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17. 00:30ㆍ대한민국 견문록/제주도 견문록
매년 10월이면 빛고을 광주 충장로에서는 7080세대만의 축제인 충장축제가 열린다.
까까머리에 교련복입고 챙좁은 학생모를 삐딱하게 눌러쓴 청춘들의 뜨거운 열기가 옴팡지게 묻어나는 7080세대만의 축제가
일년에 한 번 광주충장로에서 열린다면 제주에 있는 선녀와 나무꾼에서는 매일 그들만의 축제가 열린다.
선녀와 나무꾼은 테마공원이라기 보다 박물관이라고 해야 된다. (제주특별자치도 지정 박물관2008-6호)
서울역과 추억의 사진관, 지도관, 옛장터거리, 추억의 영화마을, 달동네마을, 도심의 상가거리, 어부들의 생활관, 인쇄소전시관, 추억의 학교
농업박물관, 민속박물관, 자수박물관, 닥종이인형관, 추억놀이체험관, 선사시대, 도깨비관, 추억의 내무반 등 7080세대들이 어린시절부터
그들의 학창시절, 군대시절까지의 추억이 고스란히 전시물에 녹아들어 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던데...서울로 서울로 모여들던 60~70년대의 서울역풍경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나도 초등학교 저학년시절에 당시 광주고속이라는 금호고속의 전신인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가 본 기억이 있다.
아마 열 몇시간은 타고 간 듯하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왜 갔는지 누구랑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입장요금 성인 7,000원 청소년 5,000원 어린이 4.000원이며 관람시간은 동절기에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5시30분까지이다.
폐장1시간이내에 입장하면 된다. 주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1997번지. 문의는 064-784-9001번이다.
서울역으로 들어가는 철길이 놓여있다..철길이 이렇게 놔져있으면 기차는 탈선하고 만다..
추억으로 가는 여행이 입구에서부터 탈선하면 안되지 않겠는가...괜시리 허접한 철길을 보고 쓴웃음만 나왔다.
서울역앞에 포니가 한 대 서있다. 1986년식포니로 출생연도를 보니 포니가 막 생산되기 시작한 1976년보다 열살이나 많다.
글쓴이도 군에서 제대해서 1986년에 자동차운전면허를 취득했으니 이 포니와 내 운전면허증은 같은 연식이다.
추억의 사진관이다.
시골초가앞 손바닥만한 밭에 배추와 무우를 심고 똥짐져 날라 밭에 비료로 뿌리던 기억이 돋아난다. 가끔 밭두렁에 구멍을 파놓고 똥물을 담아놓은 곳으로
지나가다다 풍덩 빠져버린 아주 냄새난 기억도 있다.
서울이발관에 가서 바리깡이라는 머리깎는 기계로 빡빡 머리를 문대고 머리쳐박고 머리를 감아주던 이발관집아저씨...
식칼같이 커다란 면도칼을 가죽에 쓱싹쓱싹 문대며 번지르르한 면도날에다 하얀붓에 비누거품묻혀 입주변을 몽땅 떡칠하고선 한번에 쓰~윽 문대면
면도는 끝이다.. 그리고 그땐 아주 음산한 지하 이발관은 이발이 주목적인지 다른것이 주목적인지 분간이 안될정도로 어두침침해서 기겁을 했던 기억도있다.
19공탄이라고 연탄을 당시엔 저렇게 수레로 달농네까지 날랐다. 지금 가끔 TV에 보면 일렬로 줄을 서서 연탄을 한 장씩 릴레이운반하는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 그땐 그만큼 자원봉사할 마음의 여유도 없던 시절이라 등짐, 수레짐하거나 새끼줄로 엮어 두장씩 낱개로 사가지고 가기도 했다.
당시엔 콘크리트로 된 전봇대는 참 귀했다. 나무로 만든 전봇대가 죽 늘어서 있고 가로등은 생각도 못한 시절.
가끔 있는 외등빛 하나로 달농네 언덕끝까지 찾아가곤 했었다.
옛장터거리다.
이정도 장터면 상당히 규모가 있던 장터풍경이다. 5일장내에 점포를 내어 방귀깨나 뀌면서 장사하던 사람들은 그나마 좋았다.
10리길을 나물이며 먹을 것을 등짐지고 머리에 이고 걸어나와 통일호 비둘기호를 타고 도회지 장에까지 나와 하루종일 쪼구려 앉아 고사리 한 움쿰을 파셨을
우리들의 엄니가 생각난다.
대장간과 보건소다.
당시 대장간은 일년 삼백육십오일 쇠를 녹이는 용광로가 식을줄을 몰랐다. 지금이야 콤바인, 트랙터로 대변되는 농기계로 농사를 다 짓지만
옛날에는 모두 손으로 벼를 심고 낫으로 수확하던 시절이다. 호미, 낫, 쟁기 이런 것 들은 모두 대장간에서 만들어 낸다.
지금이야 보건소는 병원급 수준이지만 그 옛날엔 이정도도 최고급이다. 사회복지시설이나 복지에 관심도 없고 오로지 개발전쟁에만 몰두하던 시절이라
아파도 참고 죽어도 참아야 했다.
대장간 아자씨...망치나 집게등 왠만한 철로 만든 것은 다 만들었다.
장터의 인기점포...신발집. 검정고무신이라도 하나 신으면 다행이던 시절...하얀색운동화는 7080세대에게는 꿈이자 로망이었다.
때가 잘 끼지 않는 검정운동화에 검정색끈....어쩌다 하얀 운동화 신은 친구를 보면 부러워 돌아가실 뻔 하기도 했다.
여학생들도 저 빨간 구두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남학생들에게 하얀운동화가 로망이듯이...
장터거리는 계속되고 포목집도 나온다.
포목집하니 그 옛날 20대초반 은행에 근무할때 광주충장로 5가 포목집네 딸하고 선을 볼뻔한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은행에 취업을 해서 야간대학을 다니던 시절...은행 바로 옆의 포목집사장님이 날 잘 보았는지 딸하고 선보자고 해서
깜짝 놀란적이 있다...이제 20살에...청춘이 구만리이건만...아이구~~~
없는게 없던 잡화점...주로 질기디 질긴 마미손 고무장갑, 아이들 딱지 등 먹는것 빼고는 다 팔았다.
추억의 빵집에서 우유에 빵을 먹으며 데이트하면 최고급 데이트였다.
대게의 청소년들은 갈만한 곳도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같이 다닐 형편도 못되어 빵집에 앉아 빵을 먹다 우유가 떨어지면 보리차로 대신~~~ㅎㅎ
구멍이 19개 뚫렸다 해서 19공탄이다. 번개탄도 있네...ㅎㅎ
번개탄의 화력은 실로 막강했다. 조그만 불씨 하나만 있어도 연탄불 살리는 것은 누워 떡 먹기만큼 쉬었다.
그시절의 담장은 월담하지 못하게 깨어진 병조각을 담장위에 심어놓았다. 지금보이는 것은 유리조각처럼 생긴 비닐조각이다.
도선생을 막기위함이기도 하고 어여쁜 딸을 보호하기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장터거리와 교련복이 걸려있는 공부방..ㅎㅎ
당시 교련복은 만능옷이었다. 마땅히 입을 옷이 없었던 학생들은 교복외에 집에서나 바깥에서나 교련복을 입고 활개치고 돌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교련복은 군인들이 입는 군복처럼 평상복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심의 상가거리다.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선거포스터도 붙어있고 골목길따라 계단지어 내려가는 담장도 있었다.
7080세대들의 잃어버린..아니 잊어버린 소중한 추억을 되살려놓은 선녀와 나무꾼..
각종 전화기와 핸드폰..저 무전기같은 핸드폰은 모토로라제품으로 1980년대 중반에 꽤나 인기를 끌었었다.
나도 저 큼직한 무전기 핸드폰을 가지고 멋부리며 으시대던 기억이 있다. 우측의 컴퓨터는 386컴퓨터시대의 유산이다.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1995년도에 내가 삼성의 486sx컴퓨터를 프린터포함해서 무려270만원을 주고 샀다.
그나마 한 2년쓰다 486dx로 업그레이하면서 또 30만원인가 들었으니 난...당시 컴퓨터를 구입하는데 물경 300만원이나 들여 산 것이다.
지금 어마어마한 반도체기술의 발달로 최고급기종에 최고급 디스플레이를 달아도 프린터포함해서 100만원을 안줘도 사니...격세지감이다.
노트북도 2000년초에 현주컴퓨터의 노트북을 무려 270만원주고 샀는데 지금은 60만원대면 살 수 있으니...아이구 얼리어답터거지란 말이 딱 들어 맞는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마지막까지 최고급 최고 사양의 컴퓨터나 핸드폰을 사려면 죽기 하루전에 사면 된다...
인쇄소 전시관이다.
글쓴이가 학창시절에 3년간 학교 교지를 편집하던 시절엔 저렇게 활자를 일일이 글자판에 맞추어서 활자조판을 짜곤했다.
지금은 나의 블러그에 쓴 글을 내 맘대로 블로그북으로 발간하니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추억의 학교다.
풀먹인 하얀 카라가 유난히 커보인 여학교교복은 단발머리와 영낙없이 잘 어울린다. 팔이 빠질정도로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느라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배기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 교대하며 책가방을 들고가던 시절...어쩌다 책 몇권 안 든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갈때면 기분은 날아갔다.
지금은 시작과 종료를 차임벨로 하지만 예전엔 저렇게 종을 쳤다. 세번 울리면 시작종....두번 울리면 끝종이다.
겨울엔 교실 한 가운데에 하나있는 난로위로 아파트층 올라가듯이 도시락이 하늘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다.
혹시 안에 김치라도 든 친구들은 수업시간내내 김치국이 펄펄 끓어서 넘치는 사고가 나도 마냥 즐거웠다..
난로위에 놓인 양은도시락그릇.. 저 도시락통안에 계란후라이라도 있는 날엔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곤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맨밥에 김치...좀 나으면 멸치정도? 숟가락과 젖가락을 그 위에 나란히 놓고 천으로 꽉 동여메어 가방에 넣어서
학교에 와서 꺼내면 김치국물이 빨갛게 교과서에 묻어나곤 했고 교실안은 김치냄새가 진동했다.
농업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을 지난다.
글쓴이는 시골에 살지 않아서 저런 농기구나 농기계에 약하다.
하지만 방학이면 시골큰집에 놀러다니면서 어깨너머로 배우고 체험해본 것이 시골에대한 추억의 전부다.
가마니짜는 기계로는 멍석도 짰던 것으로 기억된다.
도롱이는 옛날 비옷이다. 삼태기는 쌀과 함께 있는 나락을 바람에 털어낼때 쓰던 도구.
놋그릇이 가득한 부억의 선반과 신혼 첫날밤을 보내는 신혼부부. 막 옷고름을 푼 신랑이 너무 어리게 보인다.....ㅋㅋ
어릴적 다듬잇돌판에 명주옷을 놓고 방망이 두개를 손으로 잡고 리드미칼하게 두들기던 그 박자를 기억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사이좋게 앉아 구겨진 옷을 저렇게 다듬잇돌판에 올려놓고 신나게 두들겼다. 아마 시집살이에 찌든 피로와 친정에 대한 그리움을
다듬잇돌판을 신명나게 두들기면서 속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자수박물관이다. 이 전시관을 만든 김상분원장은 선녀와 나무꾼의 쥔장이기도 하다.
자수박물관에는 자수전시품만 아니라 닥종이 인형관도 같이 있다.
각종 민속놀이와 시골의 풍경을 닥종이로 만들어 놓은 예술의 공간이기도하다. 지금부터는 예술작품 감상시간이다.
자수박물관을 나와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찬 정원을 지나 도깨비관으로 들어간다.
혼자 들어간 사람은 특히 조심해야 할 듯...여기저기서 목이 떨어지고 팔을 잡아 당긴다...으흐흐..
사랑하는 연인끼리 두 손을 꼭 잡고 들어가야하는 코스다.
도깨비불이 왔다갔다하는 전시관을 나오면 선녀와 나무꾼의 동상이 여기가 자기들의 집임을 알려준다.
이곳의 쥔장이 강원도에서 식당사업을 할 때 상호가 선녀와나무꾼이었다 하는데 맞는지 틀리는지...
도깨비관 동영상으로 오싹한 추위를 느껴보고...
추억의 내무반...
83년도에 군에 입대하여 85년도에 전역을 하였다. 강원도 화천 최전방으로 입대하여 철책이라로 부르는 곳에서 근무하였었다.
당시 겨울나기는 참으로 힘들었다. 전방부대야 기름난로에 물이 펄펄끊는 최고의 시설이었지만 밖으로 나오면 아직도 빼치카를 태우는 곳도 있었고
근무하던 부대가 최신식 통합막사로 다시 지어지면서 한 동안 천막생활을 할때는 화목난로를 피기도 했다.
화목난로로 잠깐의 힘든 시기가 지나자 통합막사는 준공되어 이제는 스팀이 들어오는 최고급 최신식 내무반에서 생활을 하다 전역을 하였다.
군에서 기름난로와 빼치카난로, 그리고 화목난로와 보일러에서 제공되는 스팀난로까지 겪을 수 있었던 모든 종류의 난로를 사용해 봤던 추억이
고스란히 추억의 내무반에 남아있다.
관물대정리가 엉망이다. 소품만 갔다놨지 내무반은 이렇게 조악스럽지는 않다.
이곳 내무반을 담당하는 직원이 군대를 다녀왔는지 아니면 지금 현대식 군대를 다녀와서 각 잡는 것을 잘 모르는 것인지...
상의는 접어진 면에 종이를 대서 각을 잡고, 관물대엔 개인 모포를 각잡아서 두세장씩 쌓아놓았다. 그리고 왠 비누곽이 있는지...ㅎㅎㅎ
철모위에 모자얹어놓은 것 봐라..군기가 왕창 빠져있다. 이런 ...칼빈과 M1소총은 언제적 이야기일까..이정도 관물대면 아마 70년대쯤 내무반이지 않나싶다.
한쪽에선 원산폭격을 하고 잇고 맨 뒷줄의 고참은 누워서 TV보기, 바로 다음고참은 앉아서 책보기,,일병이 후임병들 군기잡는 것은 이정도면 약과다.
밤이면 등화관제때문에 불을 켤 수 없어 모포뒤집어 쓰고 후레쉬로 편지를 쓰고 읽었었다..저것도 아마 70년대쯤이지 않나 싶다.
영하20도를 훌쩍넘는 한 겨울 자다가 팬티바람에 눈밭에서 좌로굴러 우로굴러는 흔히있는 일이고 훈련소에서는 자다가 모두기상하여 한여름 팬티바람으로
모기회식시키기..하얀고무신으로 뺨맞기 등등 얼차례의 도를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이 짓 밟히는 수없는 만행들이 저질러졌다. 군기확립이라는 허울좋은 구호아래..
요즘 세대에게는 꿈에도 안나타나는 그런 집단 얼차례는 사회나와서 강건한 정신을 가지게된 중요한 계기도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침상 삼선에 정렬...침상 끝선에 정렬...왔다 갔다 하다보면 정신줄이 달아난다.그러다 단체로 원산폭격하고 도미노처럼 옆으로 굴러떨어지기를
몇번해야 일석점호가 끝나던 시절..
그렇게 군 생활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사나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국방의 의무는 황금같은 젊은시절의 소중한 추억이기도 하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과 안다녀온 사람은 사회생활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난다. 그래서 당시엔 취업의 가장 큰 과제는 군필이냐 미필이냐였다.
(제10편 초호화유람선 스타크루즈 홀딱 벗기기편에서 계속된다.)
simpro의 프로야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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