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농단, 그 답답한 시국에 담양 금성산성에서 가슴이 뻥 뚫리다.

2016. 12. 19. 06:00한국의 산 견문록/한국의 산

 


 

호국의 얼이 잠든 담양 금성 산성

천년 세월 꼿꼿한 산성의 기세에서 선조의 기개를 느껴본다.

대륙을 휘감고 돌아간 만리장성과 당에게서 고구려를 지켜낸 천리장성에는 못 미치지만,

천인단애 암벽위에 지은 천혜의 요새 금성 산성은 십 오리 산성으로 충분했다.


왜구로부터 전라도 땅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산성 길을 따라 수없이 뛰었 다녔을 의병들의 거친 숨소리와 발자취를 찾아보고

갑오년 동학혁명 녹두장군의 피를 토한 고함을 들어보고

금성 산성의 천년 아픔을 보듬고 그 천년의 함성을 듣기위해 담양 금성 산성에 올랐다.



 

 

 

이번 산행은 동창회 산악회의 송년산행으로 등산 후 하산해서 점심을 식당에서 먹는 관계로 이른 아침 서둘러 출발했다.


금성 산성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전북 순창에서는 강천산 군립공원에서 좌측 금강계곡을 따라 376봉과 광덕산,  시루봉을 거쳐 동문으로 올라도 되고,

우측 병풍바위에서 깃대봉으로 올라 왕자봉과 1,2형제봉을 지나는 호남정맥 길을 따라 북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산길이 여의치 않다면 현수교를 지나 구장군폭포에서 동문이나 북문 옆 승낙바위 쪽으로 해서 올라갈 수도 있다.

전남 담양에서는 금성 산성 주차장이나 담양온천을 거쳐 보국문으로, 또는 담양 오방 길을 따라 서문으로 올라도 되는데,

오늘은 담양온천을 거쳐 보국문에 올라 산성을 보기로 한다.

 


 


담양온천에는 약 7만 2600평방미터 가량 되는 넓은 수목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산성까지는 약 2km정도로 걸어서 1시간이면 오를 수 있기에

광주뿐만 아니라 멀리 수도권에서도 대나무와 가사의 고장 담양을 찾을 때

의례 숙박을 겸한 휴양을 하는 곳이다.


한여름에 오면 좌우로 빽빽이 들어선 울창한 숲으로 햇볕 한 조각 새어 들어 오지 않는데,

옷을 모두 벗어던진 겨울이라 그런지 황량하기만 하다.




담양온천을 출발해 가파른 숲길을 올라 편안한 능선길까지 30분이 걸렸다.

송년산행이라고 일부러 좀 편한 트레킹 수준의 코스를 골랐는데

몇몇 친구들 입에서 또 속았다고 장난스러운 투정이 쏟아진다.

이렇게 매번 속으면서도 나를 믿고 따라나서는 친구들.

언제나 정말 편한 숲길로 트레킹을 떠나볼까?


 

 

 


담양온천 출발 40여분 만에 2km를 걸어 보국문까지 왔다.

보국문은 정면3칸에 측면1칸의 우진각지붕을 얹은 누각으로 축조시기는 삼국시대로 알려졌다.

무주의 적상 산성, 장성 입암 산성과 함께 호남 3대 산성으로 불리는데, 1991년 사적 제353호로 지정되었다.

6,486m의 외성과 859m의 내성으로 이루어졌으며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성문이 있고

군량미 창고, 객사, 보국사 등 10여 동의 관아와 군사시설이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과 동학혁명 때 불타버리고

지금은 복원된 보국문과 충용문을 제외하고 터만 남아있다.

 

금성산성은 1906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한 녹두장군 전봉준의 마지막 전투지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녹두장군은 관군과 맞서 20여 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떨어진 식량 조달을 위해 전북 순창 쌍치에 사는 동지 김경천의 집을 찾았는데,

믿었던 친구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금성산성의 동학농민혁명군은 마지막까지 왜군과 관군에 저항했는데,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으며 성내 모든 시설물이 파괴되고 불길이 백일동안이나 계속되었을까?


 

 

 

 

보국문을 지나 충용문까지도 성이 연결되었다.

보국문이 있는 곳은 1차 수성지인 외성이고 충용문이 있는 곳부터 산성이 시작되는데,

충용문은 정면 3칸에 측면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중층누각으로 보국문과 건축양식이 틀리다.


 

 

 

 

 

금성산성은 주변에 널려있는 수성암인 점판암(구들장으로 많이 이용되는 돌)을 잘라 축성한 산성이다.

이 정도 길이의 산성을 지으려면 아마 성안에 있는 암벽 하나는 통째로 없어졌을 듯...

성 하나 쌓기 위해 배고파 죽고, 병들어 죽고, 돌에 깔려 죽고, 더위에 지쳐 죽고, 겨울에 추워 죽은 백성들의

피와 땀이 어린 현장을 직접 보니 감탄스러운 풍광보다 가련한 삶에 눈물이 앞선다.


전라도 지방의 욕 중 ‘오사랄 놈(五殺 할 놈)이란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혹시 산성에 오르걸랑 주변 풍광만 보지 말고 성을 축조하기 위해 동원된 백성의 넋도 위로해 주시기 바란다. 



 

 

 

 

충용문에서 바라본 보국문.

그 너머로 담양 삼인산, 장성 불태산, 담양 병풍산이 훤하게 보인다.


보국문은 적의 공격을 충용문과 좌우에서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위해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게 만들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금성산성 전투가 끝나고 왜병이 물러간 뒤 의병과 농민, 왜병의 시신을 계곡에 한데 모았는데

무려 시신이 2,000구에 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국문 좌편 계곡을 이천골이라 부르고 영혼을 달래기 위해 가족들이 절을 찾아 향을 피웠는데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안개처럼 사라지지 않아 절 이름을 연동사로 불렀다고 한다.


 

 

 

 

산성코스는 충용문에서 동문 - 북문 - 서문 - 충용문으로 이어지는 일주코스가 주코스로 약 6.4km에 4시간정도 걸린다.

보국문에서 서문까지 이어진 숲길 약1.8km, 보국문에서 북문까지 이어진 숲길 약2.0km, 보국문에서 동자암거쳐

동문까지 약1.5km로 3코스 모두 대략 1시간여 걸리니 각자의 체력과 취향에 맞게 코스를 잡고 가면 된다.

오늘 산성 코스는 담양온천~보국문~충용문~보국사터~서문~철마봉~노적봉~충용문~보국문~담양온천으로 원점회귀이며

5.8km에 3시간 10여분이 걸렸다.

 

 

 

 

 

충용문에서 바라본 드넓은 담양 평야와 무등산을 보니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어수선한 시국에 멍든 가슴이 뻥 뚫린다.
운무가 끼어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능선들을 보니 마치 선계를 보는 듯하다.
금성산성은 담양, 순창 등지에서 거둬들인 약 2만여 석에 달한 군량미를 보관하기도 했다.

사방으로 평야지대를 바라보고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성을 들여다볼 수 없었으니 산성으로는 최고의 입지조건이었다.


 

 

 

 

 

 

좌측은 서문과 북문, 보국사터 방향이고 우측은 동문을 거쳐 일주하는 코스이다.

그동안 금성산성 전 코스를 모두 돌아보았으니 오늘은 가보지 못한 서문코스로 가기로 한다.

 



해마다 금성산성에서는 새해 해맞이를 한다.

내년은 제8회째로 새해 첫날 금성산성 동문터에서 해맞이 행사를 치른다고...

동자암에서 떡국도 드린다고 하니 많은 분이 올라와 새해 복을 빌었으면 한다.



 

 

 

 

보국사 터까지 왔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후기인 1758년에 편찬된 담양읍지인 추성지에는 금성사로 기록되었고,

1895년에 편찬된 군사관련지 금성진 지도에는 보국사로 각각 달리 기록되었다는데,

당간지주, 석축, 계단, 우물터 등이 있어 이곳이 보국사나 금성사의 터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옆에는 휴당산방(休堂山房)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집이 한 채 있는데,

퇴직 공무원이 홀로 살며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자신의 시집과 시귀가 적혀 있는 책받침을 판매하여 얻은 작은 수입으로

청빈하게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떠한지...


 




보국사 터에서 두 코스로 나눠 산행을 한다.

북문으로 갈 친구들은 우측으로 서문으로 갈 친구들은 토담집 마당을 거쳐 좌측으로 가면 된다.

친구들 중 북문으로 갈 친구들을 배웅하고 서둘러 서문으로 향한다.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있다.
조그마한 돌담과 돌절구도 있고 바로 옆 계곡에는 갈수기임에도 물이 풍부해 민가가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금성 산성에는 조선 말기엔 약 130여 호의 민가가 있었으며 관군만 약 2천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서문터.

그 옛날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추운 몸을 잠시 쉬었을 지도 모를 천연동굴도 있고

그곳에서 밥을 지어 먹었을 계곡물은 지금 담양호로 말없이 흘러들고 있다.


 

 

 

 

북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로 한 무리의 등산객이 오르고 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저 길로 보국사 터에서 갈라선 친구들이 내려올 것이다.

경사가 가팔라 내려오기 힘든 곳인데, 충용문에서 서문으로 와 북문과 동문을 거쳐 원점회귀하거나

순창 강천산으로 하산하는 주요 등산로이기도 하다.

 

 

 

 

 

이제 성곽을 따라 철마봉으로 오른다.

 

 

 

 

 

 

서문근처의 망루역할을 하는 곳에서 높다란 성벽을 본다.

금성산성은 험준한 지형에 축조한 요새로 조선시대 이항복은

“산성이 크고도 더욱 웅장해 평양성보다 더 우수하고,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곳이 절반에 이른다”라고 평했다고...

경사도 가파르고 성벽도 높아 공격이 무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마봉에서 담양을 파노라마로 본다.

이곳에서는 담양호가 시원스럽게 보이는데, 담양호 건너 추월산과 보리암은 물론 그 건너 병풍산까지 보입니다.


 

 

 

 

 

철마봉에서 바라본 조망은 백문이불여일견이다.

좌로는 노적봉과 금성면의 비닐하우스 단지, 그리고 무등산까지 시원스레 보인다.

멀리 영암 월출산은 산 너울 위로 우뚝 솟아있다.


 

 

 

 

이제 노적봉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성내에 보이는 건물은 우리가 거쳐 온 보국사 터와 휴당산방이다.

 





 

  

노적봉에서 바라본 철마봉.  

노적봉아래 낭떠러지위에 3미터 가깝게 돌을 쌓아올려 산성을 만들고

수백 년 끄덕 없게 만든 선조들의 건축기술에 번 놀라고. 노적봉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수 많은 아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목격한 심지 곧은 소나무의 멋진 모습에 또 한번 놀란다.



 

 


 

노적봉을 지나면 보국문을 보는 최고의 전망포인트가 나온다.

보국문에서는 2009년 5월 MBC특별기획역사드라마 선덕여왕 오프닝을 포함한 1,2회의 주요 장면을 촬영했다.

당시 주인공 미실이 고현정과 선덕여왕에 오른 이요원, 신구 등 유명 출연진과 스텝 등 200여명이

촬영장비와 셋트 등을 이고지고 날라서 촬영했다하니 그 수고와 노력에 그 시대 최고의 드라마가 나왔지 않나 싶다.


 



조선시대 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왜구에 맞선 이 지방 의병들의 본거지로,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전봉준 녹두장군을 위시로 농민혁명군의 처절한 전투의 현장으로,

한국전쟁 때는 회문산과 가마골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들의 주된 활동무대였던 강천산과 금성 산성으로의

3시간에 걸친 아주 짧은 역사나들이는 유익했다.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영화와 아픔을 보듬은 유구한 역사의 현장이 빛바랜 필름처럼 압축되어

앞에 찰라의 순간처럼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과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쓰러져간 수많은 넋들과 새로운 시대를 열기위해 쓰러져간 수많은 민중들의 넋.

그리고 좌우로 편을 갈라 서로 죽이고자 시퍼렇게 눈을 치켜떴던 동족상잔의 아픈 상처를 어떻게 어디서부터 위로해야 할까.


오늘 그 역사의 현장을 잠시나마 걸으며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되새겨보고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걸어 보았다.

사계절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담양 금성 산성은 남녀노소 큰 부담 없이 운동화에 일상복으로 충용문까지 오를 수 있으며

숲길을 거닐어 동자암과 보국사 터까지만 다녀와도 훌륭한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마음이 동하여 등산화와 등산복을 갖춘다면 물 넉넉히 준비하고 간식 준비하여 한 바퀴 빙 돌아도 4시간이면 돌 수 있으니

선조들의 기개를 느끼고 담양호를 바라보는 멋진 조망과 함께 역사 공부도 할겸 가족들 손잡고 금성산성 한 바퀴 돌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