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기행)몽골과의 전쟁에서 39년을 버틴 강화도 고려궁지

2011. 10. 15. 00:30대한민국 견문록/경기도 견문록

 

    

     석모도에서 빠져나와 외포리선착장에서 20여분 달려 고려궁지에 도착하였다.

     고려궁지로 올라가는 도로는 좁고 오르막길이다 보니 그 옛날 지금 올라가는 이 길의 좌우로는 수많은 집들이 있었을 것이다.

     군인들의 숙영지와 백성들의 초가집, 그리고 고관대작들의 기와집도 있었겠지.

     고려궁지는 지금은 상당히 작은규모이나 예전에는 좌우앞으로 대규모 도읍터였다하니 차창가로 주의깊에 관찰하지만 옛사람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09:56)고려궁지로 들어가는 입구인 승평문이다.

     1232년(고려 고종19년)6월 몽고의 침략으로 도읍을 송도에서 천헤의 요새인 강화도로 옮겼는데 이 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이다.

     이 곳은 1270년(고려 원종11년)5월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궁궐로 사용되었던 장소로 환도당시 궁궐과 성은 몽골의 요구로 모두 파괴되었고

     조선시대에 지어진 다른 건물들은 1637년 병자호란때 강화성이 청나라군에게 함락되는 등 수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불타 무너지고 없고 현재는 조선시대

     건물인 승평문, 강화유수부동헌,이방청,종각 등이 남아있으며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외규장각이 있었으나

     병인양요때 불타없어지고 지금은 의궤 등 당시 복제품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남아있다.

     그 옛날 임금이 오르내렸던 계단앞에 무엄하게도 걸터앉아 희희낙락하는 모습은 영낙없는 곤장감이다...(궁궐희롱죄)    

     입장료 : 어른 900원 청소년 600원 / 찾아가는 곳 :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 개방시간 : 09:00~18:00(연중무휴) / 문의 : 032-930-7078

    

     단풍도 들기전에 이미 잔디밭은 낙엽으로 쌓이고 있다.

     궁궐부지가 넓지는 않아보이지만 사료에 의하면 대규모 공간에 궁궐을 지었다 하니 지금 보는 곳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추정컨데 당시 임금의 침소나 집무실정도 그리고 수라상을 만드는 소주방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유수부 동헌으로 현판에는 명위헌(明威軒)이라 쓰여있다. 현판은 영조대 명필인 백하 윤순이 썼다한다.(지금의 군청이다.)

 

     내부엔 당시 강화도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고 있는 장면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놨다. 유수의 좌측으로는 좌열병장, 이방, 예방이 서 있고

     우측으로는 우열병장, 호방, 공방이 서있다.

     외규장각은 병인양요때 프랑스군대에 의해 보관되어있던 은괴19상자와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약탈당하고 건물도 불타버렸다.

     지금 건물은 당시 외규장각을 2003년에 복원해 놓은 것으로 복제된 의궤와 임금행차모형을 전시해 놨다.

 

     조선왕조의 숨결이 살아있는 의궤(儀軌)는 왕실에서 국가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 훗날 참고하기 위해 남기는 기록문서를 가리킨다.

      조선 왕실에서 주관하는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임시 기구인 도감(都監)을 두어 이를 주관하게 했는데, 행사를 마치면 도감을 해체하고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하여 의궤의 편찬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2007년 6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5종이다.

 

 

         고려궁지에 가면 반드시 들르는 곳인 외규장각.

          외규장각이 강화도에 자리잡게 된 것은 1776년 정조가 창덕궁내에 설치한 왕실의 학문 연구기관이자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해 놓고 규장각이라

          불렀으며 규장각문서가 화재나 전쟁 기타 환란으로 소실될것을 대비하여 1782년 정조의 지시로 강화도에 별도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창덕궁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내각 이라하고 강화도 외규장각을(外奎章閣, 외각) 외각이라 하였다.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로 여기고 이곳에 외규장각을 설치했건만 안타깝게도 1866년(고종3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을 구실로 청나라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 즉 '병인양요'로 인해 모두 약탈되고 소실되었다. 

조선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수세에 몰린 프랑스군은 은괴19상자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를 비롯한 189종 340여책, 기타 자료 등을 약탈하고

장녕전, 외규장각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질르고 퇴각하므로써 안전을 이유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왕실 자료들은 잿더미가 되고 만 것이다.

그 후 재불 역사학자인 박병선 박사가 1975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당시 도서를 발견한 이후 수십년간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했으나 프랑스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로 지지부진하다 2010년 G20 정상회의에서 양국 대통령 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왔던 외규장각 의궤 297권이  2011년 4월 14일 1차분을 시작으로 5월 27일까지 까지

4차에 걸쳐 드디어 145년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의궤 보관장소는 한국, 소유권은 프랑스에 있는 완전한 국권회복은 아직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땅으로 돌아온 것 만큼은 역사적인 귀환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소유권마저 다시 회복하여 과거의 아픈 역사를 말끔히 치유하는 일이 우리의

후손들이 해야할 일로 남게 되었다.

 

     수령 400년된 회회나무와 아름다운 여인들...

     수령700년이 넘은 은행나무도 이방청 근처에 있다 하는데 보지 못해 아쉽다.

    

                    강화성문의 여는시간과 닫히는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한 강화동종이다.(보물 제11호)

                    1711년(조선 숙종 37년)에 만들어졌다 하나 원래의 종은 균열이 생겨 더이상 타종을 못하게 되자

                    1999년 강화역사관으로 옮겨졌고 이곳엔 복제품이 전시되어있다.

 

     강화유수부 이방청(시도 유형문화재 26호)

     강화유수부에는 6방(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이 있는데 그 중 이방이 있는 이방청으로 1654년(조선 효종5년)에 세워졌다.

 

     (10:25)10월도 아직 초순이지만 이 곳 고려궁지엔 벌써 낙엽이 지고있다.

     벤치에 앉아있는 친구들은 궁지를 둘러보고 있지만 이방청에 기대어 있는 친구들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다.

     아마도 선조들의 대몽항쟁의 근원지인 고려궁지에서 그 때 그 시절 왕비나 고관대작의 영부인으로 돌아간 상상을 하고 있는 듯하다.

 

     고려궁지의 아픈 역사를 쓸쓸한 마음으로 뒤로한채 승평문을 나선다.

     내려서는 돌계단 하나하나에 배어있는 아픈역사는 분명 우리 선조들의 유산이다.

     국권이 침탈당하고 왕권이 몰락하며 임금이 39년간 지냈던 성과 궁궐도 모두 부수고 개성으로 환도해야했던 치욕스런 역사는 이제 안 올 것이다.

     지금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메이드인 코리아를 보라...

     손톱만한 반도체가 세계를 지배하고 형체도 없는 인터넷으로 세계를 호령한다.

     썩어빠진 위정자만 없으면 선조들이 물려준 이 땅에 상처가득한 아픔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온갖 상념으로 승평문을 나서는 마음은 돌덩이지만 더 아픈 역사의 현장인 광성보를 찾아가는 발걸음은 더더욱 무겁고 더디기만 하다. 

 

simpro의 프로야구 이야기

simpro의 길(路) 이야기

simpro의 세상살이 이야기                                                    

       

       로그인이 필요없는view on꾹 눌러서 추천과 구독을 해 주시면 글쓴이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꼭 눌러주세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