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기행)1600년 역사의 산증인 전등사의 전설

2011. 10. 18. 01:00대한민국 견문록/경기도 견문록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상흔이 남아있는 역사길의 순례를 마치고 이제 우리는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은 삼랑성(정족산성)에 있는 전등사로 간다.

     전등사는 덕진진에서 20여분 거리로 주차장앞쪽 도로를 넓히는 공사로 인하여 많이 혼잡스럽다.

     워낙 유명한 절이고 또 오늘은 전등사에서 제11회 삼랑성 역사문화축제인 호국영령진혼제인 영산대제가 마침 열린 날이다.

     이것을 님도 보고 뽕도 딴다라고 한다. 전등사에 왔다가 1년에 한 번 있는 축제도 같이 즐기게 되었으니 올라가는 발걸음이 매우 가볍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로 오래된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1259년(고려 고종 46년)에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고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重修)되었다.

 

 

     [13:50]전등사로 올라가는 길은 주차장에서 부터 내내 오르막이다. 한국의 절들은 모두 이렇게 긴 오르막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단 한군데는 예외다. 부산에 있는 해동용궁사는 반대로 아래로 내려간다...

     전등사로 올라가는 곳곳엔 이렇게 연탄화로에 구운밤이며 해바라기씨를 파는 정감어린 장면이 있다.

 

     긴긴 오르막길의 끝에 또 계단길이 나오고 모두들 어제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의 산행후 새벽에 낙가산일출을 보느라 다리들이 편치 않을 것인데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차분히 계단길을 오르고 있다.

     모든 절에는 일주문이 있으나 전등사는 일주문대신 정족산성의 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절자체가 성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은 축성연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으나 고려사에 단군이 세 아들에게 이곳에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대단히 오래된 성임에는 분명하다. 처음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막돌을 맞추어 가며 쌓았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더욱 튼튼하게

     쌓았다 한다. 성안에는 전등사와 1259년(고려 고종46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264년(원종5년)에 완성한 가궐(假闕)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한다.

     병인양요때는 양헌수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의 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지켰으며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전등사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700원 어린이 1,000원 / 주차료 : 소형 2,000원 대형 4.000원

 

1 대웅전 6 향로전 11 남문 16 정행당 21 고려가궐지
2 강설당 7 극락암 12 종각 17 죽림다원 22 관해암
3 명부전 8 적묵당,종무소 13 양헌수비 18 삼랑성 23 설법전
4 약사전 9 대조루 14 동문 19 부도전 24 요사채
5 삼성각 10 종루 15 화장실 20 정족사고 25 취향당

 

     양헌수승전비...1866년 병인양요때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대를 물리친 양헌수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비문에는 367명의 프랑스군대와 맞서

     승전을 올린 양헌수장군의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윤장대...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 한다.

     전등사 윤장대는 보물684호인 경북 예천 용문사 윤장대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으로 윤장대 안에 희망하는 소원을 적은 발원문을 넣고 돌리도록

     만들어 놓았다. 전등사 대조루로 올라가는 계단앞에는 정족산성을 둘러보는 친구들 9명을 제외하고 모두 모여 축제현장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국악가락을 들으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원래는 대조루 밑으로 해서 경내에 들어가나 오늘은 축제관계로 그쪽으로의 출입을 아예 막아놓았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또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사료출처 : 전등사홈페이지)

 

     인천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된 목조삼존불좌상은 1623년(광해군 15)에 조성되었다.

     이 불상은 원만한 상호와 양감·균형감·조각 솜씨가 일품이다. 삼존불은 삼세불이라고도 하며,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세 부처님을 말하는데

     현세불인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를 모시기도 하고 과거, 현재, 미래불을 함께 모셔 삼존불이라고도 한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125cm이고 무릎 폭은 88cm로 원만한 얼굴에 유난히 큰 귀를 하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신체는 우견편단의 법의를 걸치고, 가슴께에는 군의를 묶은 자락 위에 3개의 꽃잎 모양이 있다.(자료출처 : 전등사 홈페이지)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자료출처 : 전등사 홈페이지)

 

     기와 한 장 한 장에 불심가득한 불자들의 소원과 기도가 차곡착곡 쌓여있다.

     왼쪽엔 아주 오래된 기와불사...우측엔 최근의 기와불사인 것 같다. 어마어마하게 쌓인 것을 보니 전등사의 사세가 짐작이 된다. 

     보통의 기와불사는 일만원이고 5만원정도되는 기와불사도 있다한다. 꼭 기와불사 뿐만아니라 법다의 기둥, 주춧돌 등 모든 것에 불사할 수 있다.

     

     향로전 앞에는 (좌로부터)삼별초때의 고려무장 배중손, 고려충렬왕의 비 정화궁주, 고려 문장가 이규보의 한지공예로 만든 인형이 서있다.

     아마도 축제와 연관이 있는것처럼 보이며 안에는 조명기구를 설치하여 밤에도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정화궁주는 진종사라 불리우던 이 절에 옥등을 시주하여 등을 전달하다 라는 전등사로 절 이름을 바꾸게 한 주인공이고 이규보는 몽골의 침략때

     팔만대장경을 새기게된 동기와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을 격퇴하고자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을 지었고 묘가 전등사 근처에 있지만 이곳 전등사와

     무슨관계가 있을까? . 삼별초의 난 때의 고려무장 배중손 역시 고려원종이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환도할때 따라가지 않고 야별초를 끌고

     진도로 내려가 삼별초를 만든 주요인물중의 한 명인데 그 역시 이 곳 전등사와 관련이 있나보다. 

 

 

     향로전를 지나면 우측으로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삼성각이 나온다.

     삼성각은 삼신(三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신 전각으로 전통토속신앙을 불교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거의 모든 사찰에는 이런 삼성각이 있으며 큰 규모의 사찰에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을 따로따로 두며 보통 대웅전 뒤 사찰의 제일 높은 곳에 둔다.

     칠성은 수명을 담당하는 북두칠성의 화신이고 독성은 나반존자라고도 하며 홀로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깨달아 독성이라 한다.

     산신은 보통 호랑이와 같이 있으며 호환에 대한 공포와 외경심이 만든 상징으로 이 삼성은 사람의 수명, 재물, 복을 관장하는 신선이다.

 

     기도중인 불자님들...보통 삼성각에 모신 삼성은 환웅과 단군의 탱화가 좌우로 있으며 가운데에는 치성광여래를 주존으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협시불로

     배치한 삼존불을 탱화로 안치한다.

     불교가 처음 이땅에 전달되었을 때 이미 우리나라는 단군신화라는 토속신앙이 있었기에 뿌리를 내리고자 자연적으로 불교와 단군토속신앙이 융합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니 한민족의 뿌리에 근거를 둔 불교의 노력으로 삼성각은 보통의 사찰에 같이 있게 되었다.

 

     삼성각앞 샘물로 물보시를 받고 한 쪽문이 열린 취향당을 빼꼼히 들여다본다.

     취향당은 사고를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 바로 옆에 있으며 1707년(숙종33년)에 강화유수 황흠이 사각을 고쳐짓고 그 옆에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고

     그후 1726년(영조2년) 영조가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이라는 어필을 하사하여 걸게하였고 순조.고종때에는 정족진을 두어 사고를 지키게 하였으며 전등사의

     소속 승병과 춘추관 소속의 기사관이 취향당에서 지냈다 한다. 그러나 언제인지 모르지만 소실되어 2006년 옛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지금은 실제로 절에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보니 상당히 단정하고 관리가 잘되어있다.

 

     취향당 바로 옆에 있는 정족사고(史庫)..

     사고란 고려,조선시대 나라의 역사기록이나 중요한 서적및 문서를 보관한 곳인데 아마 병인양요때 소실된 듯...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한다.

 

     사고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곳에서는 삼랑성역사문화축제를 맞아 울림.어울림전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장사각은 옛날엔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1,181책을 보관하고 있던 장소지만 지금은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장사각내부 전시공간과 선원보각.

     선원보각은 왕실족보인 조선 선원보를 보관하던 장소.    

 

     정족사고 바로 앞에서는 강화지역 작가 초대전과 고기와 그림전이 열리고 있다.

 

      정족사고를 나와 소나무가 우거진 넓다란 길을 따라 축제가 한창인 전등사경내를 굽어보며 내려가면 가궐터가 나온다.

     고려시대의 가궐지가 있던 전등사 숲길은 지금 완전 방치되어 있다..너머져 고사되어버린 나무사이로 어렵사리 들어가면 이런 가궐터가 나온다.

 

     가궐터를 지나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초입에 설법전이 있고 (설법전에스는 템플스테이를 한다). 그 앞 요사채와 종무소앞엔 각종 축제관련 행사를 하는

     간이 천막이 쳐져있다. 해마다 여름이면 해남 달마산 미황사에서 열리는 템플스테이에 아이들을 보내곤 했는데 요즘은 아이들이 공부에 바빠서 못보낸다.

     하지만 어렸을때부터 보내다 보니 아이들의 인성과 품성을 올곧게 유지하는데는 큰 도움이 된다.

 

     명부전앞에서는 11회 삼랑성역사문화축제의 주무대가 설치되어있어 한창 경기민요가 울려퍼지고 있다.

                                                     

 

     전등사에는 범종이 두개가 있다. 하나는 지금 보는 대조루 옆에 있는 종각이고 또 하나는 극락암으로 올라가는 계단입구에 있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다.

     대조루 옆의 범종각에는 법고와 운판 목어와 같이 범종이 있다.    

     보물 제179호로 지정된 약사전은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사료출처 : 전등사홈페이지)

 

     약사여래불을 모신 약사전 내부.. 약사여래불 뒤에 있는 후불탱과 좌측의 현왕탱은 시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있다.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불을 모시는 약사전에는 수 많은 불자들이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린다 한다.

      

     사전 옆의 명부전앞마당은 축제 참가자들의 대기장소로 사용중이다 보니 괜시리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저 앞의 범종을 보러가야 하는데 행사참가자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명부전 앞마당을 가로질러가기가 민망하여 한참을 돌아 계단길로 올라섰다.

 

     명부전에는 목조지상보살상과 좌보 도명존자. 우보 무독귀왕의 삼존상이 있고  좌우로는 각대왕들이 배치되어 있다.

     명부전은 지장전이라고도 부르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 부른다.

     보통 죽은 영혼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넋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기도하는 곳이다.

 

     명부전에는 보통 지장삼존상을 비롯해서 십왕10구, 판관2구, 녹사2구, 장군2구, 동자10구, 귀왕2구 등 총 31구가 있으나 이곳엔 동자3구가 없다 한다.

     문옆으로는 삼원장군 중 두 장군이 눈을 부릅뜨고 칼을 든 채 서있어 들어서기가 겁난다.

 

     전등사대조루..

     건립연대는 정확치는 않으나 1749년(영조25년)에 주지 초윤이 고친적이 있다하고 1841년(헌종7년) 총섭 연홍이 다시 지었다고 하니 훨씬 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16년에 수리하고 1932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한다.

     이 대조루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사각과 왕실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의 현판이 대조루에 걸려있었다 한다.

     지금은 장사각과 선원보각이 있는 정족사고를 복원하여 현판을 모두 원래위치로 옮겨놨다.

     전등사경내로 들어오려면 대조루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

 

     극락암.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라는데 ...오르기엔 축제가 한창이라 너무 튀는것 같아 오르기를 포기한다.

     극락암은 전등사 상묵큰스님이 열반에 드신 곳이라 한다.

 

     참으로 어렵게 접근하여 찍었다. 행사가 한창이라 극락암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보물제393호인 전등사 범종을 남기지 못할 뻔했다.

     1097년 중국 송나라때 회주 승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2차대전때 일본군이 녹여서 무기로 만들려고 부평병기창에  가져다 놓은 것을

     광복후에 다시 이리 가져다 놓았다 한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중국 하남성 백암산 승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나라 철종(1097년)에 주조되었다고

     표시가 되어있다 한다.

 

     범종앞에는 축제 참가자들의 대기공간이다..

     축제에 참가하는 출연자들과 스텝이 있는 공간에 외부인이 침입해서 보란듯이 사진찍고 있어도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너무 당연한 것인가? 절의 중요 문화재를 탐구하고 찾아보고자 하는 우리같은 호기심 가득한 블로거들은 그러한 난관도 헤쳐나가는 추진력과 돌파력이

     있어야 좋은 자료를 직접 구할 수 있다.    

 

     이제는 더 나아가 지근거리에서 공연을 카메라로 들여다 본다..

 

     찍고나니 마이크가 영 불편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천수바라를 추고있는 스님의 모습이 정말 평화롭게 보인다.

 

     천수바라는 불교의식을 행할때 추는 불교무용의 하나로 천수다라니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춤으로 도량의 정토화를 위한 결계(結界)의식으로 양손에 심벌즈같은 큰 바라를 들고 추는 춤으로 악귀를 물리쳐서 도량을 청결하게 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뜻으로 추는 춤이며 무형문화재 9호로 등재되어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앞 화단에 나무에 불심가득한 동자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작품이 있다.

     무심코 지나치다 발견한 저 아름다운 미소가 한참을 들여다 보게한다.

 

     (15:10)정족산성을 둘러보고 온 친구들과 전등사를 둘러본 친구들이 모두 대웅보전앞에서 만났지만 무려 10명의 친구들이 어디로 갔는지 안보인다.

     전등사를 둘러보는데 1시간 20분정도가 걸려 내려갔을 듯 하지만 그래도 둘레둘레 찾아본다.     

 

     내려오다 보니 죽림다원이라는 찻집이 있고 그 앞엔 전등사를 주제로 하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들여다 보니 사진작가들의 솜씨는 역시 대단하다.

 

     죽림다원앞에 있는 학조각상의 부리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다..

     정족산성의 유일한 성루인 남문의 종해루를 마지막으로 강화도 병인.신미양요때의 전적지 순례를 끝냈다.

     더 많은 순례지가 있지만 가야할 길이 멀어 지금 나서지 않으면 오늘을 넘겨 도착할 지도 모른다.

     우리민족의 역사와 같이한 강화도의 아픔은 지금은 말끔히 치유되었고 또 그 당시의 아픔을 후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역사책에서나 또 드라마에서나 보던 아픔의 현장을 둘러보고 석모도의 아름다운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의 섬산행에서 본 황금빛 바다와 일몰.

     그리고 관음성지 보문사에서 맞은 새벽 산사의 고요함과 낙가산정상의 일출..

     유은3018산악회의 특별산행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03:55] 전등사주차장을 출발한 버스는 김포를 빠져나가는데만 2시간이 걸린다.

     휴일에다 전등사에서 열린 삼랑성축제때문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고 차량들로 도로가 꽉 막혀 거북이걸음으로 차는 움직이지만

     마음속깊이 들어찬 병인,신미양요와 대몽항쟁지인 강화도의 아픈 상흔은 잊혀지지 않는다.

     돌아오는 내내 어떤 친구는 깊이 잠들었고 또 어떤 친구는 차창가에 앉아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들판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있다.

     그 꿈속에 조용히 내려앉은 강화도에서의 1박2일의 추억은 친구들의 뇌리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19:54]고요한 버스안에 갑자기 불이 켜지고 차는 천안논산고속도로 탄천휴게소로 들어간다.

     모두들 부시시 잠에서 일어나고 깊은 추억의 상념에서 깨어난다.

     저녁시간이 지난관계로 각자의 취향대로 저녁을 먹지 못하고 갈비탕과 된장찌개로 통일하였지만 만족스러운 상차림으로 저녁식사를 마친다.

     [20:45]50여분의 휴식끝에 탄천휴게소를 떠나 광주로 버스는 달린다.

     모두들 피곤할것 같지만 지금부터는 전혀 피곤한 기색을 안한다. 광주까지 가는 약 1시간정도의 시간은 우리에겐 너무 소중한 시간이다.

     유일하게 모두들 젊어지는 시간...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밤10시경에 우리가 사는 곳 광주에 도착하였다.

유은3018산악회의 특별산행이자 10월 정기산행인 강화도에서의 1박2일의 여정도 끝났다.

이 아름다운 여정을 기획하고 추진한 산악회 홍정 회장과 정태균친구에게 산악회 친구들을 대신하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남기며

물심양면으로 이번 여행에 협조하고 찬조하여 준 동창회장 김종실, 재경동창회장 박춘구, 그리고 참석을 못하고도 찬조의 자리에

기꺼이 동참한 산악회 부회장 이계철과 황정라. 약초막걸리를 찬조한 최수옥, 뽕주를 찬조한 최민자친구와 행사에 참여하고도

찬조의 열풍에 합류한 이태흔, 신민용, 박선애, 최장현, 양미화와 사과를 찬조한 고재숙, 생일떡을 찬조한 손옥경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대들이 있기에 유은3018산악회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으며 또한 영원히 그 우정을 잊지 않으며 번창해 나갈 것이다.

매년 이런 특별산행을 기획하고 추진해야할 차기 임원진에게 엄청나게 부담으로 작용할 이번 강화도 산행은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이번 산행에 동참하기로 했으나 못간 종실이, 의요, 정라, 태균이와 항상 마음따뜻하게 친구들을 위하는 민자, 수옥이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도 모두 3018산악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 똑같다.

다음달11월 산행은 가을단풍과 낙엽이 함께 어우러진 장흥가지산이다. 그 넓은 사랑으로 또 다시 멋들어진 산행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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