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떠난 인권여행3편/사람과 짐승은 문 하나 차이, 남영동 대공분실

2013. 12. 26. 07:05대한민국 견문록/서울 견문록

 

인권(人權)이란 무엇일까?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사회교과서에 우리나라의 민주정치를 설명하면서 인권의 뜻을  풀이해놨다.

인권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마다 외모나 교육 정도, 사는 형편 등이 제각기 달라. 하지만 한 가지 같은 게 있지. 사람에겐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인권이 있다는 것!

 

인권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는 뜻이야.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로부터 침해 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이런 권리를 하늘이 준 인간의 권리라는 뜻으로 ‘천부인권’이라고 불러. 인권은 헌법에 적혀 있기 때문에, 혹은 나라에서 허락했기 때문에 보장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거야.

 

인권에는 자유로울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일할 권리 등이 포함되어 있어. 만약 이런 인권들이 보장받지 못한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기가 힘들 거야.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하거든. 하지만 우리 주변을 돌아 보면 아직도 인종이나 성별, 장애 등을 이유로 인권을 침해받는 경우가 많아. 인권을 침해받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 아동, 장애인 등 힘이 약하거나 권리에 대해 잘 몰라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들이야.(초등학교 6학년2학기 사회교과서)

 

이것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는 인간고유의 존엄성을 인권이라 하며, 그것을 심판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최근에는 동물로 태어나도 생명체라는 존엄성을 인정받는 세상이기에 인간의 존엄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는 말로 인권여행을 시작해 보기로 한다.

 

 

광주 북구 일곡동의 한새봉 두레 회원끼리 인권여행을 떠나 첫번째 들른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이 글을 쓰기 위해 무려 일주일간 남영동 대공분실은 어떠한 곳이었으며, 그 건물을 설계한 건축사 김수근은 또 누구인가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아들과 아들친구를 데리고 떠난 인권여행에서 70~80년대 반인권시대를 겪어봤던 힘없는 백성의 입장에서 그 시대에 이어 행복했던 10년을 뛰어넘어 다시 반인권시대에 회귀한 지금. 과연 인권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같이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다.  

 

 

글쓴이는 건설계통에서 일하지만, 건축전문가가 아닌 경영전문가이다.

그래서 건축관련으로는 겨우 설계도면좀 보고 기초적인 건축캐드프로그램을 돌릴 줄 아는 정도의 건축상식만 가지고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근현대사 한국건축의 위대한 족적을 남긴 고 김중업 건축가와 쌍벽을 이룬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 두 건축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김중업, 김수근 으로 검색하면 수 십개의 글들이 쏟아져 나오므로 별도로 쓰지 않겠다. 

다만, 한가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천재 건축가라 불리는 김수근씨가 이 건물을 고문용도로 설계했다는 것으로 대부분의 건축가와 학자들의

일관된 주장으로 이 건물을 둘러보면 최소한의 인권은 애시당초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건축 사상과 같은 흐름으로 자신의 대표적인 건축물 '공간'사옥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한다.

 

즉, '공간'사옥의 배다른 형제같은 남영동 대공분실은 공간사옥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아 건물만 봐도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임을 대략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 '공간'사옥이 최근 문화재청에 의해 문화재로 등록예고되어 현행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제34조에 의해 건축된 지 50년이 지나야 문화재로 등록할 수 있으나 긴급한 보호 조치가 필요한 것은 등록할 수 있다는 예외규정에 의해 1971년에 건립된 '공간'사옥이 지은지 50년이 넘지 않았으나 이 조항을 적용해 등록문화재로 추진됐다고 하니 1960~70년대 군부통치세력과 결탁하여 오늘의 '공간'을 만든 김수근의 힘이 아직도 지배세력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976년에 세워져 1990년대까지 시국사범을 취조하는데 사용된 남영동 대공분실은 남산의 안기부, 서빙고동의 보안사와 함께 박정희-전두환을 잇는 공포정치를 상징하는 건물로 원래 간첩을 잡는 목적과 다르게 정권에 반하는 수많은 민주 투사들을 간첩단 사건에 연루시켜 고문과 협박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조차 말살시킨 군사정권의 치부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용도가 그러하니 위치한 장소가 남산과 같이 도시와 좀 떨어진 곳에 있는것이 당연하겠지만, 건물은 서울 시내 한 가운데인 남영역 바로 앞에 있었다. 현대적 콘크리트 빌딩숲 사이로 쥐색 벽돌로 지은 건물은 1970년대 건물로서는 최첨단 시설을 자랑한다.

정문 출입문은 철제출입문 안에 2중으로 폭이 1m가 다 되는 거대한 철제가림막이 또 있어 2중으로 바깥과 안을 차단한다.

앞으로 설명되는 모든 사진은 지금으로 부터 40년이 되가는 1976년에 지어졌다는 것을 생각하고 봐야 한다.

 

 

스위치를 작동하면 스르르 닫히고 열린다.

밖으로 부터의 공격을 막기위해 담장도 엄청 높다.

 

 

완전히 닫혔을 때의 출입문..견고한 성으로 바깥 출입문이 버스나 트럭으로 들이받혀 열려도 이곳만은 끄덕없다.

즉, 다른 세력에 의해 공격당했을 때를 대비한 출입문으로 이곳에서 부터 남영동 대공분실의 계획적 설계를 알 수 있다.

 

 

지금은 대공분실보다 더 높은 아파트 건물에 둘러쌓여 있지만, 1976년에는 민가보다 대공분실이 제일 높았을 것이다.

왜냐면 대공분실과 담장이 맞닿은 곳은 미군부대이기 때문이다.

대공분실은 대공용의자, 즉 다른말로 하면 간첩활동을 한 용의자를 취조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다지만, 대부분의 대공용의자가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를 했기에 이 건물은 생길때부터 군부독재에 저항한 민주주의 인사의 탄압과 취조를 위해 설계했다고 하겠다.

이제부터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의 현장으로 올라간다.

 

 

보통 이곳에 끌려올때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몇 시간 정도 차를 몰아 어디가 어디인지를 모르게 한다고 한다.

정문으로 들어온 피의자들은 보통 피의자들이 경찰서 현관출입문으로 들어가는 것에 반해 측면을 돌아 건물 뒷편으로 간다.

측면서 본 건물은 7층이다. 5층에 단 하나 있는 창살이 달린 창문..그곳이 바로 인권이 철저하게 유린된 역사의 산현장으로

지금 보는 사람들은 5층이 감옥이었음을 알게 하지만, 당시로서는 참 기이하게 생긴 건물로 사무용 건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측면에서 부터 4층까지 단계적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모습이 인간의 육신을 갉아먹는 것 같아 공포스럽다.

 

 

이 건물은 처음부터 경찰관들의 근무장소와 피의자들을 취조하기 위한 공간을 구분지어 설계한 건물로 사람 사는 곳과 사람이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한 공간이 구분되어있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경찰의 참고인 조사나 피의자 신분으로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정문이 아닌 건물 뒤편 출입구를 통해 들어서면서 부터 구타와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건물 뒷면의 이 출입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피의자는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되며, 그들을 다루는 경찰역시 사람이 아닌 짐승이

되는 문이다.

 

건물 뒷면의 유리창들은 무질서하면서도 좁다란 창을 곳곳에 두어 언뜻 보면 특수기관의 건물이 아닌 듯 보인다.

정면도 그러하듯이 건물 외형만으로 보면 이곳이 반인권의 상징과는 거리가 먼 그저 약간 평범함 정도를 넘어선 건물이다.

 

 

후문을 들어서면 폐쇄된 1.5평 정도의 밀실이 나온다.

일단 이곳으로 들어오면 피의자들은 이유도 없이 마구잡이로 구타당했다고 한다.

저항해도 필요없는 무자비한 구타..실컷 터지고 피가 나고 온몸의 힘이 다 빠져 축 처져버린 피의자는 지금 사람들의 들어가는

저 출입문으로 다시 나간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연행돼 아무 이유도 없이 실컷 두들겨 맞고 이 문을 나서는 사람들은 얼마나 공포에

휩싸였을까? 이 문을 나서면 이제 경찰관에 마주 않자 취조를 당하는 취조실일까? 아니면, 또 어디로 끌려갈까? 

 

 

 

하지만, 피의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취조실이 아닌 또 다른 밀실이다.

이 밀실은 5층으로 직접연결되는 엘리베이터와 원형계단으로 구성되어있다.

 

대부분 피의자들은 밀실에서 짐승처럼 두들겨 맞고 5층까지 원형철제계단을 따라 올라간다고 한다.

즉, 후문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갈때까지 자신과 자신을 취조하는 경찰관외에는 다른 사람들을 구조적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1층에서 5층까지 사람 한 사람 겨우 올라가는 원형 철제계단.

계속 빙빙 돌며 올라가는데 몇 층 정도 되는지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원형계단을 피를 철철 흘리며 몽롱한 상태로 올라가는 피의자를 생각해 보라.

천근만근 되는 다리를 끌고 아마 몇 시간은 올라간 것 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 구조는 김수근 건축가의 대표작 '공간'사옥에도 있다고 한다.

'공간'사옥의 구관에 있는 원형 계단은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자신이 사용하던 2층 개인 작업 공간과 옥상의 개인 생활공간인

‘문방’을 연결하는 비밀 통로로 반경 1미터도 채 안 되는 원형 계단을 타고 빙글 빙글 돌아 올라가면, 지금 어디로 올라가는 지 몇 층까지

올라왔는지를 전혀 모르게 하고 방향감각까지 상실하게 하는 심리적 폐쇄장치로 위 아래로 막혀 철제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소리가 공명으로 울려 극도의 공포감까지 생긴다고 한다.

 

 

원형철제계단을 나오면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죽 배치되어 있는 5층에 도착한다.

어두컴컴한 밤이나 새벽에 취조실로 들어가기 전, 긴 복도 양쪽 끝에 창살로 막혀있는 작은 네모난 창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 질 수 있다.

1층 밀실부터 시작된 구타와 어둠속 터널이 끝나고 마침내 조그만 창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달빛과 별빛에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취조실의 모습이지만, 원형은 아니라고 한다.

밖에서 보았던 좁고 긴 세로창은 이렇게 안에서 보니 세상과의 단절로 절망감을 극대화하고, 혹시라도 취조 중 창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위한 설계라고 하니 인간의 심리적 저항선까지 생각한 치밀한 설계에 혀를 내두룰 정도다.

 

 

마주 보는 방들도 서로 엇갈리게 배치해 문을 열었을 때 건너편 방이 보이지 않도록 치밀하게 방을 배치했고, 모든 문을 똑같이 만들어

피의자가 취조실을 나올때도 어느 문이 밖으로 나가는 문인지 모르게 만들었다.

 

취조실 내부의 전등스위치도 복도에 있고, 조명을 조절할 수 있는 조광기도 바깥에 있어 스위치가 단순히 불을 끄고 켜는 용도에서 피의자의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각적 효과도 고려한 심리적 설계이다.

 

도어뷰어도 일반적으로 안에서 밖을 보기 위해 현관문에 설치하나, 이곳은 바깥에서 취조실 안쪽을 감시할 수 있게 설치됐다.

 

 

509호실로 박종철씨가 고문치사한 곳으로 원형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취조실에 웬 욕조?

무슨 호텔방도 아니고 취조실에 욕조를 설치한 것은 바로 물고문을 하기 위함이었다.

세면장과 화장실도 같이 있어 이곳에서 구금당한 기간동안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고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 것이다. 

 

 

3평 정도의 취조실은 내부 벽을 모두 철제 흡음제로 방음처리하여, 고문에 의한 비명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고

다른 방의 비명소리 또한 들리지 않게 해 외부와 청각적으로 완벽하게 고립시켰다.

 

 

천정의 형광등도 철망으로 막아 놓고, 철재 책상을 바닥에 볼트로 박아 놓은 것도 자해를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1976년에 지어진 건물에 폐쇄회로 TV가 있다?

 

 

창 쪽에 있는 낮은 칸막이 안에 세면기와 변기가 있는데 기본적인 배변의 존엄성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감시당해야 했다.

생각해 보라, 소변과 대변을 보는 것 까지 감시당하고 있다면, 제대로 배설이 되기나 하겠는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박종철은 당시 시국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경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

이에 경찰은 서둘러 화장을 하고 고문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1월 15일 석간신문에 사망보도기사가 나가자 단순쇼크에 의한 사망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최초로 사체를 검안한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에 의해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제기되자 경찰은 1월 19일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로 정정 발표하고 고문에 가담한 경찰 2명을 구속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박종철의 연행시간과 사망경위, 고문에 가담한 경찰의 숫자 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고문에 가담한 경찰이 3명 더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3명의 경찰이 추가 구속되었으며, 5월 29일에는 범인 축소 조작에 나섰던 박처원 치안감 등 3명이 범인 도피죄로 추가 구속되었다.

또한, 박종철을 부검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이 사건발생 1년 후인 1988년 1월 12일 경찰이 자신을 회유하려 했다고 폭로하면서 당시 치안본부장이었던 강민창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혐의로 구속되었다.

2000년 12월에는 국가가 유족에게 지불한 손해배상액의 70%를 사건 가담 경찰이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고문이라는 잘못된 수사관행에 대한 비판과 함께 경찰의 사건 은폐 등으로 우리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인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6.10민주항쟁은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조치(전두환에 이어 후임 대통령 역시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의 헌법으로 선출하겠다는 것으로,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한 특별선언)와, 경찰에 의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6.29선언)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후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으며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시민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박종철은 2001년 서울대 55회 졸업식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으며, 3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인정 명예가 회복되었다. 1997년 서울대 추모비에 이어 2004년 모교인 부산혜광고등학교에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민주주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박종철 열사의 꿈을 받들고 기리기 위해 박종철기념사업회가 만들어 졌고, 이 사업회는 2007년 박종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들과 대학문화연구회 회원들의 모금으로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로 되었으며, 박종철인권상을 제정하고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는 등 여러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515호실은 민주화운동과 정치개혁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민주투사이자 재야인사의 영적지도자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받은 곳이다.

故 김근태의원은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던 대표적 인물로 1985년 9월 4일 서부경찰서에서 풀려 나오자마자 민주화추진위사건으로 인하여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9월 25일(22일간)까지 512호실에 감금되어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주도로 알몸상태로 집단폭행,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며 육신과 영혼의 파괴를 당했으며, 고문의 실상을 부인 인재근 씨와 함께 미주 한국일보에 폭로하여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받았고, 88년에는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이 수여하는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다시 구속되기도 하였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15대 국회의원으로 3선의 의정활동과 제 43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에 걸려 2011년 12월3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515호실은 다른 취조실에 비해 2배 정도 넓어 이른바 고위급 민주인사들의 고문장소로 사용됐다.

당시에 비해 원형이 제대로 유지되어있지 않았겠지만, 넓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인간취급을 받지는 못했다.

고 김근태 의원이 26년 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한 고문을 생생하게 재연한 영화가 바로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인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이다. 정지영 감독은 2011년 <부러진 화살>로 우리나라 사법계를 통렬하게 비판한 감독으로 <남영동 1985>는 인권의 존엄성이 고문을 통해 얼마나 헛된 구호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권연대 사무국장 오창익씨가 당시 이근안 고문기술자가 김근태 의원에게 가했던 각종 고문기술을 시범보이고 있다.

이근안은 유도 고단자로 사람의 관절을 자유자재로 넣다 뺐다하는 고문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고문도구인 칠성판에 누워 사지의 관절을 모두 빼 버리면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자신의 몰골을 보는 충격을...

 

이근안은 1999년 구속기소된 뒤 7년 옥살이를 하고 2008년 목사가 되었지만,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며 자신의 고문을

정당화 하다 2012년 김근태 의원의 사망으로 기독교와 시민단체의 목사안수철회운동에 의해 목사직이 면직되었다.

그러나 2012년 겨울 자서전을 내고 출판기념회도 열었다고 하니 아직도 반성은 안하고 있는 듯 하다.

세 아들 중 한 아들은 심장마비로, 한 아들은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지금은 부부가 폐지를 주으며 생활한다고 하니,

업보도 이런 업보는 없을 것이며 이근안에 의해 고문당하거나 죽은 사람들의 혼령이 떠나지 않았음이다.

 

 

 

5층 취조실에서 문 하나 열면 넓다란 계단이 나오고 창살로 들어오는 햇볕의 양도 많다.

1층 밀실에서 부터 얻어터지고 피 흘리며 원형철제계단을 타고 올라온 피의자들은 고문에 의해 짐승같은 삶을 살다가

죽지못해 억지 자술서를 쓰고 이 문을 거쳐 인간세상으로 나갔을 것이다.

인간세상에서 고문의 흔적을 지우고 사람답게 포장되어 걸어서 나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박종철씨처럼 싸늘한 시신으로 나갔다.

 

 

창문밖으로 보이는 시내모습

지옥같은 5층을 벗어난 피의자들은 이쪽으로 나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건물 뒷면은 오직 원형철제계단과 2인용 엘리베이터 뿐이었지만, 건물 앞면은 평범한 건물 계단과 창문이어서

철저히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지킬과 하이드처럼...

 

 

4층으로 내려가면 박종철 기념관이 있다.

5.18민주화운동 이전부터 80년대 말 까지 민주화운동의 모든것을 보여주는 신문기사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박종철의 개인 유품 등이 진열되어 있다. 5.18부터 6.10항쟁까지 이어지며, 노태우의 6.29선언까지 숨막히게 돌아가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박종철의 학창시절 사진과 대학 입학 이후 읽었던 사회과학 서적, 평소 즐기던 기타, 1986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회지에 기고한

<2학기 학생운동을 정리하며> 등 친필원고 등이 전시됐다.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 사망한 기사와 가계의 추모집회 소식을 보도한 기사들

 

 

박종철의 어린시설 사진들을 보면서 국민들 가슴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있는 박종철의 넋을 위로해 본다.

 

 

바로 옆은 경찰성 인권교육.전시관

 

 

3층은 경찰청 성희롱상담신고센터

 

 

1층부터 4층까지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5층만 제외하고...

 

 

현관에 붙어있는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

 

 

그 옆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관과 홍보관이 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당시 내무부 장관인 김치열의 이름으로 발주하고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이다.

김치열은 일제 말에 검사가 된 악성 친일파로서 박정희 독재 때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대표적인 친일-독재 인사로 고문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고 김수근은 한국전쟁때 징집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하여 건축을 공부한 뒤 서른 살 나이에 귀국해 김종필과 결탁하여

박정희 시대를 주름잡았던 인물이다.

고문을 즐겨한 김치열과 왜색이 짙은 건축가 김수근의 만남은 이런 흉물스런 건물을 세상에 남겼다.

 

 

애시당초 우측사진처럼 5층이었던 것을 1983년 7층으로 증축했다.

당시 주변 사진을 보면 남영동 대공분실 주위엔 이곳보다 더 높은 건물은 없어 건물 보안이 잘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를 보여주고

 

 

고 김근태의 타계때는 인권센터 경찰관들이 515호실앞에 조화도 올려 놓았다고 한다.

 

 

 

고 김근태, 박종철씨 사건도 정리해 놓았고..

 

 

인권센터에서 하는 일도 잘 설명되어 있다.

 

 

인권센터, 이렇게 만들어 졌다.

이것은 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얼룩진 과거에 대한 반성과 2005년 창설 60주년을 맞아 이제는 인권경찰로 거듭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그 중심이 바로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인권은 안녕하신가?

아직도 시위현장에서는 불법을 앞세워 경찰의 폭력이 난무한다.

그것은 이미 이명박정부 시절부터 제주도와 서울 광장등에서 시도때도 없이 나타났다.

국민은 촛불로 저항하지만, 매서운 찬바람에 촛불도 위태롭고 국민개개인은 힘이 없다.

 

 

이 문 하나로 인간과 짐승이 구분되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보면서

인권감수성이 스멀스멀 솟구쳐 오르는 것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다.

 

 

3층과 2층의 입면을 순차적으로 안쪽으로 밀어 넣어 건물의 역동성을 높인 남영동 대공분실

밑에서 쳐다보면 가분수격인 건물로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 감이 있다.

 

 

오른쪽 출입문은 또다른 비상계단.

 

 

건물과 건물 사이는 마치 중세의 견고한 성처럼 조그만 하늘을 열어둔다.

 

 

 

건물 반대쪽의 측면

 

 

거기서 다시 정면으로 돌아가는 기다린 벽돌벽...

건물의 미적 요소는 없이 마치 교도소 담장을 돌아가는 것 같다.

 

 

남영동 대공분실

 

 

성탄절이 다가오니 정원에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다.

그 사이로 보이는 5층의 길고 좁다란 창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무자비한 고문의 만행이 수십년간 자행된 곳이다.

 

 

 

5층의 위 아래 층은 안녕한 집단이 머무는 방이고, 5층은 결코 안녕하지 못한 집단이 억압과 고문을 받은 방이다.

인간과 짐승이 되는 것은 5층 출입문 하나 차이였지만, 밖에서 보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창문의 크기에서도 알 수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실화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었던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겸 대변인의 실화로 1981년 전민학련이라는 조작된 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한 인사이다.

 

최경환의 자전에세이

 

남영동 대공분실

 

1981년 6월 21일 새벽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내 자취방에 건장한 체격의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당시 성균관대학 사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으로 행촌동에 조그만 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3-4명의 형사들은 잠을 자고 있는 방 안까지 들어와 나를 깨웠다. 나는 깜짝 놀랐다. 형사들은 내 손을 뒤로 꺾고 머리를 눌렀다. 양팔을 붙잡힌 채 자취방에서 끌려나왔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형사들은 자취방에 있는 책과 노트를 모조리 챙겼다. 주인 집 식구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나를 쳐다봤다. 형사들은 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집에서 끌려나온 나는 독립문 사거리에 있는 파출소로 끌려 들어갔다. 형사들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나의 연행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바로 준비한 검정색 승용차에 나를 태웠다. 얼굴을 옷가지로 덮고 고개를 숙이게 했다. 내가 ‘왜 그러느냐?.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가만히 있어!’ 하고 윽박질렀다. 공포가 밀려왔다.

 

차가 어딘가에 멈췄다. 차에서 내려 계속 얼굴을 가린 채 어딘가로 끌려갔다. 얼굴에 덮어 씌운 것을 치우자 2평 남짓한 방안이었다. 방음벽으로 된 방이었다. 어떤 기관의 조사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방 한 켠 입구쪽으로 조사용 철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벽쪽으로 침대가 있고, 안쪽에는 욕탕과 변기가 있었다. 나는 이곳이 말로만 듣던 남산의 안기부가 아닌가 생각했다. 안쪽 벽에는 세로로 된 조그만 긴 창문이 나 있었지만 밖을 내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날 아침을 전후로 하여 ‘전민학련’ 사건(‘학림 사건’)으로 알려진 조직의 관계자들이 대부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후에 알았지만, 내가 끌려간 곳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는 곳이었다. 훗날, 그러니까 1986년 김근태 민청련 의장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당했고, 1987년 서울대 학생 박종철 군이 물고문을 당해 죽은 곳이었다. 내가 연행된 이후 5,6년후의 일이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빨갱이 새끼!’ ‘이 놈’ ‘개새끼’ 등 갖은 욕설을 들으며 몽둥이 찜질과 발길질 세례를 당했다. 몽둥이도 그냥 몽둥이가 아니었다. 어른 팔뚝만한 두께의 몽둥이로 내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들은 모두 군화를 신고 있었는데 3-4명이 둘러서서 무릎을 꿇고 있는 나를 사정없이 밟고 찼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죽일 기세였다. 순간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살려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욕설을 해대며 때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취조가 시작됐다. 주로 이선근 등 선배들 이름을 말하며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처음에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또 몽둥이 찜질이 시작됐다. 평생에 그렇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옆방에 다 와 있다고 했다. 나는 그때서야 이미 선배들이 모두 연행됐다는 것을 알았다. 몽둥이찜질과 구타는 조사받는 동안 계속됐다. 나는 함께 연행된 이태복, 이선근 등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훗날 재판과정에서야 알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30여일,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10여일간 연행되어 있었다. 물론 불법상태였다. 연행될 때는 물론 대공분실에 조사할 때도 나에게 구속영장을 제시하지도 않았고, 임의연행과 장기불법구금에 대해 한마디 양해의 말도 하지 않았다. 6월 21일에 연행되고 8월 3일 정식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될 때까지 43일간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불법 구금이었다.

 

당국은 나의 연행 사실을 가족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 가족들은 방학을 앞두고 내가 갑자기 실종되자 어딘가에 끌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내가 연행된 때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때였다. 광주에 살며 광주사태를 직접 경험한 내 부모는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캠퍼스에서도 어떤 기관에 끌려간 것 같다는 소문만 돌았다고 한다. 종로경찰서에서도,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이감된 후에도 몇 달간 가족면회마저 금지되었다. 모두가 불법이었다. 검찰 조사가 끝나고 재판이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서대문 서울구치소로 면회온 어머니는 죽은 자식을 보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에 얼마간 면회실을 들어오지 못했다.

 

남영동과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40여일 동안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굳은 살이 생길 정도로 지겹도록 조서를 꾸몄다. 내 조서는 나는 사회주의자고, 전민학련이라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 되어 북한을 찬양 고무하는 활동을 했고, 81년 봄 성균관대학에서 일어난 모든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꾸며졌다. 그 과정에서 조사관은 “너 사회민주주의 좋아하잖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써!”라고 하더니 며칠 후에 와서는 “‘민주’는 빼고 사회주의자라 하자”고 하며 조서를 다시 쓰게 했다. 그리고 “너희 놈들은 휴전선에 풀어놓고 총으로 쏴 죽이고 월북하던 놈 사살했다 하면 그만이다”며 공갈과 협박을 일삼았다.

 

조서 쓰기는 밤낮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른 방에서 조사받고 있는 선배나 동료들과 조서 내용이 틀리다며 또 몽둥이 찜질을 당해야 했다. 나를 담당한 조사관은 2명이었다. 교대로 근무하며 나와 함께 생활을 같이 했다. 조사관은 밤에도 침트 시트를 내려놓고 옆에서 같이 잠을 잤다. 24시간 철저히 감시 속에서 살았다. 식사는 끼니가 되면 식판에 담겨 들어왔다.

 

조서는 철저히 꾸며졌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 활동한 성균관대학교 도산연구회에서의 세미나 등 써클 활동은 모두 반국가단체 활동을 위한 의식화 교양과 조직화 사업이 되었다. 내가 읽은 각종 서적들은 모두 의식화 교양 서적이 됐다. 그 목록에는 ‘민중과 지식인’(한완상), ‘역사란 무엇인가’(E.H. 카), ‘후진국경제론’(조용범), ‘서양경제사론’(최종식), ‘한국민족주의의 탐구’(송건호), ‘소유나 삶이냐’(에릭 프롬) 등의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대학 2학년 겨울 무렵 선배들의 소개로 알게 된 동국대학교의 이종구, 성신여대의 이연미와 ‘민주학우회’라는 이름의 학생모임을 만들었다. 세 사람의 모임은 경기도 대성리 민박집이나 서울 시내의 음식점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겨우 세 사람이 모이는 ‘민주학우회’ 모임은 ‘현저히 사회를 불안하게 할 목적’을 가진 신고하지 않은 불법집회가 되었다.

 

그리고 1981년 1학기에 성균관대에서 있었던 2~3 차례의 ‘전두환 타도’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주장한 학생시위를 ‘민주학우회’가 사전에 음모하고 내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꾸며졌다. 당시 학생 시위는 1년전 광주에서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을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의식 있는 학생들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밥을 먹은 후 식판을 내놓으며 조사실 밖 복도를 내다볼 때가 있었다. 중앙 복도 양쪽으로 조사실이 연이어 있었다. 내 방 앞방에는 여자 선배 한 분이 조사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내 담당 조사관과 또 다른 조사관이 키득키득 웃고 좋아했다. 조사관들은 여자 선배에게 목욕을 하라고 방을 비워주었다. 그리고 밖에서 훔쳐본 것이다. 모든 조사실 방에는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는 렌즈가 달려 있었다. 아파트 안에서 밖 복도를 볼 수 있도록 한 자그마한 렌즈를 밖에서 안을 감시하도록 거꾸로 달아놓은 것이다. 파렴치한들이었다. 인권유린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도 공포에 질리고 무기력에 쌓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선배를 생각하면 항상 미안하고 죄스럽다.

 

남영동 조사를 받은 지 30여일이 지난 7월 하순경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소식이 들렸다. 옮겨진 곳은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또 다른 대공분실이었다. 조사실은 남영동과 마찬가지로 방음벽 처리가 돼 있었고 4-5평 정도로 컸다. 그곳에서 그 방대한 조서를 다시 썼다

 

1980년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저항이 언제 일어날지 두려워했다. 1981년 새 학기부터 서울지역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전두환 정권은 국면을 전환시킬 구실을 찾고 있었다. 여기에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을 이용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과 수사당국은 전민학련을 반국가단체로 크게 선전해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국민들로부터 떼어놓을 계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 노동자 등 관계자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정권은 부담을 느꼈다. 수사당국은 기소와 사건 발표에 앞서, 급히 재학중인 대학생들의 조서를 전부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집회시위법 위반으로 다시 작성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옥인동 대공분실로 옮겨 조서를 다시 꾸며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때 잡혀간 선배들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원이 되고, 나를 포함한 후배 그룹들은 집회시위법 위반이 적용됐다.

 

나는 1981년 8월 3일 정식 구속돼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이어 서대문 서울구치소로 이감돼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는 징역 3년 구형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심리후 1982년 5월 22일 징역 1년 6개월이 확정되었다. 판결문에는 ‘전두환 타도’ ‘광주항쟁 만세’ 등의 시위를 주관하고 전국민족민주학생연맹과 관련한 조직활동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시위를 음모, 주도하고 참여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해 8월 25일에는 성균관대학에서 '징계 제적'되었다.

 

자세한 것은 최경환의 자전에세이 참고.

 

 

인권감수성을 위한 인권여행은 공포정치의 산실 남영동 대공분실에 이어 독립과 민주의 현장 서대문 형무소로 간다.

이 여행은 광주 북구 일곡동의 삶을 가꾸는 일곡마을회의 '한새봉두레'에서 주최하고 광주광역시에서 후원하였다.

 

-연재순서-

 

1편 : 아들과 떠난 인권여행/서울시청 신청사. 그 특별한 전시회     

2편 : 아들과 떠난 인권여행/서울시청 광장의 민주주의

3편 : 아들과 떠난 인권여행/인간과 짐승은 문 하나 차이, 남영동 대공분실

4편 : 아들과 떠난 인권여행/서대문형무소 역사교육관

5편 : 아들과 떠난 인권여행/독립과 민주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6편 : 아들과 떠난 인권여행/선진 마을공동체 '삼각산 재미난 마을'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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