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여행 여유(旅儒)5편, 동국18현 하서 김인후의 필암서원.

2014. 6. 26. 07:05전라남도 견문록/장성 견문록

 

 교육여행의 대명사 ‘배움여행 여유(旅儒)’는 전국 900여개의 향교·서원에서 진행되는 모든 교육과 여행을 하나의 프로그램인

 ‘여유(旅儒)’브랜드로 묶어 영유아부터 노년까지 각 세대를 모두 아우르는 다섯 개의 프로그램과 ‘전라권 탐방’, ‘경북남부권 탐방’, 

‘충청권 탐방’, ‘경북북부권 탐방’, ‘경남권 탐방’, ‘강원권 탐방’ 등 전국 6권역의 향교와 서원을 탐방하는 종합 교육프로그램입니다.

배움여행 1편, 고봉 기새승의 월봉서원을 가다. 2편, 월봉서원에 울려퍼진 여유로운 음악회. 3편, 밤 깊은 월봉서원에서의 강연,

4편, 장성 청백한옥에서의 멋진 밤에 이어 오늘은 하서 김인후의 필암서원을 찾아갑니다.

 

필암서원은 1864년(고종1) 대원군에 의해 내려진 서원철폐[書院撤廢]에서 살아남은 전국 47서원 중 하나입니다.

조선시대 유생의 사학기관이었던 서원은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顆)이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서원

(白雲洞書院)을 지은 것이 시초로 이후 국가의 보조를 받아 전국 각지에 세워졌습니다.

초기에는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유학을 장려함이 목적이었으나, 중기 이 후에는 유생들이 곳곳에 서원을 짓고

당쟁을 일삼자 조정에서는 이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유생들의 거센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1864년 고종 즉위년에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서원에 대한 모든 특혜를 철폐하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한 데 이어,

1865년 5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萬東廟)를 폐쇄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6백여 개의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표(師表)가 될 47개소의 서원만이 살아 남게 되었는데 하서 김인후를 배향한 필암서원이 그 중 하나였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필암서원 유물전시관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필암서원을 해설해 줄 분은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사 김채림 님입니다.

 

 

필암서원은 문묘에 배향된 동국18선정(先正)의 한 분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70)를 배향한 서원입니다.

대부분의 서원이 산기슭에 위치한 것에 비해 필암서원은 평지에 위치한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러다보니 서원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인 '전저후고(前低後高)'지형을 쓸 수 없기에 사당인 우동사(祐東祠)가 강당과 같은

평지면에 있게 된 것입니다.

사당은 가장 존숭되고 상징적인 특별한 공간인데 이렇게 평지에 있다보니 서원밖에서 보면 사당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당과 사당이 마주보고 있으며, 동재와 서재가 사당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필암서원의 정문인 확연루(廓然樓)입니다.

외삼문을 겸한 2층 누각으로 크고 넓고 무한한 영역이란 뜻으로 우암 송시열이 편액을 썼습니다.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들은 이 확연루를 들어설 때 부터 고개를 조아리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냥 방심하고 들어오면 문틀에 머리를 부딪힐 수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확연루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서원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뜻으로 임금이라도 말을 타고 서원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죠.

 

 

필암서원 배치도입니다.

서원이름인 필암(筆巖)은 하서 김인후의 태생지인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 마을 입구의 '붓바위(筆巖)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풍수지리학상 붓모양의 산이나 바위가 있는 터에서는 대학자가 난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장성군 황룡면에서는 많은 인재들이 태어났는데요,

조선조에 한양을 「천하 제일」, 중국의 장안을 「만고의 제일」이라 했듯이, 황룡면은 「조선제일 황룡」이라 칭할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여 격서를 돌렸던 김 계 선생과 그의 제자인 청백리의 표상 아곡「박수량」선생, 그리고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선생 등 조선을 대표할 만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소설속에서 신출귀몰한 도술과 무예로 못된 탐관오리를 응징했던 「의적 홍길동」의 태생지이기도 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와 새정치민주연합 김효석 최고위원은 같은 집성촌에서 나고 자란 할아버지와 손자뻘 사이라고 합니다. 김 전 총리가 김 최고위원보다 1살이 더 많지만 촌수는 김 최고위원이 높아 할아버지 뻘이라고 합니다.

김 전 총리와 김 최고위원은 각각 사시와 행시를 같은 해 나란히 합격했는데, 합격한 날 마을에선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수많은 고급공무원 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니 필암이란 바위가 괜시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확연루에 들어서면 넓지막한 광장이 있고 강당인 청절당이 보입니다.

청절당(淸節堂)은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됩니다.

편액글씨는 동춘당 송준길(1606~1672)가 썼으며, 필암서원(筆巖書院)은 병계 윤봉구(1681~1767)의 글씨입니다.

 

 

청절당은 하서의 맑은 절의를 뒤새긴다는 뜻입니다.

편액을 포함 24점의 현판이 걸려있는데 제향기록, 중수기 등이 있고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 유명한 분들의 제영(題詠)이 있군요.

본래 이 건물은 진원현의 객사였던 것을 1672년 옮겨 온 것이라고 합니다.

 

 

김채림 해설사의 해설로 필암서원에 대해 자세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좌측 건물은 서재로 숭의재(崇義齋)입니다.

숭의재 옆은 경장각(敬藏閣)이고, 숭의재 맞은편은 동재로 진덕재(進德齋)입니다.

 

 

동재와 서재는 수학하는 원생들이 거처하는 곳이지요.

편액글씨는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고 합니다.

 

 

좌측 경장각은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 판각이 보관되어있다고 합니다.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고자 할 때 정조가 내탕금으로 경장각을 세우도록 했다는데 팬액글씨를 정조가 직접 썼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사당인 우동사의 편액은 아무도 선뜻 나서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필(御筆)이 사당앞 경장각에 걸려있는데 누가 감히 글을 써 줄까요? 그래서 편액글씨는 백록동서원의 <경재잠(敬齋箴>판에서

집자(集字)하여 썼다고 합니다.

 

 

 

필암서원 계생비입니다.

계생비(繫牲碑)는 향사에 제물로 쓸 가축을 매어 놓는 비로, 제관들이 그 주위를 돌면서 제물로 쓸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비문은 송일중 선생이 썼다고 하며, 묘정비(뒷면)도 겸하고 있습니다.

묘정비는 서원의 건립취지와 연혁, 서원에 모셔진 인물에 대하여 기록한 비석으로 송병선 선생이 썼다고 합니다.

 

 

필암서원의 장판각(藏板閣)과 한장사(汗丈舍)입니다.

장판각은 <하서문집,전남 유형문화재 제215호>,<초서천자문>,<해자무이구곡>,<백련초해>,유묵 목판(전남 유형문화재 제216호)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한장사는 관리인 중 책임자가 살았던 곳입니다.

그 외에도 향례 때 제수를 마련해 두는 곳인 전사청(典祀廳)이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필암서원의 주인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70)란 어떤 분인지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김희태 님의

필암서원의 역사(국립문화재연구소,<서원 향사>-무성서원, 필암서원-2013. 143쪽~189쪽)을 통해 알아볼까요?

 

김인후의 본관은 울산입니다. 참봉이었던 아버지 김영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높아

'천하문장 장성기동'이라 불리었다고 합니다.

10세때 전라도관찰사였던 모재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4세에 여흥 윤씨에게 장가들었으며, 18세에 미암 유희춘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에 유배온 신재 최산두에게서 배웠고, 19세때 성균관 시사에 나가 <칠석부>를 지어 이름을 떨쳤다고 합니다.

22세때 성균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 등과 더불어 강학하며 교유하였고, 31세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되었습니다. 34세때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이 되어 뒷날 인종이 되었던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36세때 인종이 승하하자 15년간의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15년간 순창과 장성에 거주하며 학문과 문학활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1560년 51세가 되어 운명하면서 옥과현감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말도록 유언을 남겼으며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두루 갖춘 인물로 널리 기림을 받았습니다.

필암서원, 순창 화산사, 옥과 영귀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김인후는 도학사상을 심오하게 탐구하여 태극음양론, 사단칠정론, 인심도심설에 대하여 밝혔는데, 그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합니다. 당시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김인후는 기대승에 동조하였으며,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하여 후일 기대승의 사상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또한,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하여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이른바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습니다.

 

 

소학과 효경을 학문의 시작으로 강조하였으며, 예학에도 조예가 깊어 주자가례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예서인 <가례고오>를 저술하였고, 문집에 실린 '홍문관차자'는 임금이 치국에 있어서 행해야 할 구체적인 방안으로

정치 개혁 및 인재 등용을 강조했습니다.

김인후는 도학사상 외에도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 등에도 정통했다고 합니다.

 

 

김인후는 36세때 인종이 승하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장성으로 낙향했습니다.

3년 뒤 순창으로 옮겨 후학을 지도하기위해 훈몽재를 창건했으며 ,2년 뒤 다시 장성 맥동으로 돌아와

저술과 강학활동을 하면서 매년 7월 1일이면 난산의 통곡대에 올라 인종의 승하를 애닲아 했다고 합니다.

 

 

그후 10년 남짓 강학소와 가까운 장성, 광주, 나주, 고창, 부안 지역의 김계, 김제안, 변성진, 박원순과 같은 문인들이

김인후를 찾아왔으며 양산보의 소쇄원과 송순의 면앙정도 교류공간이었습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자만 필암서원은 1864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萬東廟)폐쇄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6백여 개의 서원을 철폐했지만 필암서원 등 47개 서원은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김인후가 문묘(성균관 명륜당 ; 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된 동국18선정(先正)의 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문묘배향 명현(文廟配享 名賢)입니다.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

 

경주 설씨(慶州薛氏) 빙월당 설   총(氷月堂 薛 聰, 655- ? )

경주 최씨(慶州崔氏)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 )

순흥 안씨(順興安氏) 회헌    안   유(晦軒 安 裕, 1243-1306)

연일 정씨(延日鄭氏)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서흥 김씨(瑞興金氏)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

하동 정씨(河東鄭氏)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

한양 조씨(漢陽趙氏)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

여주 이씨(驪州李氏)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진성 이씨(眞城李氏) 퇴계    이   황(退溪 李 滉, 1501-1570)

울산 김씨(蔚山金氏)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덕수 이씨(德水李氏) 율곡    이   이(栗谷 李 珥, 1536-1584)

 

창녕 성씨(昌寧成氏) 우계    성   혼(牛溪 成 渾, 1535-1598)

광산 김씨(光山金氏)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배천 조씨(白川趙氏) 중봉    조   헌(重峰 趙 憲, 1544-1592)

광산 김씨(光山金氏) 신독재 김   집(愼獨齋 金 集, 1574-1656)

은진 송씨(恩津宋氏)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은진 송씨(恩津宋氏)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

반남 박씨(潘南朴氏)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 1631-1695)

 

 

문묘(文廟)에 배향된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최고의 영예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군신간의 논의 과정을 보면 얼마나 오랫동안 정밀하고 치열한 심사를 거쳤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후보의 모든 면이 평가 대상이었으나 가장 중요한 항목은 도학(道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고려말 익재 이제현이나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 받았던 최충, 퇴계와 양대 축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 같은 사람도

문묘에 배향되지 못했으며, 조선 왕조의 왕족인 전주 이씨조차도 배향된 이가 없습니다.

하물며 조선시대 삼대 정승가인 대구 서씨, 시대마다 인물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최고의 국반으로 자긍하는

연안 이씨도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 없습니다.

 

그만큼 배향되기 어렵다는 것으로 문묘에 모셔진 인물은 공자를 위시한 오성(五聖) : 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과 공문십철(孔門十哲 공자 문하의 대표적 제자 열분), 송조 육현(宋朝六賢, 송나라의 여섯 분),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인데, 동국(東國)은 우리나라로 신라시대 2, 고려시대 2인을  조선시대 14분 등 모두 18명이 배향되어있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선조들이 해당되는지 잘 찾아 보셨나요? 가문의 영광^^. 하지만 제 성씨는 없습니다.

 

 

하서는 1560년 51세에 운명했는데 1796년 (정조20)에 문묘 종향되었습니다.

하서의 학통을 이은 후학들은 조선초기 정치사에서 대개 서인-노론계로 좌정하였고 특히 필암서원은 그 세력의 정치적 거점으로써

호남 지역의 중심처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서 김인후의 사회적, 정치적인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문묘 종향이었습니다.

 

 

하서의 문묘 종향 논의는 1771년 (영조47)전라도 유생 양학연의 상소로 최초 거론되었습니다.

그후 1786년 2월 필암서원에 고암 양자징의 추배를 예조가 허락하면서 팔도유생 박영원 등이 다시 하서의 문묘종향을 상소했고,

1786년 10월, 1789년 4월, 1790년 3월 등 5번의 문묘종향 상소가 더 있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796년에는 6월부터 9월까지 김무순, 홍준원 등의 무려 8차에 걸친 상소를 통해 마침내 문묘 종향이 결정되었는데

최초인 1771년부터 1796년까지 무려 25년 동안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 문묘에 종향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필암서원에서 봉심(奉審) 시연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봉심(奉審)은 왕명을 받들어 묘우(廟宇)나 능침(陵寢)을 보살피는 일로, 왕이 직접 문묘에 봉심하는 것은 알성(謁聖)이라 하고,

그 외에는 성균관의 직원으로 하여금 봉심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유림들이 문묘에 참배하는 것도 봉심이라 합니다.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를 주벽으로 고암 양자징(鼓岩 梁子徵1523~1594)을 추배하고 있는데,

양자징은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하서의 제자이자 사위입니다.

1786년(정조10)에 추배되었는데 1677년(숙종23) 호남 선비들이 청원한 이래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110년이 지나서야

배향을 허락받았다고 하니 하서 김인후의 문묘 종향은 25년이 걸렸고,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의 배향은 무려 110년이나

걸렸다는 것을 현대적 사고로 생각한다면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필암서원에서 봉심시연을 하면서 하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광주에 가면 하서 김인후의 호를 딴 하서로가 있습니다.

광주문화의 심장 문예회관사거리에서 담양과의 경계인 북구 태령동까지 11.4km구간입니다.

2010년 하서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존 박물관로, 지산로, 태평로를 통합해 하서로로 도로명을 바꿨습니다.

2008년 도로명주소법이 생긴 이후 전국에서 도로명 표석이 세워진 것은 하서로가 전국 최초라고 합니다.

그만큼 하서의 학문적 업적이 호남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예향과 의향인 광주의 관문이 하서로가 된 것입니다.

훗날 아래에 열거한 하서 김인후의 유적지 등을 찾아보며 하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아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서 김인후의 유적지는...

생가터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96 맥동마을. 그곳에는 백화정이 복원되어있다고 합니다.

어사리(御賜梨) : 생가터에는 당대에 심었다는 배나무가 고목이 되어 죽고 새움이 돋아나 세번째 다시 자란

                          배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합니다.

김인후의 묘소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원당산.

김인후 신도비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25 맥동마을.

김인후 망곡단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05 맥동마을. 통곡대라고도 하며 김인후가 인종 기일에 북망통곡한 곳입니다.

김인후 난산비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05 맥동마을. 북망통곡을 기린 비입니다.

김인후 부조묘 : 장성군 북하면 중평리 582 중평마을. 김인후의 신위를 모신 불천위 사당입니다.

훈몽재 터 :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45. 김인후가 약 2년간 머문 순창의 강학당.

어암서원 유허비 :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김인후, 이이, 정철, 김시서를 배향한 어암서원터.

영귀서원 : 곡성군 겸면 현정리. 김인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담양소쇄원 : 담양군 남면 소쇄원길 17. 김인후가 양산보와 교류하면서 강학과 시문 활동을 한 곳 김인후의 소쇄원48영 탄생지.  

 

이제 하서 김인후의 유물전시관으로 갑니다. 

 

배움여행 여유(旅儒)

프롤로그 : 월봉서원 기자단 팸투어. 선비의 하루를 체험해 본다

배움여행1편 : 고봉 기대승의 월봉서원을 가다

배움여행2편 : 휘엉청 밝은 달빛 내린 월봉서원. 그 여유로운 음악회

배움여행3편 : 별빛 쏟아지는 월봉서원. 그 뜨거운 강연

배움여행4편 : 청백한옥에서의 고택체험.

 

월봉서원 관련글

1편, 조선시대 사상 최대로맨스의 주인공, 고봉 기대승을 찾아서 / 광산구 너브실 마을

2편, 제2회 고봉문화재가 열리는 월봉서원, / 고봉 기대승의 삶과 철학

3편, 기대승의 묘와 생가터를 찾아서/ 2회 고봉문화제

4편, 기쁘게 놀면 어디든 편안치 않으리오 / 제2회 고봉문화제

5편, 늦가을 너브실 마을을 찾아 / 제2회 고봉문화제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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