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필암마을 주민들의 힘으로 만든 제1회 필암서원 남도전통문화체험축제

2015. 10. 27. 06:00전라남도 견문록/장성 견문록

 

제1회 필암서원 남도전통문화체험축제(이하 필암서원 축제)가 10월 9일부터 10일까지 장성 필암서원에서 열렸습니다.

지자체가 주최하는 대부분의 축제와 달리 필암서원 축제는 필암마을 주민 130명이 주인인 필암마을 협동조합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치렀는데요, 주민의 70%가 70대 이상인 필암마을 주민들은 지난 4월부터 본업인 농사일을 하면서도 힘을 합쳐 틈틈이 행사를 준비해 왔습니다.

 

상업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필암마을의 정겨운 '나눔'을 잔치 형식을 빌려 베푸는 의미 있는 축제로 전국에서 인터넷으로 사전에 참가 신청한 100명을 대상으로 1박 2일간 세 끼니 식사와 더불어 고택에서의 숙박, 그리고 전통음식 만들기 체험, 남도 창 공연과 역사극, 전통놀이 체험, 필암서원 둘러보기, 장성투어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로 참가자 모두를 만족하게 한 맞춤형 축제였는데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전 프로그램에 걸친 영어 통역 서비스 및 공연 관련 영문자료도 함께 제공되었습니다.

 

올해가 제1회로 행사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모든 과정에 관의 개입 없이 오로지 마을 주민들만의 힘으로 이 큰 행사를 성대히 마친 축제 관계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1박 2일간 열린 제1회 필암서원 축제 현장으로 떠나봅니다.

 

 

 

 

전라도 장성하면 여러분은 아마도 단풍으로 유명한 백양사와 편백 숲이 장관인 축령산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 외에도 장성호, 홍길동 생가, 입암산성, 남창 계곡, 금곡영화마을 등이 장성 8경일 정도로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인데요,  

축제가 열리는  필암서원도 바로 장성 8경의 하나입니다.

필암서원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는 동방 18현 중 유일한 호남인으로 그를 호남의 유종(儒宗)으로 모시고 있는데요,

제1회 필암서원 축제는 바로 하서 김인후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1박 2일간 충분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잠시 잊고 있었던 남도 전통 놀이와 남도 음식 만들기 등을 마을 주민과 더불어 체험해 보는 행복한 축제입니다.

 

 

 

필암마을은 현재 13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요, 이곳에는 400년 전 하서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만든 필암서원이 있습니다.

마을은 600년 전 생겼지만, 1627년 필암서원이 증산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부터 필암마을로 불렸는데요,

400년간 마을 주민들은 울산김씨 종중과 더불어 서원을 잘 보존하기 위해 오랜 시간 힘써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부분 70~80대 주민만 남아 농사를 짓고 있는 필암마을의 지나온 400년이 필암서원을 위한 시간이었다면,

앞으로 다가올 400년은 마을 그 자체를 위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필암마을 협동조합이라는 마을 기업을 만들게 되었답니다.  

필암서원과 필암마을의 아름다운 공생으로 하나가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함이지요.

 

 

 

 

필암마을 협동조합 운영 원칙을 보니

첫째, 무엇보다 마을 주민이 즐겁고 화목해야 한다.

둘째, 정직과 신뢰의 원칙을 반드시 지킨다.

셋째, 명예 주민도 주민과 같은 이웃으로 대한다. 등이었는데요,

이번 축제에 참가 신청한 전국에서 온 100명의 신청자가 모두 명예 주민이 되었답니다.^^

 

 

 

 

제1회 필암서원 축제의 주제는 "인종과 하서, 500년 의문에 답하다"였는데요, 협동조합의 주요 활동내용을 보니,

1.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국제적인 나눔의 장으로 만들고 선비정신의 가치를 담아낸 잔치문화로 주민들의 유대감과 협동심 고취

2. 마을의 농산물과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

3. 나눔의 정신에 따라 마을 농산물을 공정한 가격에 팔아 주민 소득 증대 등이었는데요,

1박 2일간의 축제에서 이 모든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답니다.

 

 

 

 

필암서원 축제 일정표인데요, 첫 행사에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다 보니 처음엔 손발이 안 맞고 진행도 매끄럽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랜 시간 같이 살아온 연륜만큼 호흡도 척척 맞아 큰 차질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답니다.

기자는 이번 필암서원 축제에 내자와 같이 참석했는데요, 다양한 전통음식 만들기, 전통놀이 체험과 공연, 그리고 맛있는 식사와 

집성관에서의 하룻밤 등 올해 들어 최고로 멋진 여행이 되었습니다. 

 

 

 

 

광주에서 출발해 때마침 열린 황룡 5일장을 둘러보고 필암서원에 도착했는데요,

전통음식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 참가비는 1인 7만 원, 2인 11만 원, 자녀 동반 3~5인 가족 15만 원(세 끼 식대 포함, 숙박비 별도)으로

사전에 미리 납부하지 않고 도착해서 접수대에 내면 되었습니다. 물론 숙박할 곳(청백당, 집성관, 민박) 요금도 같이 납부하면 됩니다.

하지만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없지만, 다도체험과 만찬 등에는 무료로 참가할 수 있는데요, 숙박비만 납부하면 되었습니다.

 

 

 

 

 

필암서원 축제에 오는 참가자들은 우선 점심부터 해결하는데요, 필암전천후게이트볼장을 임시 식당으로 운영했습니다.

 

 

 

 

첫째 날 점심은 비빔밥인데요, 마을 주민들이 자원봉사로 배식하고 있습니다.

 

 

 

 

고사리, 콩나물, 무생채, 애호박나물, 얼갈이배추 겉절이, 표고버섯볶음 등 여섯 가지 나물과 생야채, 약고추장, 된장 시래깃국 등

필암마을에서 재배하고 수확한 우리 농산물로 만든 비빔밥인데요, 지금까지 먹어본 비빔밥 중 역대 최고였습니다.

비빔밥의 황제, 전주비빔밥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필암마을의 정성이 가득 담긴 푸짐한 비빔밥입니다.

 

 

 

 

이어 필암서원 평생교육센터에서 전통음식 만들기 체험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선 모시송편 만들기, 겉절이 김치 만들기, 매실고추장 만들기, 전통 나물 무치기 등 네 가지 음식을 만들어보는

체험 프로그램이 열렸는데요, 오후 1시 20분부터 4시 30분까지 3회에 걸쳐 각 회차당 50분씩 진행되었으며,

강사는 바로 마을 주민들이었답니다.  

 

 

 

 

 

모시송편 만들기에는 광주대학교 국제 교류센터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는데요,

이 학생들은 거의 중국 대학생들로 모시송편 만들기의 매력에 푹 빠졌답니다.

모시 잎은 가루로 만들어 송편을 만들고 줄기는 모시옷을 만드는데 쓴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식물입니다.

중국 대학생들의 손재주도 뛰어나 송편도 각가지 모양으로 만드는데요, 하트, 미키마우스, 장미꽃 등 정말 다양하게

만들더군요, 그리고 보니 기자도 어렸을 때 송편 만들면 어른들 만드는 데로 따라 하지 않고 몇 개는 제 맘대로 만들었던 생각이 납니다. 

 

 

 

 

 

 

다른 방에서는 매실고추장 담그기 체험이 있었습니다. 물론 강사는 마을 주민입니다.

100일간 삭힌 메실청이 주원료인데요, 대학생들이 모시송편 만들기가 대세였다면, 가족단위 참가자는 매실고추장 담그기가

대세였답니다.

 

 

 

 

그 진지하고 열정 가득한 메실 고추장 담그기. 사진 한 번 봐볼까요?

 

 

 

 

김치 못 담그는 여인은 없겠지요?

특히 겉절이는 바로 담가 내 아삭거리는 맛이 일품인데요, 입맛 없을 때 특효약이 바로 겉절이입니다.

 

 

 

 

 

그리 맵지도 않아 어린아이까지 맛을 봅니다.

 

 

 

 

전통 나물 무치기는 남성들 도전 작품인데요,

애호박 나물, 고구마순 나물, 토란대 나물, 도라지 나물 등 네 가지 나물 무치는 것을 체험해 봅니다.

역시 입맛 없을 때 겉절이와 더불어 입맛 살려주는 최고의 음식입니다.

 

 

 

 

 

평생교육센터에서 전통음식 만들기 체험이 있을 때 체험에 참석하지 않은 일반인 참가자들은 어렸을 때 놀던 전통놀이를 즐기며

햇볕 따사로운 오후를 즐겼는데요, 바로 오자미놀이가 시끌벅적하게 펼쳐졌습니다.

오자미는 콩을 헝겊 주머니에 넣고 실로 꿰매어 만든 공인데요, 큰 직사각형으로 놀이 판을 그리고 두 팀으로 나눠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편을 '앙꽁'이라 해서 네모 안에 들어가고 진 팀은 '수꽁'이라 해서 네모 밖에서 오자미를 던져 '앙꽁'을 맞히면 되는 게임입니다.

마치 배구 공으로 하는 피구와 비슷한 놀이인데요, 남녀 혼성으로 해도 되고 사람이 많을수록 재미난 놀이랍니다.

 

 

 

 

그 외에도 윷놀이, 비석 치기, 제기차기, 팽이 돌리기, 투호놀이로 필암서원의 하루는 유쾌했답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이제 저녁 만찬이 있기 전에 장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한마당 큰잔치에 갔는데요,

필암마을에서 준비한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제1회 필암서원 남도 전통문화 체험축제를 준비한 필암마을 협동조합 이사장 양희철 (필암마을 이장)의 환영사와 유두석 장성군수의

축사, 그리고 우기종 전라남도 정무부지사의 축사가 이어졌는데요, 오늘의 필암서원 축제가 있기까지 양희철 이장의 노고가 컸습니다. 

 

 

 

 

이어 한마당 큰 잔치가 열렸는데요, 염경애 명창의 남도창 공연과 역사극 '인종과 하서선생'이 공연되었습니다.

 

 

 

 

공연장이 쩌렁쩌렁 울려 퍼진 염경애 명창의 판소리 '심청가'

 

 

 

 

한 대목 동영상으로 들어볼까요?

 

 

 

이어 이번 필암서원 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역사극 '인종과 하서 선생'이 공연되었습니다.

내레이션에는 필암서원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한 한양대학교 정보사회학과 윤영민 교수입니다. 

윤영민 교수는 하서 김인후 선생이 좋아 3년 6개월 전 필암마을로 귀촌 한 학자인데요, 이번 축제를 기획하고 연출한 분입니다.

1박 2일 동안 100명도 훨씬 넘은 참가자들과 함께 숙식을 같이 하면서 필암마을과 하서 김인후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는데요,

가족과 지인들도 많이 참석했더군요.

 

 

 

 

역사극 '인종과 하서 선생'은 박상은 작가가 극본을 만들었으며 동신대학교 문화관광 대학장 정철 교수가 연출을 했습니다.

작가와 윤영민 교수는 대본과 관련해 무려 5번을 만나 내용을 가다듬었는데요, 단순한 삶을 살았던 하서 선생의 일생을 연극으로

만들다 보니 너무 단조로워 드라마틱한 요소를 삽입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연구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직접 작가와 함께 하서 선생의 삶이 녹아든 역사적 현장을 둘러보고 작가가 하서 선생의 생에 녹아들도록 도왔는데,

배우들의 열연과 더불어 아주 멋진 공연이 되었습니다.

 

 

 

 

역사극이다 보니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랩으로 반전을 도모해 관객들의 호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잠깐 그 부분만 동영상으로 보실까요?

 

 

 

 

장성문화예술 회관에서의 한마당 잔치가 끝나고 다시 필암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가을밤은 깊어가는데, 적막한 마을은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로 넘쳐나 모처럼 생기가 돌았답니다.

 

 

 

 

다시 게이트볼장에서의 저녁식사입니다.

한마당 큰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집성관 입구에서는 전국노래자랑도 열었다고 합니다.

 

 

 

 

저녁 메뉴는 돼지고기 수육, 현미 잡곡밥, 홍어 무침, 잡채, 각종 나물, 떡, 김치 등으로 푸짐한 만찬이었습니다.

 

 

 

 

만찬 후 각자 예약된 숙소로 들어가 달콤한 하룻밤을 보냈는데요, 숙소는 집성관, 청백당, 민박 등 다양했습니다.

기자는 평생교육센터 내 집성관에서 묵었습니다.

그 외 청백한옥과 민박 등에서 많은 분들이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도시의 소음 낀 밤에 익숙하다 적막감마저 무서운 필암서원 집성관에서의 하룻밤은 세상을 모두 놔 버린 달콤한 밤이었습니다.

지난해 홍길동테마파크 청백당 한옥에서 고택 스테이를 한 적이 있었는데, 집성관에서의 숙박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필암서원과 필암마을 산책길에 나서봅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아침 햇살도 부드러워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식사는 쌀밥에 소고기  뭇국, 조기조림, 잡전, 토란대 나물, 깻잎장아찌, 김치 등 소박한 메뉴였는데요,

소고기 뭇국이 시원해 너무 좋았습니다.

둘쨋 날 일정은 필암서원 투어였는데요, 문화관광해설사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해설에 모두 풍덩 빠지고 말았네요.

 

 

 

 

필암서원은 1864년(고종1) 대원군에 의해 내려진 서원철폐[書院撤廢]에서 살아남은 전국 47서원 중 하나입니다.

조선시대 유생의 사학기관이었던 서원은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顆)이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서원

(白雲洞書院)을 지은 것이 시초로 이후 국가의 보조를 받아 전국 각지에 세워졌습니다.

 

초기에는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유학을 장려함이 목적이었으나, 중기 이후에는 유생들이 곳곳에 서원을 짓고

당쟁을 일삼자 조정에서는 이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유생들의 거센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1864년 고종 즉위 년에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서원에 대한 모든 특혜를 철폐하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한 데 이어,

1865년 5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萬東廟)를 폐쇄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6백여 개의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표(師表)가 될 47개소의 서원만이 살아남게 되었는데 하서 김인후를 배향한 필암서원이 그 중 하나였답니다.

 

대부분의 서원이 산기슭에 위치한 것에 비해 필암서원은 평지에 위치한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원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인 '전저후고(前低後高)'지형을 쓸 수 없기에 사당인 우동사(祐東祠)가 강당과 같은

평지 면에 있게 된 것입니다.

사당은 가장 존숭되고 상징적인 특별한 공간인데 이렇게 평지에 있다 보니 서원 밖에서 보면 사당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당과 사당이 마주 보고 있으며, 동재와 서재가 사당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필암서원은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선정(先正)의 한 분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70)를 배향한 서원입니다.

문묘(文廟)에 배향된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최고의 영예였다고 하는데요, 그것은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군신 간의 논의 과정을 보면 얼마나 오랫동안 정밀하고 치열한 심사를 거쳤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후보의 모든 면이 평가 대상이었으나 가장 중요한 항목은 도학(道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고려 말 익재 이제현이나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았던 최충, 퇴계와 양대 축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 같은 사람도

문묘에 배향되지 못했으며, 조선 왕조의 왕족인 전주 이씨 조차도 배향된 이가 없습니다.

하물며 조선시대 삼대 정승가인 대구 서씨, 시대마다 인물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최고의 국반으로 자긍하는

연안 이씨도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 없습니다.

 

그만큼 배향되기 어렵다는 것으로 문묘에 모셔진 인물은 공자를 위시한 오성(五聖) : 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과 공문십철(孔門十哲 공자 문하의 대표적 제자 열 분), 송조 육현(宋朝六賢, 송나라의 여섯 분),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인데, 동국(東國)은 우리나라로 신라시대 2인, 고려시대 2인, 조선시대 14분 등 모두 18명이 배향되어있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선조들이 해당되는지 잘 찾아 보셨나요? 가문의 영광^^. 하지만 제 성씨는 없습니다.

 

 

 

 

서원 이름인 필암(筆巖)은 하서 김인후의 태생지인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 마을 입구의 '붓 바위(筆巖)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풍수지리학상 붓 모양의 산이나 바위가 있는 터에서는 대학자가 난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장성군 황룡면에서는 많은 인재들이 태어났는데요, 조선조에 한양을 「천하제일」, 중국의 장안을 「만고의 제일」이라 했듯이, 황룡면은 「조선 제일 황룡」이라 칭할 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여 격서를 돌렸던 김 계 선생과 그의 제자인 청백리의 표상 아곡「박수량」선생, 그리고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선생 등 조선을 대표할 만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소설 속에서 신출귀몰한 도술과 무예로 못된 탐관오리를 응징했던 「의적 홍길동」의 태생지이기도 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와 새정치민주연합 김효석 최고위원은 같은 집성촌에서 나고 자란 할아버지와 손자뻘 사이라고 합니다. 김 전 총리가 김 최고위원보다 1살이 더 많지만 촌수는 김 최고위원이 높아 할아버지 벌이라고 합니다.

김 전 총리와 김 최고위원은 각각 사시와 행시를 같은 해 나란히 합격했는데, 합격한 날 마을에선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고급 공무원 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니 필암이란 바위가 괜스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서는 1560년 51세에 운명했는데 1796년 (정조 20)에 문묘 종향되었습니다.

하서의 학통을 이은 후학들은 조선 초기 정치사에서 대개 서인-노론계로 좌정하였고 특히 필암서원은 그 세력의 정치적 거점으로써

호남 지역의 중심처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서 김인후의 사회적, 정치적인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문묘 종향이었습니다.

 

 

 

 

하서의 문묘 종향 논의는 1771년 (영조 47)전라도 유생 양학연의 상소로 최초 거론되었습니다.

그 후 1786년 2월 필암서원에 고암 양자징의 추배를 예조가 허락하면서 팔도 유생 박영원 등이 다시 하서의 문묘종향을 상소했고,

1786년 10월, 1789년 4월, 1790년 3월 등 5번의 문묘종향 상소가 더 있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796년에는 6월부터 9월까지 김무순, 홍준원 등의 무려 8차에 걸친 상소를 통해 마침내 문묘 종향이 결정되었는데

최초인 1771년부터 1796년까지 무려 25년 동안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 문묘에 종향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를 주벽으로 고암 양자징(鼓岩 梁子徵 1523~1594)을 추배하고 있는데,

양자징은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하서의 제자이자 사위입니다.

1786년(정조 10)에 추배되었는데 1677년(숙종 23) 호남 선비들이 청원한 이래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110년이 지나서야

배향을 허락받았다고 하니 하서 김인후의 문묘 종향은 25년이 걸렸고,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의 배향은 무려 110년이나

걸렸다는 것을 현대적 사고로 생각한다면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장성과 인근에는 하서 김인후의 유적지가 있습니다.

 

 

 

 

생가터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96 맥동마을. 그곳에는 백화정이 복원되어있다고 합니다.

어사리(御賜梨) : 생가터에는 당대에 심었다는 배나무가 고목이 되어 죽고 새움이 돋아나 세 번째 다시 자란

                          배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합니다.

김인후의 묘소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원당산.

김인후 신도비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25 맥동마을.

김인후 망곡단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05 맥동마을. 통곡대라고도 하며 김인후가 인종 기일에 북망 통곡한 곳입니다.

김인후 난산비 :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05 맥동마을. 북망 통곡을 기린 비입니다.

김인후 부조묘 : 장성군 북하면 중평리 582 중평마을. 김인후의 신위를 모신 불천위 사당입니다.

훈몽재 터 :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45. 김인후가 약 2년간 머문 순창의 강학당.

어암서원 유허비 :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김인후, 이이, 정철, 김시서를 배향한 어암서원터.

영귀서원 : 곡성군 겸면 현정리. 김인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담양소쇄원 : 담양군 남면 소쇄원길 17. 김인후가 양산보와 교류하면서 강학과 시문 활동을 한 곳 김인후의 소쇄원48영 탄생지.  

 

 

 

 

필암서원에 이어 유물전시관 투어로 1박 2일간의 필암서원 축제는 끝났습니다.

원래 계획은 홍길동 테마파크, 하서 김인후 신도비, 박수량 백비 등을 보고 백양사까지 투어가 예정되었는데요,

아침 일정이 늦어져 백양사 투어만 진행한다고 하기에 기자는 따라가지 않고 신도비와 백비를 만나러 갔습니다.

서울 등 외지에서 온 참가자들은 빠듯한 시간 내 여러곳을 둘러보기보다 단풍으로 유명한 백양사가 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기자야 광주 사람으로 백양사와 홍길동테마파크는 여러 번 가봤기에 보지 못했던 신도비와 백비가 보고 싶었습니다.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모두들 필암 마을 주민들의 정이 가득 담긴 환대에 감명받았는데요, 이렇게 마을 주민들이 직접 담근 선물까지

받아 기쁨이 넘쳐 황룡강으로 흘러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고추장, 참기름, 모시송편, 겉절이 등 첫째 날 체험해 본 음식들이었는데요,

집에 가져와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필암서원을 나서 근처에 있는 하서 김인후 신도비를 보러 갔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요, 위치는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25 맥동마을에 있습니다.

도로가에 있어 찾기도 쉬웠는데요, 김인후 묘소는 가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김인후 묘소 위치는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원당산에 있습니다.

 

 

 

 

이어 청백리의 고장 장성을 빛내는 아곡 박수량의 백비를 만나봤습니다.

장성은 역사적으로 '선비의 고장','청백리의 고장','의병의 고장'이라고 할 정도로 뼈대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판서를 지낸 아곡 박수량 선생은 장성이 자랑하는 청백리로 지금도 우리나라 모든 공직자의 표상이 되고 있습니다.

박수량 선생은 홍길동 테마파크가 세워진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났는데요, 1514년 24세에 과거 급제후 부모 시묘살이 기간을 뺀

38년간 관직생활을 했고, 한성부 판윤(현 서울시장)의 높은 관직까지 올랐으나 청빈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했던 청백리였습니다.

 

이 분을 보니 마치 현 서울시장인 박원순 시장이 떠오릅니다.

빚이 5억 원이라고 했던가요?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고 아직도 기부하고 있다 하니 현대판 청백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아곡 박수량은 명종 9년(1554)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정이품까지 벼슬에 올랐으나 명예와 재물을 탐하지 않은

청렴한 분으로, 벼슬에 오른지 39년이나 되었지만 오두막집에 살고 있다는 선생의 청빈함을 전해 들은 임금이 암행어사를 보내 사실을

확인했는데 어사가 보고하기를 "모친이 사는 시골집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는 날이 한 달에 절반이나 되고, 집안은 비가 새고 있을

정도로 청빈하다"고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이 선생의 고향인 황룡면 아곡리에 99칸의 한옥을 지어 청백당이란 이름과 함께 하사했는데요,

불행하게도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자리에 장성군에서 청백한옥 단지를 조성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임금이 "비를 하사하라" 명하고 그의 청백리 정신을 살려 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했는데요,

'선생의 청백함을 새삼스럽게 비에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함을 잘 못 아는 결과가 될지 모른다'고 하여 글씨 대신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백비'를 하사하게 된 것입니다.

 

 

 

제1회 필암서원 남도 전통문화체험축제는 필암 마을 주민들의 열정과 참가자의 수준높은 참여정신으로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대개의 축제가 관 주도로 상업성을 띈 반면, 필암서원축제는 130명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만든 마을 축제로 하서 김인후 선생을 매개체로 과거와 현대가 한데 어우러진 참가자 맞춤형 축제로 소수의 인원만 축제를 즐겼습니다.

 

이제 필 암마을은 1회 축제에서 낯설었던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내년에는 더 알차고 풍요로운 프로그램으로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해야 됩니다.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를 지양하고 하서 선생의 문학과 삶을 중심으로 다양한 전통문화와 체험이 어우러진다면 뭇 축제와는 격을 달리하는 고품격 인문학 축제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입니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전라남도 블로그기자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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