

여기저기 마구마구 들여다 봅니다.

 

 

빨간 동백꽃과 잘 어울리군요.

 

 

 

 

나주목사 내아관에서는 여행객을 대상으로 숙박을 하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2인실 요금 50,000

3인실 요금 120,000

4인실 요금 150,000

10인실  요금150,000입니다.

문의는 ☎ 061-339-2541

 

 

모두 6실로 주말은 한 달 전에 예약해야하고 평일은 2주 전에 예약해야 숙박이 가능하며, 예약과 동시에 요금을 송금해야 하네요.

 

 

나주로 여행왔다면 점심은 나주곰탕 한 그릇 비우고, 저녁은 영산포에서 홍어삼합으로 거나하게 자신 후 나주목사의 집에서 하룻밤 숙박하면서 벼락 맞은 팽나무에 소원을 빌어보면 어떨까요?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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