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北소월, 南영랑, 시문학파 대표시인 영랑생가를 가다.

2014. 8. 22. 07:05전라남도 견문록/강진 견문록

 

광주공원에 있는 용아와 영랑의 쌍시비를 본 뒤 두 시인의 행적을 찾아 떠난 여행의 마지막 종점이 강진 영랑생가입니다.

강진에는 유달리 영랑이나 모란이 앞에 들어간 상호가 많습니다. 그만큼 강진사람들은 영랑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뜻이겠죠.

강진은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남도답사 1번지입니다.

강진은 2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실학의 대가 정약용의 18년 유배지로 강진에서만 무려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백련사 혜장스님과의 우정어린 다담(茶談)으로 엮인 이야기가 많은 곳이고, 근대로 시간을 단축하면 '북도 소월 남도 영랑'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 순수시,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인 영랑 김윤식의 시세계의 터전이 있는 곳으로 다산과 영랑 두 사람의 행적만 쫓아도

문학적 배고픔이 해결되는 곳입니다.

 

 

영랑생가는 제42회 강진청자축제에 맞춰 찾아갔는데 그외 시문학파 기념관, 다산의 사의재, 다산초당과 백련사, 다산기념관, 가우도 출렁다리 등을 모두 둘러봤는데, 모처럼 흡족한 여행이 되었습니다.

영랑생가 들어가는 곳에 샘터가 하나 있는데 탑골샘이라고 하군요. 사의재 옆에는 큰샘이라고 있는데 영랑생가안의 '마당앞 맑은 새암과 삼각점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의 물이 좋긴 좋은가봅니다.

두레박으로 건진 물을 한 모금 하려다고 슬그머니 버리고 이제 영랑생가로 올라갑니다.

 

 

영랑생가 앞에는 시문학파기념관이 있습니다.

2년 전에도 없던 것인데 2012년 3월 5일 개관했군요.

이곳은 영랑생가를 다녀와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영랑생가 관리사무소인데 해설사가 상주하나 봅니다.

한 때의 고등학생들이 우르르 영랑생가로 몰려갔는데 번잡스럼움을 피해 고즈넉히 영랑의 시세계를 탐닉하고자 합니다.

 

 

영랑생가는 꽤 넓습니다.

영랑의 부친이 500석 지주라고 하는데 옛 모습은 혹시 기와가 아니었을까요?

당시 지주집안이라면 떵떵거리고 살았을 것인데 초가의 모습이라니 좀 엉뚱한 생각을 해 봅니다.

 

 

영랑의 시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를 읽어보면 그런 잡생각이 깡그리 사라지고 맙니다.

영랑생가가 초가지붕이 아니고 기와집이었다면 아마 영랑은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수하고 토속미가 물씬 풍기는 영랑의 시들은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뜰아래 우슴짓는 샘물, 마당에 탐스럽게 핀 모란,

뒤뜰의 동백과 대나무, 마당 한 켠의 은행나무 등에서 청아한 시상을 떠올렸는데 밋밋한 기와지붕이었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시상은 떠오르지 않았겠죠.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돌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십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

시의 가슴을 살프시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십다

 

 

영랑생가는 좌측 본채와 우측 사랑채로 구분됩니다.

 

 

영랑의 시비는 생가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입구에 있는 시비는 영랑의 대표적인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입니다.

모란은 봄의 절정인 5월에 피는 꽃이지요.

꽃을 피우기위해서는 춥고 어두운 기나긴 겨울을 혹독하게 견뎌야 합니다.

더구나 모란은 봄꽃 중 가장 늦게 5월에 피는 관계로 그만큼 기다림은 길어지죠.

일제 암흑기에 많은 의미가 담긴 시입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제 영랑을 만나러 가 볼까요?

 

 

안채가 보입니다.

곳곳에 모란이 심어져 있군요.

 

 

 

마당 앞에 샘이 하나 있습니다

영랑에게는 생가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시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마당 앞 맑은 새암

                         김 영 랑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먼 하늘만

내어다 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이 누운 넋 있어

이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장독대 옆에도 영랑의 시비가 있습니다.

추석이 오기전 음식장만을 위해 장독대에서 장독의 뚜껑을 열다 어디선가에서 날아 온 붉은 감잎에

'오매 단풍 들겄네'라고 반색한 누이.

그런 누이의 빨개진 볼을 사랑한 영랑의 시어는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영랑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대지주인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영랑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랑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시 80여 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 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라고 합니다.

 

 

 

 

영랑의 시 대부분이 쓰여진 영랑생가.

마당에 떨어진 흙 부스러기 하나도 영랑의 눈에는 모두 시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랑의 시를 이해하려면 영랑생가부터 먼저 봐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영랑생가 뒤켠과 뜨락에는 거대한 동백나무들이 서 있습니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핏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한쪽 모퉁에서 보니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모란 등이 생가에 켜켜히 쌓여있습니다.

금새라도 뒷짐 진 영랑이 마당을 거닐며 사색에 잠긴 모습이 보일 것 같습니다.

 

 

 

모란이 피는 5월에서 6월 사이에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사랑채로 가 볼까요?

 

 

사랑채는 전체적으로 약간 틀어져 있다고 합니다.

영랑의 눈에는 그런것도 모두 시가 되군요

사개틀닌 고풍의 툇마루에

                                       영랑 김윤식

사개틀닌 고풍(古風)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자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둘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 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위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지금쯤 사랑채 앞엔 백일홍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겠군요.

 

 

영랑은 영랑생가 위쪽 산 중턱에 자리한 금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금서당이 4년제 강진보통학교로 바뀌었을 때인 1915년 3월

졸업한 뒤 이듬해 상경해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한 후 1917년에 서울 휘문의숙에 들어갔는데 당시 휘문의숙 선배로 홍사용·

안석주·박종화가 있었고 후배는 정지용·이태준 등이 있었습니다.

1919년 3학년 때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구두에 감춰 고향으로 내려온 영랑은 강진 장날에 금서당 출신 동문, 강진군민들과 만세운동(강진 4.4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발각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靑山) 학원 중학부에 다니며 광주의 시인 용아 박용철과 사귀었죠.

1921년에 잠시 귀국했다가 1922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 들어갔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나자

학업을 그만두고 귀국했으며, 1930년 박용철·정지용·이하윤·정인보·변형윤 등과 『시문학』지를 창간하고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등 시를 창간호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영랑은 해방이 될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 채 강진에서 시작활동을 하며 지내다 광복 후 강진에서 대한청년회

단장을 맡는 등 우익활동을 했으며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잠시 외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1948년에 서울로 이사한 뒤 이승만 정권 밑에서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일하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숨어 있다가 9·28

 

수복 때 포탄 파편을 맞고 이튿날인 9월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영랑은 생애 86편의 시를 남겼으며, 정부에서 2008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영랑의 죽음은 참으로 아쉽기만 합니다.

그저 고향땅 강진에서 시를 쓰며 살았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주옥같은 시들이 탄생했을까요?

정치적 격동기에 우익활동에다 국회의원 출마까지 그의 정치적 행보가 참으로 아쉽기만 합니다.

그것은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등과 더불어 한국 서정시의 트로이카 시대가 동시에 막을 내렸다는 것으로

한국문학의 커다란 손실이었습니다.

지금도 영랑의 시는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고 있으며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영랑생가를 찾는 이도 많습니다.

광주의 시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가 찾는 이 거의 없이 썰렁한 것에 비하면 영랑은 분명 복 받은 것입니다.

 

광주공원의 쌍시비에서 출발한 용아와 영랑의 생가탐험.

남도를 대표하는 두 서정시인의 삶을 되돌아 본 소중한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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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포토뉴스코리아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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