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여행)삼별초와 함께한 남도진성과 천연기념물 진도개

2014. 4. 30. 07:05전라남도 견문록/진도 견문록

 

원종의 사실상 항복과 뒤이은 삼별초에 대한 혁파령으로 궁지에 몰린 삼별초는 개경 환도가 결정되자 ‘배중손’을 대장군으로 추대,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새로운 왕으로 삼고 고려의 환도를 거부하고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처음 강화도에서 저항을 시작한 삼별초는 이탈자가 속출하자 6월 3일 1,000여 척의 대선단에 재화와 백성, 군사들을 모두 싣고 일부 고관대작들을 인질삼아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며 남하하여 1270년 8월 벽파진을 통해 진도로 들어와 용장성에 웅거하고 항쟁의 틀을 잡습니다. 

 

이렇게 진도에 터를 잡은 삼별초가 남해안과 전라도, 경상도는 물론이요, 경기도까지 진출하여 개경을 압박하며 조세 운반로인 조운로(漕運路)를 장악하자 개경정부의 재정상태는 극도로 곤핍하게 되었죠. 당장 시급한 군량(軍糧)조차 제대로 맞춰서 대줄 수가 없는 형편으로 하루라도 빨리 진도를 되찾는 것이 당시 개경정부의 숙제였습니다. 원나라의 입장에서도 삼별초와 남송의 동맹을 방지하고 또한 일본을 정복하려는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도의 삼별초정벌이 필수적이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1271년 5월 15일 여몽연합군은 진도를 향해 총공격에 들어갔는데, 모두 백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김방경은 흔도와 함께 중군을 지휘하여 벽파정으로 쳐들어가고, 옹·희 및 홍다구는 좌군을 거느리고 장항에서부터 쳐들어가고, 대장군 김석과 만호(萬戶) 고을마는 우군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에서부터 쳐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삼면으로 기습을 받은 삼별초는 우왕좌왕하였고 여몽연합군은 마침내 벽파진으로 상륙하여 여유 있게 용장성에 입성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삼별초의 패인은 여원연합군의 치밀한 양동작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데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전만 해도 삼별초의 기세가 등등해 8월과 9월의 공격도 거뜬하게 버틸 정도로 수군의 병력이나 전함 면에서 여몽연합군을 압도했거든요.

오죽했으면 삼별초의 기세에 겁을 먹은 몽고사령관 아해가 배에서 내려 나주로 퇴각하려고 했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비겁을 감추기 위해 고려군 사령관 김방경을 음해해 개경으로 소환시키기도 했답니다.

 

 

결국 여몽연합군에 밀려 용장산성에서 탈출한 삼별초의 퇴로는 크게 두 갈래로 갈리는데, 승화후 온과 김통정, 유존섭 등은 당시 삼면에서 밀고 들어오는 여몽연합군의 기세를 분산시키기 위해 남쪽 왕무덤재를 넘어 갑포로 향했고, 배중손장군 일행은 남도포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승화후 온 일행은 지금의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부근인 왕무덤재에서 여몽연합군과 첫번째 격전을 치르는데, 이 골짜기는 당시 이곳이 삼별초의 피로 물들었다 하여 ‘핏기내·피내·혈천(血川)’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빗기내’라 부렀으며, 여몽연합군의 지휘자인 ‘홍다구가 싸운 곳’이란 뜻으로 다근투골(茶斤鬪骨)이라 불렀읍니다. 이 전투에서 승화후 온과 그의 아들 항이 몽고의 장군 홍다구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후세사람들이 ‘왕온의 묘’가 있다고 해서 ‘왕무덤재’라 불렀습니다.

 

구전에 따르면 왕준이 아들 왕희(王熙)와 왕옹(王雍)을 여몽연합군 장수로 파견, 그의 동생 왕온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홍다구가 다근투골에서 왕온을 죽였음을 알고 눈물을 뿌리며 시신 위에 흙을 덮어 왕온의 묘가 되었다고 하는데. 같이 죽은 아들 왕항의 무덤은 없고 왕온이 탔던 말의 무덤이 만 곁에서 왕온의 묘를 지키고 있다합니다.

 

 

승화후 온을 잃고 계속 남하하던 김통정 일행이 여몽연합군과 다시 맞닥뜨린 곳은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부근으로 마을 앞 곳곳에 남아 있는 작은 봉분들에서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돈지리 마을 앞 들판과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무덤들을 마을사람들은 ‘떼무덤’ 혹은 ‘대분통’이라 부르는데 ‘삼별초 궁녀 둠벙’도 돈지벌 전투에서 삼별초가 패하자 궁녀들이 만길재에서 우황천이라 불리던 웅덩이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곳입니다.

 

갑포로 이동하며 두번의 타격을 입은 김통정 일행이 제주로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금갑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북문재 정상의 금갑진에 다다라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이곳에서도 패한 김통정 일행은 결국 제주도로 배를 타고 퇴각하는데 성공합니다.

 

 

남도석성내에 있던 만호비를 이곳으로 옮겨놨군요.

수군만호들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한 만호비입니다. 모두 6기가 있는데 이곳 만호들의 정직한 위민봉사정신을 알 수 있게하는 대목입니다.

 

 

서쪽 남도포로 퇴로를 잡은 배중손장군은 남도석성에서 최후를 맞는데 우리 일행이 진도여행 마지막 코스로 잡은 곳입니다.

남도석성은 삼국시대때 쌓은 성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고종 이후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충정왕 2년 (1350)에 진도의 관부와 백성들을

모두 육지의 영암으로 옮겨 조선시대 세종 19년(1437년)까지 이곳은 텅 비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용장산성에서 패퇴한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이 여몽연합군과 최후의 격전을 벌인 곳으로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곳입니다.

 

 

온화후 왕온을 잃고 금갑진에서 최후 방어선을 그은 김통정은 여기서도 패하자 남은 삼별초와 같이 제주로 건너가 지금의 제주시 애월읍 상귀리에

10리에 이른 항파두성을 쌓고 1만여의 여몽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치릅니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안팎 이중으로 항파두성을 쌓은 김통정은 목성과 바다쪽에 방축을 쌓는 등 여몽연합군에 맞서 싸울 준비를 끝냈으며,

다시 힘을 길러 이듬해 부터 남해안 일대는 물론이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요지를 기습공격하여 번번히 피해를 입혔으며 경기도까지 북상하여

개경의 조정을 바짝 긴장하게 했답니다.

이에 고려는 다시 몽고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일본정벌의 숙원을 가지고 있던 몽고는 제주를 일본정벌의 기지로 삼기위해 삼별초의 제주를

공략합니다.

 

제주의 삼별초를 향해 처음에는 사신을 보내어 회유책으로 항복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자 여몽연합군은 원종 14년(1273) 삼별초 섬멸을 위해 제주를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여몽연합군은 좌군을 비양도에 상륙시켜 연합군의 주력이 명월포로 상류하는 것처럼 꾸민 뒤에 중군을 함덕포에 상류시킵니다.

그러나 삼별초군도 이리 올 것을 짐작하고 병력을 배치해 두었으나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함덕에 상륙한 중군이 삼별초의 저지선을 뚫고 서쪽으로 전진하자 비양도에 상륙했던 좌익군도 다시 방향을 바꾸어 군항포로 상륙하여

기습공격에 가담했습니다.

 

 

결국 협공을 받은 삼별초군은 항파두리 북쪽 파군봉에서 가장 치열한 접전을 하게되는데, 막강한 화력을 갖춘 일만 여 명의 병력을 갖고 있는

여몽연합군에 비해 삼별초는 소수 정예부대였지만 이전투에서 삼별초와 여몽연합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결국 패퇴를 거듭한 삼별초는 항파두성으로 철수하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성은 함락되고 맙니다.

김통정은 재기를 노리고 나머지 부하를 이끌고 성을 탈출하여 항파두리 남쪽에 있는 흙불은 오름으로 후퇴합니다.

그러나 연합군의 추격으로 이곳에서 삼별초와 여몽연합군의 최후의 일전이 벌어졌고 삼별초군은 모두 전사하고 말며, 김통정은 탈출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자결하면서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일어나지 4년만에 평정되고 맙니다.

 

 

남도석성안에는 남동마을이 있네요.

삼별초때도 석성안에는 이렇게 마을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공터가 발굴작업중인데 얼마나 많은 유물이 이 아래 묻혔는지 밝혀지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마을안의 주택을 모두 철거이전하고 발굴작업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순천 낙안읍성처럼 당시 마을을 재현해 놓고 사람이 살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성곽길을 걸어봅니다.

멀리 관아로 보이는 건물도 복원되었군요.

성둘레는 610m에 높이는 4~6m로 조선시대 왜구를 막기위해 증.개축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답니다.

 

1,271년의 함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삼별초의 처절했던 진도 마지막 항쟁의 현장.

 

 

석성의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아 큰 실효는 없었을 듯 합니다.

산성과 달리 내륙의 성은 공격에 취약하죠.

대표적인 산성인 담양 금성산성은 산 자체가 철옹성을 쌓고 있는데다 성벽도 높아 장기간 항쟁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남도석성은 사적 제127호로 지정되면서 2011년 7월 '남도석성'에서 '진도 남도진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왜구의 약탈이 잦았던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진도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호까지 있었으니 더더욱 신빙성이 있지요?

 

 

 

남도진성앞에는 예쁜 무지개다리 2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 있다 보겠습니다.

 

 

남도진성의 상징과도 같은 남문입니다.

 

 

진성안에는 약 20가구 정도로 구성된 남동마을이 있습니다.

남문 바로 앞에 거주하는 주민이 기르는 진도개가 예쁜 새끼들을 낳았군요.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도개는 한국의 대표적인 토종개로 문화재보호법과 한국진도개보호육성법에 따라 관리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53호입니다.

충성심이 강하고 영민한 진도개는 진도군에서는 진도개시험연구소를 설치하여 보호·육성 및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도개와 진돗개는 어떻게 다를까요?

한글맞춤법표기안에 따르면 ‘진돗개’가 맞는 표기이지만, 문화재 지정 공식 명칭은 ‘진도개’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영어표기도  ‘Jindo dog’이니 진도개라 불러야 겠죠?

 

그럼 진도개는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진도개의 유래는 중국 송나라 배가 파선해 그 배에 있던 개가 표착했다는 설, 몽고 목장개가 진도 목장견으로 쓰였다는 설,

진도 토종개가 늑대와 교배해 되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정설은 중국·일본·한국 남해안의 패총이나 선사유적들에서 나오는 개 뼈로 보아 신석기 때

부터 있어 온 개가 진도라는 섬 환경으로 외래잡견과 혼종이 덜 되어 지금의 진도개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잘 생겼죠?

그럼 진도개는 언제 천연기념물이 되었을까요?

진도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최초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입니다. 조선총독부 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뒤 1939년 7월에 650마리가 천연기념물로 지정했으나 일본인들의 반출이 심해 같은 해인 1939년 11월에 313마리로 개체수가 줄어들었는데, 1940년 이 사실을 안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반출 통제령을 내렸는데 그것이 현대까지 이르러 진도개 반출이 매우 어려웠었죠.

현재 진도개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보호·육성되고 있으며, 진도군 전 지역은 법에 의한 진도개 보호지구로 진도개의 반출입이 제한되며 진도개 이외의 개를 육지에서 반입하다 적발되면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받습니다.

 

진도개의 품성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 귀가본능, 수렵본능, 청결성, 경계성 등을 꼽을 수 있는데요.

한번 주인을 만나면 그 주인을 평생 동안 배반하지 않는 강직한 품성을 가져 이미 성장한 진도개를 구입한 사람들은 그 개와 친숙해지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경험으로 미루어 꼭 그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시골에서 진도개를 키웠는데, 부모님은 새끼때부터 키웠겠지만, 전 총각시절부터 따로  살았기에 다 큰 성견때 봤거든요.

그런데 처음엔 낯설어 하더니 며칠 지내고 보니 절 주인으로 인정하고 이내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또한, 진도개는 귀가본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진도개가 다른 지역으로 팔려갔다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주인집으로 돌아온 사례는 허다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돌아온 백구’ 이야기인데요, 이 야기는 1994년 1월 광주일보에 보도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박복단 할머니가 키우던 진도개 ‘백구’가 1988년 의신면 돈지리 박복단 할머니의 집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1993년에 대전으로 팔려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구는 할머니와 손자, 손녀의 따사로운 정을 잊지 못하여 목에 메인 줄을 끊고 도망쳐 300㎞의 거리를 찾아 헤매다가 1993년 10월에 옛 주인인 박복단 할머니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대전서 진도까지 어떻게 길을 찾아 왔을까요.

‘돌아온 백구’ 이야기는 그 후 동화, 애니메이션, 광고 등으로 제작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죠.

 

그리고 진도개는 승부근성이 뛰어나고 사냥개 자질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수렵본능이 뛰어난 진도개는 뛰어난 후각과 지구력, 용맹스러운 성격을 겸비하고 한번 추적한 짐승은 끝끝내 잡고 마는 등 근성이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키우던 진도개는 수컷과 암컷 두마리였는데, 아버지가 집문을 열고 들어오실때 가끔 탈출해서 논두렁에 매달아 놓은 흑염소를 사냥하기도 했죠. 그래서 물어준 흑염소값이 당시 한 마리당 30십만원씩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신 우리는 흑염소 고낸 것을 한참이나 먹어야 했죠.

 

또한, 진도개는 스스로 대소변을 가리는 청결성과 주인의 눈을 피해 음식을 훔쳐 먹지 않는 결벽성이 있으며, 주인에게는 순종하나 타인에 대해 철저하게 경계심을 풀지 않아 도둑을 지키는 데 으뜸입니다.

시골집의 진도개도 암컷은 순했으나 수컷은 용맹스럽기가 하늘을 찔러 목줄을 메어 산책을 나가면 저를 끌고 다닐 정도로 힘이 셌습니다.

두 손으로 목줄을 겨우 잡고 질질 끌려 다녔죠.

그러다가 주변에 이 녀석을 보고 꼬랑지를 안 내린 똥개가 있으면 조용히 지나가다 순식간에 목덜미를 물어 하늘높이 내 팽겨쳐 버리곤 했답니다.

그리곤 깨갱 거리는 녀석을 째려보고선 또 저를 질질 끌로 갔죠.

암튼 대단한 녀석이었습니다. 10년 정도 살다 두 녀석 모두 하늘나라로 가고 부모님은 양지바른 산기슭에 묻어주었답니다.

 

 

남도진성 남문 앞으로는 동에서 서쪽으로 천이 하나 흐르는데요, 주민들은 이 천을 ‘가는골(세운천)’이라고 합니다.

이 개천에는 두 개의 멋진 무지개다리(홍교)가 있는데 남문 바로 앞에 있는 이것이 바로 단홍교입니다.

 

 

단홍교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무지개 다리가 있는데요, 이 다리는 쌍홍교입니다.

편마암 자연석을 사용해 만들었는데 전국적으로 이와 비슷한 다리가 드물정도라고 합니다.

남도진성과 이 두개의 홍교가 1964년 6월 10일에 사적 제12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남동리를 남도포(南桃浦)라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 정부는 이곳 남도포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그 지휘관인 종4품인 만호를 배치하고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석성을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남도진성으로 개축했다고 합니다.

당시 남도포의 만호는 조도의 해역과 신안 하의도 해역을 관할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남도포에 만호부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의

일이라고 전하고 있어 지금 보이는 남도진성은 세종 20년 이후에 쌓은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남도진성을 나와 이제 광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번 진도여행은 지난 3월 초순의 여행이었으며, 모두 9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편 : 시(詩),서(書),화(畵),창(唱)의 본고장 진도로 떠나보자.

2편 : 이순신 장군과 진도관문 벽파진

3편 : 진도 대표문화유산, 허련의 운림산방

4편 : 200년 소치(小痴) 화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소치기념관

5편 : 740년 전 삼별초의 함성이 들리는 용장산성과 용장사

6편 : 식인조개가 있는 진도해양생태관

7편 ; 뽕할머니 전설이 있는 회동마을 신비의 바닷길축제

8편 : 한국인의 쌀과 같은 아리랑, 아리랑 체험관

9편 ; 삼별초와 함께 한 남도진성과 천연기념물 진도개

 

25명의 친구들이 참석한 진도여행. 이번 진도여행에서 들른 곳은 8군데이지만, 앞으로 가야할 곳도 많이 있음을 안 여행이었습니다.

시(詩).서(書).화(畵),창(唱)의 고장 진도, 다음 여행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소리를 찾아 떠나보고 싶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 여러분에게 진심어린 애도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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