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여행)자화상의 선비화가 윤두서 고택

2014. 2. 18. 07:05전라남도 견문록/해남 견문록

 

해남 윤씨 어초은파의 관향 녹우당을 보고서 윤선도의 손자인 윤두서의 고택과 조선 후기 건축물인 윤탁가옥을 찾게 되었다.

두 건물 모두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이라 일컷는 곳에 지어져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특히 윤두서 고택 뒤편에 윤두서의 묘도 있다고 하니 어디가 어때서 명당터로 소문이 자자한가 알아보러 간다. 

 

바로 좌측의 유명한 그림을 그린 사람이 바로 윤두서이다.

국보 제240호로 지정된 윤두서의 자화상.

당시에 글 쓰는 선비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정면상을 그렸다는건은 놀라울 정도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화면가득 얼굴만 그리고 머리 윗 부분은 과감히 생략해버린 도발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어느 화가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머리 윗 부분을 날려버릴까?

현대에 이르러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싶다.

또한, 금새라도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에서 늘어뜨린 수염까지도 흔들리게 보일 정도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박학하고 세상을 꿰뚫어 보는 시선을 가진 자신이 당쟁의 혼란스러움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고독을 이 자화상은 보여주고 있다. 즉, 세상의 불행함속에서도 꿋꿋하게 선비의 길을 가고자 했던 선구자의 마음을 담아낸 것이다. 그는 당시 최초로 백성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으며, 풍속화의 시초가 된 공재의 화풍은 아들 낙서 윤덕희와 손자 청고 윤용에게로 이어졌다. 

 

공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림을 배우지 않고 중국에서 전해져 온 고씨화보와 당시화보 등을 놓고 그림을 익혔다고 한다.

남북조시대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 백여명의 대가들의 그림이 실린 고씨화보는 그림의 특징까지 세세하게 쓰여있어 윤두서가 그림공부를 하기에 최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고씨화보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연습을 했지만, 대상을 직접 관찰하고 사생하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노력이 민중의 생활상을 그리는 것에 나타나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그의 시문학과 실학정신은 외증손자인 다산 정약용에게까지 이어졌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 녹우당을 드나들며 학문을 넓혔고 윤두서 자화상을 보고 자신이 외가와 닮았다고 했을 정도라고 한다.

 

 

윤두서 고택은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372번지 (현산면 백포길 122)에 있으며 찾아가는 길은 해남읍에서 완도가는 길로 가다 현산면 소재지 

다음 고담교차로에서 우회전 신방보건진료소를 지나 나오는 신방저수지를 좌측으로 끼고 둑방길로 가면 윤두서 고택이 있는 백포리가 나온다.

땅끝을 관광하다 해남방향으로 온다면 송지면을 지나 염전이 끝나는 직선도로에서 군곡리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좌측 안호리(77번 지방도)로

들어가는 길을 만나는데 이곳으로 가면 현산으로 가는 것 보다 훨씬 빠르게 갈 수 있다. 그러나 공제 윤두서 고택이라는 이정표가 없는 것이 흠이다.

지금 보이는 방향은 송지면에서 나오는 길에서 찾아가는 길이다.

 

 

윤두서 고택 뒤의 산은 망부산(219m)으로 "옛날 중국 남경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나게 되는데, 사신으로 떠나는 사람의

아내가 이 산에 올라서서 멀리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는 곳이다.

배가 떠난 곳은 산 바로 남동쪽에 백방산 아래 백방포였는데 망부산이란 이름은 '멀리 떠난 남편이 돌아오기를 이 산에서 기다렸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김지하 시인의 시로도 소개되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이곳 백포 포구를 통해 해남으로 들어올 때 배에서 백포마을의 지형을 보고 이곳은 내가 살 곳은 못되지만 뒤에 후손들이 살기에는 괜챦은 곳으로 보아두었던 곳으로 큰아들인 윤인미(尹仁美)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하기 위해 집을 지었으나 해변에 위치하여 해풍이 심해 고산은 다시 녹우당으로 돌아가고 훗날 한양에서 귀향한 증손자인 윤두서가 말년에 이곳에서 2년간 살다 고택 뒤에 묻혔다.

뒤에 산이 있고 앞에 물이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명당터로 마을 전체가 명당같아 보이지만 딱 꼬집어 이곳이라고 정한 윤선도의 혜안을 집과

공재 윤두서의 묘를 보면서 한 번 느껴보기로 한다.

 

마을앞에서 바라본 백포 앞바다.

백포마을은 공재 윤두서의 후손들이 자자 일촌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로 현재 약 50여호가 살고 있으며 해남윤씨와 밀양박씨, 김해김씨가 비슷하게 살고 있지만 해방무렵까지만 해도 대부분 해남윤씨들이 살았다고 하며, 공재의 넷째 아들인 윤덕훈과 그 후손들이 퍼져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 한다.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넓은 주차장도 있고...

 

마을 회관을 지나...

 

윤두서의 9대손인 윤태현(크라운제과 창업자)의 사당이라고 알려진 모선당이 보인다.

모선당은 사당과 살림집을 겸한 것 같으며 윤두서의 재실도 겸할 것이다.

 

윤두서 고택으로 들어가는 길에 만난 또다른 고택.

공재의 4째 아들인 윤덕훈의 9대손 윤영유씨가 윤두서 고택 바로 옆에서 관리하며 산다고 했는데 이집인 것 같다.

이 집은 공재의 고택에 비해 단촐하지만 사람이 사는 관계로 옛 고택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백포마을의 집들 중 최소 100년은 넘어 보이는 고택들이 많은데 규모가 작다 보니 문화재 지정이 안돼 있어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문화재로 지정이 돼야 보수나 유지관리에 돈이 덜 들어갈 것인데...

 

윤두서 고택으로 가는 골목길

가지런한 돌담길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좌측이 윤두서 고택의 돌담. 오른쪽 돌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공재 윤두서 고택의 주차장.

주차장은 고택 바로 앞에 있지만, 가급적 마을회관앞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오는 것이 좋다.

100여년도 넘은 고택들을 바라보고 가지런한 돌담장길을 거닐며 세월의 흔적을 느껴보는 것이 훨씬 더 정감있기 때문이다.

 

왼쪽 담장안 건물이 공재 고택이고 오른쪽은 공재의 9대손 윤태현(크라운제과 창업자)생가이다.

 

아직 한참 공사중이라 표지석도 제위치에 있지 않다.

 

잠시 크라운제과 창업자 윤태현의 생가 복원현장을 둘러보고..

 

윤태현 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묘가 바로 공재 윤두서의 묘다.

 

윤두서 묘

 

윤두서 묘에서 바라본 윤두서 고택과 멀리 백포해안.

윤선도는 시조에도 능했지만 집안의 부를 늘리기 위한 간척사업도 했다 한다.

그는 이곳 백포마을 앞을 대규모로 간척 하여 토지를 늘렸는데 그러자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여살게 되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간척지가 되었지만 아마 윤선도가 이곳에 집을 지을 무렵에는 마을 앞이 바로 바닷가로
어마어마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니

집집마다 담장들도 높고 처마는 담장아래 움추러 들었을 것이다.

뒤쪽 망부산에서 내려온 기가 이곳에서 솟았을까? 공제의 묘는 따스한 양지에서 멀리 해남 윤씨가 간척한 땅과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백포해안을 당겨보고...조금있다 윤두서 고택을 나와 백포해안을 가보기로 하고...

공재는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양지바른 곳에 앉아 백포해안을 바라보며 자신의 땅을 바라보며

소일만 했을까? 결국 차가운 바닷바람에 감기가 걸려 시름시름 앓다 2년만에 녹우당에서 사망하고 만다. 

 

윤두서 묘소 바로 옆의 폐가.

곧 쓰러질 것 같은 오래된 고택은 마을 서당이었다고 한다.

서당이후로는 마을회관으로 썼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바다를 옆으로 바라보고 있어 백여년 풍파를 이겨온 내공이 보인다.

 

아마도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공재의 9대손인 윤태현 크라운제과 창업자의 생가를 복원하듯, 이 집에서 공부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학교가 잘 건사해 주길 바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집에서 공부했을까?

잘 정비된 윤두서 고택과 윤태현 크라운제과 창업자 생가를 보면서 문득 폐가의 제자들이 궁금해 진다.

 

윤두서 고택으로 들어가 본다.

 

윤두서 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232호로 1996년 지정됐으며 공재의 후손 윤항식씨가 관리하고 있다 한다.

입구에서 보이는 곳이 사랑채와 사당이다.

 

 

윤두서 사당.

 

윤두서 고택의 사랑채

 

윤두서의 호가 쓰여있고 곡간채의 문 구조도 특이하다.

 

행랑채 바깥에서 들여다 본 안채

 

안채는 ㄷ자형 양반가옥으로 방마다 툇마루가 달려있다.

이 집은 원래 ㅁ자 형으로 뒷산인 망부산을 뒤로 서향을 하고 있는 것과 전체적인 모양이 윤선도의 녹우당과 비슷하다고 한다.
상량문에 의하면 경술년(1670년)에 처음 지어졌고, 142년 후인 신미년(1811) 8월에 크게 고쳤으며 60년 후인 신미년(1871년) 9월에 지붕을

다시 고쳤다고 한다.

집이 지어진 1670년은 윤선도가 죽기 1년 전으로 지금으로 부터 340년전에 지어진 고택임은 상량문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고택안에는 수령을 알 수없는 향나무 한 그루 있고 너른 텃밭엔 봄동이 익어간다.

 

윤두서 고택의 화장실.

빨래줄없는 받침대가 있는 것으로 보여 사람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고일까?

 

윤두서 고택은 한때 48칸짜리였다고 한다.

지금은 안채 13칸과 곳간채 3칸, 사당, 헛간만이 남아 있지만, 남아 있는 규모만으로도 기품이 넘쳐난다.

인적이 없는 고택을 둘러보면서 34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고택의 뒷뜰로 돌아가 본다.

 

담장 너머로는 마을 초입에서 봤던 고택이 보이고...

좌측의 건물은 모선당.

 

 

장독대

 

수선한 기와와 맷돌

 

이쪽은 전체가 광인가 보다.

 

윤두서 고택 담장너머로의 또다른 고택들...

 

윤두서 고택의 현판 중 눈에 띤 청우재

윤선도의 녹우당이 뒷 산의 비자나무 잎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초록비 소리였다면, 이곳 청우제는 말그대로 초록비가 내리는 곳이다.

 

 

특이한 구조1.

 

특이한 구조2.

 

 

안채에서 바라본 백포리

 

능통이란 현판

 

동백꽃 활짝 핀 윤두서 고택

공재 윤두서(1668~1715)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조선후기 삼재(三齋)로 꼽는 선비화가다.

1688년 해남 연동에서 윤선도의 네째 아들 윤예미의 자손 윤이후의 네째(윤선도의 증손자)로 태어났으나 윤선도의 장남 윤인미의 종손 윤이석이 아들이 없자 윤선도가 후손 중 가장 점괘가 좋은 윤두서를 종손으로 입양했다고 한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따로 있고 입양한 부모가 따로 있어 해남 윤씨 어초은 파를 이어가야할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지만, 전해지는 두 가지

일화에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때 공재는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또한 입양된 종손 윤이석의 부인은 청송심씨로 공재가 30세 되던 해 한양에서 양부 윤이석을 보러 해남으로 내려가는데, 이때 어머니 심씨부인은

향장(鄕庄)의 묵은 빚을 받아오라 했다고 한다. 공재가 채권(債券)에 수록된 내용을 보니 그 액수가 수천냥이 되었으며 빚을 진 사람들도 모두 가난하여 빚을 갚을 수 없자 공재는 채권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렇듯 공재는 입양된 종손이지만, 자신의 뜻대로 구휼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인 것이다.

 

공재는 15세에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결혼하였고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생부 윤이후의 낙향과 갑술환국으로 남인계열의

실각이 이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윤두서의 세째형 윤종서가 동궁을 두둔하고 신하를 비판한 상소를 올렸다가 거제도로 유배되고 다시 한양으로

소환되어 심문중 죽은 사건이 발생하였고 장인과 큰형 윤창서까지 역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우여곡절끝에 무고로 밝혀진뒤 해남 윤씨 가문에 크나큰 위기룰 느낀 윤두서는 섯부른 판단이 집안을 몰락시킬 수 도 있다고 판단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으며, 46세에 해남 녹우당으로 귀향하여 백포리 윤두서 고택에서 은거하다 연동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죽은 뒤 1774년(영조 50)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윤덕희의 딸인 윤소온이 정재원과 결혼하여 정약용을 낳았으므로

정약용의 외증조 할아버지가 바로 윤두서가 된다.

 

윤두서 고택을 나와 백포로 가 봤다.

 

멀리 달마산의 남해바다로 풍덩 빠지는 모습도 보이고...

하늘에서 보면 안으로 새의 모양처럼 움푹 들어가 아늑한 땅 백포해변.

 

공재는 10형제를 뒀다고 하는데 해남 윤씨 어초은파 종손 중에 아마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46세에 해남으로 돌아와 48세에 사망했지만, 그의 짧은 생애에 비해 정렬적인 다산가였던 것이다.

이렇듯 자녀가 많게된 일화가 있는데 해남 달마산 미황사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미황사 명부전의 10대 시왕 조각은 윤두서의 작품이라고 한다. 아들이 없던 윤두서는 절 근처의 은행나무를 베어다가 미황사 명부전에 시왕을

조성하고 신기하게도 10명의 아들을 보았는데 더욱 신기한 일은 네번째 시왕의 눈의 크기가 실수로 다르게 조각됐다고 한다.

그런데 윤두서의 넷째 아들도 눈의 크기가 달랐다는 전설...(그러나 윤두서가 10살때 양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했고 15세에 결혼하여

3년 만에 큰아들 덕희를 낳는 등 첫째 부인에게서 2남1녀를 얻었다고 하니..ㅎㅎ..어디까지 전설은 전설인셈이다.)

그후 장남인 덕희와 손자 용까지 공재의 예술가적 기질을 이어받아 화가가 되었다고 하니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가풍은 분명 고관대작보다 예술가적 피를 이어받았음이 분명하고 화를 피해 해남으로 내려와 가문을 부흥시킨 것이 오늘날의 명문가 해남 윤씨 어초은파를 있게한 계기가 되었음은

윤두서의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이 높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윤두서 작품

〈자화상〉 · 〈채애도〉 · 〈선차도〉 · 〈백마도(白馬圖)〉등이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 전하고 있다.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는 산수(山水) · 산수인물(山水人物) · 영모 · 화조(花鳥) · 초충(草蟲) · 도석인물(道釋人物) · 화웨도(花卉圖)등 60여점의

소품으로 꾸며져 있으며, 〈노승도(老僧圖)〉 · 〈심득경초상(沈得經肖像)〉 · 〈출렵도(出獵圖)〉 · 〈우마도권(牛馬圖卷)〉 · 〈심산지록도(深山芝鹿圖)〉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는 《기졸(記拙)》과 《화단(晝壇)》이 있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시조 한 수가 전해진다.

 

(해남두륜산권 여행기)

1.해남윤씨 보물창고,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2.초록비 쏟아지는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 

3.녹우당 비자나무숲에서 녹우(綠雨)를 느껴본다.

4.왜(倭)계 용두리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5.비련의 시인 고정희 생가와 시인을 닮은 송정소나무

6.김남주 시인 20주기, 생가를 찾아서

7.하늘이 숨겨놓은 땅 윤선도의 금쇄동 

8.청동기시대 연정리, 방축리 지석묘 군

 

(해남땅끝 여행기) 

  1편 : 앗! 공룡이 탈출했어요/해남 공룡박물관

  2편 : 우리 공룡 사냥하러 가 볼까?/해남 공룡박물관

  3편 : 보고 서 있는것 자체가 힐링/해남 고천암

  4편 : 정유재란 이순신장군 첫 승첩지/해남 어란진

  5편 : 대한민국 일출의 최고봉/땅끝마을 맴섬 일출

  6편 : 우리 모노레일 타고 가 볼까?/땅끝전망대

  7편 : 땅의 끝, 여기서 뒤 돌아서면 그것이 바로 시작이야/땅끝탑

  8편 : 땅끝에서 삼남길을 따라 한양까지 가 볼까?/삼남길

  9편 : 땅끝에도 하루에 두 번 길이 열리는 신비의 섬이 있다./땅끝 대죽도

10편 : 해남아가씨의 사랑이야기가 있는 송호해변/송호해수욕장

11편 : 자연과 예술이 하나가 된 땅끝조각공원

12편 : 땅끝 사구미 해변에서의 사랑이야기 

 

주소 :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372번지 (현산면 백포길 122)

주자창 : 있음

입장료 : 없음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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