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잊지 말아야할 우리의 슬픈역사

2016. 11. 8. 06:00대한민국 견문록/서울 견문록


 

친구들과 1박2일 북한산과 서울여행 #5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독립과 민주화 운동의 살아있는 역사현장! 서대문형무소

김구, 유관순, 한용운, 최남선, 안창호, 이광수, 김두환, 김대중, 김지하, 문동환, 고은, 김근태 이 분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80여년에 걸쳐 시간을 두고 모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분들이다.

 

서대문 형무소는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위치한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장소로 대한제국 말부터 1986년에 이르기까지 80여 년간 식민지 시기에는 애국지사를, 독재 정권 아래에서는 민주화 인사를 가두었던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대표적인 역사현장이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일본침략에 저항하는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일본인 건축가에 의해 1907년부터 대규모로 감옥을 건축했다. 당시 화폐로 약 5만 원이 들어갔으며, 인왕산 기슭아래 4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 정도의 부속시설로 지었으며 수용인원은 50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전국 8개 감옥의 총 수용인원이 300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서대문 형무소가 얼마나 큰 규모였던지 상상이 간다.

지은 지 1년만인 1908년 10월 21일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인 ‘경성감옥’이 그렇게 완성되었다.

 

독립운동으로 수용인원이 대폭 증가하자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지어 경성감옥이라 하고, 1912년 이곳의 이름을 ‘서대문감옥’으로 바꾸었으며,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불리다가 서울형무소(1945), 서울교도소(1961), 서울구치소(1967)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7년 3월 서대문형무소는 감옥에서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바뀌어 보존되고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3,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거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순국하였다.

의병활동을 했던 허위 선생이 1908년 10월 21일 최초로 순국했으며, 열아홉의 어린나이로 체포된 유관순은 유관순 굴이라는 지하 감방에 갇혀 모진고문을 당하고 1920년 9월 28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밖에 이승만, 김구 선생도 이곳에 갇혔으며, 윤봉길 의사는 투옥돼 일본으로 압송되어 순국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람이 약 2,890명에 달했다고 한다.

 

서대문 형무소는 광복 후에도 감옥으로 쓰였으며, 이 시기에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6.25동란 때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1949년 6월 체포된 김약수 등 13명의 의원은 1심 판결에 불복, 2심 계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의 정치범 석방에 의해 모두 풀려났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제3공화국 등과 같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수많은 시국사범들이 투옥됐다.

사형 선고와 집행을 받고 반세기 후 무죄 판결을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 1975년에는 인혁당 사건으로 재판 후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민청학련의 도예종 씨 등 8명의 고인.

이렇게 서대문형무소는 1988년 철거되기 전까지 서울 구치소로 불리며 반독재 반민주 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1986년 88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해 서울 구치소 이전 계획을 수립하였고, 1987년 11월 15일에 경기도 의왕시로 서울구치소를 옮겼다. 옮길 당시 옥사는 모두 15개동이 있었지만, 그중 보존가치가 있는 제9ㆍ10ㆍ11ㆍ12ㆍ13옥사와 중앙사, 나병사를 보존하였다.

 

그리고 1988년 2월 20일, 김구와, 강우규, 유관순 등이 옥고를 치렀던 제10ㆍ11ㆍ12옥사와 사형장이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고, 1992년 8월 15일에 마침내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역사관은 모두 역사실과 4개 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1실 (민족저항실1) : 조선말기 의병의 투쟁기 소개  

2실 (민족저항실2) :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던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공간

3실 (민족저항실3) :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의 항일투쟁기 소개  

4실 (지하고문실) : 고문의 모습을 재현해 일본의 잔혹한 실상 소개

 


 

 

서대문형무소 역사실



 

 

 

 

 

민족저항실 1: 조선말기 의병의 투쟁기 소개  


 

 

 

 


 

민족저항실 2 :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던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공간

 

 

 


 

서대문형무소 기록 가운데 남아있는 5천여 장의 수형기록표가 전시됐다.

일제시대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됐던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5천여 명의 애국지사 수형기록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류관순열사 수형기록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지하 고문실

 

 


 

5면이 못으로 박힌 고문기

움직일 때마다 못에 찔리는 고통.



 

 

 
 

해방 후 이승만 정부 등 친일파들은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 가뒀고, 박정희 정권 시대에는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수많은 민주투사들이 간첩혐의를 뒤집어쓰고 투옥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다.

신군부세력이 집권한 80년대에는 고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을 선고받고 이곳에 투옥되기도 했으며 수많은 민주화운동 학생들로 서대문형무소는 넘쳐났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서대문형무소의 감옥은 실제로 이곳에서 1980년 초반 민주화운동으로 수감되었던 

김대중대통령 마지막 비서관 국민의당 최경환 국회의원의 자서전을 인용해 서대문형무소 수감생활을 생생하게 증언하고자 한다.



최경환의 자전에세이 

 

서대문구치소  

 

서대문구치소 생활은 최악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모두 독방에 수감되었다. 나도 독방에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있는 시간이 너무도 지루하고 답답했다. 주로 책을 읽고 혼자서 바둑을 두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이 면회 오는 시간과 매일 30분씩 운동하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출두하는 날이 좋았다. 법정으로 가는 호송차 안에서 ‘공범’들을 만나 눈짓, 손짓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모두가 포승줄에 묶인 몸이었지만 죄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편지는 봉합엽서에 한 달에 한번 가족에 한하여 허용되었다. 물론 검열 도장을 받아야 외부로 내 보낼 수 있었다. 신문은 아예 볼 수 없었다. 감방은 매주 한번씩, 혹은 수시로 ‘검방’이라는 것을 해서 금지물품을 찾아냈다. 감옥 안에는 ‘검방을 일주일만 안하면 헬리콥터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방 안에서 할 일이 없는 재소자들은 무언가를 했다. 두루마리 화장지, 빵봉지 등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라이터, 바늘 등 금지물품들이 돌아다녔다.  



 

 

 

밥은 콩밥이었다. 콩 반, 보리 반 정도로 콩이 많았다. 반찬은 무말랭이, 김치조각, 멀건 국들이 들어왔다. 밥의 양은 적지 않았다. 아침 7시, 낮 12시, 오후 4시가 배식 시간이었다. ‘식구통’이란 곳을 통해 기결수 죄수들이 밥 한덩이와 반찬, 국을 넣어주었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됐다. 방 안에서 콩밥만 먹으니 소화가 잘 안됐다. 마아가린와 고추장을 사입해 비벼먹었는데 먹을만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삶은 돼지고기 한 덩이씩이 나왔다. 때로는 닭고기가 나오는 날이 있었다. 이 돼지고기는 학생들의 교도소 투쟁의 주요 대상이었다. 행형법과 교도소 규정에 정해진 양이 있는데 너무 적다는 것이다. 돼지고기를 누군가 가로채고 있고 ‘정량’을 달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통방’을 통해 이런 정보를 주고받고 옥중투쟁을 했다. ‘통방’이란 죄수들끼리 큰소리로 다른 방에 있는 상대방을 불러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모두 금지된 행위였지만, 학생들은 그 규정을 무시했다.





 

내 방은 1층 맨 끝방이었다. 옆에 목욕탕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위층에서 물이 새는지 겨울에는 방안에 벽을 타고 얼음이 얼고 고드름이 열렸다. 한 겨울에는 한쪽이 작은 빙벽처럼 얼음이 얼었다. 두꺼운 속옷에 솜옷을 입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추위를 이길 수 없었다.

 

교도소에는 쥐와 비둘기들이 많았다. 모두가 콩 때문이었다. 재소자들은 먹고 남은 콩밥을 화장실에 버리거나 창살 너머로 버렸다. 살찐 쥐들은 화장실 밑을 기어다녔다. 살찐 비둘기들은 감옥 지붕에서 밥이 던져지기를 기다렸다. 교도소 생활이 지루해진 나는 비둘기를 포획할 계획을 세웠다. 식빵 봉지를 말아 고리를 만들고 밥을 던져 비둘기를 유인했다. 몇 차례 실패 끝에 비둘기를 잡았다. 방안에 묶어두고 친구삼아 놀았다. 교도관이 어이없어 했다.

 

 


 

 

생쥐놀이  

 

잠결에 내 코를 간지럽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생쥐 세 마리가 내 이불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방안을 돌며 밥을 받아먹는 식기로 한 마리씩 덮어놓고 아침에 어떻게 처리할지를 궁리하기로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식기를 들쳐보니 모두 죽어 있었다. 추워서 동사한 것이다.

 

 


 

마루바닥 밑에서는 쥐들의 잔치가 매일 열렸다. 하루는 마루에 관솔이 빠져 생긴 구멍으로 귀여운 생쥐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고 전후좌우를 살피기를 반복했다. 나는 먹다남은 떡 조각을 구멍 앞에 놓고 생쥐를 유인했다. 생쥐는 쉽게 속지 않았다. 나는 떡 조각을 실을 묶어 한 손으로 잡고 구멍 가까이에 갖다 대고 생쥐를 유인했다. 생쥐는 몸 상채만 내놓은 채 떡을 물고 가져가려고 했다. 내가 떡을 잡아당기자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떡을 구멍에 더 멀리, 생쥐가 상체를 다 내밀어 먹을 수 있는 곳까지 갖다 놓았다. 조금 있다가 생쥐는 머리를 내밀고 전후좌우를 살피더니 몸 전체를 구멍에서 빠져나와 떡을 물었다. 내 다른 손은 식기를 들고 있었다. 바로 구멍을 막아 버렸다. 도망갈 구멍을 잃은 생쥐는 말 그대로 ‘독안에 든 쥐’였다. 1.75평 감옥 안에서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해서 여러 마리의 생쥐를 생포해 라면 박스를 구해 먹이를 주며 길렀다.



 


 

한번은 구멍에서 빠져 나온 생쥐가 구멍을 향해 도망가는데 꼬리를 눌렀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마루바닥 밑에 있던 다른 생쥐가 머리를 내밀더니 서로 입을 물고 구멍쪽으로 당겼다. 내가 꼬리를 누르고 있는 생쥐는 구멍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구멍 안에 있는 생쥐는 밖에 있는 생쥐를 입으로 물고 당겼다.


아마도 둘은 형제간이었던 모양이다. 언니인지, 동생인지, 형인지 모르겠지만 잡혀 있는 형제를 위해 입을 물고 끌어당기는 것을 보고 생쥐 같은 하찮은 동물도 그런 정들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생포한 생쥐들을 석방하고, 다시는 ‘생쥐놀이’를 하지 않았다.

 

 


 

겨울보다 더 힘든 때가 봄이었다. 운동장은 부채꼴 모양으로 높은 블럭 담으로 갈라져 있는 원형의 운동장이었다. 한가운데 교도관의 감시 망루가 있었다. 운동장에서 바라보는 안산과 인왕산의 신록과 개나리, 진달래는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언제 감옥을 나가 저 산과 들을 맘껏 거닐 수 있을까?

 

 


 

감옥에는 혼자서 걸을 수 있는 권리, 즉 ‘독보권’(獨步權)이 없다. 면회를 갈 때도 목욕이나 운동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갈 때는 항상 교도관과 함께 가야 한다. 나 역시 혼자 걸을 수 없었다. 항상 몇 발짝 뒤, 혹은 바로 옆에 교도관이 붙어 있었다.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인권변호사의 대부로 불리우는 이돈명 변호사들이 나서서 열심히 변론을 했지만 판결문은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 내용 그대로였다. 43일간의 불범구금, 수사과정의 폭력, 고문 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피고인들과 방청석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공소장 그대로 된 판결문을 낭독하는 판사들을 보며 판사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건으로 법정에 선 피고인들은 무려 30여명이나 되었다. 그만큼 심리기간도 길었다. 우리는 감옥안에서 산책 삼아 나오는 재판이 즐거웠지만 매번 방청을 와야하는 가족들은 오랜 재판에 지쳤다. 방청석에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 아버지, 누나들, 쌍둥이 형이 보였다. 재판은 6개월이 넘게 진행되었다. 2심 재판이 끝나자 나는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1년 6월 징역형이 확정된 것이다. 나는 서대문 서울구치소에서 강원도 춘천 교외에 있는 춘천교도소로 이감됐다.

 

 

 

저자 최경환은 서대문형무소 시절 생쥐놀이에서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생명의 존엄성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생쥐도 자기 동료를 구하러 저 난리인데, 지금 세상돌아가는 것을 보면 마치 자신의 절대적 권력 유지를 위해 마지막까지 몸부림 치는 가련한 인생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저들은 모를까?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 절대로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최순실이 수렴청정한 박근혜 정부에 빌붙어 그들의 입과 손발이 되어준 사람들. 영원히 모를 것이다고 했겠지만,

하나씩 드러나는 그들의 행적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뿐이다.


 


 

박근혜대통령은 벌써 두번이나 국민에게 사죄했다.

하지만 번번이 몸통으로 지목되고 있는 자신보다 자신을 돌본 사람들 탓으로 돌리고 있으니...

수사를 통해 계속 드러나는 자신에 대한 의혹이 만약 사실로 들어난다면 국민에게 세번 째 사과를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곧 하야 기자회견이 될 것이라는 것을 제발 알았으면 한다.


 

 


 

추모비 

 

작품 : 민족의 혼 그릇

작가 : 임승호, 2010년 작

 

추모비는 독립운동하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순국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순국한 이들의 민족정신과 자유 · 평화를 향한 의지를 한데 모으고, 그 모아진 의지를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내부에 투영된 이들은 지금까지 발굴된 총 165명이며, 발굴되는데로 추가 등재된다.


 

 


 

통곡의 미류나무와 사형장

 

1923년 지어진 목조건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이들이 순국했던 장소이다.

사형장은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었다. 사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격벽장

 

격벽장은 수감자들이 운동할 때 서로 대화하는 것을 방지하고,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러 개의 칸막이 벽(격벽)을 만들었다.

각 칸에 수감자들을 분리 수용해 운동을 시켰던 일종의 운동시설이다.

 


 

서대문형무소 수기를 간간히 보면 몇 백바퀴를 돌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이 곳을 말한다.

 


 




여옥사

 

여옥사는 최근 다시 복원하여 개관했다.

형량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나 사형수를 수감했던 곳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이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제의 고문과 고문에 맞선 애국지사와 민주화운동에 따른 고문과 이에 맞선 민주인사를 기억하는 곳이다.

큰 아들이 고3일 때 아들과 함께 인권여행을 떠나 들렀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3년이 지나 다시 들렀음에도 당시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것은 비록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현세에 이르러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국정개입으로 사면초가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를 향한 광화문 광장 수십만명의 함성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곳에 갈 수 없는 수천만 명의 함성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 하나씩 불거지는 새로운 의혹들.

만약 한진해운 공중분해 사건이 최순실의 농단에 의한 현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모두 대통령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는 대한민국 국민은 보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