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지평선축제가 열리는 김제벽골제에서 농자천하지대본을 묻다.

2017. 9. 20. 06:00전라북도 견문록/김제 견문록



김제 벽골제에서 農者天下之大本를 묻다.

 

한반도는 산지 면적이 전국토의 70% 이상을 차지한 산림국가로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 산이다.

전국 어디든 주말이면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산으로 향하는 민족의 대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나라가 한국인데,

전북 김제 딱 한 곳만 예외이다.

 

김제는 전체 면적의 절반이 논으로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김제평야와 만경평야가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일 년 내내 산으로 가는 사람보다 논에서 일하는 사람이 더 많은 곳으로 전북의 어머니 산이자 김제의 진산인 모악산에서 발원한 생명수가 아주 오래전부터 풍족하게 흘러 기름진 평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제는 옛 삼한시대 마한의 벽비이국(辟卑離國)이 있던 곳으로 백제 인덕왕 때까지 벽골군(碧骨君)으로 불렸다.

벽이기나 벽골은 벼고을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지명에서 보듯 삼한시대 부터 김제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벽골제라는 저수지를 조성할 정도로 물을 귀중하게 여긴 농자의 땅이었다.

 

 




소설가 조정래는 김제만경평야를 중심으로 일제 쌀 수탈의 역사를 쓴 대하소설 아리랑에서 징게 맹경 외에밋들이라고 김제의 들녘을 표현했다.

징게 맹경은 김제와 만경을 말하고 외에밋들은 넓은 들녘을 말하는데, 호남평야가 바로 김제만경평야인 것이다.

 

거기에 물을 댄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자,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삼한 시대 3대 수리 시설로 손꼽히는데, 오늘은 김제 지평선 축제에 맞춰 김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만날 수 있는 벽골제에 들러 논과 물의 소중함을 여긴 농자천하지대본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한다.



 


벽골지문이라 쓰인 솟을대문에 들어섰다.

엄청난 규모에 놀랍지만 문턱이 없는 것도 특이했다.

예로부터  양 옆의 행랑보다 지붕을 높게 올린 솟을대문은 권위의 상징이다.

과거엔 말도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앴다는데, 요즘은 말대신 차량이 드나든다.



  

벽골제 관광단지는 엄청 넓다.

고대 최고의 수리시설인 벽골제와 그 배경인 김제만경평야의 문화사적 의미가 높아 1975년 벽골제 발굴을 시작으로 유적정화공사를 마치고 1990년 과거와 미래를 연결할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했는데, 총면적만 188,848㎡로 모두 들러보려면 약 3시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서 알뜰하게 관람할 코스를 만들어봤는데, 18.관광안내소 - 17.지평선몰 - 9.짚풀공방 - 10.민속놀이도구방 - 12.명인학당 - 11.전통가옥 - 7.벽천미술관 - 6.우도농악관 - 5.단야루 - 3.농경문화박물관 - 4.단야각 - 3.벽골제 중수비 - 2.수문 장생거 - 쌍용조형물 - 8.농경사주제관 - 논 - 주차장으로 나오는 코스로 대략 2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다.





관광안내소에서 벽골제 안내 지도를 받아 출발한다.

지평선몰에서는 한복을 무료대여 한다.

대여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니 친구나 연인끼리 왔다면 무료로 대여해 주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벽골제 여행을 떠나면 더 멋진 인생 사진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왕이면 9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열리는 김제지평선축제에 맞춰 멋진 한복 투어를 지금부터 기획해 보면 어떨까?

여행 중 배가 고프다면 오른쪽 지평선 시골먹거리장터에서 해결할 수 있다.

한옥으로 된 장터도 아름답기만 하다.


 



짚풀공방과 민속놀이 도구방이다.

이른 시간이라 썰렁하지만 빠지면 안되는 코스다.

짚풀공방은 지푸라기, 보릿대, 왕골 등 여러가지 풀을 이용하여 공예품이나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고 체험하는 공간이고, 민속놀이 도구방은 솟대, 나무곤충, 연만들기 등 다양한 목공예체험과 민속놀이 도구를 직접 만들고 체험할 수 있다.





민속놀이 상설체험장에서는 투호, 고리걸기, 굴렁쇠굴리기, 윷놀이, 제기차기, 널뛰기,새총쏘기,그네뛰기 등 온갖 민속놀이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석정 이정직의 생가와 김제 동헌 내아 도 재현했으며 전통가옥에서는 숙박체험도 가능하다.

옛 선조들의 삶과 문화를 한 자리에서 체험해 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운 추억인데, 석정 이정직은 조선 말의 실학자로 김제 지역의 학풍과 학통을 크게 형성한 대학자로 많은 제자를 길렀다고 하며 생가는 백산면 상정리에 있다.

김제 동헌 내아는 김제시 교동월촌동에 있는데, 김제를 관할했던 고을 수령의 살림집이다.





명인학당은 선비체험을 할 수 있는 서당으로 훈장님이 직접 살면서 운영한다.

아이들에게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교육하고 올바른 인성교육 및 한문 교육 체험까지 할 수 있으니 지평선 축제 때는 줄을 서시오. 줄을~ 이렇게 되지 않을까?





농경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소다. 옛날에는 소 없이 농사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벽골제에는 인간과 소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이 조각된 소테마공원도 있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단도 있다.




벽천미술관은 벽천 나상목 화가(1924~1999)를 기리기 위한 미술관이다.

벽골제 부근인 부량면에서 출생해 진경산수의 고요한 미를 화폭에 담은 화가로 국전 초대작가이자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벽골우도농악전수관은 김제, 부안, 익산, 정읍, 고창, 영광 등 전라도 평야지역에서 전승된 농악을 우도농악이라고 한다.

각 지역마다 전수관이 있는데 벽골제에도 전수관이 있다.





김제만경평야를 배경으로 한 역사대하소설 '아리랑' 문학비와 벽골탑이다.

벽골제 건너편에는 작가 조정래의 아리랑문학관이 있는데, 인근 아리랑마을과 함께 둘러보면서 '소설 아리랑 문학여행'을 즐겨도 좋다.





단야루와 농경문화박물관 광장에서도 다양한 축제를 만날 수 있다.





벽골제와 단야는 때놓을 수 없는 관계로 전설이 있다.

지역 태수의 딸 단야가 벽골제 보수공사에 동원된 원덕랑이라는 토목기술자를 흠모했는데 큰 공사에는 '용추에 사는 청룡과 백룡에게 제물을 바쳐야 공사가 순조롭다'는 속신을 원덕랑이 무시하고 공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자 백성들 사이에 우려가  번지자 가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를 아버지 태수가 보쌈해 제물로 바치려는 계획을 알고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된 전설인데, 이후 단야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영정을 단야각에 모시고 그의 이름을 딴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단야루 뒤로는 제방이 있다.

바로 오늘의 목적지  벽골제이다.

1415년(조선 태종15년) 벽골제 중수 때 세운 중수비는 오랜 세월 마모가 돼 판독이 어렵지만,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벽골제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역사책에서 자주 봤던 벽골제 수문 장생거다.

중수비 기록으로는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로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結) 95 복(卜)이다'고 적혀있는데, 다섯 도랑 중 두번 째 수문으로 이곳에서 나온 물은 만경현의 서쪽 윤부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 벽골제를 만들었을 때를 상상해본 그림이다.

신털미산과 명금산을 둑으로 막고 물을 모았는데,  멀리 모악산에서 발원된 물을 제방안에 모아 만경현,부안, 정읍 신태인 등 호남평야에 물을 대는 엄청난 역사였던 것이다.


지금은 신용리에서 월승리까지 약 2.6km 제방이 남아있는데, 중수비의 기록으로 보면 60,843척이니 약18.4km에 이른다.

새만금 방조제의 길이가 33.9km이니 당시 측량기술과 높은 수준의 인력이 동원된 대토목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벽골제는 당시 수여거부터 유통거까지 다섯개의 수문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발굴조사를 통해 두개만 확인되었으며 아쉽게도 벽골제에 남아 있는 장생거만 잘 보존되고 있어 안타까웠다.






제방을 따라 걸어본다.


둑은 아래 넓이가 70(21m), 위의 넓이는 30(9m), 높이가 17(5m)로 상당한 규모다.

축조방식은 무덤의 봉분이나 토성을 쌓을 때 흙을 한 켜씩 다져가며 쌓는 판축법과 흙벽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흙과 나뭇잎 층을 교대로 쌓는 부엽법으로 쌓았다고 한다.

이렇게 제방의 규모가 큰 만큼 물도 많이 유입돼 수압이 증가하다 보니 유실이 잦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만큼이나마 남아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측량과 토목 기술을 보여준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1963년 사적 제111호 지정된 벽골제는 백제 11대 비류왕 27(330)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로 18km가 넘는 제방이었지만 현재는 약 3에 이르는 제방이 현존하고 있는데, 통일신라 원성왕 6(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때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1415)에 중수하였으나 세종 2(1420)에 심한 폭우로 유실돼 방치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 농지개량조합에서 이 제방을 운암제 설치에 따른 김제 간선수로로 개조하면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일부 사학자들이 벽골제가 저수지가 아니라 바닷물을 막기 위한 방조제였다고 주장하지만 저수지였든 방조제였든 서기 330년에 18km에 이르는 제방을 쌓은 대역사를 이루어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벽골제는 도대체 얼마나 컸을까?

당시 기록을 현대 측량 방법으로 알아보면, 최초의 벽골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왕 21년 기록에는 제방 길이가 일천팔백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척(((()라는 도리식수(道里息數) 거리 측정법이 있는데 6척은 1, 360보는 1, 3,600보는 10, 1식은 30리로 두 걸음을 1(1.5m)라고 했으니 약 2.7km를 쌓은 것이다.

 

중수비에 기록된 규모도 둑의 길이는 6843(1자는 30.3cm)18.43km이고, 둑 안의 둘레는 7746(1보는 1.5m)11.6km이며 논은 9840(1은 쌀 20섬으로 1,200)으로 1,180만평(3900ha)이니 김제시 진봉면 일대의 논 면적 (2130ha)2배 가까이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인 것이다.





지평선 축제에 맞춰 다양한 공간들이 조성되고 있다.


그럼 당시 둑을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까?

4세기 초 한반도 전체 인구는 약 200~300만 명 정도라는데, 제방 쌓기에만 연인원 32만여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당시 백제의 인구와 경제 규모를 고려한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동원 숫자인데, 이후 벽골제는 많은 인력을 투입해 수리와 증축을 더하고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며 엄청난 규모의 논이 개간되었다는데,  폭우로 유실돼 농경지 침수가 반복됐다고 한다.

 

무너지고 침수될 때마다 백성을 동원했는데, 당시 동원된 백성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1415년 벽골제 보수를 위해 동원된 백성들이 신털미산에 머물면서 공사를 했는데, 공사를 마치고 돌아와 쉬면서 하루만 신어도 해어지는 짚신에 엉겨 붙은 흙을 털다 보니 자그마한 산이 되었다고 한다.

흙을 털고 짚신을 버려서 이루어진 산이라 해서 신털미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또한 동원된 백성의 숫자를 세는 것이 어려워 매일 인원 파악을 위해 지게 진 인부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논을 만들어 숫자를 셌다는데, 측량기술 못지않게 번쩍이는 아이디어도 현대인 못지 않다.





벽골제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쌍용 조형물이다.

단야와 벽골제 그리고 쌍용에 얽힌 전설을 고대 최고의 토목 기술이 집약된 벽골제에 걸맞는 스토리텔링이 벽골제를 전라북도 최고의 관광지로 만들었으며 지평선 축제를 대한민국 최고 축제로 만든 것이다.







멀리 모악산이 보인다.

벽골제는 김제 모악산과 태인 상두산에서 발원된 물이 원평천에 흘러들어 모이는데 벽골제 다섯 도랑인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아래 땅들은 모두 비옥했다고 하니 예로부터 김제는 식량생산의 절대적 요소인 치수(治水)를 위해 벽골제라는 국가 기간시설을 세워 왕의 권위를 높이고 농사가 곧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 되는 농자천하지대본을 벽골제로 보여준 곳이라 하겠다.

 

이제 곧 최초로 5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된 김제 지평선 축제가 열린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동안 한민족과 함께 이어 온 도작문화의 1번지이자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선의 고장 김제에서 김제 쌀과 김제 향토음식의 진미도 맛보고 고대 최고의 수리시설 벽골제의 의미도 되새기며 황금들판에 넘실대는 가을의 정취를 가족과 함께 느껴보면 어떨까.

 

벽골제(사적 11)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벽골제로 442

전화 : 063-540-3934, 4986

승용차

-김제시내에서 벽골제 이정표를 따라 15분소요

-서김제 IC(서해안고속도로)에서 15

-서전주 IC(호남고속도로)에서 30

버스

-김제터미널에서 부량, 화호, 평교, 금강, 상평 방면 15분소요

기차

-KTX 김제역에서 대중교통 이용 시 25분소요



벽골제 관광 후 돌아보면 좋은 주변 관광지다.



아리랑 문학관.




아리랑 문학마을




그리고 망해사, 김제동헌, 하시모토 농장, 김제만경향교, 금산사, 귀신사, 천주교수류성당, 금산교회, 증산법종교, 금평저수지, 김제만경평야, 모악산 등 김제의 관광자원은 많고도 넓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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