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여행)백련결사가 있었던 강진 만덕산 백련사

2014. 8. 13. 07:05전라남도 견문록/강진 견문록

 

다산이 1801년 발생한 신유사화에 연루되어 셋째 형 약종과 그의 큰아들, 매형 이승훈, 조카사위 황사영 등은 참수되고 다산은 밀고와 천주교도 색출 협조 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그 해 2월 경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또다시 황사영의 백서사건에 연루돼 문초를 받고 11월에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물설고 낯선 환경에 적응을 못 하였고, 천주교도였다는 사실만으로 배척받아 강진읍 동문 밖 주막집의 방 한 칸에 머물러야 했던 암울한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동문배반가의 주모가 다산의 인생을 바꾼 첫 번째 스승이었다면, 거처하던 방을 동천여사에서 사의재로 바꾸고 자신을 추스르며 지낸 지 5년째 되던 1805년 어느 날,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자 우연히 백련사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해남 대흥사의 혜장선사는 다산의 운명을 바꾼 두 번째 스승이었습니다.

 

그들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습니다. 다산의 인품과 학식을 알아본 혜장선사. 그리고 혜장스님의 불심과 차도를 알아본 다산.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고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는 것은 바로 다산과 혜장스님의 만남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산은 혜장스님을 만나면서 차(茶)에 대해 알게 되었고, 혜장스님도 다산을 만나면서부터 그의 학식과 인품에 매료되어 스스로 주역 배우기를 청하였으니 실사구시(實事求是) 실학의 대가 정약용과 열 살이나 연하였던 혜장스님은 단순히 차나 마시며 친분을 쌓았던 사이가 아니라, 차를 핑계로 정약용은 불심을, 혜장스님은 실학을 공부하여 서로에게 스승이 된 자리가 되었으며, 훗날 정약용이 외가인 해남윤씨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게 된 뒤 오솔길을 따라 다산초당과 혜장스님이 있는 백련사를 오가며 친형제 이상의 우애를 나눈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럼 혜장스님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백련사로 가 보겠습니다.

백련사를 지난해 6월 들른 후 1년여 만에 다시 갔습니다.

이번까지 벌써 네 번째 방문이군요.

백련사 개보살이라 불리는 진도개가 사람이 와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경루를 지나자마자 바로 백련사대웅보전이 나옵니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18세기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가 완도 근처 신지도에서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던 중 백련사에 들러 대웅보전과 만경루의 글씨를 남겼다고 합니다.

 

 

백련사 종무소인듯합니다.

 

 

대웅보전 옆에는 삼성당이 있습니다.

삼성당에는 독성탱화와 칠성탱화, 그리고 1931년에 그려진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삼성당은 불교가 한국의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전각으로 만덕산 삼성당은 예로부터 큰 인물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자손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부모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산신탱화는 소화 6년 일제 강점기 때 그려진 것으로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령과 까치 호랑이, 그리고 지팡이 끝에 물병을 매달고 있는 동자 그림이 매우 민화적이고 친근한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 백련사)

 

 

백련사에서 바라본 강진만입니다.

고려시대 혜일선사가 만덕사를 찾아 만세루 너머 강진만에 떠 있는 돛단배를 보며 읊었다는 시가 이 풍경을 보여주는군요.

백련이라 이름난 절 아름답고, 만덕산은 맑기만 한데/

문은 고요히 솔 그림자로 닫혀 있어, 객이 오면 풍경 소리만 듣네/

돛단배 바다 위로 지나고, 새들은 꽃 사이를 날며 우짖으니/

오래 앉으면 되돌아갈 길조차 잊을 만큼, 인간 세상의 흔적은 하나도 없네/

 

 

강진만 한 가운데 있는 가우도가 보입니다.

지난번 가우도 출렁다리를 포스팅했는데, 그 멋진 출렁다리가 있는 곳입니다.

 

 

백련사 대웅보전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앞면 세 칸, 옆면 세 칸의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이루어진 다포식 건축물로 1760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62년 중건했다고 합니다.

 

 

 

1710년에 목조로 조성된 부처님은 주불이 석가모니불, 좌협시 아미타불, 우협시 약사여래불입니다. 1760년 화재가 발생했을 때도 이 불상들을 먼저 빼냈다고 합니다.

법당 내부에는 아름다운 벽화와 조각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하나 다 찾아보지는 못했습니다.

 

 

백련사 범종각

 

 

백련사 천불전과 응진당

 

 

응진당 석축 아래에는 보물 제1396호인 백련사사적비가 보호전각에 고풍스러운 자태로 서 있습니다.

 

 

높이 4.47m 규모로 용머리를 한 귀부는 고려시대에 조성되었고, 비신과 이수는 1681년(숙종 7년)에 조성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려와 조선 등 시대를 달리하는 사적비에는 ,,,,

숙종 7년(1681) 당시 홍문관 수찬 조종저가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석은 숙종 때 것이지만 아래위의 돌거북과 머릿돌은 고려 시대 것입니다.

정약용의 <만덕사지>에 따르면 이곳에 원래 고려의 문필가 최자가 비문을 지은 원묘국사의 부도비가 있었지만, 그 비신이 언젠가

훼멸된 후 돌거북과 머릿돌만 남았다가 나중에 이렇게 다시 비석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수염 달린 고려시대 돌거북은 아래 사진의 돌거북과 달리 여의주를 물지 않고 있는 것이 특색입니다.

 

 

백련사(白蓮寺)의 본래 이름은 만덕사(萬德寺)입니다.

백련사를 품고 있는 산은 만덕산(萬德山)으로 백련사가 창건하기 훨씬전 부터 이미 만덕산으로 불리었기에 사찰도

만덕사라 불린 것 같습니다.

만덕사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에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원묘국사 요세가 중창을 하였고, 사찰이름을 만덕사로 부르다가 근래 들어 백련사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고려 후기인 1211년(희종 7년) 대대적 중창을 이끈 원묘국사 요세가 주도하여 일어난 불교 개혁 운동인 백련결사가 만덕사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세는 고승 지눌(知訥)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고,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있는 만덕사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으며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한 중창을 하게 됩니다.

이 중창은 1211년(희종 7)에 시작하여 21년 만인 1232년(고종 19)에 완공되었으며,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는데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결사(修禪社結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입니다.

지눌의 수선사가 돈오점수(頓悟漸修), 정혜쌍수(淨慧雙修)를 수행의 요체로 삼았던 반면, 요세의 백련사에서는 참회하여 죄를 멸하는 참회멸죄(懺悔滅罪)와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는 정토구생(淨土求生)에 전염했고 염불선을 수행 방편으로 삼아 그 후 120년간 8명의 국사를 배출하게 되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중흥기를 맞았던 것입니다.

 

 

대웅보전 오른쪽으로는 명부전이 있습니다.

명부전은 세상 모든 중생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지옥 중생들까지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명부전에 모셔진 지장보살로 안에는 1775년(영조 51)에 정암 즉원(晶巖 卽圓1738-1794) 스님이 지은 [시왕전중수기]현판이 있어

이 건물이 1775년경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백련사 만경루입니다.

만경루의 현판도 대웅보전의 현판처럼 18세기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가 남겼습니다.

 

 

 

 

 

만경루에서 바라본 강진 구룡포..

백련이라 이름난 절 아름답고, 만덕산은 맑기만 한데/

문은 고요히 솔 그림자로 닫혀 있어, 객이 오면 풍경 소리만 듣네/

돛단배 바다 위로 지나고, 새들은 꽃 사이를 날며 우짖으니/

오래 앉으면 되돌아갈 길조차 잊을 만큼, 인간 세상의 흔적은 하나도 없네/

라고 고려시대 혜일선사가 여기서 구룡포를 보고 시를 읊었다고 하니, 사색을 곁들인 여유를 찾아볼까요?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티끌 없는 거울이네/

울 옆의 긴대 바람에 소리내고/

난간 앞의 그윽한 꽃눈 속의 봄이라/

라고 조선 성종 때의 문신 김유(金紐)가 백련사 만경루에 올라 쓴 시도 있습니다.

 

부도전은 천연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 안에는 있습니다.

동백나무 숲 안에는 고려, 조선시대의 부도가 곳곳에 숨바꼭질하듯 흩어져 있으며, 원묘국사 증진탑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인 강진백련사 원구형부도(康津白蓮寺圓球形浮屠), 대웅보전을 중수한 월인당 총신 스님의 부도,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2기의 부도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응진전 앞에 춘파당 부도, 절 입구 축대 위에 부도, 명부전 앞에 부도의 잔해가 남아 있다고 하군요.

부도전이 있는 곳은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이라 들어가 보지를 못했습니다.

고창 문수사의 부도전도 마찬가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단풍나무 숲에 있기에 보호되어야 마땅합니다.

 

백련사에는 일주문과 해탈문, 금강문, 불이문 등이 없습니다.

그 문들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입니다.

주차장부터 절 입구까지 약 3천여 그루의 키 큰 동백나무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약 300m에 이르는 긴 동백숲 터널을 지나면서 바로 백련사가 나옵니다.

즉, 본전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도 없지만 동백 터널의 끝에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되기에

충분히 불이문(不二門)을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석축을 쌓아 터를 잡은 백련사와 그 뒷산인 만덕산.

석축 앞에는 넓은 텃밭이 자리해 각종 채소가 자라고 있어 여느 절집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백련사를 나와 다산초당으로 가 보겠습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길을 걸어야 하나 차량을 가져온 관계로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으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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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포토뉴스코리아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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