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3. 01:00ㆍ대한민국 견문록/제주도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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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제주 토박이 가이드 미스고가 추천하는 나 홀로 렌트카 여행이야기
☞(제주여행)1편. 유리로 말한다. 유리의 성과 여행가이드 미스고.
☞(제주여행)2편. 한라산 마지막 등반코스 영실코스와 겁없는 아가씨.
☞(제주여행)3편. 올레길 10코스 따라가는 송악산과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이야기.
☞(제주여행)4편. 올레길 10코스. 이틀에 걸쳐 갈 정도로 아름다운 산방산과 해안도로.
☞(사찰여행)5편. 올레길 10코스. 산방굴사와 한 지붕 두 가족 산방사와 보문사 .
☞(제주여행)6편. 올레길 10코스. 용머리해안과 하멜 그 빠삐용같은 조선 탈출기.
☞(제주여행)7편. 올레길 6코스. 이틀에 걸쳐 갈 정도로 아름다운 쇠소깍.
☞(제주여행)8편. 시간도 잠시 멈춰 버린 곳 평대리 비자림 곶자왈.
형제해안로를 따라 늦은 일출을 찍는다고 궁상떨다
철 덜든 꽃샘추위에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제주의 아침 바다는 아직 겨울이다.
옷을 두텁게 입었지만 바닷가의 바람은 코끝이
목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한기가 매섭다.
손가락이 얼얼해 질 정도로 해변가를 쏘다니다
차 안에 앉아 따듯한 히터바람을 쐬니
지금이 봄인지 겨울인지 분간이 안된다.
산방굴사 보다 용머리 해안을 먼저 들렀지만
물때가 안 맞아 해안을 빙 돌아 가볼 수가 없단다.
(이 일을 으째야 쓰까잉...)
용머리해안은 1653년 네델란드의 하멜을 포함한 일행 64명이
타이완에서 일본 나카사키로 가던 중 배가 풍랑에 좌초되면서
제주도로 표류하여 표착한 지점이다.
64명의 선원 중 28명이 사망하고 36명이 살아남아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무려 13년 세월을
조선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다 결국 일본으로 탈출하게 되는
그 빠삐용같은 삶이 시작된곳.
일단 산방산 앞에 있는 산방연대에 올라 용머리해안을
내려다 본 후 산방굴사로 가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 매표소에서 산방굴사 입장권을 구입하는데...
한 장의 입장권으로 용머리해안과 하멜상선전시관을 모두 둘러
볼 수 있단다. 산방굴사포함 입장료는 2,500원, 산방굴사 주차료는 1,000원이다.(이걸 일타 삼피라고 한다지?)
그렇다면 용머리 해안의 넓다란 주차장에 차를 무료로 주차하고 그 곳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 욤머리해안을 먼저 둘러보고,
하멜 상선 전시관도 둘러본 다음 산방연대까지 난 오솔길을 따라 연대에 올라 보고, 산방굴사와 보문사, 산방사를 탐방한 후
내려오면 차도 무료로 주차하고 다섯 개의 관광지를 모두 둘러볼 수 있는 2,500원짜리 일타 오피 코스도 가능하겠다.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좌측은 산방사이고 우측은 보문사이다.
즉 한 지붕(산방굴사) 두 가족(산방사와 보문사)인 셈이다.
왜 산방굴사 입구에는 사찰이 두개가 나란히 있을까. 밖에서 보면 언뜻 하나의 사찰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찰의 이름이 틀리다.
산방사는 태고종, 보문사는 원효종으로 우측의 보문사를 먼저 탐방하고 계단을 따라 산방굴사를 들른 다음 내려오면서
좌측에 있는 산방사를 둘러보기로 한다.
「영주십경도(瀛洲十景圖)」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10여 곳을 골라 그린 그림첩이다.
현재 전하는 영주 십경은 이한우가 품제(品題)한 것이라고 하는데, ‘성산일출(城山日出)’, 사봉낙조(紗峯落照)‘, 영구춘화(瀛邱春花)’,
‘정방하폭(正房夏瀑)’, ‘귤림추색(橘林秋色)’, ‘녹담만설(鹿潭滿雪)’, ‘영실기암(靈室奇巖)’, ‘산방굴사(山房窟寺)’ , ‘산포조어(山浦釣漁)’, ‘고수목마(古藪牧馬)’로 전해진다.
정방하폭은 2005년에..귤림추색은 시도 때도없이 지나 다니며, 녹담만설은 어제 영실기암으로 윗세오름으로 올라 멀찌감치에서보고,
영실기암은 어제 봐 부렀으니까, 산포조어(고기낚는 돛배와 백로 갈매기가 어우러진 장관)와 고수목마 (한라산 중산간 너른 초원지대
에서 말이 뛰노는 광경)는 또 시도 때도 없이 눈 안에 들어온다.
그러므로 오늘은 영주십경중 마지막 남은 산방굴사를 보러간다.(하지만 영주십경의 본색을 보려면 제때에 와서 봐야 한다.)
산방산에는 산방굴사를 제외하고도 5개의 사찰이 더 있다.
산방굴사로 오르는 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에 산방사가 있고
오른쪽엔 보림사가 있으며 산방사 옆으로 가정집같은
광명사가 있으며 산방산 뒤로는 영산암과 보덕사가 있다.
사찰탐방은 항상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먼저 보문사는 대한불교 원효종 제주교구로 1963년 원효종이
창시될 무렵에 김대현 스님이 5평 남짓한 스레트 건물에 법당을
만들면서 창건되었고, 1969년 4월에 대웅보전을 건립하였으며 1998년 3년간의 대대적인 불사를 벌여 현재의 법당과 종각,
일주문 등이 들어섰다.
보문사가 들어서기 전에는 고려 충렬왕 무렵 1275년에서 1308년 사이에 제주에 머물며 여러 편의 시를 남겨 시승(詩僧)으로 불리는 혜인 선사가 산방산에 있던 천연동굴에 굴법당을 만들어 산방굴사를 창건하였지만,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포교활동을
못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안봉려관 스님 등에 의해 제주에 근대불교가 포교되기 시작하면서, 1928년 산방사가 먼저 창건되고 그 후
신행이 뛰어난 여러 스님들에 의해 제주 도처에 사찰들이 중창될 무렵인 1963년 용산당 대현사에 의해 원효종으로 창건된 사찰이
보문사다.
그런데 왜 적멸보궁이란 이름을 사찰이름앞에 붙혔을까?.
적멸보궁이란 적을 멸하고 나라를 보호하는 사찰이란 뜻으로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사찰 당우(堂宇)
가운데 하나로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나 보문사의 대웅보전엔 부처님이 계신다.
왜 적멸보궁이라 해 놓고 대웅보전에 부처님을 모실까?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자장율사가 646년
(신라 선덕여왕 15년)에 당나라에서 선량산의 문수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그 화현 보살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 1벌을 받아 귀국하여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었고, 왕명에 따라 당시에 계율종의
본산인 통도사를 창건하였으며, 그 사리를 삼분하여 각각
황룡사탑과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자장율사의 5대 적멸보궁은 양산의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이고, 이 중 태백산 정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친히 가져 온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정암사의 적멸보궁은 임진왜란 때사명대사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 적멸보궁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자장율사의 5대 적멸보궁외에도
금강산 건봉사, 대둔산 안심사, 지리산 법계사, 선산 도리사 등
많은 적멸보궁이 있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참고)
보문사를 적멸보궁이라고 칭한 이유를 글쓴이 생각으로는 1963년 절이 창건된 후 1969년 대웅보전을 건립 하였을 때 까지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 관세음보살 우 지장보살을 협시 봉안 하여 예불을 드리다가, 보문사 주지 강설스님이 태국에서 남방불교를 수학하고 1986년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여래의 진신사리 33과를 봉안한
5층 금강사리대탑을 대웅보전앞에 세우면서 적멸보궁이라고 바꾼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대부분 적멸보궁 사찰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대웅보전에 모시거나 대웅보전 뒤쪽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대탑을 세운 것에 반해 대웅보전 바로 앞에 진신사리탑을 세운 이유가 또 궁금해 진다.
우측 보문사로 들어서는 일주문에는 아무런 현판도 걸려있지 않다.
다만 일주문 왼쪽 기둥에 조그맣게 적멸보궁 대웅보전 참배라는
안내판을 걸어 놓아 입구에서 부터 보문사라는 현판을 내걸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그외 사찰 건물 어디에도 보문사라는 현판은 없고 있다면
'청동약사여래대불 방광하다'라는 안내도와 산방굴사로 올라가다 보면 보이는 텃밭위의 조그만 이정표가 이 사찰이 적멸보궁 보문사라는 것을 유일하게 가르켜 줄 뿐이다.
보문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동자승들과 천진스럽게 놀고 있는 포대화상이 보인다.
포대화상의 웃는 모습을 따라 크게 웃으면 저절로 무병, 장수, 부귀의 세 가지 복이 생긴다고 하니
모두 큰 소리로 웃어보자.. (으하하하~~~켁켁...)
대웅전 왼쪽의 금강사리탑(金剛舍利塔)은 2010년에 입적한 당시 주지 강설스님이 태국에서 남방불교를 수학하고
1986년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이 있다. 그래서 보문사를 적멸보궁 보문사라고도 한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부처님보다 진신사리를 더 중요시한다.
그러나 그 적멸보궁들은 처음부터 당우를 지워놓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지는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사리를 모신 戒壇을 향해 마당에서 참배하던 것을 불자들의 편의를 위해 전각을 지어 모시게 되었으며
전각안에는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고 진신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참배를 위한 불단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통도사는 금강계단에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고.
상원사는 사리를 안치한 장소를 알 수 없어 뒤쪽에 마애불탑이
상징적으로 서 있고 봉정암에는 불사리를 안치한 5층 석탑이
있고, 정암사에는 산 위로 수마노탑이 있다. 법흥사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된 보탑이 있고, 그 외 적멸보궁이라고 하는
지리산 법계사는 사리를 모신 석탑을 적멸보궁의 제단과
유리창으로 마주보게 위치하여 참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산방산 보문사의 적멸보궁의 위치는 과연 맞는가
틀리는가..최근에는 많은 절집에서 태국, 스리랑카등지에서
진신사리를 들여와 보탑을 세운다.
그 들 사찰들은 이미 전각들도 세워져 있고 대웅전에 부처님도
모시고 있지만 진신사리를 모신다는 의미에서 적멸보궁이라고
칭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런 의미라면 적멸보궁이라 불리워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겠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하고 있기에..
상단사진 대웅보전 앞의 좌측 불상은 높이 약 5m의 용두관음상
으로, 전세계가 평화로운 불국정토가 되기를 발원하는 의미로
조성되었으며,
좌측사진은 미륵반가사유상으로 인도 바라대국의 바라문집에서
태어나 석존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 라는수기를 받다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천인들을 교화, 석존 입멸 후
56억7천만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모든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한다.
2010년 4월 17일 오전 9시 30분경 부터 10시까지
약 30분 동안 청동약사여래대불 점안 봉불 대법회중
무지개가 떠 올라 부처님의 머리 위를 두번이나 휘감아 도는
희유(稀有)모유(妙有)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약사여래불의 원래 이름은 약사유리광여래이며
대의왕불이라고도 한다.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해 주고, 모든 불구자를 고쳐주며,
삼재팔난의 위험에 처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며
십이대원을 세운 후 오랜 겁 동안 성불하신 부처님이다.
안내판에 나와 있는 희유(希有)의 希자는 稀자로 바뀌어야
하지만 어떤 연유로 希로 쓰였는지....직접 물어보기도 그렇고..
청동약사여래는 반대편 송악산에서도 그 금빛 부처님의 모습이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
약사여래는 열두 가지 서원(誓願)을 세워 중생의 질병 구제, 수명 연장, 재화 소멸, 의식(衣食) 만족을 이루어 주며,
중생을 바른길로 인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해 준다고 하지만 그 크기에 중생들은 크게 압도당하고 만다.
보통 사찰의 약사전에는 자그마한 크기의 약사여래를 모시지만 이렇게 크게 만들면 기도발이 더 듣는가 싶다.
대웅전 우측 청동약사여래대불이 있는 쪽에는 내부에 독성탱·칠성탱·산신탱 등의 불화를 모시고 있는
굴법당 형태의 삼성굴이 있어,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을 몰래 들여다 보고..
삼성굴앞 석등너머로 멀리 형제섬과 송악산이 보인다.
예로 부터 산방굴사가 있는 이곳 산방산에는 수많은 스님들과 선사들이 수행을 위해 찾았다고 하나
과연 이곳에 앉아 서귀포 앞바다의 풍광을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에 취해 참선이 제대로 되었겠나 싶다.
(그런것들로 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으면 그것도 참선으로 가는 길이겠다.)
삼성굴 법당뒤에는 청동약사여래불을 새로 만들기 전부터 있는 나무약사 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이 약사여래의 기도발이 약해져서 청동약사여래불을 엄청난 크리고 모셨는지..
일광,월광보살과 함께 2010년에 점안 봉불된 청동약사여래불쪽을 내려보고 있다.
한 사찰에 약사여래가 두 분 계시는 경우도 있는지 궁금하다.
우측사진은 일붕대사 기국상.
일붕대사는 1914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출생하여 19세에 보문사가 세워지기 전에 있던 광명사(당시이름 산방굴사)에서
강혜월스님께 수계를 받고 전주 위봉사와 개운사 대원암 금산사 강원 오대산 선원을 거쳐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후
국내외 25개 대학에서 불교 및 철학을 강의하시던 학승이자 교육자다.
조계종 원로의원 등 조계종의 주요 요직을 두루 맡으며 불교의 입장을 대변하였으나, 정권에 대한 조계종의 행태에 회의를 느껴
1988년 조계종에서 나와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하는 대한불교 일붕선교종을 새로 설립해 종정에 올랐고 1992년에는
세계불교법왕청을 설립하고 초대 법왕이 되었다.
1995년 생일 다음날 입적한 후 일붕선교종의 세는 상당히 약해지고 일붕선교종 소속이던 많은 사찰들은 다른 종파로 소속을
바꾸지만 아직도 제주지역 250여개 사찰중 30여개가 일붕선교종소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일붕대사기국상이 보문사에 있을까.
산방사로 올라가기전 야자수 나무 뒤로 가정집같은 광명사라는 조그마한 사찰이 하나 더 있다.
그곳은 일붕 서경보 대종사가 삭발을 한 성지로 대부분 일붕선교종 소속의 사찰엔 이렇게 일붕대사기국상이 있다고 하니
1963년부터 원효종이었다는 보문사에 확인해 보면 알 일이다.
산신각의 형태인 삼성굴이 있지만 또 따로 산신각을 대체하는 비석이 있다.
기와불사로는 텃밭의 경계를 이루기도 하고. 어디다 쓰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만 내 이름이 적혀있는 기와가
만약에 텃밭에 굴러 다닌다면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을 듯 싶다.
마침 보문사 대웅보전에서 예불이 진행되고 있다.
살짝 들어가 합장한 후 가만히 앉아 들어본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 관세음보살 우 지장보살이 협시 봉안되었으며,
뒤쪽으로는 천불상(千佛像)이 봉안되었다.
이제 대웅보전을 나와 삼성굴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산방굴사로 오른다.
산방산의 전설의 여신 산방덕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산방산의 여신 산방덕과 관련된 전설은 대체로 세 가지 형태로 전해온다고 한다.
“옛날 용모가 뛰어난 처녀가 산방산에 살면서 스스로 ‘산방덕(산방댁)’이라고 불렀다.
그 뒤 부자인 고승(高升)과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관원이 그를 겁탈하려 하자 산방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돌로 변해 버렸다.
고승과 살던 유허지는 지금의 안덕면 화순리 마을 통천과원(洞泉果園)이라고 한다.”
“산방덕은 산방굴사의 여신으로서 인간계에 환생하여 고승과 가연을 맺어 살았다.
호색가인 주관이 그 미모를 듣고 고승에게 죄명을 둘러쓰게 하고 여인을 겁탈하려 하였다.
산방덕은 인간계에 환생한 것을 한탄하여 다시 암굴에 들어가 화석이 되었으며,
그녀의 솟아나는 눈물이 산방굴사의 물방울이 되어 샘으로 흐른다.”
“아랫마을 번내(현 화순리)에 고성목이란 천민 계층의 부자가 살았는데 미모의 산방덕을 첩으로 삼았다.
어느 날 관원이 고성목의 기세를 꺾고 산방덕을 차지할 계책을 꾸미는 것을 알아차린 산방덕은 훨훨 날아 산방산으로 들어가
산방산의 신이 되었다.”
(자료출처:디지털 제주문화대전)
산방굴사는 고려의 승려 혜일이 마음을 닦았다고 하는 곳으로 영주십경도의 이한우는 이렇게 노래했다.
화공다교착청산(化工多巧斲靑山) 조물주가 재주 많아 푸른 산을 깎아내어
동설승문운엄관(洞設僧門雲掩關) 굴속에 절을 짓고 구름으로 빗장 걸었네
연석건곤포상하(鍊石乾坤包上下) 돌을 다듬어 만든 천정과 바닥을 감쌌고
공침세계천중간(孔針世界穿中間) 침으로 뚫어 세상은 그 중간에 만들었네
도현수색천년희(倒懸樹色千年戱) 거꾸로 매달린 나무는 천년을 희롱하고
점적천성만고한(點滴泉聲萬古閑) 떨어지는 물방울은 만고에 한가롭다
한탑향소쌍불좌(寒榻香消雙佛坐) 향기 가신 차가운 자리에는 부처 두 분 앉혔는데
기시병발학비환(幾時甁鉢鶴飛還) 어느 때나 큰 스님이 학을 타고 오실런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왔을 때 그와 절친했던 초의선사라는 승려가
추사를 위로하기 위해 1843년에 제주도로 와서 6개월 동안 머무른 곳이 산방굴사라고 한다.
산방굴사의 동굴은 산방산(395m)의 200m지점에 있는 길이 10m, 높이 5m, 너비 5m의 천연석굴로
원래는 산방굴(山房窟)인데 안에 불상을 안치하고 있어 산방굴사로 불리우며
고려의 승려 혜일(慧日)이 자신을 산방법승(山房法僧)이라 하고 이곳에서 수도하다 입적하였다고 한다.
산방굴사의 벽면에는 수 많은 글씨들이 조각되어 있다.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김몽규(金夢煃) 목사, 여철영(呂喆永), 홍종우(洪鍾宇), 남만리(南萬里) 등
대부분 목사와 현감의 이름이 보이고, 장현수(兵僚 張鉉琇)와 오치각(禮幕 吳致慤)이란 고을 아전의 이름도 보인다.
장현수라는 이름 옆에는 박정행(朴正行)이라는 금릉(金陵客 지금의 전남 강진사람)에서 두 아들과 유람을 왔다 새긴 시도 새겨져 있어
스님 뿐만 아니라 당시 제주 목사들을 포함하여 육지의 양반들도 자유로이 산방굴사를 드나들며 굴에 글을 새겨 넣을 정도로
유명한 도량처였지만 또한 이 글들을 보며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방법상의 문제점은 항상 그 도를 넘는다.
시 한 수 적어 놓는 것과 왔다 간 흔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산방덕은 산방산의 여신으로 알려진 인물로 산방산 암굴(산방굴)에서 태어나 인간 세상으로 나왔으나,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실망하여 다시 산방산으로 들어간 뒤 스스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 바위가 산방굴을 이룬 산이 되어 천정에서 쉴 새 없이 물방울이 떨어져서 바위 밑에 샘물을 이룬다.
이것이 인간 세상의 죄악을 슬퍼하여 흘리는 ‘산방덕의 눈물’이라고 후세사람들이 이름을 붙혔다고 하니
산방굴사에 가면 이 여신의 눈물을 마시고 가족의 건강을 소원하면 행복한 가정을 원했던 산방덕의 도움으로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반드시 샘물을 마시며 기원해 보자.
산방덕의 눈물샘앞에 촛불을 켜 놨다.
입구에 거사님이 한 분 계셔서 공양에 도움을 준다.
난 산방덕의 눈물샘에서 소망을 비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부처님 불전함에 항시 그렇듯이 시주를 한다.
'곧 있으면 수술을 하는 애들 엄마의 건강을 지켜주세요..그리고 다시 환한 얼굴로 가족들 품에서 새로운 희망의 반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소서'..라며.
부처님 뒤쪽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임관주(任觀周)라고 조선 영조때 사람이다. 1767년(영조 43) 정언 재임 중 언론의 중요성, 『어제유곤록(御製裕昆錄)』의 불합리한
서술, 재상의 잦은 교체, 제술(製述) 시험 때 성균관 유생을 모독한 도승지 송영중(宋瑩中)의 파직, 서울과 지방 관원들의 비리 적발,
무장들의 권위 존중 등 10여 가지에 달하는 조목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창천촌에 유배지를 정하고 독서에 열중하였지만 유배된 지 두 달만에 조정 대신들이 바른 말을 하는 관리를 섬에 계속
둘 수 없다 하여 특별 방면 되었다.
방면된 후 곧바로 육지로 나가지 않고 제주도 산천을 두루 구경하고 많은 시를 남겼는데, 창천·산방산·용연·백록담 등지에
임관주의 시가 음각되어 있다고 한다. (자료참고)디지털 제주문화대전
산방굴사를 나서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이제는 올라오다 좌측에 있던 산방사를 탐방하러 가는 길이다.
산방사는 1928년 4월 산방굴사에서 수행한던 유장호에 의해 설립된 절로
산방굴사에서 수도하다 입적한 고려시대 혜일선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사찰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법정사 무장항일운동을 주도한 방동화 스님이 주석하였다고 하며 1961년 대웅전, 요사채, 조왕단을 중수하고
1996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웅전은 창건당시인 1928년에 1차로 세워졌으며 1961년 중수하였고 다시 1996년에 대대적인 불사로 오늘에 이르렀다.
대웅전옆의 제주 최대 관세음보살 석불은 32자. 약9.7m에 무게만도 60톤에 달한다고 한다.
부산의 해동용궁사의 해수관음대불이 단일 석재로는 한국최대를 자랑하는 10m높이니 그 크기는 단 1자 차이 밖에 안난다.
대웅전에는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좌 관세음보살 우 대세지보살이 협시 봉안 되어 있으며
불화에는 후불탱, 지장탱, 칠성탱, 신중탱, 독성탱, 산신탱, 용왕탱, 천신탱이 조성되어 있다.
왕생극락돌탑과 아기를 안은 아미타불. 제주최대 관세음보살상. 시주공덕비 당래하생 미륵존불
보병을 든 관세음보살 입상이 삼존불과 함께 세워져 있다.
산방사의 범종은 2층 누각으로 되어 있으며 5톤이 넘는 범종이 달려 있다.
이곳 보문사의 홈페이지에는 고려말 혜일선사께서 산방굴사를 개산하시기 전에 처음 주석하셨던 도량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산방사는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혜일선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사찰이라고 쓰여있다.
그러나 1928년에 창건한 산방사가 1963년에 창건한 보문사보다 먼저 산방굴사의 법맥을 이어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산방사도 보문사도 광명사도 모두들 자신들의 사찰이 산방굴사 혜일선사의 법맥을 이어 받고 있다고 하겠지만
그러한 적통성을 논하기 전에 모두들 산방굴사 앞에 터를 잡고 있으므로 혜일선사의 뜻은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산방굴사를 관리하는 주체가 어느 사찰인지 확인되지는 못했지만 글쓴이 생각으로는 산방사와 보문사 그리고 광명사가
함께 관리하지 않는가 싶다. 그런데 왜 제주시에서 입장료를 받지? 또 그것이 궁금해지네..ㅎㅎ
산방굴사를 나와 이제 용머리해안과 하멜상선전시관으로 빠삐용같은 삶을 산 하멜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긴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굿뉴스피플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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