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여행)벌교꼬막정식 그리고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여행

2014. 10. 6. 07:00전라남도 견문록/보성 견문록

 

동창회의 보성 오봉산 산행은 점심을 준비하지 않고 단촐한 차림으로 나선 산행이었습니다.

이유는 산행 후 벌교로 이동해 벌교꼬막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소설『태백산맥』의 벌교를 관광하기 위함이었죠.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 유명한 벌교는 보성군에 속한 읍이지만, 보성읍보다 먼저 읍이 되었다는 자부심이 강한 곳으로,  낙안군 고읍면에 속한 변두리에 불과했던 벌교는 일제강점기 보성과 고흥 일대의 물산을 배로 실어내 가는 창구가 되면서 갑자기 커졌는데요, 1930년에 경전선이 지나는 벌교역이 생겨 포구뿐만 아니라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인 신흥도시로서 탈바꿈했습니다.

당시 벌교에는 일본인들이 무려 135가구에 515명이나 살았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벌교는 보성읍보다 4년이나 빨리 1937년 벌교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조선 시대부터 고읍이나 낙안으로 드나드는 작은 포구였던 벌교가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수탈 기지로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급속히 발전해 보성군의 다른 곳에 비해 상당히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곳입니다.

그런 벌교가 조정래의 소설『태백산맥』으로 다시 제2의 번성기를 누리고 있는데요, 바로 꼬막정식과 소설『태백산맥』거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보성 오봉산 산행에 이어 도착한 곳은 바로 벌교꼬막정식으로 유명한 벌교입니다.^^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보다 더 유명한 것이 바로 ‘벌교 꼬막’인데요,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순천만의 차진 갯벌에서 꼬막, 피조개, 바지락 등을 거둬 왔는데

알이 굵고 속살이 쫀쫀하기로 유명한 ‘벌교 꼬막’으로 만든 꼬막정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벌교에는 많은 꼬막정식전문점이 있지만, 우리가 간 곳은 소화다리 앞에 있는 외서댁꼬막나라입니다.

뒤로는 엘림타운아파트가 있어 찾기도 쉬웠습니다.

간판부터는 남다르죠? KBS 6시 내고향, KBS 1박2일, SBS 웰빙맛사냥, MBC 해피실버 고향은 지금, KBS 세상의 아침 등에서 촬영나왔다고 대문짝만하게 쓰여있습니다.  

 

 

벌교꼬막정식을 시키면 나오는 것은 바로 통꼬막, 양념꼬막, 꼬막회무침, 꼬막전, 꼬막된장찌개, 꼬막탕수육 등으로 구성되는데,

 

 

꼬막 까 먹는 도구를 이용해 무지하게 먹었다는^^

 

 

꼬막전은 두툼해서 입안에서 오물거려 좋구요,

 

 

4인분 꼬막회무침인데, 김가루에 참기름 넣은 밥 한릇에 적당히 넣고 싹싹 비벼드시면 된다는...

 

 

102차 보성 오봉산 9월 정기산행의 성공적 마무리를 위하여~~~

그리고 10월 달 대구 팔공산으로 가는 1박2일 특별산행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하여~~~

 

 

식사후 이동한 곳은 바로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입니다.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은 소설가 조정래가 쓴 대하 역사소설 <태백산맥>의 문학적 성과를 기리고 통일에 이바지한다는 취지로 보성군에서 이곳에 조정래 문학관을 세우기로 하였고 2008년에 문을 열고 오늘에 이르렀는데요, 태백산맥 문학관은 2003년 초 태백산맥 문학공원 설립계획이 당시 김대중 정부에 의해 추진된 뒤, 2003년 소설 첫 장면에 나오는 현 부자 네 집을 문학관 옆에 복원하면서 부터 탄력을 받기시작하여 2005년 첫 삽을 떴다고 합니다.

이후 2007년 소화의 집이 완공되고 이듬해 문학관이 문을 열면서 오늘의 태백산맥 문학공원이 완성되었는데요, 

문학관은 2전시실에 여섯째 마당으로 구분되어 있고 입장료는 성인 2000원, 청소년/군경은 1500원, 어린이는 500원이며, 만6세이하 65세이상과 보성군민은 무료입니다.

개장시간 09:00~17:00(동절기) 09:00~18:00(하절기)이며, 휴관은 매주 월요일, 설날, 추석 등입니다.

 

문학관 바깥에는 백두대간의 염원을 담은 옹석벽화가 세워져 있습니다.

소설<태백산맥>의 높은 문학성 속에서 질곡의 역사를 극복하고 광맥처럼 묻혀있는 민족의 염원을 발굴, 이를 첨단 건축언어로

표현한 함의를 비보하며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의 아픔을 종식하고 통일을 간구하는 문학, 건축, 미술이 조화를 이룬 최초,

최대의 옹석벽화라고 합니다. 작가 일랑 이종양(一浪 李鐘洋)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공원은 문학관과 소설속 무대 현부자 집과 소화의 집으로 구성돼 있으며, 주요 전시품은 1983년 집필을 시작해 6년만에 완간된 <태백산맥>에 관한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소설을 위한 준비와 집필', '소설 <태백산맥>의 탈고', '소설 <태백산맥> 출간이후'. 작가의 삶과 문학소설 <태백산맥>' 등을 주제로 마련된 전시공간에 조정래가 쓴 1만 6천여 장의 친필원고 등 719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학관 내의 북카페에서 소설태백산맥을 책과 만화로 만날 수도 있고 작가가 머무르면서 집필활동을 하는 작가의 방도 있기에 운 좋은 날은 작가를 직접 만날 수도 있습니다.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은 단일 문학작품을 위해 설립된 문학관 규모로는 전국 최대를 자랑합니다.

1993년부터 보성군에서 태백산맥의 주요무대인 벌교에 문학공원을 건립할 계획이었으나 작품이 이념 분쟁에 휘말리면서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가 2005년 검찰에서 반공단체에 의해  고발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무혐의 처분함에 따라 오늘의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을 볼 수 있게되었습니다.

 

 

작가는 소설 <태백산맥>을 1978년 부터 5년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1983년 부터 <현대문학>9월호에 연재를 시작하였으며, 1986년 1부 [한의 모닥불]3권이 단행본으로 발간되었고,

1987년 2부 [민중의 불꽃]2권, 1988년 3부 [분단과 전쟁]2권, 1989년 4부 [전쟁과 분단]3권 등 전 10권이 완간되었으며,

2000년 일어판 전10권이 완간되었고, 2007년 불어판 전 10권이 완관되었습니다.

1986년 10월 1부 첫 3권이 출간된 이래 10년만인 1997년 초에 100쇄를 돌파하였며, 그 기록은 계속 연장되어 그 후 또 10년만인 2009년 경 200쇄를 돌파하며 한국문학 다권본으로는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200쇄란 책을 찍기위해 200번 인쇄기를 돌렸다는 뜻으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후 두번 째 200쇄라고 하네요. <난.소.공>이 단행본이었던 것에 비하면 소설 <태백산맥>은 10권에 이른 대하소설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달리할 것입니다.

 

 

문학관에는 작가가 4년간 준비과정을 거친 기록들이 빼곡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주무대인 벌교에서 소설속에 등장하는 주무대와 보조무대, 그리고 300명에 달하는 등장인물까지 섬세하고 기록되어

있는데, 책 전체 줄거리는 작가의 머리속에 있었겠지만, 처음에 이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소설속에 등장하지 않은 수 많은 그림들, 그리고 메모 등 집필을 준비해 나간 4년의 세월이 얼마나 작가에게는 길었을까요? 

가는 소설 <태백산맥>을 무려 1978년 부터 1989년까지 무려 12년간이나 준비하고 쓴 것입니다.

 

작가 조정래는 1부를 쓰고 있을 무렵 이태의 <남부군>이 쓰여지기 전 남부군의 원고를 동료소설가 백시종에게서 받아

소설의 핵심인 빨치산 이야기를 쓰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경험해 보지 못한 이야기를 쓰는데 남부군의 원고는 구름가득한 하늘에 한 줄기 햇살이었으며, 어둠을 밝히는 등대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2부를 마칠 무렵 1987년 이태의 <남부군>이 소설로 나오면서 소설가 이병주가 쓴 <지리사>7권 중 6,7권이 남부군을 그대로 표절했다고 밝혀져 큰 사회적 반향을 가지고 온 사건이 생겼는데, 나중에 이병주는 이태에게 정당하게 원고료를 지불했다하여 무마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작가는 남부군 원고를 가지고 만든 취재수첩과 취재메모를 모두 파기시키고 다시 빨치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난제에 부딪혔는데, 그 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박현채 선생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박현채 선생은 작가의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빨치산 부분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에 자신의 경험담을 작가에게 들려주기위해 나섰으며, 작가와 같이 지리산 등으로 취재 여행에도 흔쾌하게 나섰다고 합니다.

그런점에서 박현채 선생은 소설<태백산맥>을 완성짓는 가장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박현채 선생의 경험담을 토대로 그를 소설속에 등장시켰는데 그 인물이 바로 조원제입니다.

박현채 선생은 전남 화순출생으로 1950년부터 52년까지 빨치산 소년돌격부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1954년 전주고를 졸업하고, 195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 1960년 초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1964년 인혁당 사건에 연루 옥고를 치루고, 1960년대부터 20년간 재야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경제론>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조선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1995년 뇌졸증으로 별세하였습니다.

박현채 선생의 저서 <민족경제론>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의 경제정책수립에 영향을 끼쳤으며, 대기업 위주가 아닌 중소기업과

농업을 진흥시켜 대외의존에서 벗어난 자립경제를 강조했다고 하군요.

 

 

부인, 아들 내외 그리고 손자들과...

작가는 "나의 동행이자 평생 동반자는 나의 아내, 김초혜입니다. 함께 문학을 하는 내 문학의 동반자이면서 내 작품의 최초 독자이며 열독자이기도 하고요. 그뿐 아니라 감시자, 감독자, 교정자, 조정자이기도 하지요. 아내가 잘못된 부분이나 어색한 표현을 지적하면 100%수정합니다. 책 제목을 지을 때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항상 의논해요. 오롯이 나 혼자만의 작품이 아닌 것이지요.

그의 지성, 학식, 품격을 믿고 시가 소설보다 고차원 예술이라고 생각하기에 지적해 주는 부분을 전부 받아들여 고칩니다.

글을 쓰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 때, '영욕은 반반이다'라는 말을 자주 해 줬어요.

그럴 때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지요. 이런 아내의 역할이 내가 작품을 계속, 잘 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첫 번째 요인입니다."

 

작가의 부인 김초혜는 베스트셀러 시집 <사랑굿>으로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동국대학교 재학시절 처음 만나 3년간의 연애끝에 결혼을 한 부부는 슬하에 1남이 있네요.

오른쪽은 독자들이 쓴 <태백산맥>필사본 원고, 가운데는 아들의 필사본 원고, 왼쪽은 며느리의 필사본 원고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독자들이야 120명이 나눠 썼지만, 아들과 며느리는 각자가 이렇게 필사본을 원고로 썼습니다.

 

 

부부와 동시에 동지인 두 분의 지고지순한 사랑 끝까지 같이 하세요...

 

 

 

2층 문학사랑방에는 독자가 쓴 소설태백산맥 전권 필사본 기증이 있었군요.

기증 독자를 위한 감사패 전달식도 있었나 봅니다.

 

 

이렇게 쓰신 분도 있고...

 

 

이렇게 쓰신 분도 있습니다.

 

 

문선아 님..정말 대단하십니다.

simpro도 두 번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필사는 언감생심, 겨우 줄거리만 만들어 지난 벌교여행때 써먹었지만,

이분들은 스케일이 틀리군요.

태백산맥 이후 나온 아리랑은 <태백산맥>의 전 시대인 동학농민부터 815광복까지를 대하소설로 썼고, 1990년 태백산맥 이후 바로 집필을 시작해서 1995년 12권이 완간되었으며 역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습니다.

우리 근현대사 100년을 32권의 소설로 그리겠다는 구상대로 작가는 <아리랑>, <태백산맥>이후 시대에서 부터 이승만, 4.19, 8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다룬 대하소설 <한강>을 발표하여 이것 역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작가의 오래된 구상을 완성하였습니다.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을 나오면서 이제는 시대상을 그리는 작업에서 벗어나 종교나 실존 같은 삶의 본질로 들어가는 작품을 쓰고 싶으며, 일흔다섯까지 열 작품쯤 더 쓰는 것이 목표라는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이제 쉴 만도 하시건만 작가의 작품에 대한 무한한 열정이 느껴졌습니다.

 

 

이제 태백산맥 문학관을 나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현부자네 집과 소화의 집을 들러 그 시대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해 봅니다.

 

 

“긍께... 좌, 좌익...”

“그렇소, 제대로 맞췄소, 내가 바로 빨갱이요.”

태백산맥 문학관을 나와 이 대화가 시작된 현부자네 제각에 있던 소화의 집입니다.

소설 <태백산맥>은 이렇게 1948년 10월 24일 어느 날 어둠이 희끄무레하게 깔린 새벽 현부자 네 제각에 살던 무당 소화를 찾은 정하섭이 소화와 나누는 대화로부터 시작합니다.

현부자네는 뒤로 유사시에 피신할 수 있는 대숲 우거진 제석산이 있어 소화의 신당에 몸을 숨긴 정하섭의 선택은 어쩜 필연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중도 들녘이 질펀하게 내려다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현부자네 집과 제각은 박씨 문중의 소유로 소설에서는 현씨 문중 소유로 묘사되었습니다.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 태백산맥 1권 14쪽.

 

현부자네 앞에는 잉어 떼가 노니는 멋있는 연못이 있고 여름 끝 무렵에는 빨간 꽃무릇이 올라와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고하는데, 아직 보이지는 않군요.

현재는 이렇게 각종 아파트 등 현대식 건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절대지주 현부자가 2층 누각에서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기도 하고, 때론 자기 소유의 중도벌판을 내려다보며 어느 소작인이 일을 게을리 하는지 지켜보는 전망대 역할도 했을 것입니다.

 

 

 

안채와 대문은 한옥을 기본으로 곳곳이 일본식을 가미한 독특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갈 보성여관(소설속 남도여관)도 이렇게 한옥과 일본식 건축양식을 섞어서 지었으니 당시 벌교가 얼마만큼 일본인들이 득세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라 하겠습니다.

그럼 그 들의 사랑이야기가 있던 현부자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마당은 연못대신 원형 정원이 있고 안채는 전형적인 팔작지붕의 한옥이지만, 들어가는 출입구를 일본식으로 매달았습니다.

작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졸업할 때 까지 벌교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소풍은 이렇게 현부자네 별장 근처로 왔다고 하니, 작가의 어린 시절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된 현부자네의 등장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좌측으로 광이 있으며, 마당쇠가 거처했을 법한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고..

그리고 2층으로 된 대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대문 바로 옆에 있습니다.

안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출입문이 없다면 안채에서 앉아 바깥을 훤하게 내다 볼 수 있겠지만. 아주 오묘하게 저 출입구가 가려주고 있습니다. 소작인들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싫었을까요?

안채 출입구에서 바라본 대문역시 가운데 원형 정원이 가로막고 있어 전체적으로 약간 답답하게 보입니다

 

 

뒷면과 좌우면은 모두 툇마루가 놓여있는데, 소설 속 동백나무 역시 이곳으로 소화를 만나러 지나간 정하섭을 묵묵히 지켜봤겠지요?

 

 

안채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으며, 안채 마루에 앉아 바깥을 내려다보고

안마루는 바깥마루와의 사이에 미닫이문을 달아 현대식 건물의 거실역할을 합니다.

건물 외형은 한옥과 일본식을 섞었지만 내부는 양변기와 욕조까지 있다고 하니 한옥이라고 부르기 민망스럽군요.

 

 

정하섭이 드나들었을 쪽문 앞에는 150년 된 동백나무가 있습니다.

 

 

제각입구입니다.

선돌 두 개가 영역 표시를 하고 있군요.

 

 

현부자네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바로 옆의 자그마한 집...

<조그만 하고 예쁜 기와집, 방 셋에 부엌 하나인 집의 구조...부엌과 붙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옆방은 산을 모시는 신당이었다.

부엌에서 꺾여 붙인 것은 헛간방이었다.>라고 소설<태백산맥>에서는 무당 소화네 집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실제 위치는 현부자네 제각 앞 울안의 앞터라고 하니, 소설 속 위치를 찾아 가면 좋았을 것인데요, 하지만 이렇게 단독으로 서 있는 것도 나름 괜찮아 보입니다.

원래 있던 집이었는데 1988년 태풍에 쓰러져 폐허가 되었고, 이후 밭으로,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흔적이 없어져 버린 것을 2008년 보성군에서 태백산맥문학공원을 조성하면서 같이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고래등같은 현부자네 보다 이렇게 아담사이즈 소화네 집이 더 인기가 있더라능...ㅋ

문들이 굳게 닫혀있어 관리가 제대로 된 것 같지만, 사실은 문을 개방하여 안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는지..

새끼무당 소화가 정하섭과 사랑을 나눈 애뜻한 집이건만...이렇게 밖에서 보고 돌아가야 하는 마음 한 구석은 왠지 껄적지근합니다.

현부자네 방문은 열려있건만 이렇게 소화네 모든 문을 닫아놓고 어떻게 열린 마음으로 태백산맥문학공원을 보여준단 말인지..

아직 복원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나무 울타리 키가 작아 초라해 보이지만 먼 훗날 대숲 울창해 지면 정말 무당집이 될듯합니다.

 

 

<태백산맥> 소설이 시작되는 현부자네와 무당 소화의 집을 둘러보면서 이제 소설 속으로 들어갔으니 주 무대인 벌교읍으로 들어가서 이제 소설속의 주인공들을 만나봅니다.

 

 

벌교보성여관입니다. 소설속에서는 남도여관이지요.

보성여관 1층은 사무실과 카페, 자료실, 소극장, 전시실,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며, 2층은 다다미 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입구를 열고 들어서면 기다란 복도가 나오고 멀리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비로소 여관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단 여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카페를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설<태백산맥>속 반란군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남도여관.

차 값은 국화차, 녹차, 향차 5000원, 아메라카노, 에스프레소가 4000원이며 차 값에는 입장료 1000원이 포함되어 있네요.

차를 마시지 않고 입장료 1000원만 내고 들어갈 수도 있으며, 보성군민은 무료입장입니다.

 

 

여기는 소극장과 카페로 운영되며, 내부인테리어는 화려하지 않고 말끔한 분위기가 엿보입니다.

오래된 흑백 TV와 기계식 타자기, 그리고 비디오플레이어가 있으며, 다이얼을 돌리면 금새 신파곡이 나올 것 같은

오래된 라디오도 있는데, 카페에서 차를 주문한 다음 이곳에서 마셔도 됩니다.

 

 

 

넓은 창가로 한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가을볕이 너무 부드럽게 느껴지는 곳.

앙증맞은 토기에 다육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깨진 도가지에 심어진 난초도 멋지게만 보이는 곳

전체가 창문으로 된 테리스엔 키 낮은 테이블을 두어 여관안을 쮸뼛거리며 들여다 보는 사람들과 눈을 맞출 수 있고,

그들의 호기심 어린 발걸음을 안으로 모셔오기도 하는 곳입니다.

 

 

이렇게 따스한 햇살 가득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서 마시는 차와 커피..

 

 

 

금새라도 토벌대장 임만수가 토벌대를 끌고 이 거리를 지나 여관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은 곳,

금새라도 탁탁거리며 글자를 찍을 것 같은 기계식 타자기와 TV문이 스르르 열리면 홍수환의 세계챔피언 경기가 중계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보성여관 카페입니다.

 

 

보성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일단 1층에 있는 자료실과 전시실 등을 구경해봅니다.

 

보성여관은1935년 건립된 일본식2층 건물로 소설 <태백산맥>속 남도여관의 실제 모델이며 오랫동안 여관과 상가 등으로 사용되다

2004년 근대건축사적, 생활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돼어 등록문화재 제 132호로 등재되었으며 2008년 문화재청에서 매입한 뒤 문화유산국민신탁이 관리단체로 지정돼어 2009년 12월부터 2년간 복원공사를 거친다음 2012년 6월7일에 개관하였습니다.

 

 

1층은 카페와 소극장, 전시공간 등이 있고 2층은 다목적 커뮤니티 공간으로 사용되며 기존 여관으로 쓰이던 숙소공간은 숙박체험장으로 바꿔서 현재 영업을 하고 있는 중이네요. 보성여관은 17억 원에 이르는 국비와 도비가 투입되었으며, 문화유산 국민신탁 회원들의 기부금과 신한카드사의 '카드포인트' 기부금, 그리고 (주)포드림의 현물기부 등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조정래 작가의 벌교북국민학교 여자 동창의 언니 부부가 벌교에서 교편생활 하고 퇴직하여 금은방을 운영 중 이 건물이 1979년 매물로 나오자 5만원에 매입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26년간 보성여관에 살며 보성여관을 굳건하게 지켜냈다고 하군요.

그 후 여관과 상가 등으로 임대하여 지내다가 1988년 이 지역이 학교정화구역에 묶이자 여관 간판을 내렸고 안채에 살림집을 차려 살았으며 바깥채는 모두 상가로 임대 내주며 살았었다고 합니다.

 

 

보성여관의 연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공간

1935년 지어질 당시 시간별로 공사일지가 적혀았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아마 여기서는 태백산맥 영화를 비디오로 감상할 수 있지 않겠나요?

 

80년 세월 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거쳐가고 묵고 갔을 다다미방으로 들어서 봅니다.

2면이 모두 미닫이로 되어 창문도 넓어 한 겨울 자기에는 많이 추웠겠지만 한 여름엔 엄청 시원했을 듯...

문득 소설속 토벌대가 되어 벌러덩 누워 코를 골고 깊은 수면에 빠지고 싶은 햇살 가득 찬 오후, 우리 일행은

건달 노릇을 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건달 대장인지 ㅋㅋ

"거 보아하니 예사사람이 아니겠소." 소대병력인 그들의 여장을 남도여관에 풀게하고 사무실로 돌아서던 길에 읍장이 한 말이다.

(<태백산맥>2권161쪽)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임대장님 그런데, 토벌대는 어디에 주둔하고 있습니까?" "예에, 저어........우선 남도여관에....".

"뭐요, 여관? 당장 짐을 꾸려 남초등학교 운동장에 집합시키시오". (<태백산맥>3권84쪽)

"임만수 똑똑히 들어 (중략)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입을 놀려대?"(<태백산맥>3권85쪽)

그가 벌교에 열흘정도 머무는 동안 벌교의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성의 지주들까지 남도여관의 뒷문을 드나들었다.

(<태백산매>4권43쪽)

위 내용들은 <태백산맥>에서 나오는 남도여관에 관한 내용들로 심재모의 말에 총알같이 기립하여 남초등학교 운동장에 집합했을 모습들을 또 올려보며 지금도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심재모의 피끓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긴복도를 따라 임대장의 토벌대들의 군장이 금새라도 어지럽게 널려 있을 듯한 모습이군요.

 

 

창문밖으로 내다본 남초등학교

한 때 보성에서 국회의원에 나온사람들은 벌교에 오면 모두 보성여관 2층에서 유세를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아래를 쳐다보고 확성기로 연설을 했다하니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상황아닙니까?

 

 

 

80년 세월 희노애락 켜켜이 쌓인 다다미방을 나와 다시 1층으로 ㄷ자 형태의 전형적인 한옥 정원에는 키가 큰 나무 한 그루가 삐쭉 솟아나 있습니다.

 

가을볕이 한가득 내려서는 보성여관의 뜨락 한 편에 이 여관의 역사를 말해주는 줄기 굵은 석류나무 한 그루.

그 나무를 바라보며 이렇게 앉아 차 한 잔 마시는 행복을 느껴보고 봄비가 내리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목련꽃 그늘아래서란 노래가 절로 나올 것 같은 보성여관.

창가에 스쳐지나가는 여인을 보고 창문을 열어주오~~~라고 불러보고 싶은 곳.

그리고 참으로 오랫만에 보는 미닫이 유리창문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와 키작은 선인장

창호지에 붙어 가을 이야기를 들려주는 말라버린 낙엽에서 보성여관의 가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방은 보성여관의 숙박체험을 할 수 있는 방.

1층에는 모두 7개의 온돌방이 있으며, 가격은 8만원~15만원입니다.

 

 

 

8만원짜리 방은 공동화장실, 공동샤워실을 사용하지만, 그 위 급은 별도 화장실이 있으며,

15만원 짜리 방은 화장실과 별도의 작은 방.

그리고 간단히 요리할 수 있는 주방시설도 되어있다고 합니다.

 

 

다소 비싸다고 느껴지지만, 보성여관은 개관당시 무려 오성급 여관이었습니다.^^

 

 

 

 

 

보성여관에서의 색다른 숙박체험을 언젠가는 해 보겠지만, 오늘은 아쉬운 맘 가득 내려놓고 갑니다.

이곳을 나와 이제 벌교읍사무소까지 태백산맥거리를 걸어가면서 소설속 무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벌교의 적산가옥들이 모여있는 본정통

 

 

벌교읍사무소까지가 본정통입니다.

 

 

잘 단장된 보도블럭을 따라 걸어본 소설태백산맥 문학거리.

 

 

벌교금융조합 건물.

벌교농민상담소로 운영되다 지금은 완전히 비어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 건물이자 몇 채 안 남은 일본식 건물로 보존가치가 높아 태백산맥 거리를 지키고 있는가 봅니다.

 

 

2년 전에는 없던 것이 새롭게 조성되었군요.

부용산 앰완고지 바로 앞에 있습니다. 근처에는 벌교읍사무소가 있네요.

 

 

벌교읍사무소입니다.

벌교출신 채동선 음악당과 같이 있습니다.

그 외 소설 태백산맥 속 무대는 소화다리, 앰완고지, 염상구의 철교, 회정리교회, 김범우 집, 홍교 등이 있으나

시간관계상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년 전 벌교여행에서 만난 무대를 링크를 걸어놓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창회 산악회의 보성 오봉산 산행에 이어 들른 짤막한 벌교여행으로 홍교와 김범우의 집 등을 보지 못함에 조금 서운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여행이란 여운을 남기는 법. 또 갈 거리를 만들었으니 그게 더 위안임셈이죠.^^

 

벌교유일의 보물 홍교와 소설 속 김범우의 집

염상구의 철교와 소설 태백산맥 속의 벌교이야기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simpro)

트위터 http://twitter.com/huhasim

페이스북http://facebook.com/inseob.shim.7 

 


 

 

    (공지사항)

    1.본문 내용과 관련없는 복사댓글은 정중히 사양하며 방문하지 않습니다.(블로거 예절입니다)

    2.광고성 댓글은 예고없이 삭제합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3.제 글에 동감과 댓글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일일이 답글을 달 수 없지만, 꼭 방문하겠습니다.

    4.추천과 즐겨찾기 없는 친구신청과 상업블로그의 친구신청은 정중히 사양합니다.^^