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시문학파의 대표시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를 가다.

2014. 8. 21. 07:05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박용철(朴龍喆, 1904년 6월 21일 ~ 1938년 5월 12일)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번역가로도 활동한 박용철은 충주박씨로 아호는 용아(龍兒)입니다.

충주박씨는 행주기씨, 장흥고씨와 함께 호남 학맥의 중심을 이뤄 흔히들 광주를 기고박(奇高朴)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용아도 바로

충주박씨의 후손입니다.

충주박씨 시조의 9세손 판서공 소(蘇)의 아들 오형제 중 넷째인 지흥(智興)은 400여 년 전 단종 폐위 때 처가인 광주 광산구 송정리로

낙향해 솔머리 마을(지금의 소촌동)을 이루었는데 이 마을은 어등산의 용(龍)이 남동쪽으로 내려와 동자봉·금봉산(송정공원)으로 이어

지는 능선의 안쪽에 자리 잡은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금호타이어 광주공장과 소촌공단 등이 들어섰고 아파트가 마을을 빙 둘러 포위했지만 앞쪽으로는 황룡강이 흐르고 뒤로는 금봉산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 명당 마을입니다.

 

예쁜 벽화가 그려진 꼬불꼬불한 담장 길을 따라가면 골목안쪽에 초가 한 채가 보입니다. 생가 앞 골목길에는 담쟁이 넝쿨이 담 너머로 내려와 있어 오래된 동네임을 알려줍니다. 생가의 정면 큰 대문은 평소에는 닫혀있으며, 대문 왼쪽 돌담을 따라가면 또 하나의 작은 문은 열려있습니다. 이 집은 그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집이고, 복원된 생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용아생가 앞 주차장)

 

 

집은 그의 시처럼 소박하고 단아합니다.

지붕에는 초가이엉을 얹었는데 한때 그의 부친이 기와로 개조 하려고 하자 "시골집은 초가라야 제 멋이 납니다. 가을에 이엉을 올려놓은 후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노랗게 빛나는 그 색깔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라고 만류했다고 합니다.

그 후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와 슬레이트 등으로 개량하였으나 1995년 문화재 복원 사업으로 다시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였으며 돌담에도 초가 이엉을 얹어 마치 고향집처럼 포근하기만 합니다.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 등이 있으며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높다란 막돌 기단 위에 세웠습니다. 사랑채도 5칸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고 행랑채는 4칸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습니다.

이 집은 용아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용아의 선조가 자리를 잡은 솔머리 마을은 지형이 마치 가마솥의 머리 부분 같다고 하여 정두(鼎頭)라 했고 우리말로 솥머리라 불렀는데 나중에 부르기 쉬운 솔머리로 바뀐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후손들은 모두 청렴하고 학문이 뛰어나 대제학, 영의정이 나왔으며 용아의 아버지 박하준도 조선조 중종 조 때 명신

눌재 박상의 15대손이며 박상의 둘째아들 순(淳. 1523-1589)은 영의정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용아는 1904년 6월 29일 대를 이어 내려온 천석꾼 지주였던 부친 박하준의 4남매 중 셋째로 지금 이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눌재 박상의 16대손인 것 입니다.

3세 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산수를 하고 사자소학을 공부했으며 ‘기질은 약했지만 고집 세고 기억력 좋은’ 수재였다고 합니다.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가 없는 광주를 떠나 서울휘문의숙, 배제학당을 다니다 3.1운동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자퇴한 뒤 16세 때 일본에 유학해 동경 청산학원 4학년에 편입했습니다. 청산학원에서 운명적으로 영랑 김윤식을

만났는데 영랑의 권유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졸업 후 동경외국어학교 독문과에 입학했다가 1922년 관동 대지진때 자퇴했습니다.

그 후 다시 연희전문 문과에 편입했으나 서너 달 만에 다시 그만두고 말았죠.

 

귀국한 후 일찍 죽은 두 형을 대신해서 대가족의 책임을 맡아야 했기에 7,8년 동안 고향에서 칩거하며 미두(米豆)에 손을 댔지만,

3천 원(당시 쌀 한 석은 20원 정도)을 손해 보는 등 우울한 청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용아 박용철 하면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김수철의 노래 ‘나두야 간다’노래 일부분을 들려주면 아하~하고 무릎을 칩니다.

용아의 떠나가는 배는 뼈로 새기고 피로 쓰듯 절절한 망국의 한과 깊은 절망을 토해 놓은 용아의 대표작으로 고향 광주에서 오랜

칩거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 영랑과 같이 시문학지를 창간하면서 발표한 데뷔작입니다.

 

떠나가는 배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쫒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아 16세 때 아내로 맞이한 시골 처녀와는 전혀 정이 없었다고 하네요, 결국 1931년 양가 합의로 이혼하고

1932년 누이동생의 친구 임정희(林貞姬)와 연애 결혼하면서 결핵으로 육체적 고통은 컸지만, 결혼으로 안정을 찾아 문학에 헌신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용아가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 청산학원에서 영랑을 만나면서부터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용아는 문학에 문외한이었다고

합니다.

뒷날 용아는 ‘윤식이가 나를 외도하게 했다’며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니 용아가 시를 쓰게 된 것은 바로 영랑 때문이었으며 영랑은 훗날 龍兒死後 출판한 박용철전집 후기에서 ‘실상 벗은 그때 아직 문학이나 詩니 아직 생각도 안했던 때인데 공연히 벗을 끌어 들여서 맛을 붙이게 하고 글재주를 찾아내려 했으니’라며 술회했다고 합니다.

 

 

용아는 1930년 들어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는데 1931년 서울에서 부친이 보내준 생활비를 아껴 김영랑, 정지용과 함께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였고 김영랑, 정지용, 정인보, 변영로 등과 문학 동인활동을 하며 ‘문예월간’, ‘문학’같은 동인지에서 외국의

시와 희곡을 번역해 소개했습니다.

 

 

이런 외국문학에 대한 관심은 동경유학시절 이하윤, 김진섭, 정인섭, 손우성, 이선근, 김온, 함대훈 등과 외국문학연구회 동인으로 활동

하면서였는데 이 때문에 용아는 시인이자 비평가, 외국문학가로서 우리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같이 활동한 김윤식, 정지용 등보다 덜 알려진 것은 바로 용아가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해 자신의 작품집을 생전에

내지 못했으며, 대표작 〈떠나가는 배〉 등 시작품은 초기에 많이 발표했고, 이후로는 정지용시집, 영랑시집 등을 자비로 출판하고 극예술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해외 시와 희곡을 번역하고 평론을 발표하는 방향으로 관심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1년 뒤에 시와 평론, 수필, 번역, 극본 등을 묶은 《박용철전집 2권》이 시문학사에서 간행되었는데, 전집의 전체 내용 중 괴테, 하이네, 릴케 등 독일 시인의 번역시가 많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입센의 《인형의 집》 등 번역 희곡도 있어 작품 활동보다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번역에 주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1968년 현대문학사가 미당 서정주의 도움으로 용아의 시 48편을 묶은 박용철시집을 냈습니다.

 

 

용아는 1930년대 문단에서 임화와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으로 대표되는 경향파 리얼리즘 문학, 김기림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문학과 대립하여 김영랑, 정지용, 신석정, 이하윤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이끌었는데, 용아의 시는 영랑이나 정지용과 비교할 때 시어가 맑거나 밝지는 않지만, 서정적이면서도 깊은 회의와 절망을 담고 있으며 시의 밑바닥에 사상성이나 민족의식이 깔려 있다는 점이 김영랑, 정지용의 시와 차별되는 점이라고 합니다.

 

 

또한 용아는 그의 유일한 시론이자 대표적 평론인 ‘시적 변용에 대하여’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드리는 편지’를 인용할

정도였으며 릴케와 슈테판 게오르게 A.E하우스만 등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상징주의에도 깊이 심취했다고 합니다.

 

 

생가는 비록 지금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조용하고 깔끔한 외관이 그의 시정은 느끼게 해 줍니다. 생가 뒤에도 한 채의 초가가 더 있습니다. 앞마당에는 장독대가 있고, 그 앞까지 돌다리가 놓여있으며, 돌 틈에는 채송화와 맨드라미가 꽃을 피워 그 자체가 시가 되는 풍경입니다.

 

 

그의 생가는 영랑의 생가와 달리 많이 쓸쓸합니다. 이른 나이에 병사한 이유도 있지만 활동기 대부분을 평론과 번역 출판에 힘쓰다보니 한국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부분이 있어 영랑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광주시의 관심도 낮아 보입니다.

영랑생가는 관리인과 해설사가 상주하면서 손님을 맞지만 용아생가는 문이 굳게 닫혀있는 날이 많고 문화해설사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용아생가를 찾아오는 발길은 뜸하기만 합니다.

2004년이 박용철 탄생 100주년이었으니 올해로 110주년입니다.

매년 9월 용아의 생가에서는 용아축제가 열리는데 이것을 계기로 용아생가가 강진의 영랑생가처럼 광주사람들의 자랑으로 남기를 희망해 봅니다.

 

주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로 46번길 24 (소촌동 363-1 )

생가는 시기념물 13호이며 시비(떠나가는 배)는 송정공원, 광주공원, 목포해양대학교 내 해양시비공원 등에 있습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에서 하남동에 걸친 도로는 박용철 선생의 아호를 따 용아로 로 명명 되었습니다.

광주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용아 고 박용철 생가와 그 뒤편의 송호영당에는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영전이 모셔져있습니다.

 

 

또다른 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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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보성벌교여관에서 만난 소설태백산맥

7.벌교 유일의 보물 홍교와 김범우의 집

8.테마가 있는 여행의 종착역 조태일 시문학기념

9.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의 광주공원 쌍시비

 

(글 : 포토뉴스코리아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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