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여행)삼별초의 한이 서린 진도남도진성

2017. 8. 29. 06:00전라남도 견문록/진도 견문록


진도국립자연휴양림 개장식에 이어 인근 진도남도진성을 갔다.

남도석성은 삼국시대때 쌓은 성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고종 이후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충정왕 2년 (1350)에 진도의 관부와 백성들을 모두 육지의 영암으로 옮겨 조선시대 세종 19년(1437년)까지 이곳은 텅 비었다고 하는데, 여몽연합군과의 용장산성 전투에서 패퇴한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이 최후의 격전을 벌인 곳으로 결국 목숨을 잃었다.





남도석성은 사적 제127호로 지정되면서 2011년 7월 '남도석성'에서 '진도 남도진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왜구의 약탈이 잦았던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진도의 중심지였다고...





조선시대부터 남동리를 남도포(南桃浦)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정부는 이곳 남도포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그 지휘관인 종4품인 만호를 배치하고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석성을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남도진성으로 개축했다고 한다.

당시 남도포의 만호는 조도의 해역과 신안 하의도 해역을 관할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남도포에 만호부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의

일이라고 전하고 있어 지금 보이는 남도진성은 세종 20년 이후에 쌓은 것으로 추정한다고...





남도진성앞에는 예쁜 무지개다리 2개가 있다.

남도진성 남문 앞으로는 동에서 서쪽으로 천이 하나 흐르는데, 주민들은 이 천을 ‘가는골(세운천)’이라고 한다.


남문이 바라보이는 곳으로 쌍홍교가 있다.

편마암 자연석을 사용해 만들었는데 전국적으로 이와 비슷한 다리가 드물정도라고 한다.





쌍홍교를 지나 성쪽으로 가면 단홍교가 있다.

남도진성과 이 두개의 홍교는 1964년 6월 10일에 사적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남도진성의 상징과도 같은 남문.












성둘레는 610m에 높이는 4~6m로 조선시대 왜구를 막기위해 증.개축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남도석성안에는 남동마을이 있다.

삼별초때도 석성안에는 이렇게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보이는 공터가 발굴작업중인데 얼마나 많은 유물이 이 아래 묻혔을까?



 



1,271년의 함성이 들리는 듯 하다.

삼별초의 처절했던 진도 마지막 항쟁의 현장.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진도의 아름다운 풍경들.





지금 보고 있는 풍경 바로 옆에 배중손 장군의 사당도 인근에 있다.

국립진도자연휴양림을 취재하기 위해 광주서 머나넘 길을 왔지만, 이 풍경을 보는 순간 진도에서 그냥 눌러 살고픈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럴까?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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