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공재고택 - 윤두서의 자화상.

2018. 8. 29. 00:30전라남도 견문록/해남 견문록


이 자화상의 주인공 아시죠?

뭐 역사교과서에도 나오지 대부분 아시리라 봅니다.

유교를 숭배하던 시절 머리 윗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버린 것은 흔하지 않죠.

또한,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동자도 범상치 않습니다.

눈썹과 눈꼬리가 위로 솟구치고 구렛나루와 턱수염, 그리고 두툼한 코와 굳게 다문 입술이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를 닮았는데요, 전투에 앞서 굳은 의지를 가진 장군으로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자화상은 조선 중기 화가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으로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었는데요, 

오늘 공재 윤두서를 만나기위해 전남 해남으로 떠나봅니다.





공재 윤두서의 생가는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372



마을회관 앞에 주차하고 오래된 고택들을 보면서 골목을 걸어도 좋은데요,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공재고택 앞 주차장까지 차로 이동해도 됩니다. 하지만, 마을 고택길을 걸으면서 공재가 걸었던 옛날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공재 고택까지 가는 길에는 수백년은 되어보이는 고택들이 몇채 있는데요, 백포마을은 공재 윤두서의 후손들이 자자 일촌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로 현재 약 50여호가 살고 있으며 해남윤씨와 밀양박씨, 김해김씨가 비슷하게 살고 있지만 해방무렵까지만 해도 대부분 해남윤씨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주로 공재의 넷째 아들인 윤덕훈과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데요, 계속 걸어보겠습니다.




윤두서의 9대 손인 크라운제과 창업자 고 윤태현의 사당인 모선당도 있군요

공재 고택 뒤로는 윤태현 생가도 있는데요, 모두 공재이 네째 아들 후손들이군요.




윤두서의 4째 아들 윤덕훈의 9대 손이 공재 고택을 관리한다는데 이 집인 것 같습니다.

바로 공재 고택 담장 너머에 살죠.




세월의 흔적이 담기 긴 돌담을 따라 가면 공재 고택에 이릅니다.

마치 해남 윤선도의 녹우당 돌담을 따라가는 것 같은데요, 수없이 이 길을 거닐었을 공재를 떠올려 봅니다.




창고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건물 끝에 사당이 보입니다.




공재 윤두서 사당입니다.

공재는 15세에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결혼하였고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생부 윤이후의 낙향과 갑술환국으로 남인계열의 실각이 이어지고 윤두서의 세째형 윤종서가 동궁을 두둔하고 신하를 비판한 상소를 올렸다가 거제도로 유배되고 다시 한양으로 소환되어 심문중 죽은 사건이 발생하였는데요, 장인과 큰형 윤창서까지 역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우여곡절끝에 무고로 밝혀진뒤 해남 윤씨 가문의 종손으로서 가문의 위기를 느끼게 되죠.


곧 윤두서는 섯부른 판단이 집안을 몰락시킬 수 도 있다고 여겨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내게 되었는데요, 46세에 해남 녹우당으로 귀향하여 백포리 윤두서 고택에서 은거하다 연동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죽은 뒤 1774년(영조 50)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윤덕희의 딸인 윤소온이 정재원과 결혼하여 정약용을 낳았으므로 정약용의 외증조 할아버지가 바로 윤두서가 됩니다.




공재 고택은 전형적인 ㄷ 자형 양반가옥으로 방마다 모두 툇마루가 있습니다.

윤선도가 죽기 1년 전인 1670년 이 고택을 지었다는데요, 350여년의 역사를 가진 고택입니다.




한때 48칸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안채 13칸과 곳간채 3칸, 사당, 헛간이 남아 있습니다.

능통이란 현판은 천문, 지리, 수학, 의학, 병법, 시서화, 음악 등 다방면에 능통했던 공재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보이군요.




청우재

윤선도의 녹우당이란 뜻이 뒷 산의 비자나무 잎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초록비 소리였다면,

공재 고택의 청우제는 그야말로 초록비가 내리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공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림을 배우지 않고 중국에서 전해져 온 고씨화보와 당시화보 등을 놓고 그림을 익혔다고 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독학 한 것이죠.


남북조시대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 백여명의 대가들의 그림이 실린 고씨화보는 그림의 특징까지 세세하게 쓰여있어 윤두서가 그림공부를 하기에 최적이었다는데요, 공재는 고씨화보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연습을 했지만, 대상을 직접 관찰하고 사생하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민중의 생활상을 그리는 것에 나타나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그의 시문학과 실학정신은 외증손자인 다산 정약용에게까지 이어졌는데요,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 녹우당을 드나들며 학문을 넓혔고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자신이 외가와 닮았다고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가지런한 장독대가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듯한 풍경인데요, 공재 윤두서(1668~1715)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조선후기 삼재(三齋)로 꼽는 선비화가입니다.

1688년 해남 연동에서 윤선도의 네째 아들 윤예미의 자손 윤이후의 네째(윤선도의 증손자)로 태어났으나 윤선도의 장남 윤인미의 종손 윤이석이 아들이 없자 윤선도가 후손 중 가장 점괘가 좋은 윤두서를 종손으로 입양했다고 하죠.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따로 있고 입양한 부모가 따로 있어 해남 윤씨 어초은 파를 이어가야할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지만, 전해지는 두 가지 일화에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는데, 이때 공재는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고 합니다.


또한 입양된 종손 윤이석의 부인은 청송심씨로 공재가 30세 되던 해 한양에서 양부 윤이석을 보러 해남으로 내려가는데, 이때 어머니 심씨부인은 향장(鄕庄)의 묵은 빚을 받아오라 했다고 합니다.


공재가 채권(債券)에 수록된 내용을 보니 그 액수가 수천냥이 되었으며 빚을 진 사람들도 모두 가난하여 빚을 갚을 수 없자 공재는 채권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데요, 공재는 비록 입양된 종손이지만, 자신의 뜻대로 구휼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공재의 묘는 고택 바로 뒤에 있습니다.

공재는 10형제를 뒀다고 하는데 해남 윤씨 어초은파 종손 중에 아마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46세에 해남으로 돌아와 48세에 사망했지만, 그의 짧은 생애에 비해 정렬적인 다산가였던 것이죠.

공재의 장남인 덕희와 손자 용까지 공재의 예술가적 기질을 이어받아 화가가 되었다고 하니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가풍은 분명 고관대작보다 예술가적 피를 이어받았음이 분명하고 화를 피해 해남으로 내려와 가문을 부흥시킨 것이 오늘날의 명문가 해남 윤씨 어초은파를 있게한 계기가 되었음은 윤두서의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이 높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공재 고택을 나오면서 마을앞에서 백포 앞바다를 바라봅니다.

공재의 할아버지 윤선도는 시조의 대가지만 가문의 부를 늘리기 위한 일도 열심이었는데요, 바로 공재 고택이 있는 마을 앞을 대규모로 간척하여 토지를 늘린 것이죠. 백포마을에 윤선도의 후손들이 자리한 이유를 어느정도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이곳 백포 포구를 통해 해남으로 들어올 때 배에서 백포마을의 지형을 보고 이곳은 내가 살 곳은 못되지만 뒤에 후손들이 살기에는 괜찮은 곳으로 보아두었던 곳으로 큰아들인 윤인미(尹仁美)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하기 위해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변에 위치해 해풍이 심해 고산은 다시 녹우당으로 돌아가고 훗날 한양에서 귀향한 증손자 윤두서가 말년에 이곳에서 2년간 살다 고택 뒤에 묻혔죠.


해남으로 여행을 가신다면 한번쯤 가볼만한 곳입니다.


이 글은 전남관광블로그에 소개되었습니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여행기획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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