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5. 23:29ㆍ대한민국 견문록/제주도 견문록
발행
☞(제주여행)제주 토박이 가이드 미스고가 추천하는 나 홀로 렌트카 여행이야기
☞(제주여행)1편. 유리로 말한다. 유리의 성과 여행가이드 미스고.
☞(제주여행)2편. 한라산 마지막 등반코스 영실코스와 겁없는 아가씨.
☞(제주여행)3편. 올레길 10코스 따라가는 송악산과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이야기.
☞(제주여행)4편. 올레길 10코스. 이틀에 걸쳐 갈 정도로 아름다운 산방산과 해안도로.
☞(사찰여행)5편. 올레길 10코스. 산방굴사와 한 지붕 두 가족 산방사,보문사.
☞(제주여행)6편. 올레길 10코스. 용머리해안과 하멜 그 빠삐용같은 조선 탈출기.
☞(제주여행)7편. 올레길 6코스. 이틀에 걸쳐 갈 정도로 아름다운 쇠소깍.
☞(제주여행)8편. 시간도 잠시 멈춰 버린 곳 평대리 비자림 곶자왈.
산방산과 산방굴사 그리고 한 지붕 두 가족인 산방사와 보문사를 둘러보고 다시 용머리 해안으로 내려갔다.
왜? 하나의 입장권으로 세 군데를 다 볼 수 있다고 하니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여행자는 항상 가난하다. 그리고 배가 고프다.
단돈 1,000원에 차를 댈까 말까 망설이기도 하고, 아이구 저기 대면 공짠데~~~..이러기도 한다.ㅎ
물론 산방굴사 주차장도 마찬가지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산방굴사쪽은 유료이고 주차장 아래 용머리해안이 잘보이는
공용주차장은 무료다.. 그곳이 번잡스럽다면 가까운 용머리해안의 공용주차장에 차를 공짜로 대면 된다.
그런데 산방굴사앞은 분명 도로의 일부분 이건만 왜 주차료를 받지? 아무 생각없이 당연히 받는갑다 하고 와이퍼에 끼워진
주차영수증을 꺼내 들고 주차료를 지불한 난 아직도 기본 자세가 안되어 있다.
의문난 사항은 물어봐야 하거늘..나도 궁금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니까..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용머리 해안의 넓다란 주차장엔 많지 않은 차량들이 멀찌감치들 서 있다.
산방굴사와 산방연대 등에서 본 용머리해안은 가까이 갈수록 그 모습이 용에서 바위로 변하고 있지만.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자신에게 맞설 누군가가 탐라에 나타난다고 하여 항상 두려워 했다는 용머리는 변하지 않는다.
한반도의 탐라섬에 제왕이 태어날 기세를 지닌 터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된 진시황은 풍수에 능한 호종단를 제주로 보내
그 혈맥을 끊어버릴 것을 명하였고, 호종단이 산방산에 도착할 무렵 산방산에서 내려와 태평양으로 나가려고 하는 형세인
용머리를 보고는 용의 꼬리와 잔등을 끊어 버렸다.
그러자 시뻘건 피가 솟아 주변을 물들이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고 산방산은 괴로운 울음을 며칠 동안이나 계속했다고 한다.
임무를 마친 호종단은 차귀섬으로 배를 타고 나가려다 한라산 신의 노여움을 받아 태풍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용머리해안...그 끊어진 잔등이 도로로 변해 확인할 수 없지만 지금이라도 그 끊어진 잔등을 연결하고 도로는 고가도로로
연결하면 안될까? 그래야만 거대강국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탐라의 전설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제주특별자치도의 도지사가 되면 검토해서 무조건 건설이다.ㅋ...(죄송합니다..도지사님..농담이예유~~)
하멜일행은 스페르웨이호가 태풍으로 대정현 해안에서 좌초하여 구사일생으로 이곳 용머리해안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864년 제주도는 제주현과 동남쪽의 정의현, 서남쪽의 대정현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었는데 상륙지를 두리뭉실하게
대정현 해안이라 하였지만 이곳 용머리 해안이 하멜의 실질적인 상륙지는 아닌 것 같다.
대정현 해안이라면 서귀포 강정해안부터 화순해변을 거쳐 용머리해변, 송악산너머 모슬포 해변까지가 몽땅 포함되는데
폭풍우에 휘말린 스페르웨이호가 닻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튀어나온 바위에 세 번 충돌을 일으켜 좌초했다고 하니
산방산에서 내려가는 용머리와 부딪힌 것으로 추정되고 표착지에서 제주목으로 이송 중 대정에서 하룻 밤을 묵는데
약 6km정도를 여행했다고 하니 거리와 정황상 이곳을 하멜이 최초로 상륙한 지점이라 하지 않았나 싶다.
하멜이 제주에 표도(漂到)하기 전에 또 다른 외국인이 제주에 표도하거나 찾아 온 적이 있을까?
헌종실록에는 모두 13건의 이양선(異樣船)기록 있고, 고종실록에는 130건에 달하는 이양선기록이 있다고 한다.
영국의 해군장교였던 에드워드 벨처(1799~1877)는 1841년 사마랑호의 지휘자로 홍콩에 영국 깃발을 맨 처음으로 꽂은
인물이며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해안선을 측량하고 기록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하멜의 표류기에 영향을 받아 우도에 전진기지를 세워놓고 제주 해안 전역을 돌아다니며 해안선을 측량하고
물의 깊이까지 확인하며 만든 지도에 한라산의 높이가 지금(1950m)과 별 다름이 없는 1998m로 측정하여 표기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멜 이전에 중국이나 일본사람을 제외한 외국인의 표도는 인조5년(1627)9월 얀 얀세 웰테부리가 제주에 상륙한 것이 처음이다.
오우벨 켈크호를 타고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 식수를 구하기 위해 선원 2명과 함께 보트로 상륙했다가 관헌에 붙잡히고
나머지 선원들과 배는 이들을 구하지 않고 일본으로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그 후 웰테부리는 귀화하여 박연(朴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조선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며 살았으며 병자호란에도 참전하여
같이 상륙한 일행 2명은 사망하였지만 웰테부리는 목숨을 구해 조선이 서양과 교류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 후 26년후인 1653년 8월 16일 하멜일행이 탄 스페르웨르호가 태풍으로 대정현 해안에 좌초하여 8월16일 부터 1656년 3월까지
약 1년 9개월동안 제주에 머문 것이 두 번째 표도로 기록된다.
그 후 몇 번의 탈출 시도 끝에 한양으로 이송되어 결혼도 한 하멜일행은 고국 네델란드를 못 잊어 또 탈출 계획을 세우고 한양, 강진,
여수 등으로 옮겨 다닐 때도 탈출만 생각하다 결국 표도 13년만에 일본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1년여를 일본에서 체류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 기록한 하멜 표류기에 쓰여진 탐라 최초의 표도지인 용머리 해안으로 조선땅에서
빠삐용같은 삶을 살았던 하멜을 만나러 간다.
빠삐용을 모르는 분이 혹시 계실까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1973년 프랑스와 1974년 미국에서 개봉되고 국내에서는 1990년에 개봉된 프랭클린J샤프너 감독의 영화 빠삐용은 원작자인 한앙리 샤리에르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프랑스령인 적도 부근 기아나로 향하던 죄수 수송선에서 빠삐용( 스티브 맥퀸 분)과 드가( 더스틴 호프만 분)는 서로 만난다. 빠삐용은 무죄지만 살인죄로 그리고 드가는 위조 지폐범으로, 죄수들이 겪는 끔찍한 일들을 겪게 된다. 빠삐용은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붙인 검사에 대한 복수 때문에 드가는 아내에게 당한 배신 때문에 탈주를 하기로 한다. 겨우 콜롬비아에 도착하여 지내다가 수도원의 원장에게 속아 다시 세인트 조셉프의 독방에서 5년을 보내게 된다. 이런 중에도 드가의 우정만이 빠삐용에게 용기를 준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감옥 중 가장 끔찍한 감옥이지만 빠삐용은 또 다시 탈주를 계획하나 드가는 빠비용과 함께 떠날 수 없는 입장이다. 뛰들들고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며...영화는 끝난다. 리뷰보기
|
하멜 [Hamel, Hendrik, ?~1692]
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소속 선박의 포수(砲手)로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 건너갔다가 서기(書記)로 승진,
1653년(효종 4) 상선 스페르웨르로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는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다.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의 심문을 받고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으며, 1657년 강진(康津)의
전라병영(全羅兵營), 1663년(현종 4) 여수(麗水)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다가 1666년(현종 7)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1668년 귀국하였다.
그해에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 즉 [하멜표류기(漂流記)]로 알려진 기행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하멜표류기는 그가 자신과 동료들의 14년간동안 밀린 임금을 타기 위한 보고서 형태로 썼으며 그로 인해 조선이라는 나라가
서구 열강에 매력적인 나라로 소개되었고 또 이 보고서를 토대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직접 무역을 하기 위해 1000 톤급의 선박인
코레아 호를 건조하였으나 일본 바쿠후의 반대로 코레아 호는 조선으로 항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때 일본의 간계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다양하게 지금의 제주도와 한반도가 그려진다.
본토는 몰라도 제주도는 유럽의 어느 나라 땅이 되었다가 지금의 홍콩처럼 변해서 되 돌려 받았을까?
그 영향으로 조선은 서구열강의 문물을 받아들여 강성한 나라가 되고 오히려 일본을 쳐들어 가고 중국을 정복해 버렸을까?
지금쯤 세계를 호령하는 거대 제국이 되어 미국과 라일벌전을 벌이고 있을까? 머..이런 잡다한 생각들..
용머리해안은 만조가 되어 돌아가서 뒷면을 볼 수가 없다.
닻을 내렸음에도 폭풍우에 해안가로 밀려 바위에 세 번 부딪히며 배가 좌초되었다는 흔적이라도 찾아 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더이상 물때 때문에 못 간다.
하멜표착 35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하멜 일행이 탔던 ‘스페르웨르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17세기 대양 항해용
상선인 네덜란드 ‘바타비아호’를 모델로 2003년 8월 16일 하멜 상선 기념관이 세워졌으며, 1980년 한국국제문화협회와 네덜란드
왕국해외문화 역사재단이 각 1만달러씩을 분담하여 공동으로 세운 하멜 표착기념비(높이 4m, 폭 6.6m)도 세워져 있다.
하멜에 비해 27년을 앞서 제주에 표도했던 박연은 동료 D.히아베르츠, J.피에테르츠와 함께 일본으로 가던 중 식수가 떨어져
제주도에 상륙하다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병자호란때는 참전하였다가 유일한 동료 둘을 잃고 말지만 그 후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통솔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조작법을 조선군에게 지도하였고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하였을 때 제주도로 내려가 통역을
맡고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는 임무도 담당했다.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의 풍속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서 여생을 마칠 정도로 한국에 동화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멜 일행의 조선 생활은 혹독했다.
제주에 머문 기간은 표착 직후부터 1656년 3월까지 약 2년 7개월간.
표착지 대정현에서 제주목으로 이송된 하멜 일행에게는 쌀과 밀가루가 지급되고 겨우 제공된 반찬은 입에 댈 수가 없어
소금을 물에 타 마셨다고 한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은 일본으로 떠나고 싶은 하멜 일행의 소원을 들어주려 노력했지만
정부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고 1654년 1월 이원진 목사의 후임으로 온 신임 목사는 쌀 대신 보릿가루를 주고 부식은
제공하지 않았다. 하멜 일행은 외출과 식량이 통제되자 일등 항행사와 선원 3명을 포함한 6명이 1차로 일본으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만다.
제주목사는 이 탈출사건에 대해 다른 일행들은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다른 일행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또 왜 탈출하려 했는가를 물었는데, 6명은 일본으로 가려고 그랬다고 대답한다.
제주목사는 그렇게 조그마한 배로 먹을 물도 없이 겨우 빵 몇 조각으로 갈 수 있었겠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곤장형에 처해지고 한 달 정도를 앓아 누워있어야 했으며
외출도 금지되고 밤낮으로 감시받게 되어 1차 탈출은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 만다.
그후 1654년 6월초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효종을 알현하여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 당하고
훈련도감에 배치된다. 군인이 되었지만 때로는 고관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들중 일부가 청나라 특사 방문을
계기로 두 번째 탈출을 감행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분노한 일부 대신들이 하멜 일행을 사형에 처하자는 주장까지 나오지만 결국 1년 9개월만에 한양에서 전라도로 유배된다.
결국 표착 인원 36명중에서 서울 호송때 부상자 1명이 사망하고, 탈출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던 2명이 사망하고, 강진에서
17명이 다시 사망하여 16명만이 살아남아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내 여수 순천 남원 등으로 뿔뿔히 흩어지고 만다.
1666년 여수에서 장사로 큰 돈을 번 하멜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두 배의 값을 주고 배를 구해 8명이 그해 9월 탈출에
성공하여 조선에 남아있는 이들은 하멜 탈출후 조·일간 송환 교섭을 통해 1668년 이 땅을 떠난다.
13년만의 일로 끝끝내 살아남은 자는 16명이었다.
(다음은 하멜표류기를 재미있고 알기쉽게 쓰여진 디시인사인드 갤러리의 역사짱님의 글과
흰구름님의 하멜표류기(해설)를
글쓴이가 각색 재 구성한 것이다.)
8월 3일
하멜은 선장과 함께 배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살펴보니 해류로 인해 예정된 진로에서 무려150km나 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멀리 타이완의 해안이 보이자 하멜은 진로를 수정하여 타이완 해안과 중국 본토 해안 사이를 통과하라고 선장에게 명령했다.
그게 화근이 될줄을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단지 그들이 그토록 믿던 하느님만 알고 계실뿐..
그것은 '폐쇄의 땅 조선을 서구열강에 널리 알려라'라는 하느님의 묵시적인 인도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결정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일등항해사과 십수년 바다생활을 한 그들은 섬과 본토 사이를 항해 한다는 것은 왠만한 기술이 아니면 어렵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쪽으로 배를 몰고가 결국 조선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 지게 되며 13년여의 세월을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하게될지는
꿈에도 모른채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뱃머리를 돌리자 마자 다음날인 8월 4일 부터 8월 11일까지 변덕스런 바다 날씨에 오도 가도 못하고 하멜 일행은 바다위를
표류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날씨는 8월 11일에 더욱 나빠져 하멜은 어떻게든 배를 동남쪽으로 돌려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8월 12일에서 14일동안 하멜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화가 났다.
그저 바람이 부는대로 파도가 치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리는 배를 제어 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높은 파도로 인하여 바닷물이 배 안에 까지 넘쳐 들어와 그 물을 퍼 내기에도 바빴다.
하멜은 그저 배가 어디로 가든지 그냥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8월 15일
바람이 너무 심해 갑판 위에서는 서로의 말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으며 작은 돛조차도 올릴 수가 없었다.
바닷물로 넘쳐나는 바닥의 물을 퍼내느라 선원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일을 계속해야 했다.
폭풍우가 몰아쳐 성난 바다에서 일엽편주가 되고 만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하멜은 곧 배가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생각에 선원들의 안위도 걱정이 되었지만 싣고 가는 상품도 걱정이 되었다.
책임감 강한 하멜은 자기자신의 안위보다 선원과 회사의 판매용 상품이 더 걱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저녁 무렵에 선수의 일부와 선미의 전망대가 파도에 떨어져 나갔고, 배의 제일사장마저 흔들리기 시작해서 잘못하다가는
선수 전체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하멜은 선수를 몽땅 잃지 않으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으나 배가 심하게 요동치고 집채만한 파도가 연 이어 배를 덮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멜은 차라리 앞 돛대의 돛을 조금 느슨하게 함으로써 선원들의 생명과 배와 회사의 상품을 구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심한 폭풍우로 인한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파도가 선미위를 덮쳐와서 갑판에서 작업을 하던 선원들이 하마터면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가 버릴 뻔했다.
이를 목격한 배의 선장은 절망하여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쳤다.
“다들 잘 들어라. 마스트를 끊어 버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다시 이런 파도가 한 두번 덮쳐오면 우리들은 모두 물귀신이 된다.
이제는 별 도리가 없으니 작업을 중단하고 모두 기도하자.."
그런 생사의 갈림길에 모든 선원들은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을 무렵, 새벽 1시경 망루에서 망을 보던 선원이 소리쳤다.
“육지다, 육지가 머스킷 총 사정거리에 있다.!”...이건 분명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이다.
하멜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칠흑같은 폭풍우속의 밤에 육지가 보인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파수꾼은 어둠과 폭우 때문에 육지를 일찍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게 모두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 때문이야'라고 생각한 하멜 일행은 곧 닻을 내리고 배를 돌렸는데
거친 파도와 심한 바람 때문에 닻이 지탱할 수가 없다. 사력을 다해 배가 안 움직이도록 해야 하는데 그때 순식간에 배가 바위에
세 번 부딪치면서 배 전체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판 밑의 침대에 있던 사람들은 미처 갑판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죽었고, 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들기도 하였으며
파도에 이리저리 밀리며 안보이게된 사람도 있었다.
15명이 육지에 다다랐는데 대개 알몸이었고 또 많이 다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아마 모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스로 바위위로 기어 올라가 배를 바라보니 난파선 안에서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계속 들리고 칠흙같은 어둠과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폭풍우로 인한 파도에 자신의 몸조차 겨눌수가 없어 누구인지 알아내지도 못했고 또 구해 낼 수도 없었다.
8월 16일
동이 트자 조금이라도 걸울 수 있는 사람들은 해변을 따라 걸으며, 혹시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이 있나 찾으며 소리쳐 불러 보았다.
그 소리에 숨어있던 몇 사람이 여기저기에서 더 나타나 모두 36명이 되었지만 대부분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난파선을 살펴 보니 이름모를 선원이 커다란 나무통 두 개 사이에 끼어 있어 곧 구출해 내었으나 3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그의 시체는 처참하리 만큼 심하게 뭉개져 있어 지난 밤의 악몽같은 현실에 치를 떨어야 했다.
하멜과 그 선원들은 비통한 심정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아름답던 배는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64명의 선원 중 불과 36명만이
살아 남은 것이다. 이 지옥같은 참상이 모두 15분 사이에 일어났던 것이다.
하멜 일행은 그래도 혹시 있을지도 모를 생존자와 해안으로 밀려 올라온 시체를 수습하러 찾아 다녔다.
불행한 그 배의 선장은 물에서 20m쯤 떨어진 곳에서 팔베게를 한 채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고 여기저기서 발견된 6, 7명의
죽은 선원과 함께 양지바른 곳에 매장했다.
하멜일행은 지난 2, 3일 동안 심한 폭풍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혹시 해안으로 밀려온 식량이 없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밀가루 한 포대, 고기 한통, 베이컨과 붉은 스페인산 와인이 들어 있는 나무통만 있을 뿐이고 정작 필요한 불은 구할 수 없어
요리도 할 수가 없어 쫄쫄 굶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야자수 나무와 종처럼 봉긋이 서있는 바위산만 있을 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안 보여 하멜은 이곳이 무인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 벌어질 13년간의 악몽같은 현실의 시작점 이었음을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가 상륙했던 곳은 바로 제주도 대정현 앞바다 용머리 해안이였으며. 그들은 곧 조선인들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8월 17일
모두가 시름에 잠겨 있을 때 멀리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멜은 그들이 일본인이기를 기대했다.
그래야만 그의 일행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오가 조금 못 되어 약 200~3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다. 하멜은 그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지만 그 사람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새하얀 모습의 낯선 이방인들을
보자마자 마치 귀신을 본 듯 질겁하며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 버렸다.
정오가 지나서는 세 사람이 카논포의사정거리쯤 까지 왔기에 하멜이 손짓 발짓을 다해도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 들중 한 사람은 대승총, 또 한 사람은 활을 가지고 있어 겁이 좀 났지만 당장 배가 고프니 어떻겠는가.
일행 중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로 가서 총을 들이대고서야 겨우 불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하멜은 나중에 그가 본 사람들을 '중국식 복장을 했는데 말총으로 짠 모자를 쓰고 있어 그들이 해적이 사는 곳이나 본토에서 추방된
중국인이 사는 땅에 온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모두 겁을 집어 먹고 말았다.'라고 쓰고 있어 당시의 긴박함을 드러냈다.
아닌게 아니라 저녁 무렵 약 100명 정도의 무장군인들이 천막 주변으로 와서 이 기괴한 이방인들의 수를 세고 밤새 그들을 감시한다.
하멜 일행은 그렇게 꼼짝없이 해적이나 중국본토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고 추측한 곳에 붙잡히고 만 것이다.
8월 18일
이른 새벽부터 대형 천막을 만드느라 분주하는데, 정오 무렵 1천 명 내지 2천 명 정도의 기병과 보병들이 몰려와 천막을 포위하고
서기, 일등항해사, 이등갑판장, 사환을 연행해 갔다. 병사들이 네 명을 데리고 가면서 각각의 목에 쇠사슬을 감았는데, 거기에는
방울이 매달려 있어 걸어갈때도 딸랑딸랑 소리가 나 더욱더 겁이 났다.
군인들은 이 네 명을 땅바닥을 기어가게 해서 그들의 지휘관 앞에 다가가게 하고는 꿇어 엎드리게 했다.
그러자 지휘관 옆에 있는 군사들이 함성을 질러 대자 텐트 안에 있는 선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서로에게 “우리도 끌려갈 것이다.”
라고 말하며 안절부절 했다. 지휘관이 하멜 일행에게 무엇인가를 물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다. 그래도 하멜은 손짓 발짓
해 가며 일본에 있는 나가사키로 가려 했다는 걸 말해 보려 했으나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그 들은 네덜란드인들이 흔히 부르던 Japan[야판]이라는 말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들은 일본을 예나레 라든다 이르폰이라 불렀기에 야판을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었을 것이다.
뜻밖에도 지휘관은 하멜 일행에게 각각 술 한 잔씩을 주게 하고는 텐트로 되돌려 보냈다.
약 1시간 뒤에 군인들은 하멜 일행에게 쌀로 만든 죽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것은 하멜일행이 몹시 굶주려 있었기에
갑자기 많은 음식을 먹으면 해로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후에 군인들이 밧줄을 가지고 왔다. 그러자 하멜은 덜컥 자기들을 묶어 죽이려는가 싶어 겁이 났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군인들은 난파선이 있는 쪽으로 걸어 가서 시끌벅적 떠들면서 쓸 만한 것을 주워 모아 묶었다. 저녁에는 하멜일행에게 쌀밥을 주었다.
정오에 일등항해사가 위도를 측정하여 그들이 북위 33도 32분에 있는 켈파르트[제주도] 섬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일찍이 나가사키에 있는 네덜란드 회사 일지에는 1647년 11월, 그 섬(제주도)이 언급되어 있다.
“마테우스 에보켄이라는 생존자가, 그들이 켈파르트 섬(제주도)에 붙잡혀 있었고 일등항해사가 이 섬을 알고 있었으며
이곳은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고 설명해 주었다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그제서야 하멜은 자신들이 표착한 곳이 중국이 아닌 켈파르트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8월 19일
군인들은 표류물들을 육지로 옮기고 그것을 볕에 말리고 못이나 쇠붙이가 붙어 있는 나무를 태우느라 바삐 움직였다.
아마도 나무에서 쇠붙이들을 빼 내려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하멜 일행의 사관들이 어제 만났던 지휘관을 방문하여 각각에게 쌍안경[망원경]을 주고 한 통의 붉은 포도주를
은술잔에 따라 주며 교제를 시작했다.
포도주 맛을 본 상급 지휘관들은 아주 맘에 들어 하면서 과음을 하게 되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일행들을 천막까지 바래다 주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었기에 안도한 하멜 일행은 그 은술잔을 기념으로 지휘관에게 선물로 주며 잘 지내보자고 말했다.
8월 20일
군인들이 철제품을 뽑아내기 위해 난파선과 나무 조각들을 불태우고 있을 때 불타고 있는 난파선 안의 대포알이 들어있는 두 개의
대포가 폭발했다. 갑작스런 폭발소리에 놀란 그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모두 도망쳤다가 별일이 없음을
알고 돌아와서는 다시 터질 것이냐고 우리에게 손짓으로 물어 보았다.
우리는 이제 더 폭발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 시켰더니 그들은 다시 나무에서 철을 분리시키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친숙해진 군인들은 우리들에게 하루에 두 번씩 약간의 음식을 갖다 주었다.
8월 21일
아침이 되자 지휘관은 하멜일행에게 천막 안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봉인하여 자기 앞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봉인을 한 뒤 하멜일행이 지휘관 앞으로 가져와서 앉아 있을 때, 인양 작업 중 짐승 가죽이라든가 철물, 그 밖의 것들을 훔쳐간
몇몇 도둑들이 끌려왔다. 지휘관은 도둑들을 뒷짐으로 포박하여 하멜 일행 앞에서 앞으로는 절대로 물건을 훔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일 때까지 그들을 처벌했다.
마치 하멜에게 물건이 앞으로는 도난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과시하려는 것 같았다.
불쌍한 도둑들은 길이가 1m쯤 되고 굵기가 보통 아이의 팔뚝만 한 몽둥이로 발바닥을 맞았다.
일부는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는데 한 사람당 30대 내지는 40대를 맞았다.
정오 무렵 지휘관은 하멜일행에게 이제 제주목사가 있는 관헌으로 출발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말이 주어지고 부상 때문에 말을 탈 수 없는 사람은 지휘관의 명령으로 들것에 태워졌다.
오후에 하멜일행은 호위병으로 따라온 기병과 보병들의 친절한 호위를 받으며 표착지를 출발했다.
저녁무렵 하멜일행은 대정이라는 작은 읍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하멜은 그곳을
'여관이나 숙소라기보다는 마구간 같은 곳이었다'고 악평했다. 어쨋든 그렇게 하멜일행은 그날 약 6km 정도를 여행하였다.
8월 22일
이른 아침, 하멜일행은 말을 타고 여행을 계속하느데 도중에 조그마한 어느 성채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두 척의 청나라 전투용 정크선을 보았고 그곳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오후에 하멜일행은 목간이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제주 목사의 관저가 있었다.
하멜 일행이 도착하자 제주 목사는 우리를 관청의 앞마당에 모이게 한 다음 미음 한 그릇씩을 들게 했다.
하멜일행은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식사이고 모두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포졸들의 총이랑 전쟁에서 쓰는 갖가지 물품들,
다양한 옷차림들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약 3,000명 정도의 무장 병졸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행동은 중국인이나 일본인 사이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었다. 곧 하멜과 전에 지휘관앞에 끌려갔던 세 사람은 다시 제주 목사 앞으로 끌려 갔다.
그들이 한참 동안 꿇어 앉아 있었는데, 관청 앞 대청마루에 왕처럼 앉아 있는 제주 목사의 모습이 보였다.
하멜 일행이 목사 가까이에 앉으니, 그는 손짓으로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하멜은 온갖 손짓 발짓으로 앞서 했던 대로 '일본의 나가사키로 간다고'를 나타내고자 했다. 이에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뭔가 알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다른 사람들도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한 번에 4명씩 앞으로 나가 심문을 받았다.
각각의 질문 때마다 하멜일행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몸짓으로 대답 했으나 서로의 말을 아직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목사는 하멜 일행을 어떤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은 현 왕의 숙부(광해군)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이었다.
그는 왕위를 찬탈하고 선왕을 폐위하려다 이 섬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그 집은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하멜일행은 하루에 3/4개티(600g)정도의 쌀과 밀가루를 각각 받았으나 그것과 같이 먹을 수 있는
부식은 거의 없었고, 있는 것도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것이 못 되어서 소금과 물만 넣어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하멜은 제주목사가 친절하고 사리를 잘 판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 목사는 왕에게 편지를 띄워서 우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려 주는 답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까지의 거리는 해로로 90km를 가서 다시 육로로 500km 이상 가야 하기에 답신이 빨리 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린 그에게 이따금 고기와 그 밖의 부식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더 이상 쌀과 소금 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기분도 풀겸 몸을 씻거나 옷가지를 빨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매일 6명씩 교대로 외출할 수 있게 되었고 부식도 주어졌다.
이따금씩 그는 우리를 불러 이것 저것 묻게 했고 네델란드말로 뭔가를 쓰도록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우리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오락거리를 주어 우리의 시름을 달래 주려고 노력했다.
매일 "국왕으로부터 답신만 오면 너희들을 일본으로 보낼 것이다." 라며 위로해 주기도 한다.
그는 또 부상자도 치료 받도록 조처해 주었다. 하멜은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10월 29일
오후에 하멜과 일등항해사 그리고 하급선의가 제주 목사에게 불려갔다.
그곳에 가 보니 긴 붉은 수염을 한 어떤 사람이 있었다.
목사가 그가 ‘어떤 사람’일 것 같느랴를 물어서 하멜일행은 "우리와 같은 네델란드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제주 목사는 웃으며
하멜일행에게 그는 조선 사람이라고 손짓 발짓으로 설명해 주었다.
많은 이야기를 손짓 발짓을 주고받은 끝에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 붉은 수염의 남자는 서툰 네들란드말로 더듬더듬 말했다.
"여러분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서 왔습니까?"
하멜일행은 대답했다.
"저희들은 암스테르담 출신의 네덜란드 사람입니다"
그는 또 하멜일행에게 물어왔다.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는 길이었습니까?"
"타이완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던 중 전능하신 하나님이 길을 막아 폭풍우에 5일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이 섬까지 표류하게 되어
지금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출되는 것만 바라고 있는 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번엔 하멜 쪽에서 그에게 그의 이름과 국적,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나의 이름은 얀 얀스 벨테브레 이고 드 레이프 출신이며, 1626년 홀란디아호를 타고 고국을 떠나, 1627년 오웨르케르크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조선 해안 근처에서 역풍을 만나 표류하다 식수가 부족하여 보트로 육지까지 왔다가 우리들 중 세 사람만이
주민에게 붙잡혔고, 나머지 사람들은 보트를 타고 도망쳐 배까지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 의 동료인 라이프 출신의 디르크 헤이스베르토스존과 암스테리담 출신의 얀 피이테르세는 17년전에
만주족이 이 나라를 침공했을 때 전사했습니다."
하멜일행은 그에게 계속 물었다.
"어디서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 때문에 이 섬에 왔습니까?"
벨테브레는 대답했다.
"서울에 살고 있고 왕으로부터 적당한 식량과 의복을 지급받고 있으며 이곳에 보내진 이유는 당신들이 누구이고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아 보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벨테브레는 그러면서 또 덧붙였다.
"여러 차례 왕과 관리들에게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청원했지만, 왕은 항상 ‘당신이 새라면 그곳으로 날아갈 수 있겠지만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 당신을 보호해 주겠으며 적당한 식량과 의복을 제공해 줄 테니 이 나라에서 여생을 마치라.’고
대답하면서 거절했습니다."
벨테브레는 하멜일행을 위로하면서 만약 우리가 왕을 만나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일본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멜일행은 뜻밖에 네델란드인을 만나 크게 기뻐했지만 이 말을 듣고 다시 크게 실망했다.
벨테브레는 하멜일행을 조사한 일을 통역해서 조정으로 보냈다.또한 제주 목사는 ‘답신이 곧 올 것이며 좋은 소식이 와서
너희가 일본으로 보내질 것’을 바란다며 매일 하멜일행을 격려해 주었다.
또 벨테브레와 그의 관리 한 사람이나 상급 감독관을 매일 하멜일행에게 보내어 하멜일행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보고 하게 했다.
12월 초에 새로운 목사가 부임해 왔다.전임자의 3년 임기가 다 끝났기 때문이었다.
하멜일행은 신임 목사가 새로운 통치 스타일을 띄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하멜일행은 전 제주목사의 너그러운 조치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신임 목사가 직무를 시작하면서 하멜 일행의 부식을 다 빼앗아 갔다.
이제 하멜 일행은 쌀과 소금, 그리고 마실 물 밖에 먹을 수 없었다. 하멜 일행은 바람 때문에 아직 섬에 머물러 있는 전임 목사에게
이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의 임기가 다 끝나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지만 신임 목사에게 서신을 띄워 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전임 목사가 있는 동안은 신임 목사가 그러한 불평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때때로 부식을 조금씩 제공해 주었다.
1654년
1월 초에 그동안 정들었던 전임 목사가 육지로 떠나가게 되었다. 그 이후 하멜 일행의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하멜 일행은 쌀 대신 보리를, 밀가루 대신 보리 가루를 지급 받았고 부식은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부식을 얻으려고 보리를 팔아야
했는데 하루에 4분의 3캐티의 보릿가루로 견뎌야 했으나 6명이 교대로 외출하도록 허락 받은것에 다소 위안을 삼았다.
이렇게 자유도 없고 제대로 먹지 못하여 감옥같은 삶에 비참한 심정이 된 하멜 일행은 급기야 도망칠 궁리를 모색했다.
그무렵 봄이 오고 장마철이 되어도 국왕으로부터의 답신은 오지 않아 하멜 일행은 섬에 유배된 채 죄수 같은 상태로 삶을 마감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그래서 첫 번째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하멜 일행은 밤에 부두 근처에 계류 중인 배로 탈출할 궁리를 했는데, 4월 말에 그 기회가 왔다.
일등항해사를 포함한 6명이 탈출 계획을 세웠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하멜 일행이 점찍어 둔 배로 가던 길에 썰물이 끝났나를 알아
보려 담을 넘다가 개들이 짖는 바람에 경비가 더 삼엄해져 되돌아오고 말았다.
결국 하멜 일행의 첫 번째 탈출 시도는 담을 넘기도 전에 허망하게 끝났다.
5월 초에 항해사는 다른 5명의 선원과 같이 외출했다가 마을을 벗어난 곳에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고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은 배
한 척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곧 그들은 한 사람을 숙소로 보내 이런 경우를 위해 그동안 꼬아 놓은 새끼줄과 일인당
두덩이씩의 빵을 가져 오게 했다. 그들은 물 한 그릇씩을 마시고 준비한 새끼줄과 빵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이 배에 타서 모래톱을
지나 바다로 배를 밀어냈다. 일부 마을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배를 같이 밀어주었지만 나머지 몇몇 구경꾼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 당황해 있다가, 그 중 한 명이 집에서 화승총을 가지고 와서는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뭍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가고 있었다.
불행히도 한 선원은 배를 매어 두던 밧줄을 풀다가 배에 탈 시간을 놓쳐 버려서 다시 해안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배에 탄 사람들도 돛을 올리긴 했으나 장비에 익숙치 않아서 돛을 매어 단 돛대가 갑판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하여 돛대를 다시 세웠고 새끼줄로 비끄러 매어 고정시킨 후 다시 돛을 올렸다.
그때 돛대의 목재 받침대가 부러져서 돛대와 돛이 두 번째로 넘어졌다. 다시 세우지를 못하고 그들은 육지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바닷가로 떠밀려 오게 되었다.
육지에 있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곧바로 다른 배로 그들을 쫓아왔다. 두척의 배가 서로 가까이 접근하게 되자, 탈출하려던 6명은
그들이 총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배에 뛰어올라 쫒아온 사람들을 바닷속으로 던져 버리고 그 배로 계속 항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포구는 바닷물이 가득 차 있어서 탈출에 적합치 않고 배의 조작에도 서툴러서 결국 탈출에 실패하고 모두들 해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바로 체포되어 제주 목사앞으로 연행되어 갔다.
각각의 몸에는 두꺼운 칼이 씌워지고 한 손에는 칼에 연결된 수갑이 채워지고 목에는 사슬이 둘러졌다.
그렇게 족쇄가 채워진 채로 목사 앞에 포복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소환되어서 목사 앞에 붙들려 갔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동료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왜 니네들끼리 도망치려 했느냐라는 말이 목구멍앞에까지 나왔다가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다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제주목사는 그들이 '이 일을 저지른 것을 다른 선원들은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또 '왜 그랬는가'를 물었는데, 탈출을 감행한 이 6명의 외국인들은 '일본으로 가려고 그랬다'고 대답했다.
제주목사는 '그렇게 조그마한 배로 먹을 물도 없이 겨우 빵 몇 조각으로 갈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감옥같은 곳에서 서서히 말라 죽느니 배를 타고 가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나을을 거라고 대답했다.'
제주목사는 칼을 풀게 하고 엉덩이를 내리게 하고서 길이가 6자 가량 되고 끝이 둥글고 두께가 손가락만 하고 폭이 손바닥만한
노 모양의 몽둥이로 25번씩 내리치게 했다. 그 때문에 6명의 선원들은 약 한 달 정도를 누워 있어야 했다.
이후 하멜 일행의 외출은 금지되고 더욱 엄중하게 밤낮으로 감시받게 되었다.
이렇게 하멜 일행이 여러번 탈출계획을 세웠지만 그때마다 실패하고 죄수나 다름없는 연금생활을 당하고 있을 때, 드디어 서울에서
그들을 압송하라는 명령서가 전달된다. 이제 하멜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지긋지긋한 제주도에서의 삶이 끝나가고 있었다.
서울에 가면 조선인들의 왕을 만나 제발 일본으로 돌려 보내 달라고 사정하면 들어주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5월 말경,
하멜 일행을 압송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하멜일행은 6, 7일 후에 4척의 정크선에 나누어 태워진다.
이때 하멜 일행은 두 다리와 한 팔은 배에 묶인다. 이것은 하멜 일행이 정크선 한 척을 빼앗아 버릴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하멜 일행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능수능란한 선원이며 또 잘 훈련된 병사의 임무도
가능했기에 풍랑에 배멀리로 고통스러워 하는 호송 군인들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틀이나 배안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때마침 남풍이 불어 정크선이 항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배에서 풀려나와
감옥으로 되돌아왔다. 4, 5일 후에 바람이 다시 순조로워져서 아침 일찍 정크선에 타서 전번과 같이 묶이고 감시를 받았다.
닻을 올리고 돛도 세우고 출발해 저녁에는 전라도 땅 해남에 도착해서 입항했다.
아침에 상륙했는데 역시 병사들의 엄한 감시를 받았다.
다음 날 말을 타고 해남읍까지 갔다. 정크선이 도착한 장소가 각각 달랐기 때문에 하멜 일행36명은 그날 저녁에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음 날에는 약간의 음식을 먹고 다시 말을 타고 저녁 무렵쯤 영암에 도착했다. 그날 밤 하멜 일행 중 동료 한명이 죽었다.
영암 군수의 명령으로 그는 하멜 일행 앞에서 매장되었다. 하멜 일행은 죽은 동료의 넋을 위로하고 묘지에서 말을 타고 다시 출발하여
저녁에 나주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하멜 일행은 다시 떠나서 그날 밤을 장성에서 보냈다. 다음 날 아침에 하멜 일행은 입암산성이 있는 높은 산을 넘어
정읍에서 밤을 보냈다. 다시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는 태인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말을 타고 정오 무렵에 금구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떠나 저녁에는 전주라는 큰 고장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전주를 떠나 여산에 도착했는데 하멜은 이곳이 전라도의 마지막 고장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음 날 아침 말을 타고
떠나 저녁에 충청도의 은률에 도착했다. 다음 날 연산으로 가서 하룻밤 묵고 그 다음 날 저녁 공주에 도착했다.
다음 날 큰 강을 지나 경기도에 이르렀다. 다시 며칠을 여행하여 몇 고장과 마을에서 밤을 보낸 후에 한강을 넘었다.
일행은 배로 강을 건너 3km 정도 말을 타고 가 서울에 도착했다.
약 500km정도의 긴 여행을 하루에 45km 정도를 말을 타고 갔다. 서울까지 가는 길은 적어도 12일 걸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54년 6월 26일에 이 일행이 서울에 도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서울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처음 2, 3일 동안은 모두 한 집에 수용되어 있었으나 다음에는 2~4명씩 나뉘어져 중국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 집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숙소가 정해진 후 곧 바로 효종앞에 끌려갔다. 왕은 벨테브레(박연)를 통하여 하멜 일행에게 이것저것을 물어 왔다. 하멜 일행은 왕에게 이곳에 온 경위를 설멸했다.
"폭풍우를 만나 낯선 땅에 오게 되어 부모, 처자식, 친구를 못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일본으로 보내 동포도 만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요."
효종은 벨테브레(박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서 죽을 때 까지 살아야 하며, 대신 너희들을 부양해 주겠다."
그렇게 대답한 효종은 하멜 일행에게 네덜란드 식으로 춤을 추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하고 하멜 일행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보이도록
했다. 효종은 나름대로 하멜 일행를 잘 대해 주었으며 일인당 포목 2필씩을 주어 조선 복식과 네델란드 복식으로 옷을 지어 입게 했다.
그 다음날 훈련도감의 대장 이완의 호출을 받아 하멜 일행은 그곳에 가게 되었다.
이완은 벨테브레의 통역을 통해 효종이 하멜 일행을 이완의 호위병으로 삼았다는 말을 전했다.
또한 하멜 일행은 이제 매달 70근에 상당하는 쌀을 받게 되었다. 또 각자에게 나무로 된 둥근 호패를 주었는데 거기에는 조선말로
하멜 일행의 이름, 나이, 국적(네덜란드 사람), 왕을 위해 하멜 일행이 할 역할 들이 문자로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 왕과 장군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화승총 한 자루씩과 화약, 총알을 지급받았고 초하루와 보름 때마다 장군에게 와서 고개 숙여 충성을 표해야 한다고 명령받았다.
중국인 호위병과 벨테브레가 하멜 일행을 통솔하여 조선식으로 하멜 일행에게 가르치고 감독하게 되었다.
하멜 일행 각각에게는 필수품을 조달하고 옷을 만들도록 포목 2필씩이 지급되었다.
매일 하멜 일행은 고관들의 집을 방문하도록 명령 받았는데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하멜 일행를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하멜 일행이 사람이라기 보다는 괴물과도 같다는 소문을 퍼뜨렸기에 궁금했던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위층 사람들이 하멜일행을 보고 매우 놀랐고 자기들보다 하멜 일행이 더 나아 보인다고 생각하는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흰 피부였다. 조선 고위 관리들은 흰 피부를 몹시 선호했다. 처음에 하멜 일행은 하멜 일행이 살고 있는 골목길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심지어 집에서조차 담너머 구경꾼들 때문에 편히 쉬질 못했다. 마침내 이완이 그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찾아가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우여골절을 치룬 하멜 일행은 결국 일본으로 간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1654년 8월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다.
효종은 자신의 꿈인 북벌을 위해서 청 사신에게 하멜 일행이 와 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되었다.
군대를 서구식으로 무장하고 또 훈련을 시키려면 하멜같은 외국인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그들이 사신의 눈 밖에 있어야 했다.
하멜 일행은 남한산성에 옮겨졋다. 그 곳은 도성에서 부터 21km정도 떨어진 아주 높은 산을 6km 가량 더 올라간 곳에 있었고
매우 견고하여 전쟁때에는 국왕이 피난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3년치의 식량이 저장되어 있어 수천 명은 먹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후 청나라 칙사가 떠난 9월 2, 3일경까지 계속 그곳에 있었다.
11월 말이 되니
날씨가 몹시 추워져서 서울 밖 3km 정도 되는 곳에 떨어져 있는 강이 단단하게 얼어 붙어 200~300마리 정도의 짐을 가득 실은 말들이
줄을 지어 건너다닐 수 있었다. 12월 초에 이완은 하멜 일행이 추위와 가난으로 고생하는 걸 보고 효종에게 보고했다. 효종은 제주도에 난파된 배에서 가져온 가죽을 하멜 일행에게 주도록 명령했다. 하멜 일행은 이 가죽으로 추위를 이길 물건을 사기보다 아예 2, 3명씩
살 집을 몇 채 사자는 데에 동의했다. 이것은 매일 하멜 일행 더러 땔감을 해 오라고 괴롭히는 주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추위 속에 20km 이상의 산길을 땔감을 마련하러 다녀오는 일은 그 일에 익숙치 않은 하멜 일행으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같은 기독교도가 아닌 이 조선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느니 차라리 추위를 견디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각각 은전 3, 4테일씩을
추렴하여 한 채에 8, 9테일씩 하는 조그마한 집들을 샀다. 나머지 돈은 옷을 사서 추운 겨울을 지냈다.
1655년 3월에
청나라 칙사가 다시 왔다. 이때도 하멜 일행은 집에서 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청나라 칙사가 떠나던 날 뜻밖의 사태가 터진다. 암스테르담 출신의 일등항해서 헨드릭 얀스와 할렘 출신의 포수 헨드릭 얀스
보스가 땔감 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숲 속으로 가서 청나라 칙사가 지나가기로 되어 있는 길에 숨어 있었다.
수백 명의 기병과 보병의 호위를 받으며 그가 지나가는 순간, 얀세 일행은 그들 대열 사이를 뚫고 들어가 칙사가 탄 말의 고삐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조선옷을 벗어 버리고 네덜란드 복장으로 청나라 칙사 앞에 서 있었다. 곧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다.
청나라 칙사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물었으나 말이 통할리 없었다. 사신은 이 외국인들에게 그가 저녁에 묵을 곳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그는 호위한 사람들에게 항해사의 말을 통역할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고 곧 벨테브레가 왕의 명령으로 오게 되었다.
이사건으로 인해 하멜 일행은 모두 왕궁으로 끌려갔다. 어전회의 앞에 붙들려 나가서 이 일을 아느냐는 질문이 떨어지자 하멜 일행은
모두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결국 하멜 일행은 동료가 도망쳤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볼기에 50대씩 곤장을
맞았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효종은 곤장친 일에 대해서 못마땅 하게 여겼고, 외국인들이 조선에 온 이유는 약탈하려는 것이
아니고 폭풍 때문에 어쩔수 없이 피난 온 것이니 더이상 괴롭히지 말라며 따로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집에 있으라고 되돌려 보냈다.
한편 칙사앞에서 소란을 피운 항해사는 칙사의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그때 효종과 고문관은 이 사실이 중국 황제에게 알려질까 봐 청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매듭지으려 했다.
그들은 제주에서 그들이 건져낸 물건과 총을 공물로 내놓으라 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하멜 일행 중 항해사와 포수는 나중에 서울로 압송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얼마 후에 죽게 되었다.
하멜 일행은 그들을 면회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연사 했는지 참수 되었는지 분명히 알지 못했다.
청나라 사신앞 사건으로 하멜 일행은 이제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1656년
국왕의 고문관(도승지)들이나 고관들이 우리들이 다시 칙사앞에 나가서 말썽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이제는 우리들에게 넌더리가 나서 국왕에게 죽이자고 건의하였다. 이 문제로 3일간의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국왕 및 국왕의 동생과 이완.그리고 우리들과 관계가 있었던 고관들은 모두 우리들을 처형하는데 반대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목숨은 여러 사람들의 처형 주장을 뿌리친 채 국왕과 그의 동생에 의해서 결국 살게 되고,
국왕은 우리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건의에 따라서 전라도 강진땅으로 유배하였다.
다행이 국왕 자신의 수입 중에서 매월 50폰드의 쌀을 지급받게 되었고 3월 초에 우리들은 드디어 말을 타고 서울을 떠나
유배지인 강진으로 떠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상경할 때 지나간 마을과 고을들을 거꾸로 지나서 영암까지 갔는데 밥값과 말값도 역시 상경할 때처럼
국비의 혜택을 받아 무료로 올 수 있었다.
영암서 1박한 다음날 아침에 다시 출발하여 점심 때 쯤 전라병영이라는 고을 옆의 산에 성채가 있는 큰 읍에 도착했다.
거기는 전라감사의 차석으로 전라도의 군사령관인 절도사가 있었다. 우리들은 국가 소유의 건물에서 살게 되었는데 3일 후에는
작년에 온 세 사람도 함께 합류하여 인원은 모두 33명이 되었다. 4월에는 그동안 제주도에 방치되어 있던 녹피를 몇 장 얻어왔다.
그것들은 상했기 때문에 서울에 보낼 정도로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기에 제주도에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 일부를 팔아 의복도 장만하고 새로운 집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으며 절도사는 우리들에게 월 2회씩
관청 앞에 있는 광장의 풀을 뽑도록 지시했다.
1657년
년 초에 병영 목사는 정무상 과실 때문에 국왕의 명령으로 서울로 소환되어 사형을 당할 뻔 했으나 백성들로 신망을 받고 있었기때문에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명문가 출신이였기에 국왕의 특사를 받아 더 높은 지위로 영전이 되었다.
2월에 신임 목사가 부임했는데 9월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통치는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우리들이나 주민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기뻐했다.
11월에는 다시 신임 목사가 부임했는데 그는 우리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의복과 물건들을 부탁했지만 그는 "나는 국왕으로 부터 쌀을 지급해 주라는 명령밖에는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필요한 물건은
다른 수단을 써서 너희들 스스로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조선 사람들이 호기심이 많고 진기한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는 것과 또 이 나라에서는 구걸한다는 것이 하나도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것들을 이용해서 겨우살이에 필요한 물건들을 겨우 장만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소금 한 줌을 얻기 위해서 반 마일이나 걸어야 했기에 이러한 사실을 목사에게 호소하면서
"우리들은 나무를 해서 팔아 내내 생활해 왔습니다만, 옷이 헤어지고 식사는 쌀고 소금, 그리고 물만 가지고 해야 되니 괴롭습니다.
3~4일 만에 한 번 씩 일반 농민이나 절에 가서 구걸해서 월동준비를 하고자 하는데 허락해 주십시요."라고 간청했더니 겨우 허가되어
우리들은 다시 어느 정도의 의복을 얻어 겨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1659년
효종이 서거하고 청의 동의를 얻어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우리들은 전처럼 국왕의 원조를 받았으며 가끔씩 절에 가서 도움을 받기도 했다.
스님들은 아주 자비심이 많았으며 특히 우리나라 사정이나 다른나라의 소식을 알려주면 기분좋게 우리들에게 보시해 주었다.
그들은 외국소식을 몹시 듣고 싶어 해서 우리들이 말하기에 지치지만 않는다면 밤새도록이라도 듣고 싶어 했다.
오히려 스님들이 위정자들보다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서 유일한 우리들의 안식처였다.
1660년
년초에 신임 목사가 부임했다.
신임목사는 매우 호의적이어서 가끔 "만일 내 개인의 권한으로 처리될 수 있다면 여러분의 부모나 친구 곁으로 보내고 싶지만.."하고
우리들을 위로했다. 이 해와 다음 해는 무척 가물었기 때문에 흉년이 들어 1662년에는 추수전까지는 식량이 매우 귀해서 몇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교통수단은 도둑들 때문에 마음대로 이용하지 못하게 되고 국왕의 명령에 따라 여행자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경비를 철저히 했다.
그것은 길거리에서 아사한 사람들을 매장하고, 매일처럼 일어나는 살인이나 강도를 예방하기 위해서 였다.
여러마을에서 그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국고를 습격하여 식량을 강탈해 갔으나 그들은 고관대작들의 하인이라는 이유로
체포 되지는 않았다. 백성들은 도토리, 송피 그리고 풀을 뜯어 먹으며 연명해 갔다.
그런한 기근으로 인해 하멜일행은 다시 남원 순천 여수 등지로 뿔뿔히 흩어지게 되고
하멜은 운좋게 바닷가인 여수로 가게 된다.
드디어 운명처럼 조선을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멜이 여수가 아닌 남원이나 순천으로 옮겨졌다면 과연 탈출할 수 있었을까..
역시 그들의 신인 하느님은 조선을 서구열강에 널리 알리고자 하멜을 여수로 보낸 것이다.
청나라 사신 일과 전염병, 기근 등으로 인해 여수로 유배를 떠난 하멜.
당시 일본의 배가 빈번히 출몰하던 지역이었던 여수는 일본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수군사령부인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여수에서 장사로 돈을 모은 하멜 일행은 1666년 9월 4일 어민들의 도움을 받아 8명이 탈출, 12일 만에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그리고 하멜 일행은 나가가키 부교의 심문을 받는다.
그 내용은 상선의 규모, 항해 목적, 난파 경위와 조선에서의 생활, 군사정보, 경제, 풍습 등과 조선의 대외 관계 및 탈출경위.
조선의 입장에 대한 내용 등 54개항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에도 막부에 보고되었고, 막부는 하멜 일행을 데지마에 1년
더 억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에도 막부는 조선에 외교문서를 보낸다.
막부의 외교문서집인 ‘통항일람’에는 탈출자들이 기독교인지 아닌지를 조선에 문의하는 것으로 되었으나
한국 측 자료 ‘현종 7년과 8년의 실록’에는 이와 다른 기록이 있다고 한다.
“하멜 일행의 억류 사실을 놓고 막부 측이 10달간이나 집요하게 조선 조정에게 공격해온 사실이 있다. 막부 측은 하멜 일행을
억류시켜 놓은 채 이 사실을 조-일간의 외교 분쟁으로 비화시켰던 것이다.”
에도 막부는 임진왜란 이후 왜관으로 한정됐던 무역량을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하멜 일행의 심문 내용을 이용한 것이다.
즉, 막부는 하멜 일행의 탈출을 이용해 조선과의 무역량을 늘리고자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귀화한 박연 등의 활약으로 인해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조선과의 외교전이 실패하자 막부는 1668년 하멜 일행의 출항을 허락한다.
네덜란드로 돌아온 이들은 밀린 임금을 지급 받고자 상선의 기록을 맡았던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생활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동인도 회사에 제출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하멜 일행은 14년여의 급여를 지불받는다.
하멜의 보고서는 시중으로 유출되어 소책자로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다 한다.
이후 네덜란드는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고, ‘코레아호’라는 대형 상선까지 건조하였지만 데지마 봉쇄령을 무기로 삼은
일본 막부의 방해로 없던 일이 되고 만다.
이로 인해 ‘코레아 호’의 조선 상륙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멜..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은 이곳에 있지만 왠지 초라해 보인다.
하멜은 분명 조선에서의 치욕같은 13년간의 삶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그때 기록을 해 놓은 것도 아니고 기억에 의한 리포트를 썼기에 분명 잘못된 기록도 있을 것이고 잘못 알고 있던
기록도 있을 것이다. 또 밀린 급여를 받기 위해 자신의 삶을 아주 처절하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 부터 약360여년전 제주에 표도한 한 이방인의 눈으로 본 조선의 실태는 어쩌면 객관적인 눈으로 본 조선일 수도 있다.
당시 모든 기록들이 정권을 가진 자들..재산을 많이 가진 자들..또 양반이라는 계급사회에서 학문으로 이름을 날린 자들의 편협된
시각이 들어있는 역사기록물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 하멜 상선 전시관에 생뚱맞게 히딩크 기념관도 같이 있는
연유는 또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전시관 전체가 당시 스페르웨이호를 재현한다고 하며
내부를 꾸며 놨지만 정작 하멜 관련 자료는 많이 부족하다.
2층은 전시관이고 1층은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영상관과
히딩크 관련 전시관으로 꾸며 놓아 하멜 상선 전시관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하멜의 표착지가 불분명하니 이 하멜상선전시관을
철거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정확한 표착지가 확인되면
옮겨 전시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하멜이 왔다간지 360년이 되건만 하멜의 표착지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말도 많았던 상선전시관과
하멜기념탑을 용머리해안에 세운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항상 사실앞에 무력한 것이다.
360년동안 찾지 못한 하멜의 최초 표착지를 몇 년 안에 찾는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표류기에 두리뭉실하게 대정현 해안이라고 했으나 하멜이 표착지를 떠나 제주목으로 이동하면서 기록한
대정읍까지 6km지점의 바닷가에 선박이 세 번 충돌했다는 절벽이나 암초가 있는 곳을 추적확인하면 가장 합리적인 하멜의 표착지가
될 것이다. 고차원적으로 한다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도 날짜와 조류간만의 세기 그리고 배가 좌초될 정도의 풍랑을 계산하고
실제로 모형도 바다에 띄워 연구한다면 현대기술로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하멜의 고향인 네델란드 호르콤시와 과 자매결연을 맺으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강진군의 행보도 눈 여겨 보고 제일 중요한
하멜의 제주도 첫 표착지가 이곳에 있다는 역사적 사실도 중요시 되어야 하며 제주목에 있었을 여러가지 하멜의 흔적도 찾고
하멜이 표착지를 떠나 제주목으로 가는 길도 추적연구하여 새로운 관광지로 개발하는 것도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이틀간 와 볼 정도로 아름다웠던 송악산과 산방산 일대의 여행을 마치고 서귀포시를 지나 효돈동 쇠소깍으로 간다.
쇠소깍 역시 이틀간 가 본 곳이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굿뉴스피플 simpro)
simpro의 프로야구 이야기
simpro의 길(路) 이야기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 로그인이 필요없는view on꾹 눌러서 추천과 구독을 해 주시면 글쓴이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
'대한민국 견문록 > 제주도 견문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여행8편)시간도 잠시 멈춰 버린 곳.평대리 비자림 곶자왈 (0) | 2012.03.28 |
---|---|
(제주여행7편)올레6코스.마을중심 공동체 사업으로 효돈동을 부자마을로 만들 쇠소깍 (0) | 2012.03.27 |
(제주여행5편) 올레길 10코스. 산방굴사와 한 지붕 두 가족 산방사와 보문사 (0) | 2012.03.23 |
(제주여행4편)올레길10코스.이틀에 걸쳐 갈 정도로 아름다운 산방산과 해안도로 (0) | 2012.03.21 |
(제주여행3편) 올레길 10코스. 송악산과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이야기 (0) | 2012.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