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한 장 들고 떠나는 광주 양림동 둘레길

2014. 11. 20. 06:30광주 견문록/광주 견문록

 

양림동은 광주 근대 역사 문화의 보고(寶庫)라고 불릴 만큼 근대 문화유산을 그대로 간직한 곳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광주 최초로 서양 근대문물을 받아들인 곳으로 선교사들의 사택과 아직 개발되지 않아 정감이 넘치는 골목길, 그리고 오래된 한옥들이 즐비한 곳으로 서양의 기독교 문화유적과 우리의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근대사의 보석 같은 공간이다.

미국선교사 유진벨(배유지)이 광주 최초로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세워 근대교육과 의료를 시작한 곳으로 유진벨이 몇몇 여학생을 가르치던 것에서 시작한 수피아 여학교가 있으며 한센병의 아버지로 불리며 죽는 날까지 나환자들을 돌보며 치료했던 우월순 선교사의 사택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광주시 문화재 1,2호인 이장우 가옥, 최승효 가옥 등 고택이 즐비하고 사직공원, 양림산과 나란히 하며 현대화된 광주에서 유일하게 옛 향기를 느끼게 해 주는 곳이다.

세련된 빌딩 숲과 현대화된 차량으로 가득 찬 도시는 이미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지만, 개발되지 않은 오래된 골목길과 멋들어진 한옥들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을 것이다. 공자 왈(孔子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 “예전에 배운 것을 연구하여 새롭게 응용할 줄 안다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양림동의 옛 것을 보고 배워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공부한다면 그대는 훌륭한 문화전도사가 될 것이다. 자, 그럼 출발해 볼까?

 

 

(지도 : 광주남구청제작, 클릭하면 커짐)

광주 양림동을 처음 여행하거나 양림동을 재밌게 여행하고 싶은 사람은 양림동 주민 센터 혹은 양림동 파출소 옆 ‘뒹굴 동굴’에 들러 양림동 지도를 받아 여행해도 되지만 아래 양림동 둘레길 지도를 인쇄해서 다녀도 된다.

이동순서는 각자 개성에 맞게 가도 되지만,

정율성 흉상 - 정율성 거리 - 정율성 가옥 - 양림 교회 - 오웬 기념각 - 어비슨 카페 - 이장우 가옥 - 최승효 가옥 - 뒹굴 동굴 - 통기타 거리 - 양파정 - 사직공원 시비 - 사직단 - 사직공원 전망타워 - 충현원(블레이즈델 동상) - 양림 미술원 - 호남신학대학교 - 다형 김현승 시비 - 선교사 묘원 - T브라운 카페 - 우일선 선교사 사택 - 수피아여고 - 커티스 메모리얼 홀 - 광주3.1운동 기념동상 - 수피아여고 소강당 - 수피아 홀 -윈스 브로우 홀 - 선교 기념비 - 무인카페 다형다방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마무리 짓는 코스로, 양림동 둘레길의 시작은 양림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출발하지만, 지도를 구했다면 정율성 흉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정율성 거리

13억 중국인이 추앙하는 천재 작곡가 정율성, 2014년이 탄생 100주년이지만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것 같다.

광주가 낳은 예술가이자 작곡가인 정율성은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외삼촌 최흥종이 사준 축음기를 좋아했고, 최흥종은 어린 정율성에게 서양 명곡을 들려주거나, 그가 활동하던 광주YMCA, 양림교회, 양림동 선교사촌을 통해 서양 음악과 접하게 해주었으며 동시에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정율성은 어머니 최영온의 본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정해업은 외삼촌 최흥종의 뒤를 이어 수피아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정율성의 형제들도 모두 외삼촌이 관여했던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를 졸업했다.

정율성의 작은 외삼촌은 최영욱 박사로 숭일 학교와 서울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켄터키 주립대학 의학부, 에모리 대학 의학박사를 취득한 후 광주 제중원(광주 기독병원)원장을 지냈고, 해방 무렵에는 황금동에서 서석병원을 운영하다 미군정 하에서 초대 전남도지사를 지낸 사람이다.

 

 

정율성 거리에 있는 연안송을 들어볼 수 있는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 악보아래 하얀색 단추를 누르면 듣고자 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최 박사의 부인이자 율성 형제의 작은 외숙모는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인 김필례(1891-1983) 여사다. 그녀는 일본 동경여자학원 유학 후 김활란과 함께 조선 여자 기독교청년회(YWCA)를 창립했으며, 미국 콜롬비아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정율성의 외삼촌 최영욱과는 미국 유학 중 결혼했다. 광주 수피아 학교 교사와 교감을 거쳐 교장을 역임하는 등 수피아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부인 김필례 여사와 사이에 자식이 없던 최 박사는 율성을 양자로 삼고 싶어 할 만큼 아꼈으며, 1933년 의열단원인 형의 권유로 중국으로 떠날 때 여비를 대 주었다.

 

 

 

*정율성 생가

정율성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로 오른쪽의 집들은 다 비어있다.

모두 헐어내고 도로를 내어 주차장 부지와 정율성 생가임을 알리는 기념물을 설치한다고 한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정율성은 외가와 양림교회에서 서양음악과 찬송가를 듣고 배우며 음악도의 꿈을 키워갔으며, 광주 숭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사망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학교를 중퇴한 뒤,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뒤 1937년 연안의 노신 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39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군의 공식 노래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한 인물이다.

 

 

 

정율성 생가는 지금 정율성과 관계없는 분이 살고 있지만, 정율성에 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100년이 다 된 석류나무 옆 작은방이 공부방이었다고 한다. 지금 천정은 막았지만 예전에 대들보에 쓰인 상량문에 적힌 연대를 보면 일제 때 지어진 집이 맞다고 한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9월 중국으로 다시 갔다가 12월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 때 인민지원군의 전선 위문활동을 하였다.

그 후 중국 주은래 총리의 요구로 김일성은 정율성을 중국으로 보내게 되고 이후 중국 국적을 취득했으며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작곡가로 약 360여 곡을 만들었다. 특히 [八路軍 行進曲]은 90년 北京 아시안게임에서 주제음악으로 쓰이기도 하였고, 2009년 중국 정부에 의해 ‘신중국 창건 100대 영웅’으로 선정된 바 있다.

 

 

 

정율성은 中國 현대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중한 인물임에도 주 활동 지역이 중국에다 중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2차 대전 이후 한 중 수교가 이루어질 때까지 전혀 몰랐던 인물이었지만,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그를 알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鄭律成의 작품이 국립 국악원의 노력으로 지난 96년 10월 8일 처음으로 한국에서 선보이게 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음악 활동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음악계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현재 남구 양림동 생가 터에는 출생지 표지가 세워져 있고 생가 앞 약 100m에는 2008년 ‘정율성로(路)’가 광주시와 남구청에 의해 조성됐다. 광주시와 자매도시 관계를 맺고 있는 광둥(廣東) 성 광저우(廣州) 시의 정율성 선생을 추모하는 시민단체에서 기증한 동(銅)으로 제작된 흉상도 ‘정율성로’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그가 태어난 광주는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매년 개최하고 올해로 10년째 ‘페스티벌 오! 광주 정율성 축제’도 매년 열어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출생지를 놓고 광주시 남구청과 하동 정씨 종친회가 주장하는 생가가 달라 아직도 정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 의외였다.

 

 

 

이곳은 정율성 기념사업회가 주장하는 정율성의 생가이다.

히딩크 호텔 주차장 뒤에 있는 한옥이 생가이며 정율성 기념사업회도 이곳에 있어 수많은 중국인들의 추모행렬이 이쪽으로 이어지고 있다한다. 율성정이라는 우물도 있고, 정율성의 가계도 및 관련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어 양림동 생가와는 완전 딴판이다.

 

 

 

출입문 앞에는 애국지사의 집이라는 명패가 걸려있고, 집안 이곳저곳에도 오래된 석류나무가 있다.

남구청이 주장하는 정율성 생가는 자필이력서와 가족의 증원 등을 근거로 양림동 79번지이고, 기념사업회에서 주장하는 생가는 정율성 선생 아버지 본적에 기록된 불로동 163번지로 정율성 생가 고증위원회는 두 곳을 모두 생가로 인정했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지.

어떻게 한 몸이 두 군데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매년 수만 명씩 정율성 생가를 찾아오는 중국인들이 거의 모두 불로동 163번지(히딩크 호텔 앞)로 간다고 하니 관광객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광주시와 정율성 고증위원회에서는 한 곳을 정확히 생가로 지정하던지 아니면 두 개의 생가를 연계하는 사업을 펼치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양림 교회

정율성 거리에서 중국 3대 음악가 정율성에 대해 알아보았다면 이제 양림동 중앙에 있는 양림 교회로 가보자.

이곳은 찾기가 참 쉽다. 교회 십자가만 보고 가장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를 찾으면 된다. 그러나 헷갈릴 수가 있다. 양림 교회는 양림동에 세 곳이나 된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4년 12월 25일에 배유지 선교사 사택에서 성탄절 예배를 드림으로서 시작하였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만큼 많은 일이 있어 지금은 대한예수교 장로회와, 한국기독교 장로회 등 두 교파가 양림동에서 양림 교회라는 이름으로 선교활동을 한다. 하지만 목표는 하나로 서로 합심하여 지역의 복음화와 지역사회발전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니 과거로 되돌아 다시 통합을 이룬다면 그것이 곧 새로운 양림 교회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양림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기독간호대학 옆 대한 예수교 장로회 양림 교회를 가 본다.

 

양림 교회는 1904년 시작하였지만 1907년에 교회당을 증축했으며, 1908년 선교의 목적으로 숭일 학교와 수피아 여학교를 설립했다. 1915년 오웬 기념각을 건립하였고 3.1운동으로 교회건물이 일제에 몰수되자 오웬 기념각에서 예배를 보기도 했다. 1953년 총회 분열로 기존 예배당에 한국기독교회 양림 교회가 들어서고, 오웬 기념각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 교회로 들어섰다. 1961년에는 양림 교회(합동-오웬기념각)과 양림 교회(통합-본당)로 다시 분리되었고 1969년에는 본당이 본당과 은성 교회로 분리되었다가 2005년 합동과 통합이 다시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결국, 양림 교회는 기존의 양림 교회와 은성 교회로 나누어진 셈이다.

 

 

이 근처에 살던 음악가 정율성은 어릴 때부터 양림 교회에서 서양음악과 찬송가를 듣고 배우며 음악도의 꿈을 키워갔다고 하니 양림 교회 어느 자리에선가 정율성의 그림자를 찾아봐야겠다.

 

 

*오웬 기념각

양림 교회 바로 옆에 오기원 기념각(오웬 기념각)이 있는데 이곳은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오웬과 그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이 건물의 특징은 객석에서 설교단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1층 바닥과 2층 발코니를 모서리의 설교단을 향해 약간 경사지게 하였다고 한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림 교회가 1919년 많은 교인이 참여한 3.1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으로 예배당을 몰수당하자 이 오웬 기념각에서 예배를 드렸다 하고, 양림 교회가 분열되면서 양림 교회 합동교파가 또 이곳에서 한동안 예배를 드렸다고 하니 기나긴 역사만큼 부침도 많이 겪었다고 하겠다.

 

 

 

이제 정율성 거리와 양림 교회를 둘러보았으니 다리쉼도 하고 목도 축일 겸 양림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어버슨 카페에서 착하디착한 커피 한잔 하고 가자.

 

 

*어비슨 기념관

1층은 기념관이고 카페는 2층이다.

세브란스 연합병원을 설립하고,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한국 근대의학과 근대의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올리버 어비슨(1860~1956)의

한국인들을 위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헌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2층 카페에서 보이는 양림 교회,

어비슨 카페는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각 1,500원 놀랍지 않은가?

 

 

 

고든 윌버포스 어비슨

고든 어비슨 1881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출생했으며 3살 때 아버지 올리버 어비슨 손을 잡고 처음 한국에 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공부했으며, 미국 YMCA의 농업전문 간사의 일원으로 1925년 부인, 두 아이와 함께 한국에 다시 들어와 호남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아버지 올리버 어비슨은 세브란스 연합병원을 세우고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한 의사였다.

 

어비슨은 농업전문가로 쌀농사 외에도 토양을 좋게 하는 법, 종자 고르는 법, 우량종자 보급, 유리온실 농업, 축산, 양계, 동물 기르는 법, 양봉법 등을 가르쳤으며 목공일까지 가르쳤다. 또한 밤에는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에도 힘을 썼으며 지역주민과 신뢰를 쌓아가며 신용협동조합과 농우회를 결성하여 생활개선과 문화 보급운동에도 앞장섰다.

 

안식년 휴가 때는 미국에서 통조림 기술을 배워 와 자신이 손수 만든 장비로 농산물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장기간 저장하고 좋은 가격에 판매하는 등 농촌사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어비슨 부인은 남편을 도와 자신이 습득한 간호기술을 한국의 영유아를 위해 사용했으며, 당시 호남지역에 만연된 영양실조와 영유아의 높은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생산량이 적고 구하기 어려운 우유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콩을 이용하여 콩우유를 만들어 영유아의 영양실조로 인한 사망률을 크게 낮추었다.

 

어비슨은 1933년에는 자신의 사택 근처에 농업실습학교를 세웠으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에게 농사교육과 성경교육을 실시하여 농촌지도자를 양성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탄압을 받고 1939년 어비슨 가족은 강제출국을 당한 뒤 1967년 미국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광복 후 어비슨의 농업실습학교 자리는 호남 성경학교(호남신학대학교)로 사용되었으며 양림교회는 한국농민을 지극히 사랑하여 이 백성을 위해 헌신한 고든어비슨의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가기 위해 2010년 그가 활동하던 이곳에 어비슨 기념관을 세우게 되었다고 ...

 

*이장우 가옥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좋은 골목길을 향해 걸으면 좀 전에 봤던 오웬 기념각 같은 서양식 건물과는 전혀 다른 한옥 두 채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이장우 가옥과 최승효 가옥인데, 이 두 가옥은 각각 광주광역시 지정 민속자료 제1호, 제2호로 등록되어 있다. 이장우 가옥은 1899년 정병호가 건축하였고 1965년에 이장우가 사들이면서 이장우 가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대문간, 곳간,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배치된 기와집이며 안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터 언덕 아래 굽이치던 양림천의 물길과 집 정면에 펼쳐진 무등산 봉우리의 풍광이 이 집과 어울려 한 폭의 경관을 이루고 있지만, 지금은 그 앞으로 많은 주택이 들어서 옛 풍광을 잃어버렸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의 지역감정을 코미디로 희석한 영화<위험한 상견례>에서 남자주인공 전라도 총각 현준(송새벽 역)의 본가로 나오는 집으로 세트장이 아닌 실제 사람이 사는 주택이다.

 

 

동강 이장우 박사(1919~2002)는 교육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동강 유치원과 동신중ㆍ고등학교, 동신여중ㆍ여고, 동강대학, 동신대학교를 설립하여 호남 지역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이장우 가옥은 현재 학교법인 해인학원 소유이다.

 

 

이장우 가옥은 사람이 현재 사는 곳이기에 일요일 방문은 하지 못한다. 평일에 대문 옆 샛문을 열고 들어가 조용히 관람하고 나오면 된다.

이장우 가옥을 보고나서 대문 앞으로 난 골목길로 내려서면 효자비가 하나 나온다.

 

 

*동부승지를 지낸 정엄(鄭俺1528~1580)효행정려

나주목사이던 정엄은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수 죽을 끓이고 약을 달이며 정성을 다했지만 결국 운명하게 되자 손수 장사지내고 아침저녁으로 호곡하며 시묘살이 하던 중 지쳐 쓰러져 이듬해 모친의 묘 옆에서 같이 운명을 달리한 효자였다.

이 효행비는 정엄이 사망한 1580년 이후 1611년 (광해군 3년)예조판서 이정구의 상소로 정엄의 생가앞에 세워졌다.

1975년 석조로 재건했으며 문헌고증은 없으나 충견에 대한 전설이 내려와 충견상도 같이 세우게 되었다.

 

 

 

효자비앞에 있는 사자모야의 석상은 양촌공 정엄이 기르던 개의 비이다.

이 정엄의 개는 한양과 평양 등에서 감사를 지내던 아버지와 정엄간의 연락은 물론 한양과 감영  지방 방백들과의 문서수발 등 신속한 통신연락업무를 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각종 연락사항이나 문서를 보자기에 싸고, 가고 올 노자돈 만큼의 엽전을 전대에 넣어 목에 걸어주면 보내고자 하는 곳을

다녀왔고 지정해 준 주막에서 밥을 먹고 주모가 밥값 만큼의 엽전을 빼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정확히 계산할 때까지 안 갔다고 한다. 

어느 엄동설한에 정엄이 급한일로 새끼 날때를 생각치 않고 한양으로 심부름을 보냈는데,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홉마리의 새끼를 낳았으며 주인이 살고있는 곳까지 한 마리씩 물어 나르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새끼를 나르다 그만 지쳐 죽었다고 한다.

자신의 실수로 아끼던 개가 죽은 정엄은 자책하며 슬퍼하다 개의 상을 조각케 하여 집뜰에 세우고 추모했으며, 후대에 양촌 정엄의 효행비가 세워질 때 충견상도 같이 이곳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정엄 효행비는 이장우 가옥을 들어가는 골목입구 모퉁이에 있어 눈에 잘 안 띨수도 있으니 주의깊게 봐야 한다.

또한 안에는 충견비도 있기에 바깥만 보고 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최승효 가옥

효자비를 보고서 양림동 공용주차장 쪽으로 내려가면 최승효 고택 안내판이 나오는데 다시 골목길을 올라가 최승효 가옥을 보고 계속 진행한다. 골목길로 들어서면 여름철이면 주황색 능소화가 멋들어지게 핀 전통 가옥의 문을 만날 수 있다. 그 문에서도 오른쪽 골목으로 좀 더 들어가면 막다른 집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최승효 가옥이다.

 

 

 

최승효 가옥은 이장우 가옥과 필적할 만한 고택으로 독립운동가 최상현이 1920년 건축한 한옥이다. 무등산의 절경과 양림산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지은 집으로 1968년 최승효가 인수하였다. 최상현은 다락을 배치하여 독립 운동가들을 숨겼다고 하며 독립운동자금 지원, 빈민구제에도 힘썼다. 부친 최명구는 구 시청 부근에 홍학관을 지어 신간회 등 여러 단체가 활용하였고,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승효 가옥은 작년까지만 해도 관람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올해 가을부터 집을 개방하고 있어 관람객들을 기쁘게 하는데, 현재 최승효 씨의 셋째 아들 최인준 화백이 관리하고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펼쳐진 광경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장엄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기존의 한옥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크기도 그렇고, 보통의 검정 기와가 아닌 붉은색 기와로 지붕이 이루어져 있었다. 부지가 꽤 커서 물어보니 대지만 3,000여 평이라고 한다. 한옥의 사면으로 정원과 샘물, 작업실, 무대 등이 있는데, 초록 잔디와 멋진 소나무들과 잘 어우러져 있다.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가옥과 곳곳에 설치된 현대미술품을 보고 있자니 시공간을 초월한 곳에 있는 듯한 묘한 감정도 들었다.

 

 

*고광표 고택

양림동 뒹굴동굴로 가는 길의 좌측에 있다.

이장우 가옥, 최승효 고택과 달리 고광표 고택은 민속자료가 아니지만 1920년대에 지어졌다.

 

 

 

*뒹굴 동굴1,2

이장우 가옥을 나와 최승효 가옥을 나오면 고광표 가옥이 나오고 그 아래로 쭉 내려가면 광주천이 나온다. 광주천에서 좌측 길로 방향을 잡으면 야트막한 산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광주사직공원이다. 사직공원을 올라가기 전에 좌측 양림 파출소 옆으로 이상하게 생긴 동굴 모양의 구조물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뒹굴 동굴’이다.

광주에 동굴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장난기 넘치는 동굴 이름과는 달리 이곳은 일제가 만든 방공호이다. 일제는 광주 사직공원 일대 네 곳에 방공호를 팠다. 하지만 한 곳은 규모가 매우 작아 지금은 흔적 찾기가 힘들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일제가 판 방공호 세 곳의 규모는 폭 약 2m에 길이가 약 30m에 이른다. 일제는 대피시설인 이 방공호를 무기고와 화약고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 세 곳의 방공호는 각기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한 곳은 문화재 지킴이들의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고, 한 곳은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좌측이 가정집으로 쓰이는 동굴, 그리고 우측이 양림동문화재지킴이의 휴식처로 사용되는 동굴이다.

 

 

우리가 간 곳은 일반인에게 공개된 동굴로 현재는 양림동을 소개하는 다양한 글귀들을 전시해놓은 공간으로 있다. 이곳에 있는 문화 해설사는 남구청에 소속되어 있는 자원봉사자로 양림동 거주 주민들이 직접 동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 보이는 건물이 양림 파출소이다.

파출소 같지 않고 미술관처럼 보이지 않은가? 그렇다 실제로 미술관을 겸한 파출소이다.

유리 벽면 내부에는 LED조명이 설치되어있어 다양한 설치미술프로그램을 빛으로 볼 수 있다.

야간에만 조명을 켜는 관계로 낮에는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사직공원으로 올라가는 골목에 있는 통기타거리가 불을 켤 시간이면 양림 파출소의 화려한 LED미술작품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통기타 거리

'뒹굴 동굴을 나와 양림 파출소를 끼고 좌측 산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우측으로 오래된 건물들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통기타거리이다.

 

 

 

70~80년대에는 ‘기타집’이라 불렀으며 7080세대들의 추억이 서린 곳으로 최근에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과 연계한 국제적인 뮤직 페스티벌 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사직공원의 음악 타운화도 계획 중 이어서 이 통기타 거리가 더 주목을 받고 있다. 광주를 방문한 통기타 애호가라면 생음악을 들으면서 생맥주 잔을 부딪치고 싶다면 양림 파출소 옆 통기타 거리로 가면 된다.

 

 

*양파정

통키타 거리를 보고 사직공원을 넘어가기 전에 좌측 계단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본다. 이곳에는 광주천을 굽어보는 전망 좋은 곳에 양파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고려 말 광주천에 건축되어 홍수를 다스린 석서정을 추억하여 조선말 광주의 큰 부자이며 참봉이었던 온양 정씨 양파 정낙교가 1914년 양림산 바위언덕에 건축하여 후에 광주군에 기증한 누정이다.

바닥이 여느 정자와 달리 콘크리로 되어 있어 여름철 누워있으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이지만, 신발을 신고 그대로 들어가는 바람에

바닥이 지저분하다. 아마도 마루 바닥이었다면 신발을 벗고 올라갔을 것이다.

조그마한 안내간판이라도 걸어놨다면 신발을 벗고 올라다닐 것인데..그게 조금 아쉬웠다.

향토명사들의 시문 30여 점이 있으며, 정낙교의 아들 정광호와 정상호는 모두 광주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양파정에서 바라본 양림동

 

 

양파정 뒤로는 경찰충혼탑으로 1956년 전남도청 앞 상무관 정원에 세워졌던 것을 1979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제 사직공원으로 난 길을 따라 공원을 넘어가야 한다.

공원을 넘어가면 정상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리는데 왼쪽 길로 들어서면 양림동으로 가고 오른쪽 길로 내려서면 서동으로 간다.

사직공원은 한때 동물원이 있었다. 동물원이 우치공원으로 옮기면서 한때 수영장이 들어섰으며, 팔각정에 대회전 목마 등 유희시설도 있어 7080세대들의 향수를 심하게 자극하는 곳이다.

지금은 완전 공원화가 되어 수많은 시인의 시비가 들어서 있으며, 녹지 조성이 잘되어 한낮에도 햇빛 비추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구.여성회관으로 지금은 광주문화재단에서 부속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광주문화재단 부속건물에서 오른쪽 골목길로 살짝만 내려가면 사동 최부자집을 볼 수가 있다. 

구 한말 광주 최고부자로 손꼽히는 인물이 바로 만석꾼 최명구 선생이다.

그 외 구 호남은행과 무송각(광주전통문화관)의 설립자 현준호 선생이 7천석, 양파정과 이장우 가옥을 지은 정낙교 선생이 6천석으로 뒤를 이었다고 한다.

 

그 최명구 선생의 아들 최상현은 지금의 최승효 가옥을 지은 사람으로 그곳에서 둘째 아들 최정엽과 손자인 준성, 기성씨와 살고 큰아들 최성숙을 위해 지어준 집이 바로 사동 최부자 집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광주천이 사동 최부자집 앞으로 흘렀으며 최부자집 옆에는 물레방아도 있었다고 하니 사동 최부자집의 옛 모습을 떠올리면 영화의 한 장면이 나올 것 같다.

 

1800평에 이르는 대지에 웅장한 목조2층 건물은 일제시대때 지어진 보기드믄 근대목조 2층 건물로 한국전통가옥에 일본양식을 가미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전혀 관리 및 보존이 이루어 지지 않아 폐가나 마찬가지로 있는 것이 안타깝다. 본채 외에도 다른 건물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이렇게 본채만 남았다. 한때 이 건물에는 주점과 독서실 등이 들어서 내부는 변형이 많이 되었으며, 현재 거주하는 분은 이화여대 음대 석사로 교직에서 정년퇴임한 최순 할머니와 그 딸로 최명구-최상현-최성숙-최윤성-최순으로 이어지는 가계를 지키고 있는 분이다.

 

관리가 안 되는 이유가 대지는 전남대학교 소유이고 본채와 화장실 건물은 최성숙의 아들인 최윤성과 장녀 최순의 소유였지만 법적다툼을 통해 지금은 모두 전남대 소유라고 한다. 그동안 관리주체가 모호하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보니 시에서 나서서 직접 관리하기도 힘들어 지금까지는 빛고을 문화재지킴이와 무진주문화재지킴이 봉사단에서 봉사활동으로 잡초제거만 하고 있으며 본채안의 각 방들은 형광등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총체적인 관리 부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2012년 7월 경 최순 할머님이 광주시장과의 면담을 통해 근대목조건축물 문화재로 등재될 예정이라고 하니 조만간 다시 옛 모습을 되찾은 사동 최부자 집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구 KBS광주방송국으로 지금은 광주콘텐츠산업지원센터가 있다.

건물앞의  계단은 사직공공예술프로젝트에 의해 설치된 미술품이다.

작품명 : 공원풍경1-스텝(작가 김영준)

 

 

 

데크길 옆으로는 각종 시비가 들어서 있다.

금남군 정충신은 조선중기 무신으로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임진왜란때는 17세의 어린나이에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연락병으로 활약했으며 권율장군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에 갔다가 이항복의 권유로 학문을 배우면서 무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무과에 급제한 뒤 1602년  명나라에 다녀와 국제통이 되었으며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지금 광주 금남로는 정충신 장군의 시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그외 윤선도의 오우가,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면앙정 송순의 시비, 박봉우의 시비, 백호 임제의 시비, 충무공 이순신의 시비, 눌재 박상의 시비 등이 있다.

 

 

*사직단(社稷壇) 

사극에 보면 많이 나오는 말...전하~~~종묘 사직을 보존하소서~~

그 사직이 광주 사직공원에 있다. 왕조가 유지되려면 세가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왕의 권위와 통치수단인 궁궐이며, 하나는 왕조의 존립근거인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이고 나머지 하나는 토신과 곡신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으로 이 셋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왕조가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하들은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을 때마다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소서 라며 왕을 닥달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천(天)·지(地)·인(人)에 대한 국가의 제례로서 원구제(圓丘祭)와 사직제(社稷祭) 및 종묘제(宗廟祭)가 있었다.

그중 사직제(社稷祭)는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농작의 풍년을 좌우하는 곡식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드리는 제례로, 왕실제사 중 가장 큰 대사(大祀)에 속하여 사직대제라고 부르고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사직대제 봉행위원회에서 사직대제를 보존계승하고 있으며, 2000년 10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9월 셋째 주 일요일 사직단에서 제례를 봉행하고 있지만 이곳 광주에도 사직단이 있으니 왠일일까?

 

서울에 사직단이 있듯이 광주 등 지방에도 사직단이 있었다. 이 지방 사직단은 임금으로 부터 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위임받은 지방 수령이 왕명으로 제사를 지냈다 하는데, 광주 사직단은 조선 태조 3년 부터 나라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며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894년 제사가 폐지되고 1960년대 말에 사직동물원이 들어서면서 사직단은 헐리고 말았다. 그 뒤 사직단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자 1991년 동물원을 우치공원으로 옮기고 사직단을 복원하여 1994년 4월 100년 만에 사직제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팔각정은 헐리고 그 자리에 광주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사직공원 전망타워가 세워졌는데, 매년 4월 중순이면 벚꽃이 만발하여 인근의 광주공원과 더불어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곳이다.

 

 

*충현원

사직단을 보고 왼쪽 길로 들어서 광주 탑 건립현장을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온다. 도로가 나오면 바로 우측 내리막길로 보이는 충현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가면 충현원을 찾을 수 있다.

 

 

충현원이라는 간판이 따로 있지 않아 찾는데 좀 애를 먹었지만 충현원 입구에는 블레이즈델 동상이 있으니 동상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면 충현원을 찾은 것이다.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이 가운데 서서 한복을 입은 여자아이를 안고 남자아이에겐 어깨동무를 한 동상은 그가 마치 아이들을 지켜주는 듯 보였다. 블레이즈델 대령은 1950년 가을과 겨울에 서울 길거리에 버려진 1,059명의 한국 전쟁 고아들을 구출했다. 1950년 12월 20일, 그들의 목숨과 경력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비행기 수송 작전'이란 이름으로 그 어린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김포에서 제주도로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충현원은 박순이 선생이 1949년 우일순 선교사댁에서 한국 전쟁 전후에 발생한 전쟁고아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설립한 후 1952년 늘어나는 고아들을 위해 양림동 210번지로 옮겨진 선교 사회복지기관이다. 충현원은 고아들의 건강을 위하여 채광과 통풍 등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던 흔적의 건물들이 복원되어 해외 입양인들이 방문할 때 잃어버린 뿌리를 알게 하며 입양 당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충현원 근처에는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500,000명의 어린이를 추모하기 위한 ‘비운의 왕좌’라는 조각과 해외로 입양된 한인 입양인들을 위한 ‘평화의 대사’라는 조각이 함께 충현원을 빛내고 있다.

 

 

*호남신학대학교

 

충현원에서 나와 다시 왼쪽 길로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호남신학대학교가 보인다. 호남신학대학교 역시 수피아여고만큼이나 근대역사문화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교내에는 다형 김현승 시인의 시비가 있고, 우일선 선교사 사택과 선교사 묘원이 있으며 중간에 다리 쉼하며 사색을 즐길 수 있는 티브라운 카페가 있는 곳이다.호남신학대학교가 양림동에 있다는 것은 그 역사의 뿌리가 광주에 최초로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운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배유지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광주 선교에 이어 1955년 어비슨의 농업실습학교 터에 호남성경학교가 세워졌다.

그후 1961년 호남성경학교, 광주 야간 신학교, 순천 매산 신학교 등 세 학교가 통합되어 호남신학원이 되었으며, 1963년 호남신학교로 개치되고, 1984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자와 동등한 학력이 인정되는 학교가 되었다.1988년에는 교회음악과를 증설하였고, 1992년에는 대학교가 되었으며, 1995년 신학대학원이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호남신학대학교 안에는 우일선 선교사 사택과 선교사 묘원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먼저 들릴 곳이 있다. 바로 양림 미술관이다

 

 

*양림 미술관

호남신학대학을 들어가기 전에 바로 앞에 있는 양림 미술관을 들어가 보자

현대식 기와지붕으로 된 두 채의 건물이 바로 ‘양림 미술관’으로, 양림 미술관은 무료관람에 사진촬영도 가능하다고 하니, 나들이하기에도 참 좋은 장소인 듯하다. 다만, 양림 미술관은 오후 1시 이후부터 운영하므로 오후에 방문할 것을 권한다.

양림 미술관 운영시간 안내

▪화~금: 13:00~18:00

▪토요일: 13:00~17:00

▪휴관일: 일요일, 월요일

▪문의: 062) 607-2312

 

 

 

*김현승 시비

위 사진에서 보는 무등산은 바로 양림동 광주신학대학교에 있는 다형 김현승의 시비에서 본 것으로 시간을 달리하여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무등산을 광주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죽기 전까지 줄 곳 보게 되는 것으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일출을 광주 8경의 하나라고 한다.

다형 김현승 시인은 눈물과 보석과 별의 시인으로 커피를 워낙 좋아해서 호도 다형(茶兄)이라 불렀으며, 김현승 시초, 옹호자의 노래, 견고한 고독, 절대 고독 등 4편의 시집이 있고 숭전 대학교 문리대 학장으로 있다가 1975년 교단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63년의 생을 마감했다.

김현승시비를 보고서 신학대학교 운동장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운동장 한켠에 양림산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길이 나온다. 선교사 묘역으로 가는 길이다

 

 

 

*선교사 묘원

호남신학대학 운동장에서 양림산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한 50m를 이동하면 선교사 묘원이 나온다. 선교사 묘원이 연결되는 샛길마다 선교사들의 이름을 따서 길 이름을 짓고 나무 팻말을 세워 두었다. 특히 고난의 길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편하게 놓은 65개의 디딤돌엔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곳에 묻힌 45명의 선교사와 850여 명의 호남지방 순교자들의 아픔을 느끼며 고마움을 전하는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선교사 묘역에 도착하게 되는데 잔디 위에 비석을 세워 그들의 공을 기리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선교사들은 광주, 전남에서 한센병 치유공동체, 결핵 치유공동체, 빈민 구제공동체 등을 통한 희생, 나눔의 삶을 실천했다고 한다.

 

 

 

 

 

고난의 길

디딤돌 65개로 만들었으며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아내와 자식을 잃고 이곳에 묻힌 45명의 선교사와 850명의 호남지방

순교자들의 눈물과 아픔, 고통과 피흐림을 느끼는 발걸음으로 걸어야 한다고 한다.

고난의 길에는 오웬길, 윌슨길, 카딩톤길, 포싸이트길, 탈마지길, 세핑길, 유화레길, 브라운길, 프레스톤길 등 선교사의 이름을 딴 길이 있으다. 이곳은 돌림병이 걸린 어린아이들을 버리는 풍장터였으나 유진벨은 이 산에 나무를 심고, 산자락에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워 광주

근대문화를 전하는 '생명의 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제 우월순선교사 사택으로 가기 전에 갈증을 해소하고 다리도 쉴 겸 티브라운 카페로 가 본다.

 

 

 

*T브라운카페

자, 이제 조금 많이 걸었으니 잠시 쉬워가자

양림 교회 옆에서 만났던 어비슨 카페처럼 이곳에도 선교사 이름을 딴 T브라운 카페가 있다.

 

 

이곳의 메뉴도 어비슨 카페와 비슷하다. 가격도 매우 저렴해서 주머니가 얇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양림동 둘레길 투어에 나서는 사람들의 휴게소 같은 곳이다.

카페에서 나오면 바로 정면으로 무등산이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정말 아름답다. 카페 우측으로는 아주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우일선 선교사 사택이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

학교에는 선교사 묘역과 함께 선교사들의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우일선, 원요한, 유수만, 피터슨 선교사 사택이 있는데 우일선 선교사 사택이 대표적이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1920년대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며 광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다. 우일선 선교사는 1908년 제중원(현 기독병원)의 원장이 되어 의사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에서 계단 길로 내려서면 나오는 곳이 바로 원요한, 유수안선교사 사택이 있다.

 

 

 

이곳에서 우월순 선교사는 1925년 나환자 치료를 위한 전문 진료소를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애양원이 탄생하게 된다.

평면은 정사각형으로 1층은 거실, 가족실, 다용도실, 부엌, 욕실이 있고, 2층은 사생활 공간으로 침실을 두었다.

현재는 1층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방 한 칸 만 작업실 및 침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2층은 침실, 욕실, 부엌, 다용도실로 사용한다.

지하층은 창고와 보일러실로 사용하며, 크기는 정면ㆍ측면 10.6m, 연면적 350㎡이다.

 

벽은 회색벽돌(225㎜×110㎜×55㎜)을 사용하여 네덜란드식으로 쌓았고, 내부는 회반죽으로 마감을 하고 고막이 부분은 화강석을 쌓아 처리하였으며, 지하의 통 풍과 채광을 위해 정면부분에 십자형 구멍을 두는 장식벽돌쌓기를 하였다.

개구부는 모두 반원의 아치형으로 만들었고 창대부분은 벽돌 마구리 세워쌓기를 하였다. 창은 이중창으로 외부는 열개창, 내부는 오르내리창으로 구성되어있다. 허리돌림띠 (String Course)를 사용하여 1층과 2층의 구분을 주었으나 지하층은 구분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현관 2개의 기둥상부에는 1층과 2층에 각각 6켜 내쌓기의 주두장식이 되어 있다.

 

 

*호랑가시나무

선교사 사택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이제 수피아 여학교로 가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에 유명한 나무가 있다.

광주시 기념물 제17호인 호랑가시나무로 수령이 400년이나 된다.

1904년 배유지, 오기원 선교사가 황량한 양림산에 선교부를 세운 후 호랑가시나무들은 꾸준히 보호를 받아왔으며

100여 년을 훌쩍 넘긴 노거수들과 함께 양림산을 지키고 있었다.

 

 

 

 

전남 남해안, 제주 서해안 등의 자생 감탕나무과 상록활엽관목으로 광택가죽질 잎가에 가시들이 있어

호랑이가 이 나무에 등을 긁었다는 전설도 있다.

호랑가시나무를 지나면 광주에서 제일 오래된 여학교인 수피아 여고가 나온다.

 

 

 

*수피아 여고

광주 최초의 근대식 학교는 1904년 광주 최초의 교회로 설립된 양림교회 설립자 배유지 선교사에 의해 1908년 선교목적으로

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한 것이 최초이다.

서울에서는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연희전문학교, 1906년에 애덤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대구 계성고에 이어 여학교로는 1908년 광주에 세워진 것이다. 당시 이러한 학교들은 선교사들이 선교목적으로 한국에 왔다가 병원을 설립하고, 이어 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이어진 것이 보통이었으며, 수피아 여학교는 선교사들이 모여 살던 동네에서 한두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것이 정식 학교로 까지 발전한 풀뿌리 교육의 산실인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수피아여학교는 1907년 미국 선교사 유진 벨의 사택이 있던 지금의 사직도서관 일대에서 예배를 보면서 몇 명의 여학생들을 가르친 것에서 시작하여, 다음 해인 1908년 남학생을 위한 숭일 학교와 여학생을 위한 수피아 여학교를 설립한 뒤 한동안 특별한 이름 없이 교회내의 ‘광주여학교’ 정도로 불리다가 미국의 한 부인이 자신의 여동생인 스피어(Speer)를 애도하는 뜻에서 기부한 자금으로 1911년 수피아홀을 준공했는데 이것이 수피아 여학교라는 교명의 기원이 됐다.

 

 

*광주3.1 만세운동 기념탑

강당앞에는 동상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광주 3․1 만세운동 기념탑이다.

당시 수피아 여학교는 기독교신앙과 신문물 전파 말고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고취와 지역문제에 많은 관심과 기여를 하도록 교육했다. 1919년 삼일 만세운동에 수피아 여학교에서 많은 참여자가 나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교사2명과 21명의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당시 삼일 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그러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5년에 건립했다. 

또한 수피아 여학교는 기독교의 유일신앙에 토대를 둔 학교였던만큼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1937년에 자진 폐교할 정도로 의식있는 학교였으며 훗날 다시 교명을 되찾는 과정에서도 많은 부침이 있었던 학교였다.

 

 

*커티스 메모리얼 홀(유진벨 선교사 기념교회)

이 기념 동상을 바라보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커티스 메모리얼 홀이 보인다.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159호인 이곳은 미국 테네시주 잭슨의 커티스씨가 코닐리어 커티스를 기념하여 선교사들의 기부금으로 1924년에 지어졌다.

초기에 이 건물은 건축 헌금 기증자의 이름을 따 코넬리아 커티스 기념교회라 불렀지만 지금은 유진벨 선교사 기념교회라 명칭을 바꿨다.

 

1895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유진 벨(Eugene Bell,한국명 : 배유지)은 나주,목포,광주 등 주로 전라도에서 활동하며 많은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웠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광주 기독교 병원과, 양림교회,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로 그러한 유진 벨 선교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유진 벨 선교사 기념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 것이다. 

 

 

 

 

1923년 건축을 시작해 이듬해 완공된 이 교회는 반지하 건물로, 아래층은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와 선교사 숙소로,윗층은 주일 오전 사역을 마친 선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 드리는 장소로 활용됐다.

1955년에 광주전남선교의 아버지인 배유지 목사를 기려 배유지 기념 예배당이라고 명명하였고, 현재는 예수피아교회로 예배가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규모는 작지만, 변화가 풍부하고 건축수법이 우수한’ 이 회색 벽돌건물의 위층은 예배실, 아래층은 선교부 아동들의 학교로 쓰였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건물이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창문의 구조가 오랜 서양식 건물의 구조를 띠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피아 옛 강당 

학교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수피아 옛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적벽돌 건물로 지어졌으며 광주 근현대사, 건축사, 여성교육사에도 의미가 있다.

1937년 자진폐교에 이어 수피아 여학교의 모든 건물과 부지는 조선총독부에 몰수되었으며 그 후 1942년부터 1943년 12월까지 광주공립상업실수학교로, 1944년 5월에는 광주의학전문학교가 여기서 개교하여 해방 뒤까지 교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미군정시절에는 광주에 주둔한 미군들의 막사로도 잠시 이용되었다가 해방되는 해 9월 이 학교 출신자로 훗날 민주화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조아라 여사 등이 금정교회에서 재교교 모임을 가지면서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고 결국, 미군정청의 허가를 받아 이듬해 4월 학교 지위를 되돌려 받았다. 그리고 1947년 6월 미군이 떠난 뒤에 숭일학교에서 잠시 머물던 것에서 원래의 학교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수피아홀 

이곳에서 오른쪽 산 쪽으로 올라가면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된 수피아홀이 있다. 수피아홀은 미국 스턴스 여사(Mrs. M.L.Sterns)가 세상을 떠난 친정 동생(Jennie Speer)을 추모하기 위하여 기증한 5,000불로 세운 건물이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붉은 벽돌이 아니라 회색 벽돌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광주 지역 개신교 선교의 근거지이자 여성 교육의 요람으로 꼽히는 수피아 여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윈스 브로우 홀 

수피아 여고에서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면 윈스 브로우 홀이 있다. 이곳은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370호로 지정된 곳으로 윈스 브로우(Winsborough) 여사가 받은 생일 헌금으로, 건축을 전공한 남장로회 마틴 스와인하트(Swinehart한국명 서로득) 선교사가 건축하였다.

 

 

 

이 건물은 1927년에 준공되었으며 현재는 수피아 여중 본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수피아 여학교를 나와 지도에 있는 푸른길을 따라 소설가 황석영의 '장길산'집필지, '징소리'의 소설가 문순태 거처,

'첫사랑'의 극작가 조소혜 거처 등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거처나 집필지라는 표지판이라도 세웠더라면

찾아다닌 보람이라도 있었겠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기에 양림동 둘레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은 수피아여고의 윈스브로우 홀을

마지막으로 다시 양림교회 방향으로  내려오면 된다.

 

 

양림동 둘레길도 이제 종착역에 도착하였다. 

정율성거리에서 시작하여 양림교회와 이장우 가옥 등을 만나고 사직공원을 넘어 한국전쟁고아들의 보금자리 충현원도 들러 보았다. 

양림동 둘레길의 오아시스같은 카페 2곳과 식당 1곳도 같이 소개하여 먹고 마시고 보고 즐기는 양림동 둘레길 여행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무인카페 다형다방과 선교기념비이다.

마침 다형다방에서는 '양림동의 화가들' 아카이브展<이강하, 그 도도하고 짙푸른 물너울>이 열리고 있다.

故이강하 화백은 무등산과 영산강 등 전라도 풍경 속에 역사의 한과 통일을 향한 염원을 화폭에 사실주의 방식으로 그려낸

광주의 대표작가로 알려져 있다.

 

 

 

*다형다방과 선교기념비

수피아 여고 윈스 브로우 홀을 보고 나왔다면 KT 남광주 지사를 보고 좌측으로 길을 나선다.

그렇다면 수피아 여고 정문 앞을 지나 다시 양림교회 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사거리 모퉁이 2층에 다형 다방이라고 있다.

 

 

 

2층에는 故이강하 화백의 화실로 꾸며져 있다.

손때가 묻은 이강하 화백의 작업실 도구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 것이다.

 

 

 

다형 다방에서 호남 신학대 쪽으로 잠깐 올라가면 우측으로 선교기념비가 있으니 그곳을 보고 다시 다형 다방으로 돌아와 무인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양림동 둘레길에 대한 마지막 정리 작업을 하면 된다.

선교기념비는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이곳에서 배유지 선교사가 지역민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린 배유지 선교사의 임시사택이 있던 자리로 1982년 선교기념비를 세웠다. 

 

양림동 둘레길을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일단, 양림산과 사직공원을 끼고 이루어진 양림동 둘레길을 걸으려면 편안한 신발과 간식, 생수는 필수이다. 4.5km로 이루어진 구간거리는 짧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볼거리가 많아 계속해서 발걸음을 멈추게 될 것을 고려하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매력적인 둘레길임은 분명하다. 100년 전 광주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혹은 그 당시 건축물을 보고 싶다면 꼭 한번 들려볼 것을 권하고 싶다. 서양식 건물과 한옥이 함께 공존하는 멋진 곳이다.

 

하지만 많이 아쉬웠던 것은 푸른길이라 불리는 곳에 표시된 대부분의 작가 거처 및 소설가 황석영의 ‘장길산’집필지에 관한 정보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떠한 표시도 있지 않고, 아파트 담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둘레길을 걷는 이들에게 의아함과 지루함을 더한다. 둘레를 꼭 돌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라면 괜스리 이곳까지 갈 필요가 없다.

 

그리고 대중교통수단으로 광주 양림동에 왔다면 양림동 둘레길을 정율성 흉상에서 시작하지말고 다형다방에서 많은 정보를 취득하여 시작하는 것도 나을 것이다. 하지만 승용차편으로 양림동 둘레길을 찾았다면 굳이 걷지 않고 승용차로 이동하여도 충분히 다닐 수 있으니 사간이 부족한 여행자는 차량으로 이동하여도 큰 문제가 없음을 알려드린다.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양림동 둘레길과 골목은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도 100% 만족감을 채워줄 수 있으니 언제 어느때라도

양림동이 궁금하다면 달려가보길 바란다.

 

양림동 둘레길 tip. 

양림동 ‘뒹굴 동굴’이나 양림동 주민 센터, 다형다방 등에 가면 양림동 둘레길 지도를 받아 볼 수 있다.

지도를 펼쳐놓고 차분하게 자신만의 양림동 둘레길 동선을 그려서 여행해보자.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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