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 유일의 보물 홍교와 소설속 김범우의 집

2013. 3. 26. 07:05전라남도 견문록/보성 견문록

 

보성여관을 나와 횡갯다리를 건너 이제 김범우의 집으로 가고자 한다.

차는 보성읍사무소에 주차하고 에망고지, 금융조합, 소화다리 등을 둘러보았지만 횡갯다리를 보려면 차를 가지고

벌교성당방향으로 올라가야 한다.

 

횡갯다리에서의 소설속 묘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어섰다. 그리고 북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드넓은 낙안벌은 어둠 속에 그 자취를 숨기고 있었다. 진광산도 금산도 그리고 조계산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산줄기들도

농밀한 어둠의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무수하게 뻗은 산줄기들은 모두 북으로  북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조계산 줄기는 무등산 줄기와 손을 맞잡으며 섬진강에 이르고, 그 지맥은 섬진강을 뛰어넘어 지리산으로 이어졌다.

산 속에 산을 품은 지리산의 준령들은 북으로 치달아 오르다가 덕유산을 만나고 , 덕유산은 가쁜 숨을 몰아 추풍령에 다다라선

속리산으로 건너 뛰는 것이다.

그 줄기가 소백산에 이르러, 원줄기인 태백산맥이 거느린 네 개의 실한 가지 중에서 최남단으로 뻗어내린 소백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진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가지에 붙어있는 하나씩의 잎사위인

셈이었다.(소설<태백산맥>1권257쪽)

 

 

소설<태백산맥>문학기행의 필수품 지도는 항상 챙겨다녀야 해요^^

 

 

 

보성 벌교 홍교 중수비군

이 근처에 차를 대놓고 홍교와 도마교및 석비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도마교와 석비의 위치를 찾지 못해 결국 홍교만 보게 되었으니, 훗날 다시 벌교에 갈 핑계는 생긴셈이다.

 

홍교근처에는 홍교가 낡고 헐어 다시 고친 내력과 참여자 등을 자세히 기록한 중수비와 단교명 비 등 5개의 비가 있다.

홍교는 단교라고도 불렀는데 큰물이 들면 다리가 끊어진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737년, 1844년, 1899년 등 3기의 건립연대만 확인되고 비문이 모두 마모되어 식별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홍교는 무지개다리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으며, 길이는 약27m이고 높이는 약3m이다.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를 본따라 만든것으로 추정되며, 3개의 무지개 다리가 원형이고 나머지는 현대식 다리로 이어져 있지만

다리가 끊겨 유실되어 이런모습은 아니다고 한다.

1718년(숙종44)에 옛 낙안현의 주민들이 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이 곳에 원목을 엮어 만든 뗏목다리를 놓았는데, 1728년(영조4)

대홍수로 다리가 무너져 버렸고, 이 후 1729년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승선교를 본따 다시 세우게 되었는데 1734년에서야 완공

되었다고 한다.

 

당시 무지개다리와 이음매 부분은 나무다리로 건너편으로 이어졌고, 물때가 되면 나무다리가 오르락 내리락 했다고 하니,

지금 모습보다 예전 모습으로 홍교를 다시 만드면 어떨까?

사실 벌교(筏橋)라는 것도 옛날 이곳에 있던 뗏목다리에서 유래되지 않았는가.

어짜피 차가 못다닐 다리라면 예전 모습으로 나무다리를 만들어 이어놓는다면 훨씬 더 벌교스럽지 않겠는지.. 

 

 

멀리 보이는 산이 바로 낙안의 진산 금전산이다.

홍교위에서 김범우가 북쪽인 낙안땅을 망연히 바라보며 시선에 들어왔던 바로 그 금산이다.

 

 

 

이 횡갯다리 위에 빨치산들이 쌀가마를 쌓아놓고 벌교 빈농들 설 쇠라고 심리전을 펼쳤으니...

 

 

 

6.25전쟁은 유엔군의 참전과 중국의 개입으로 점점 교착 상태에 빠지고,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대치 상태가 지속되면서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세력은 지리산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 투쟁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군경의 토벌 작전에 따라 이들의 투쟁은 점차 무력해지고, 박현영 등 남로당 계열이 전쟁의 실패와 함께 숙청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며 이들은 패배감과 낭패감에 빠져들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죽음으로 항전의 결의를 가다듬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투쟁과 죽음이 역사 투쟁으로의 전환임을 인식하고 대부분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된다.

 

횡갯다리를 건너 좌측 벌교천을 따라 50여미터 걸어가면 우측으로 김범우의 집이 보인다.

도로 입구에 김범우의 집이라는 안내판이 있어 찾아가기는 쉽다. 

횡갯다리까지 봤다면 다시 차를 가지고 김범우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 낫다. 그곳에서 회정리 교회와 조정래가 어릴적

살았던 집까지는 거리가 꽤 되니까.

 

 

 

홍교 아래는 천장 한가운데 마다 이렇게 용머리를 조각한 돌을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양식은 사찰에서 많이 본 모양으로 불길한 기운이 하천을 따라 사찰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위함이라고 한다.

 

 

지금은 물때가 아니기에 홍교가 바닥까지 들러나 있지만 물때가 되면 대부분 물에 잠긴다고 하니

훗날 다시 올때는 물때라도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토록 멋진 홍교의 반영이라도 찍을 수 있을 것 같기에..

 

 

홍교와 현대식 다리가 이어지는 이음매 부근.

이 부근의 원래 모습은 뗏목다리고 연결되었졌다고 하니 현대기술로 그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홍교에서 나도 김범우처럼 낙안벌판 방향을 바라본다.

 

 

벌교성당

 

 

그리고 김범우의 집으로 가는 길의 언덕에서 만난 노거수 2그루는 금새라도 넘어질 것 같지만 용케도 잘 버티고 있다.

 

 

골목부터가 모두 김범우의 집이라고 한다.

대지만 600평이니 현부자네에 비교해도 물러섬이 없다.

 

 

 

          골목입구에 문이 하나 있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다른 골목이 나온다.

          양옆으로 문이 하나씩 있으며, 왼쪽은 사랑채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작가의 어린시절 친구였던 김길평이 살던 곳이라고...

 

 

김범우는 작가의 외삼촌인 박순동씨이다.

OSS(현 미국 CIA)요원출신으로 귀국해서 미군통역관을 지냈으며, 시골동네 벌교에 국제감각이 풍부한 김범우의 등장은 소설은 더 재미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였다.

 

 

안채는 여느 부잣집같은 단아한 멋이 있다.

현부자네가 한옥과 일본식이 반반 섞어 지어졌다면, 김범우의 집은 말 그대로 오리지날 한옥이다

지붕의 기와양식도 보통 한옥에서 보는 기와가 아니라 동그란 형태의 기와임을 알 수 있다.

 

이쪽은 광인가 보다.

 

 

문간채

 

 

한편 인민군에 입대했던 김범우는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갇힌다. 뜻밖에도 거기서 제자 정하섭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믿지만, 포로 석방 때 정하섭은 북으로 가고 김범우는 정하섭으로부터 남에 남아 거점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받고 반공 포로로 위장,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온다.

 

 

 

 

사람이 사는 흔적은 없어, 오래전에 폐가가 된 모습이어 태백산맥 문학관 옆의 현부자네가 최고의 관리상태를 보이는 것에 비하면

김범우의 집은 전혀 관리가 안 되어 있다.

 

 

정원 역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이고,

 

 

문에는 이렇게 모두 녹슨 자물쇠가 걸려있다.

 

 

           출입문도 삐그덕 거리며 금새라도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괴기한 분위기이다.

 

 

작가의 친구 김길평씨가 살았다던 집은 담장은 모두 허물어져버렸고, 문도 박살나 있다.

 

 

            금새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집들...

 

 

시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산비탈에 있어 접근성은 떨어지지만, 소설속에 나오는 양심적 지주 김범우의 손때가 곳곳에

묻어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기에 지금이라도 보성군은 김범우의 집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할 때이다.

 

 

이런 모습을 보러 온 것은 아니었는데..

 

 

석축을 따라 길게 돌아가는 골목길을 나오면서 소설속 위치를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시 깨끗하게 유지 보수하여 지금이라도

벌교로 문학기행오는 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을 없었으면 한다.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빨치산 세력은 군경의 토벌 작전으로 모두 와해된다. 이름 없는 숱한 빨치산 전사들과 함께 손승호도, 독립투사요 인민군 소장이었던 김범준도 토벌군의 총탄에 쓰러진다. 염상진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는 군경과 수많은 전투를 하였으나 패퇴를 거듭하다 퇴로가 막히자 염상진은 부하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목이 벌교 읍내에 걸리게 되고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는 형의 목을 수습하며 ‘살아서나 빨갱이 제, 죽어서도 빨갱이 여!’를 외친다.. 염상진이 염원했던 <인민해방>은 실패로 끝났지만, 염상진을 추종했던 하대치 등이 살아남아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새로운 투쟁에의 결의를 다지고 어둠속으로 사라져간다.

소설<태백산맥>의 주요줄거리, 네이버 지식인 등 자료참고

 

 

벌교로의 소설<태백산맥>문학기행도 이제 1차로 일단락되었다.

제 다시 벌교에 올지 모르지만 다시 와야할 이유가 생겼다.

바로 이 포스팅을 하며서 못 가본, 진트재, 도마교와 석비, 작가가 어린시절 지낸곳,  염상진의 해방구 율어와 중도벌판, 그리고 벌교가 낳은 또 한 사람의 명인 채동선의 생가와 긴념관 등을 둘러보기 위함이다.

여운이란 항상 그리움을 남기는 법..그렇게 못다한 벌교이야기는 훗날 좋은 기회를 택해 독자여러분의 방으로 또다시 배달될 것을 기약해 보며 소설<태백산맥>을 따라 간 벌교이야기를 마친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트위터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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