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시인의 요람이자 문인들의 사관학교, 광고문학관을 찾아서.

2014. 8. 27. 07:00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문학의 로(路) 시비(詩碑)를 찾아 떠난 여행이 광주공원 용아 영랑의 쌍시비에 이어 두 시인의 행적을 쫒아 광주의 용아생가,

강진의 영랑생가, 강진 시문학파기념관 등을 거쳐 다시 광주로 돌아왔는데요, 강진군의 영랑에 대한 사랑은 영랑생가와 시문학파기념관만 봐도 그 깊이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강진 뿐만 아니었지요. 그동안 simpro가 여행한 문학관은 벌교의 태백산맥문학관, 곡성의 조태일문학관, 순천문학관, 하동 토지문학관,

담양 가사문학관 등 이었는데, 한국문학관 협회의 자료를 찾아보니 전국적으로 61곳의 문학관이 있다고 합니다.

대개 문학적 업적이 지대한 작고 문인의 문학관이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담양의 가사문학관과 강진의 시문학파문학관은 그런점에서

아주 특이했습니다.

 

이렇게 중소도시나 군단위에도 문학관이 있는데, 충격적인것은 문화수도이자 아시아 문화전당이 들어설 빛고을 광주에는 그 무게에

맞는 종합 문학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있다면 광주고등학교 출신 문인들의 광고문학관과 오월문학관 등으로 모두 한정되고 특성화된 문학관뿐이었네요.

광주도 용아 박용철과 다형 김현승 등 시대를 빛낸 국민시인이 태어나고 활동한 곳으로 한국 현대시 100년을 맞아 이제 제대로 된

종합 문학관 하나 정도는 생겨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며 광고문학관을 찾았습니다.

 

 

광주고등학교(광고)입니다.

광고는 역사로 보거나 현실로 봐도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와 더불어 빛고을 광주의 대표적인 공립고등학교입니다.

1923년 5년제 공립중학교로 설립돼 1928년 1회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6·25사변 중인 1951년 8월 광주동중학교와 광주서중학교를

병합해 1·2·3학년은 광주서중학교로, 4·5·6학년은 21학급으로 새로이 개편된 광주고등학교로 편입되어 개교했습니다.

1952년 3월 1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2014년 2월 63회 졸업생을 배출해 그동안 31,585명의 졸업생을 만들어 냈답니다.

신흥 사립명문고에 뒤져 잠깐 저조한 성적을 내기도 했으나 자율형 공립고로 선정되면서 제2의 도약기를 갖고 있습니다.

 

교정에 전 일간스포츠 부국장 이성부 시인의 무등산이라는 시비가 있군요.

이성부 시인(1942∼2012)은 광고출신으로 1967년 동아일보에 ‘우리들의 양식’으로 등단했으며, 예술성과 현실성을 두루 갖춘 시를

써온 시인으로, ‘이성부 시집’, ‘백제행’,‘전야’, ‘지리산’ 등의 시집을 펴냈고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

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광고를 들어가자마자 만나는 거대한 나무.

바로 광고 교목인 히말라야시다입니다.

아마 많은 광고인들은 이나무의 진취적인 기상을 이어 받았을 것입니다.

 

 

희귀한 소나무도 있군요.

처진소나무라고 해서 가지가 버드나무처럼 처진 모습입니다.

 

 

다른 문학관들은 모두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독립된 건물을 가지고 있지만,

광고문학관은 광고내 도서관의 일부분에 있습니다.

 

 

광고는 광주4.19혁명의 발상지입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자 광주에서 전국 최초로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는데요,

1천여 군중이 합세한 광주의 3·15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선거 무효를 선언한 전국 최초의

시위로 광주 4·19 혁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다음은 광주민주역사올레의 홈페이지 4.19혁명을 인용해 광주고등학교의 광주 4월혁명 발상기념탑을 이야기합니다.

1960년 4월 19일의 광주 시위는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는데요, 오전 10시가 조금 못된 시간, 학생들은 이미 약속한 종소리에 맞춰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하고, 교장실에 갇힌 학생 대표들도 잠긴 교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는데 정문이 이미 진입한 경찰에 의해 봉쇄되자, 일부 학생들은 후문을 통해 거리로 나갔다.

후문을 통해 거리로 진출한 학생 100여 명은 계림파출소와 경양방죽 쪽으로 나뉘어 시내로 진출해,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일고, 광주공고 등 시내 고교를 찾아다니며 동참을 호소했다. 이에 광주여고생들은 판자울타리를 넘어뜨리고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오후 2시, 금남로는 몰려드는 고교생들로 가득찼다.

이어 일부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수천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 학생 의거 선배를 따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 시내 곳곳의 파출소와 소방서를 파괴하며 이승만 정권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경찰과 충돌했다.

 

 

학생 시위대의 최대 격전지는 광주경찰서였다.

1천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로 모여들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이에 맞섰으며, 시위대와 경찰이 밀고 당기며 접전을

벌일 때, 40명의 경찰 돌격대가 시위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하지만, 시위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었고 여기저기서 시위대가 쓰러졌다.

경찰은 금남로로 후퇴하는 시위대를 끝까지 쫓아 와 사격을 했으며, 순식간에 이귀봉(당시 18세)을 비롯하여 7명이 금남로 등지에서

사망하고, 부상자 역시 수십명에 달했다.

 

 

이튿날인 20일 오전, 농고생들이 합세한 전남대생들의 시위가 있었지만 무장한 군인과 장갑차의 공격으로 해산되었고, 광주에서의 시위는 이후 목포, 여수, 순천 등 전남 일대로 퍼져나갔다.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된 광주 4·19는 서울, 마산과 함께 전국 3대 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광주고등학교 정문에는 ‘광주 4월 혁명 발상기념탑’이 세워졌고, 중심 지역이던 계림동에는 ‘4·19혁명 기념관’이 건립되어 당시 희생된 열사들을 추모하고 있다. 광주공원에는 ‘4·19의거 영령 추모비’가 있으며, 서방사거리에서 광주고등학교와 계림파출소 앞을 지나 중앙초등학교까지의 거리가 ‘4·19로’로 지정되었다. 최근 이를 지나는 56번 버스를 419번으로 변경해 광주 4.19 혁명의 뜻을 기리고 있다.

 

 

이제 광고문학관 내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번듯한 건물대신 도서관 일부를 문학관으로 꾸며놨습니다.

 

 

광주고등학교 전경사진이 있군요.

 

 

광주고등학교 출신 문인들의 방이 하나씩 꾸며져 있습니다.

광고출신 문인들의 활약은 대개 태동기(1회~2회), 개화기(3회~11회), 휴면기(12회 이후)로 나뉘는데, 12회 이후는

재학생들의 교내활동은 활발했으나 문단진출은 저조했다고 합니다.

지금 보는 방은 장백일 선생의 방으로 장백일 선생은 광고1회로 광고문학관의 태동기의 비평가입니다.

태동기(1~2회)에 해당하는 문인들은 장백일(평론.1), 현재훈(소설.1), 정현웅(시.2), 박성룡(시.2), 김중배(수필.2)등 입니다.

 

 

시 「풀잎」의 작가 박성룡(2회) 님의 방입니다.

 

풀잎

                                    박성룡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에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풒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풀잎' 하고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버리거든요

 

 

 

 

 

박봉우(3회)시인의 방입니다.

휴전선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상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박연구(3회)선생은 3회 졸업생으로 <바보네 가게>수필가입니다.

박연구 님이 1974년 발표한 수필 <바보네 가게>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꼬마엘리스님의 블로그에서 공유했습니다.

 http://blog.naver.com/rnjh3027/220074354311

 

 

 

 

윤삼하 시인(3회)의 시<응시자 1957>

 

 

    응시자

 

                                                   윤삼하

 

오늘도 여전히 해는 뜨고 저기 하야니 구름 피어오르는 산 너머

푸른 하늘 위로 무수히 포화(砲火)와 유탄(流彈)이 되어 흐르던

그날의 처절한 벌판에서 스스로의 가슴을 찢기우고, 다만 아련한

울음으로 굳어있던 한 개 피 묻은 돌이었다.

천둥 같은 우람한 폭음 속에 터져 흩어진 무수한 꽃잎들.......그

자욱마다 피맺힌 이슬을 먹고 피어난 하이얀 꽃, 보다 붉은 피의

덩이-----

돌 위에 박힌 탄흔(彈痕)처럼 영 사라지지 않을 그것은 어쩌면 전

쟁(戰爭)이 울고 간 흔적으로 하여 더욱 까맣게 빛나는 눈망울과

까맣게 타는 입, 그의 입술은 차라리 쓰러져가는 「라자루스」의

그 마지막 침묵하는 표정(表情).

아직도 그의 상한 육신에선 피가 흐르고 그의 팔로부터 많은 팔들

이 떨어져 간다.

그의 다리로 더불어 더욱 많은 다리들이 절룩거리며 간다.

빗발이 쏟아지기 전 가자던 제2의 행렬들이 뿌옇게 거리 모퉁일

돌아 나간 지도 이미 오래다.

수없이 가로놓인 진창을 밟으며 오직

피 듣는 팔과 쑤시는 다리를 이끌면서 걸어온 그 하나의 버둥거림

이 여기 이렇게 서서 다시 한 번 바라는 저 짙푸른 하늘과 핏빛 태

양(太陽)과........

 

 

 

광고를 빛낸 문인들...

100여 명에 이르군요. 지금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광주고등학교는 개교이래 약 60여 명의 문인을 배출했는데  60여 명의 문인 배출은 국내 어느 고교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랍니다.

문인들을 장르별로 보면, 시 28, 시조 2, 소설 7, 수필 16, 평론 6, 아동문학 2, 희곡 1명으로 등으로 시인이 압도적으로 많아 광주고를

'시인학교', '시인사관학교'라고도 부릅니다. 

 

 

조태일(11회)시인은 곡성 태안사 입구에 조태일 시문학관이 있습니다.

조태일 시인에 대한 포스팅 참조 :  http://blog.daum.net/huhasim/1021

 

 

이성부(9회) 시인은 범대순(1930~2014) 시인과 더불어 무등산 시인으로 유명합니다.

 

무등산(無等山)

                                     이 성 부

콧대가 높지 않고 키가 크지 않아도

자존심이 강한 산이다.

기차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그냥 밋밋하게 뻗어 있는 능선이,

너무 넉넉한 팔로 광주를 그 품에 안고 있어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느냐.

기쁨에 말이 없고,

슬픔과 노여움에도 쉽게 저를 드러내지 않아,

길게 돌아누워 등을 돌리기만 하는 산.

태어나면서 이미 위대한 죽음이었던 산.

무슨 가슴 큰 역사를 그 안에 담고 있어

저리도 무겁고 깊게 잠겨 있느냐.

저 산이 입을 열어 말할 날이

이제 이를 것이고,

저 산이 몸을 일으켜 나아갈 날이

이제 또한 가까이 오지 않았느냐.

저 산에는

항상 어디 한구석 있는 곳이 있어,

내 서울을 떠나기만 하면

그곳이 나를 반가이 맞아줄 것만 같다.

 

광고문학관은 2007년 5월 개관했습니다.

당시 교장이었던 오덕렬선생님이 광고역사기념관을 만들려다 광고문학관으로 수정해서 개관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문학관하면 큰 업적을 남긴 특출한 작가 한 분을 집중 조명하는 것이 관례인데 문학관 하나 없는 광주에서

광주고등학교 출신 문인들을 위한 문학관 개관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광고문학관은 120평 규모의 공간에 한국문학 창달에 기여한 문인들을 기리는 '작고문인관'과 '스승관’. ‘동문관'이 작가의 서재를

보는 듯 내실 있고 아담하게 잘 꾸며져 있어 문학관이라기보다 마치 살아 생전의 서재같은 느낌입니다.

광주 4.19혁명의 발상지이자 한국 문단의 주류를 이끈 광주고등학교를 마지막으로 문학기행을 마쳤습니다.

광주공원의 용아와 영랑의 쌍시비에서 출발한 이번 문학기행은 용아생가, 영랑생가, 시문학파기념관, 광고문학관에서 막을 내렸는데요,

강진에서 본 시문학파기념관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내년이면 광주에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이 생기는데요, 문화수도 빛고을 광주에 아직도 광주를 빛낸 문인들을 알리는 문학관이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현재 광주는 그런 문학관을 짓기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산도 이미 세워져 있지만 부지 선정에 많은 애로점이 있다고 합니다.

전문가, 문인, 공무원, 학계, 시민단체 등 관련단체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 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하는 날 광주문학관도

개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또다른 문학기행

1.비련의 시인 고정희와 시인을 닮은 소나무

2.김남주시인 20주기. 전사의 생가를 찾아서.

3.조정래의 태백산맥문학관에서 길을 묻다.

4.소설태백산맥의 시작점 현부자네와 소화의 집

5.염상구의 철교와 소설태백산맥속의 벌교이야기

6.보성벌교여관에서 만난 소설태백산맥

7.벌교 유일의 보물 홍교와 김범우의 집

8.테마가 있는 여행의 종착역 조태일 시문학기념

9.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의 광주공원 쌍시비

10.시문학파 대표시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를 가다

11.북소월 남영랑 시문학파 대표시인 영랑 생가를 가다.

12.한국 서정시의 요람. 강진 시문학파 기념관

 

 

(글 : 포토뉴스코리아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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