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떠난 인권여행 5편/독립과 민주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2013. 12. 28. 07:05대한민국 견문록/서울 견문록

 

4편 아들과 떠난 인권여행/서대문형무소 역사교육관에서 이어집니다.

 

서대문형무소(서울구치소)는 1986년 88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한 서울구치소 이전 계획에 의해 1987년 11월 15일에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고 현재의 서대문형무소는 1988년 2월 20일 김구, 강우규, 유관순 등이 옥고를 치렀던 제10ㆍ11ㆍ12옥사와 사형장을 사적 제324호로 지정하고, 1992년 8월 15일에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1998년 11월 5일 개관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역사관의 주제를 놓고 광복이후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민주인사들의 옥사를 상설전시관으로 넣자는 당시 신계륜 서울시 정무부시장과 설립취지대로 일제시대 고문을 당한 애국선열을 기리는 공간으로 한정하자는 이정규 서대문구청장이 맞서 같은 당 출신 인사끼리의 갈등이 이슈가 됐었다.

 

 

그 후 2010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다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동안 역사관의 설립취지대로 독립운동의 성지로서의 위상만 갖고 있던 것을 넘어 이제는 서대문형무소를 광복이전의 독립운동과 광복이후 민주화 운동을 포함한 독립과 민주의 성지’로 재개관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시관의 내용도 민주화운동 관련 부분이 많이 보강되었고, 11사에는 독립민주인사 풋프린팅 기념전시관이 상설로 운영되고 있다. 

 

 

뒤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서대문 형무소는 독립운동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를 수호하기위한 저항의 요람이기도 한다.

광복 후 1945년부터 1986년까지 40년간의 민주화 운동의 세월을 서대문 형무소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 등 친일파들은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 들여 가뒀고, 박정희 정권 시대에는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수많은 민주투사들이 간첩혐의를 뒤집어쓰고 투옥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다. 신군부세력이 집권한 80년대에는 고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을 선고받고 이곳에 투옥되기도 했으며 수많은 민주화운동 학생들로 서대문형무소는 넘쳐났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서대문형무소의 인권여행은 실제로 이곳에서 1980년 초반 민주화운동으로 수감되었던 최경환 김대중 센터 공보실장 겸 (사)민생평화광장 상임대표의 자서전을 인용하여 서대문형무소 수감생활을 생생하게 증언하고자 한다.

 

 

최경환의 자전에세이 

 

서대문구치소  

 

서대문구치소 생활은 최악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모두 독방에 수감되었다. 나도 독방에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있는 시간이 너무도 지루하고 답답했다. 주로 책을 읽고 혼자서 바둑을 두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이 면회 오는 시간과 매일 30분씩 운동하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출두하는 날이 좋았다. 법정으로 가는 호송차 안에서 ‘공범’들을 만나 눈짓, 손짓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모두가 포승줄에 묶인 몸이었지만 죄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편지는 봉합엽서에 한 달에 한번 가족에 한하여 허용되었다. 물론 검열 도장을 받아야 외부로 내 보낼 수 있었다. 신문은 아예 볼 수 없었다. 감방은 매주 한번씩, 혹은 수시로 ‘검방’이라는 것을 해서 금지물품을 찾아냈다. 감옥 안에는 ‘검방을 일주일만 안하면 헬리콥터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방 안에서 할 일이 없는 재소자들은 무언가를 했다. 두루마리 화장지, 빵봉지 등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라이터, 바늘 등 금지물품들이 돌아다녔다.  

 

 

밥은 콩밥이었다. 콩 반, 보리 반 정도로 콩이 많았다. 반찬은 무말랭이, 김치조각, 멀건 국들이 들어왔다. 밥의 양은 적지 않았다. 아침 7시, 낮 12시, 오후 4시가 배식 시간이었다. ‘식구통’이란 곳을 통해 기결수 죄수들이 밥 한덩이와 반찬, 국을 넣어주었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됐다. 방 안에서 콩밥만 먹으니 소화가 잘 안됐다. 마아가린와 고추장을 사입해 비벼먹었는데 먹을만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삶은 돼지고기 한 덩이씩이 나왔다. 때로는 닭고기가 나오는 날이 있었다. 이 돼지고기는 학생들의 교도소 투쟁의 주요 대상이었다. 행형법과 교도소 규정에 정해진 양이 있는데 너무 적다는 것이다. 돼지고기를 누군가 가로채고 있고 ‘정량’을 달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통방’을 통해 이런 정보를 주고받고 옥중투쟁을 했다. ‘통방’이란 죄수들끼리 큰소리로 다른 방에 있는 상대방을 불러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모두 금지된 행위였지만, 학생들은 그 규정을 무시했다.

  

 

내 방은 1층 맨 끝방이었다. 옆에 목욕탕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위층에서 물이 새는지 겨울에는 방안에 벽을 타고 얼음이 얼고 고드름이 열렸다. 한 겨울에는 한쪽이 작은 빙벽처럼 얼음이 얼었다. 두꺼운 속옷에 솜옷을 입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추위를 이길 수 없었다.

 

교도소에는 쥐와 비둘기들이 많았다. 모두가 콩 때문이었다. 재소자들은 먹고 남은 콩밥을 화장실에 버리거나 창살 너머로 버렸다. 살찐 쥐들은 화장실 밑을 기어다녔다. 살찐 비둘기들은 감옥 지붕에서 밥이 던져지기를 기다렸다. 교도소 생활이 지루해진 나는 비둘기를 포획할 계획을 세웠다. 식빵 봉지를 말아 고리를 만들고 밥을 던져 비둘기를 유인했다. 몇 차례 실패 끝에 비둘기를 잡았다. 방안에 묶어두고 친구삼아 놀았다. 교도관이 어이없어 했다.

 

 

생쥐놀이  

 

잠결에 내 코를 간지럽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생쥐 세 마리가 내 이불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방안을 돌며 밥을 받아먹는 식기로 한 마리씩 덮어놓고 아침에 어떻게 처리할지를 궁리하기로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식기를 들쳐보니 모두 죽어 있었다. 추워서 동사한 것이다.

 

 

마루바닥 밑에서는 쥐들의 잔치가 매일 열렸다. 하루는 마루에 관솔이 빠져 생긴 구멍으로 귀여운 생쥐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고 전후좌우를 살피기를 반복했다. 나는 먹다남은 떡 조각을 구멍 앞에 놓고 생쥐를 유인했다. 생쥐는 쉽게 속지 않았다. 나는 떡 조각을 실을 묶어 한 손으로 잡고 구멍 가까이에 갖다 대고 생쥐를 유인했다. 생쥐는 몸 상채만 내놓은 채 떡을 물고 가져가려고 했다. 내가 떡을 잡아당기자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떡을 구멍에 더 멀리, 생쥐가 상체를 다 내밀어 먹을 수 있는 곳까지 갖다 놓았다. 조금 있다가 생쥐는 머리를 내밀고 전후좌우를 살피더니 몸 전체를 구멍에서 빠져나와 떡을 물었다. 내 다른 손은 식기를 들고 있었다. 바로 구멍을 막아 버렸다. 도망갈 구멍을 잃은 생쥐는 말 그대로 ‘독안에 든 쥐’였다. 1.75평 감옥 안에서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해서 여러 마리의 생쥐를 생포해 라면 박스를 구해 먹이를 주며 길렀다.

 

 

한번은 구멍에서 빠져 나온 생쥐가 구멍을 향해 도망가는데 꼬리를 눌렀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마루바닥 밑에 있던 다른 생쥐가 머리를 내밀더니 서로 입을 물고 구멍쪽으로 당겼다. 내가 꼬리를 누르고 있는 생쥐는 구멍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구멍 안에 있는 생쥐는 밖에 있는 생쥐를 입으로 물고 당겼다. 아마도 둘은 형제간이었던 모양이다. 언니인지, 동생인지, 형인지 모르겠지만 잡혀 있는 형제를 위해 입을 물고 끌어당기는 것을 보고 생쥐 같은 하찮은 동물도 그런 정들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생포한 생쥐들을 석방하고, 다시는 ‘생쥐놀이’를 하지 않았다.

 

 

겨울보다 더 힘든 때가 봄이었다. 운동장은 부채꼴 모양으로 높은 블럭 담으로 갈라져 있는 원형의 운동장이었다. 한가운데 교도관의 감시 망루가 있었다. 운동장에서 바라보는 안산과 인왕산의 신록과 개나리, 진달래는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언제 감옥을 나가 저 산과 들을 맘껏 거닐 수 있을까?

 

 

감옥에는 혼자서 걸을 수 있는 권리, 즉 ‘독보권’(獨步權)이 없다. 면회를 갈 때도 목욕이나 운동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갈 때는 항상 교도관과 함께 가야 한다. 나 역시 혼자 걸을 수 없었다. 항상 몇 발짝 뒤, 혹은 바로 옆에 교도관이 붙어 있었다.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인권변호사의 대부로 불리우는 이돈명 변호사들이 나서서 열심히 변론을 했지만 판결문은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 내용 그대로였다. 43일간의 불범구금, 수사과정의 폭력, 고문 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피고인들과 방청석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공소장 그대로 된 판결문을 낭독하는 판사들을 보며 판사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건으로 법정에 선 피고인들은 무려 30여명이나 되었다. 그만큼 심리기간도 길었다. 우리는 감옥안에서 산책 삼아 나오는 재판이 즐거웠지만 매번 방청을 와야하는 가족들은 오랜 재판에 지쳤다. 방청석에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 아버지, 누나들, 쌍둥이 형이 보였다. 재판은 6개월이 넘게 진행되었다. 2심 재판이 끝나자 나는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1년 6월 징역형이 확정된 것이다. 나는 서대문 서울구치소에서 강원도 춘천 교외에 있는 춘천교도소로 이감됐다.

 

 

저자 최경환은 서대문형무소 시절 생쥐놀이에서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생명의 존엄성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생쥐도 자기 동료를 구하러 저 난리인데, 지금 세상돌아가는 것을 보면 마치 자신의 절대적 권력 유지를 위해 마지막까지 몸부림 치는 가련한 인생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저들은 모를까?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 절대로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벽을 두드리고 벽에 대고 말을 하면(통방) 옆방에서 옆방으로 계속 전달해 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감방에서도 서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건만, 현 정부는 소통없는 원칙을 불통이란 지적에 자랑스런 불통이라고

나불대고 있다. 정말 대단한 불통이 아닐 수 없다. 이정도면 불통이 아니라 옹고집으로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판 뜨자는 것이라

하겠다.

 

 

감옥의 환기통

 

 

 

독방에 감금된 수감자는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었다.

용변을 치울 때 조차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룻널 끝 쪽에 구멍을 내어 그 구멍에 용변을 보고 밖으로 배출하게 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인사들의 풋프린팅 전시관

서대문형무소 역사의 절반은 독립의 공간,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민주항쟁의 공간이다.

뒤늦게나마 민주항쟁의 역사가 조명되고 있어 다행스런 일이다.

 

 

 

공작사는 수감자들이 노역한 곳으로 각 방이 비교적 넓게 구성되어 있다.

수감자들의 노동력으로 형무소 · 군부대 · 관공서 등의 관용물품을 조달했으며,

주로 옷감과 의복을 생산해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군수용품으로도 납품되었다고 한다.

 

 

말없이 걸려있는 대형 태극기

 

 

추모비 

 

작품 : 민족의 혼 그릇

작가 : 임승호, 2010년 작

 

추모비는 독립운동하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순국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순국한 이들의 민족정신과 자유 · 평화를 향한 의지를 한데 모으고, 그 모아진 의지를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내부에 투영된 이들은 지금까지 발굴된 총 165명이며, 발굴되는데로 추가 등재된다.

 

 

 

격벽장

 

격벽장은 수감자들이 운동할 때 서로 대화하는 것을 방지하고,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러 개의 칸막이 벽(격벽)을 만들었다.

각 칸에 수감자들을 분리 수용해 운동을 시켰던 일종의 운동시설이다.

 

 

서대문형무소 수기를 간간히 보면 몇 백바퀴를 돌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이 곳을 말한다.

 

 

 

통곡의 미루나무

 

미루나무는 사형장 건립 당시 심어졌다.

사형장으로 가는 이들이 미루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죽어야 하는 현실을 한탄하며 통곡했다고 해서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불리웠다. 

 

인혁당 사형수상

 

사형장으로 걸어가면서 무표정한 눈으로 뒤를 바라보고 있는 이 조각상은 사형장 바로 앞에 전시되어 있다.  

'인혁당사건'은 박정희독재정권 반대운동을 한 사람들을 북한의 간첩으로 몰아서 처형시킨 사건으로, 참혹한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 철저히 조작한 사건이다.

대법원 확정판결 뒤 18시간만에 교수형을 집행함으로써 제네바 국제법학자 협회에 의해서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된 날이다. 2007년 이 사건은 법원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정당성 없는 권력의 힘으로 날조된 역사는 반드시 그 죄값을 받는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형장

 

1923년 지어진 목조건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이들이 순국했던 장소이다.

사형장은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었다. 사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사형장치는 교수형 집행을 위한 개폐식 마루판, 교수줄, 가림판 뒤쪽에 위치해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레버장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루판 아래 지하공간에 시신 수습실이 있다.

 

 

사형집행을 참관하는 이들이 앉았던 곳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독립운동가들을 보고 일본놈들은 희희낙낙했을까?

일말의 인간성이 있다면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우리를 안내한 인권운동가의 설명을 듣고 나면 손발이 부르르 떨린다.

 

 

 

시구문은 차마 찍지 못했다. 

시구문은 사형 집행 후 사실을 은폐해야 할 경우 시신을 외부로 몰래 반출하기 위해 뚫어놓은 비밀통로로, 고문흔적이 있거나

사형 사실이 외부에 공개됐을 때 사회적으로 파장이 우려되는 경우, 시신을 인도할 유족이 없는 경우 등에 이용되었다.

원래 길이는 약 200m로 바깥과 연결되었으나 해방 직전 일본이 붕괴시킨 것을 지난 1992년 독립공원 조성 시 발굴해 약 40m를

복원했다.

 

 

옥사터

 

지금 사람들이 걸어가는 장소가 옛 옥사터다.

1987년에 서울구치소가 의왕시로 이전한 후 철거되었던 지역으로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은 감방이 있던 자리다.

2010년 보수 정비할 때 원형의 자리를 확인해 붉은 벽돌로 표시했으며, 최경환 자전에세이에서는 이쪽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여옥사

 

여옥사는 최근 다시 복원하여 개관했다.

형량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나 사형수를 수감했던 곳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이 수감되었다.

 

 

 

유관순 열사 동상

굳게 다문 입술에서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유관순과 8호 감방

이 방에는 유관순 열사외에도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 임명애, 김향화 등이 수감됐다.

 

 

풋 프린팅을 한 독립과 민주 인사들

 

 

취사장

 

재소자와 간수들의 식사를 담당하던 곳으로 뮤지엄 샵(기념품 판매소)을 겸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제의 고문과 고문에 맞선 애국지사와 민주화운동에 따른 고문과 이에 맞선 민주인사를 기억하는 곳이다.

거기에 필연적인 것은 바로 인권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대문형무소까지 인권여행을 했지만, 이것만 가지고 인권의 소중함을 알기는 역부족이다.

최근 대자보 행렬에 동참한 고등학생들의 대자보를 철거하라는 지시에 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은 학생들의 인권을 들어 거부했다고 한다.

대자보를 붙일 수 있는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한 권리다.

이것을 두고 학습권 침해 운운하는 것 자체가 바로 불통이다.

 

 

서대문형무소를 나와 인권여행의 숙소인 서울유스호스텔에 왔다.

이곳은 옛날 박정희 정권시절 남산 안기부 건물로 수 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받고 탄압받으며 간첩 누명을 쓰던 곳이다.

잠이 올리가 없다. 지금은 리모델링해서 옛모습을 많이 지웠다지만, 옥상의 송신탑에서 부터 위압감을 받는 곳이다.

서울시청 광장의 촛불집회에 참석해 보고 싶었으나 이미 끝났다는 말에 침대에 누워 온 밤을 하얗게 지새며 인권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아들과 떠난 인권여행도 이제 서서히 결말을 향해 달리고 있다.

내일은 서울 인권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선진 마을공동체 '삼각산 재미난 마을'을 방문한다.

남영동 대공분실과 서대문형무소를 탐방하였지만 역사에 죄를 짓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난 3월1일 3.1절을 맞이해 인사동 쌈지길에서 열린 아리랑 플랩시몹을 들으며 다시한번 독립정신과 민주투쟁의 정신을 함양해 본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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