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도갑사 편)

2012. 12. 1. 08:05전라남도 견문록/영암 견문록

 

월출산을 삼국시대에는 달이 난다 하여 월라산(月奈山)이라 하고

고려시대 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부르다가, 조선시대부터 월출산이라 불렀다.

아무튼 달하고 관련이 많은 산이다. 그 월출산에 걸린 달을 제대로 감상하는 포인트는 구림마을이라고 한다.

영암(靈岩)이란 말은 한자 뜻풀이 대로 신령스러운 바위를 말하며, 월출산에는 세개의 움직이는 돌인 동석(動石)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한반도에서 큰 인물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중국사람들이 월출산까지 와서 그 동석을 찾아 내 산 아래로 굴려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 하나가 스스로 움직여 자기자리를 찾아 다시 올라갔다고 하는데 그 바위가 바로 영암(靈岩)인 것이다.

 

세개의 동석이 각자의 큰 인물 세 명이라고 한다면 영암출신의 인물 왕인박사와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 고려건국의 일등공신

최지몽이 모두 영암 구림마을 출신으로 월출산의 기를 받아 이미 나온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지만 굴러떨어진 세 동석중 하나가 스스로 올라갔다고 하니 아직 한 사람의 큰 인물이 남았을 것도 같다.

과연 누가 영암을 대표하여 이나라를 움직이는 인물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월출산 미왕재에서 내려오다 보면 처음 만나는 것이 바로 도선국사비각과 부도전이다.

도갑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창건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수미왕사에 의해 대규모 중수가 이루어진 1456년 (세조2)까지 약 570여 년의

기록이 유실되어 없다고 한다.

당시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사찰들이 폐찰되고 하던 때 왕명을 받든 수미왕사가 국가의 지원을 받아 966칸이나 되는 당우와 전각들을

지었고, 부속암자도 12개나 지었다고 하니 도갑사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1653년(효종4년)

에는 '도선수미비'와 '월출산도갑사석교 중창비'가 세워졌는데, 당시 영의정과 형조판서 등 국가의 지도급 인사들이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보아 도갑사의 위상은 조선 제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찬란했던 영화도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었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것들도 일제시대와 6.25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고, 새로이 세운 대웅보전도 1977년 참배객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 또다시 소실

되었다가,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차츰 옛 대가람의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9년 4월1일 대웅보전 낙성식을 가졌

다고 한다.

 

 

                도선국사(827~898)는 신라말의 승려임에도 고려 태조 왕건의 출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고 한다.

                875년(헌강왕 1) 도선은 송악땅을 지나며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의 집앞에 이르러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으며,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왕건은

               자신의 쿠데타를 합리화 하기 위해 도선국사의 비기를 인용해서 신라는 망하고 고려가 건국된다라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수습했다고 한다. 즉, 고려의 건국은 도선국사의 비기를 잘 이용한 왕건에 의해 예언화가 된 것이라고...          

              

               아무튼 신라 헌강왕6년(880년) 당시 54세였던 도선국사에 의해 도갑사가 창건되었다고 하는 설은 도선국사가 37세 때인

               863년에 신라의 조그마한 암자였던 광양 백운산 옥룡사에 들어가 864년에 중수하고 그곳에서 35년간 참선을 하며 후학을

               기르다  898년 72세의 나이로 입적한 것을 보면 도선국사에 의한 도갑사 창건설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헌강왕이 그의 명망을 듣고 궁궐로 초빙하여 법문을 들었다고 하니 당시 문수사터 자리에 도갑사의 창건을

               부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위 사진은 도갑사 도선·수미비(道岬寺道詵守眉碑)로 도선국사비각에 있는 비석이다.

               보물 제1395호로 지정되었으며 창건주 도선국사와 중창주 수미왕사에 대한 추모비로 1653년(효종4)에 완성되었는데

               만든데만 17년이 걸렸으며 1500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부도전 진화문(眞化門)

 

 

도선국사가 도갑사를 창건했음에도 이곳에 도선국사의 부도는 없고 광양 옥룡사에 있다고 한다.

수미왕사의 부도는 도갑사에 있다고 하는데 아마 이곳 부도전 어디에 있지 않나 싶지만

주인이 확인된 것은 영백당(靈栢堂)과 서령당(西領堂)2기 뿐이라고 하니 어디서 찾을 것인가.

 

 

 

용화문으로 들어가면 보물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미륵전(彌勒殿).

미래불(未來佛)인 미륵이 용화세계(龍華世界)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화한 사찰 당우 중의 하나지만

봉안된 부처는 미륵불이 아닌 석가여래불이다. 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즉, 좌선할 때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은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성취한 정각(正覺)을, 지신(地神)이 증명하였음을 상징한다.

                그런 이유로 미륵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은 미륵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도갑사 부도전에서 미르전까지의 숲길은 참 좋았다.

혹시 도갑사에 오걸랑 반드시 미륵전을 보고서 부도전까지 올라 도선.수미비까지 보고 가시기 바란다.

 

 

 

 

 

 

 

 

 

용수폭포엔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짙푸르기만 하다.

깊이는 2m 정도에 폭이 3m라지만 훨씬 더 넓어 보이고 옛날엔 명주 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산신각.

 

 

명부전

 

 

천불전

 

 

국사전에는 도선국사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수미왕사비각

 

 

                수미왕사비각에 있는 수미왕사비는 1629년(인조7)2월에 만들기 시작하여 1633년(인조11)6월에 완성했다고...

                부도전 옆에 있는 도선·수미비(道詵守眉碑)가 도선국사 위주로 만든것에 비해 수미왕사비는 오로지 수미왕사의

                공덕만 기렸다고...

 

 

 

 

도갑사 대웅전은 1977년 한 참배객의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뒤 대웅전 복원불사를 일으켜 1981년 복원된 단층 대웅보전이 조금씩 침하 현상을 보이기 시작해서

2004년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원인분석과 함께 재복원 작업에 들어갔다고...

다 헐어내고 터를 확인하던 중 대웅보전 뒤편 10여m 지점에서 희미한 계단 흔적을 발견하고 땅을 파들어 가보니

국보 50호인 도갑사 해탈문 계단과 동일한 양식의 기단석 4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즉, 도선국사가 창건당시 또는 그 후 수미왕사가 중창을 했을 당시의 대웅전 터가 확인된 것으로, 도갑사는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2005년 4월부터 복원작업에 착수했는데 위원회가 목포대 발굴조사단에 의뢰해

모두 4차례 유적지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고 조선 초기의 기단과 유구를 발굴해 옛 대웅전이 최종 5칸 이었음을 확인하고,

전문위원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현재의 외부 중층, 내부 통층(내부 높이 18m), 온칸물림 방식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복원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 고증에 따라 기존에 있던 자리보다 6-7m 가량 뒤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 화재를 입어 무너지고 새로이

지을 당시에는 왜 그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신라시대 때 이렇게 2층으로 대웅전이 지어졌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전문가들이 충분한 고증을 통해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라고 지었겠지만

사진에 보이는 단아한 대웅전의 모습이

훨씬 보기 좋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좌측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퍼온 도갑사해탈문

사진으로 해탈문 사이로 정면에 보이는 단층

대웅전이 새로이 짓기전에 있던 대웅전이다.

국민의 세금인 도비와 국비가 23억원이나

투입되어 지었으면서도 문화재관람료를 징수

하는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대웅보존 안의 삼존불과 후불탱화는 도갑사 신도들이 10억원 가량의 불사금을 모아 순전히 목조각으로 만들어

 봉안했다고...


 

도갑사에는 현재 해탈문’(국보 제50호)과  월출산 구정봉 아래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미륵전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성보박물관에 있는 문수 보현보살 사자 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등

다수의 국보급 보물급 문화재가 소장돼 있지만 무위사의 단아한 대웅전 하나가 훨씬 더 기품이 있어 보이는 것은 왜 일까?


 

 

도갑사 종무소로 쓰이는 곳은 7칸.

 

 

10칸에 이르는 이 건물들은 탬플스테이로 쓰여질 듯.

 

 

도갑사 오층석탑. 그 옆에 있던 조선 숙종 8년(1682)에 만든 곡물을 씻던 석조는 종무소 앞으로 옮겼다는데

무슨 바쁜일이 있었는지 확인도 못해 봤다.

 

 

 

범종각

 

 

 

성보유물관안에는 국보인 해탈문을 보수할 때 문수.보현보살을 옮겨 이곳으로 옮겼다고...

 

 

 

엄청난 크기의 불사도 이제 마무리되어 가고있고...

예전 도갑사의 사진을 보면 해탈문에서 대웅전까지 바로 보였으나 이 건물의 등장으로 대웅보전이 안 보여

오히려 더 이상해 졌다. 지금 서 있는 건물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그 위치에 지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자꾸만 비대해 지는 사찰의 모습에서 갈수로 높아만 가는 교회가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

 

 

도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바로 입구에 있는 해탈문이다.

해탈문은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앞면 3칸에 옆면 2칸 크기로 1960년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신미·수미(信眉·守眉) 두 스님의 발원으로 조선성종 4년(1473)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건축양식으로

경북 영주의 부석사의 조사전과 비슷한 모양이라고 한다.

도갑사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해탈문은 보물을 넘어 국보 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인 해탈문안에는 또다른 보물이 있는데 금강역사옆 좌우 칸에는 보물 1134호인 도갑사 동자상(道岬寺 童子像)이 있다. 

 

 

해탈문에 있던 보물 동자상은 도난 방지와 보존을 위해서 경내에 있는 성보박물관 옮겼으며

현재 여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라고..(성보박물관에 가 볼 시간적 여유가 없어 문화재청에서 진본사진을 퍼왔다.)

 

             보물 제1134호인 도갑사 동자상

도선.수미비를 능가할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비는 아마 도갑사의 최근 대규모 복원불사에 대한 공덕비인듯...

그럼 23억원의 세금으로 지어진 대웅보전에 대한 공덕은 국민들에게 있는 것이므로 문화재 관람료를 몇년간 징수하지

않으면 어떨까?

 

 

 

도갑사에는 문화재관람료 2,000원이 있다.

근처의 무위사가 문화재관람료를 받지 않는 것에 왜? 라고 의문이 든다.

모든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사찰은 이렇게 국립공원이나 도립공원을 끼고 있는 산만 받는다.

이곳을 통과해야 산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위사에서 올라가는 탐방로가 출입통제가 해제되면 무위사도 문화재관람료를 받을까?

월출산 입구의 천황사는 아직 불사중이어 받지 않지만 천황사도 불사가 끝나면 아마 받을지도 모른다.

 

 

일주문을 나서며 오늘 영암월출산 깊은 곳에 숨겨졌던 천년의 미소를 만나고 도갑사까지 탐방을 마쳤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거찰 도갑사는 현재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도갑사는 사찰의 규모에 비해 대웅보전의 모습이 너무 비대해 보인다.

그나마 해탈문과 대웅보전을 가로 막고 선 새로운 건물로 자꾸만 민중들과 거리를 두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그저 바람처럼 일주문 하나 통과하고 사천왕문 하나 통과하면 바로 대웅전 뜨락으로 들어서는 아담한 절집이

더 엄숙해 보이고 경건해 보이는 것은 지금까지 수백개에 이르는 사찰을 탐방해 본 눈에 의하면 그렇다.

월출산 끝자락에 서서 사찰과 월출산을 같이 바라보니 왠지 월출산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는 지금 도갑사의 모습이

옛날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여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제 경포대에 주차해 놓은 차량을 회수하여 무위사와 설록차밭을 둘러볼 차례이다.

 

(4편 무위사에서 계속) 

 1편 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구정봉 편),

 2편 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마애불 편)

 3편 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도갑사 편)

 4편 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무위사 편)

 5편 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강진다원 편)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지도: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